2012년 6월호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5-22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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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승의 아내를 남몰래 사랑했고, 스승 사후에도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보호했던 제자….
    • 현실보다는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설정이지만, 음악사에서는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 그리고 그의 제자 브람스의 강렬했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정신병자가 된 스승 슈만과 그만을 사랑했던 클라라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평생 독신으로 산 브람스. 스승의 아내가 죽은 충격으로 1년 뒤 그녀를 따라 죽은 대목에선 시대를 넘어 세인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음악이 왜 비 오는 날이나 늦가을에 감상하기에 알맞은지, 왜 그토록 애절하고 우울한지 알 수 있다.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브람스의 스승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일생을 알게 되면 그의 음악이 왜 그토록 서정적이고 편안한지 이해할 수 있다.

    남자 예술가, 특히 작곡가들은 수많은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냈지만 브람스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한 작곡가는 거의 없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주인공 중 로베르트 슈만은 독일 작센지방의 당시 인구 5000명의 작지만 운치 있는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 작은 도시는 슈만이 나고 자란 18년의 기간 덕분에 지금도 ‘슈만의 도시’로 불리며 슈만의 가곡을 그리워하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1955년 당시 동독 정부가 세운 슈만기념관은 예술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출판업에 종사하던 슈만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서 책을 만들고 기고를 하며 문학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어린 아들이 작곡을 시작하자 주의 깊게 관찰하던 아버지는 비록 음악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들을 위해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린 슈만은 아버지를 따라간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숨진 뒤에는 원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다.

    슈만의 도시 츠비카우



    음악에 빠진 부자를 못마땅해했던 어머니는 집안이 기울자 어린 아들의 미래를 더욱 걱정했다.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법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지역의 큰 도시인 라이프치히로 유학을 보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슈만은 법학 공부보다는 음악에 열중했고, 좀처럼 공부에 진중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1년 만에 다시 하이델베르크 법과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학업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슈만의 머릿속에는 음악뿐이었다.

    이미 19세의 ‘꽃미남’이 된 슈만은 매력적인 여인들과 차례로 사랑에 빠진다. 이 중 클라라라는 이름의 다른 여인도 있었고, 부유층 고위직 관리의 딸도 있었다. 물론 많은 작곡가처럼 슈만도 그 여인들을 기리면서 ‘아베크 변주곡(작품번호 1번)’ 같은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재정 지원도 한계에 달하면서 자신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릴 적 보았던 공연의 전율을 기억해냈고.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크 역시 슈만의 재능을 평가해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시키며 레슨을 하고, 또 슈만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비크의 집에는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며 힘이 넘치는 신들린 연주를 하는 9세 어린 딸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였다. 일부 문헌에는 슈만의 재능을 그의 미래의 장인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패기만 높은 시골 청년에게 편의를 봐주며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 ‘구두쇠’ 비크가 재능을 높이 평가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러한 문헌은 은혜도 모르는 바람둥이가 금쪽같은 딸에게 마수를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인이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사위의 예술적 능력을 저평가한 데서 나왔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어쨌든 슈만은 독창적으로 고안한 방식의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한 결과 4번째 손가락의 감각을 잃는 불운을 겪게 된다. 4번째 손가락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손가락을 매단 끈을 천장에 붙여놓고 생활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로베르트 슈만(왼쪽)과 요하네스 브람스.

    결국 슈만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작곡에만 몰두했고, 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아 평론지를 발간하고 직접 주간이 돼 편집을 하고 평론을 기고했다. 이즈음 이교도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처럼, 작고 초라할지라도 독일 음악의 전통을 굳건하게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비드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슈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프로레스턴’과 ‘오이제비우스’라는 필명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성향의 평론을 기고했다. 그의 평론은 너무나 날카롭고 비판적이어서 많은 이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평론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장래가 불투명한 그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은 장인 비크에게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름도 쓰지 못하는 9세 ‘파파걸’ 클라라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츠비카우 시내 풍경. 성모마리아 교회의 높은 첨탑이 보인다. 길에는 동독 시절의 승용차 트라비가 다니고 있다.

    클라라 비크 슈만(1819~1896)은 유럽 단일 통화 유로화 때문에 현재는 통용되지 않지만 100마르크 지폐에 등장한 우아한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인에게 매우 친근한 인물이다. 비크와 피아니스트 마리안네의 2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난 클라라는 항상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데리고 가출을 감행한 어머니 때문이었다. 독선적이고 자신의 교육방식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의 교육방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어린 클라라에게 고강도 훈련을 강요했고, 결국 클라라의 연주 실력으로 그의 교수법은 인정을 받게 된다.

    비크는 어쩌면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베토벤의 아버지를 반반 섞어놓은 듯하다. 아들을 아버지의 틀 안에 머물게 하면서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끊어버렸지만 열성적인 교육열로 음악적 성장을 이끈 점에서는 모차르트의 부친과 비슷하고, 연주 수입으로 들어오는 부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자식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점은 베토벤의 부친과 일맥상통한다.

    가난했던 비크는 누구보다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딸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사회성이나 언어력, 사고력이 부족했던 것처럼, 9세의 클라라 역시 피아노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독일어로 자기 이름을 쓰지 못했고, 자신의 의사도 어눌하게 겨우 표현하는 ‘파파걸’이 됐다.

    그런 클라라에게 슈만은 집과 연주장 밖 세상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지적 통로였고, 슈만의 언변과 필력은 어린 클라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편견에도 작곡을 하기 원했던 클라라에게 슈만은 신과 같은 존재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슈만이 폰 프리켄 남작의 수양딸인 에르네스티네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약혼하자 클라라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했다. 일설에는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를 의심한 비크가 일부러 다른 여인을 소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남작의 수양딸이기에 본인이 원하는 결혼을 하면 남작의 재산을 한 푼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파혼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클라라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슈만이 파혼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슈만의 주변 여자는 모두 정리됐고 클라라만이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해공작은 이미 도를 넘어, 16세의 클라라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편지로 슈만과 왕래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야만 했다. 클라라는 슈만의 곡을 일부러 연주 레퍼토리에 넣어 발표했고, 슈만은 공연장 어디에선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라가 18세가 되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했지만 비크의 집요하고 완강한 반대로 결국 결혼 허가를 법원에 요청하기에 이른다. 3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법원은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했고, 온갖 술수를 부렸던 비크는 18일 동안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3명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을 하루 남긴 1840년 9월 12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슈만은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생활에 영감을 받아서인지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고, 1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비크는 3년이 흐른 후 딸과 사위에게 용서의 편지를 썼고, 슈만은 그 용서를 받아들였다. 여느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원수는 아니었다.

    장인과 법적투쟁으로 쟁취한 결혼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슈만의 생가를 개축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결혼을 위해 겪었던 끔찍한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클라라의 보살핌 속에서 슈만은 교향곡 1번과 4번을 작곡하고 실내악의 작곡에도 박차를 가한다. 1843년에는 부부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로 초빙된다. 슈만은 안정되고 다복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수많은 곡을 작곡했고, 자신의 곡을 발표해주는 클라라는 듬직한 우군이 됐다.

    1844년 드레스덴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슈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명성을 날렸고, 1850년에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자라는 직책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단원을 이끌고 그들과 소통하고 화합해야 하는 자리였다. 사교적이지 못한 슈만에게는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예술가로서의 압박감이 그를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전부터 조금씩 엿보이던 우울증은 환청, 환각 등의 정신분열증세로 악화됐다. 정신병으로 자살한 13세 위의 누나와 슈만처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친 슈만의 차남을 유추해보면, 그의 정신병은 외부 요인보다는 집안 내력으로 인한 유전적인 질병으로 보인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심령술에 의지한 슈만은 결국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자리를 내놓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클라라 혼자서 버는 연주비와 레슨비로는 6명이나 되는 아이의 양육비와 남편 치료비용을 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때 슈만과 클라라 앞에 등장한 인물이 브람스였다. 그가 지휘자 자리를 내놓기 몇 달 전, 이 듬직한 젊은 독일청년은 추천장을 들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슈만은 브람스가 작곡한 곡에 감탄하면서 그의 평론지 ‘음악시보’에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 뒤 슈만은 라인강에 투신한다. 다행히 지나는 고깃배에 의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슈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클라라의 일기에는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숨결을 느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온몸이 그의 음악 속에 녹아내리는 듯하다’고 기록돼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슈만보다는 23세, 클라라보다는 14세 연하로 ‘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장남으로 태어난 브람스는 넉넉지 못한 집안 살림으로 일찍이 선술집이나 카페에서 연주와 편곡을 하면서 생계형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재능 덕분에 많은 이의 호감을 살 수 있었고,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은 절친한 슈만에게 그를 소개했다. 슈만의 집을 찾았을 때 브람스의 손에 들린 추천장은 요하임이 써준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슈만의 찬사까지 들은 브람스는 하늘을 걷는 기분이었다. ‘병아리 작곡가’는 슈만 내외가 베풀어주는 호의에 감사했고, 이들 3명은 독일낭만음악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교감하며 예술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투신 소동 이후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임신부였던 클라라가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본 브람스는 가족의 일원인 듯 슈만 가족을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꿈에 그리던 여성상이었고, 자신의 작품을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고 연주해주는 거장이었다. 브람스는 어느 새 사랑이 된 클라라에게 편지를 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브람스의 사랑, 슈만의 아내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클라라에게는 당장 슈만의 병원비와 갓 출산한 자녀를 포함해 7자녀의 양육문제로 벅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주 기획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더 컸다. 당시는 요즘처럼 매니지먼트가 모든 것을 섭외, 기획하고 본인은 연주만 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공연 홍보물을 인쇄하고 연주 당일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신경 써야 하는 클라라에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항상 슈만의 음악과 함께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정서적인 공허함도 느끼지 않았다. 클라라는 브람스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슈만의 아내로 살길 원했다.

    클라라에게 열렬한 사랑 편지를 보내고서 겨우 2년이 지난 1858년, 25세의 브람스는 괴팅겐 대학 교수의 딸이자 명망가 출신의 아가테 폰 지볼테(1835~1909)와 약혼을 한다.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브람스는 성악을 공부하던 아가테를 위해 ‘8개의 노래와 로맨스-작품번호14’와 ‘5개의 시-작품번호19’를 작곡한다. 하지만 결혼 일정을 잡아야 하는 시기에 이르자 브람스는 사랑하지만 속박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돌연 파혼을 선언했다. 갑자기 파혼을 당한 아가테는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한 충격에 빠진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의 셋째딸인 율리와 사랑에 빠지지만, 1869년 율리는 이탈리아의 마르모리트 백작과 결혼했고, 브람스는 이 황량한 마음을 담아 ‘알토랩소디’를 작곡한다.

    일부에선 클라라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한 클라라가 둘의 관계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갑자기 파혼을 선언할 정도로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성향의 남자를, 더구나 연주여행 동안 수많은 남자 음악가의 자유연애 행각을 접한 클라라가 딸의 평생 배필로 브람스를 점찍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일곱 아이의 양육비와 투병생활 끝에 사망한 남편을 떠올리면 클라라에게 작곡가 사위는 마뜩찮았을 것이다. 18세의 슈만을 만난 9세의 클라라와 20세의 브람스를 보는 34세의 클라라의 입장과 처지는 너무나 달랐으리라.

    클라라는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죽은 1856년부터 40년 동안 슈만 부인으로 남아 슈만과 브람스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의 연주에 단골 레퍼토리가 된다는 것은 브람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클라라가 위독하다는 비보를 접하고 40시간 동안 달려왔지만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한 브람스는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비통해했다. 그러고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탄식했다.

    클라라는 77년 생애 중 16년의 결혼생활 동안 슈만을 사랑했고, 43년간 브람스와 만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결국 이듬해 4월 브람스도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브람스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쩌면 브람스의 음악은 클라라가 남긴 유품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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