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악몽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⑥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ahnkw@snu.ac.kr

    입력2012-05-23 09: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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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일간 이어진 2008년 촛불집회
    • “대통령님, 인권위원장 손도 좀 잡아주시지요”
    • 씁쓸했던 5·18 기념식의 기억
    • 인권위 의견서 발표 후폭풍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본부건물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시청 바로 뒤, 무교동길과 을지로가 교차하는 모퉁이다.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일반 시민의 접근이 용이해야 한다는 인권위 설립기준에 관한 국제적 가이드라인이 있다. 수도뿐 아니라 지방에 사무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모든 국민이 균질한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 때문이다. 기본권, 인권은 모든 국민이 누려야할 기초 서비스다. 지방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은 주목받기 어렵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광주 인화원의 ‘도가니 사건’도 만약 서울에서 일어났더라면 그처럼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조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인권위 설립 직후 부산과 광주에 지역사무소를 열었고, 2007년에는 대구에도 추가로 사무소가 만들어졌다. 세 사무실 모두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입지를 정했다. 물리적 접근성의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 인권위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서울본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외국인 내방객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방문이 용이할 뿐 아니라 각종 인권문제로 집회가 열리는 서울광장이 지척이다. 현장체험으로는 더없이 좋은 자리다.

    인권위를 만들 때 후보로 검토된 장소는 여러 곳이었다고 한다. 과거 남산 중앙정보부 건물(현재 국제유스호스텔)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강했다고 한다. 군사독재 시절 인권유린의 상징어가 ‘중앙정보부’였던 점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발상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절대권력의 독재가 사라지고 일상적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인권의 범주가 넓어졌다. 이제 인권의 핵심의제도 일상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남산은 다소 복고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더구나 시민의 접근이 쉽지 않다. 지체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남산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안쓰럽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장소가 최적이다.

    서울광장 옆 인권위 사무실

    인권위는 서울 복판의 13층 건물 중 7개 층을 사용한다. 6층 이하에는 규모가 작은 회사들이 세 들어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도 한국지부를 설립하면서 이 건물에 자리 잡았다. 1층에는 오래전부터 부산은행이 입주해 있다. 현관복도를 사이에 두고 은행 반대편에는 몇 년 전부터 제과점이 성업 중이다. 상시 이동인구가 많은, 그야말로 목 좋은 곳이다. 인권위는 진정인의 편의를 위해 이 공간을 빌리려 애썼으나 비싼 임차료 때문에 포기했다. 지하층에는 각종 실비 식당이 자리 잡아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이처럼 시민의 접근이 용이한 만큼 소란스러운 일도, 돌발사태도 잦다. 청원경찰과 경비직원의 애로가 크다. 소동을 막는 방법이 ‘인권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업무수칙이 있다. 건물주인 포스코장학재단의 숨은 배려도 있다. 각종 항의 방문, 점거 농성과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일반 사무실로는 인기가 떨어진다. 인권위가 입주해 이미지가 좋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수지면에서는 적잖은 손해다. 어쨌든 인권위원장 재임 시절 이따금씩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입주자들의 시선에 불만과 원망의 불꽃이 담겨 있는 듯해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건물 7층에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비상임위원의 방과 회의실이 있다. 위원장실은 애초에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집무실이었다고 한다. 물론 규모는 대폭 줄였다. 그 방에는 위원장 전용 화장실이 딸려 있다. 간이 샤워시설도 있다. 집무실과 별도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내실도 있다. 인권위 옥상에서는 서울광장의 전경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그래서 대규모 집회가 있을 때마다 사진기자들이 선호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8년 5월 2일, 초저녁부터 서울광장에 인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몇 달 동안 서울의 밤은 유례없는 불꽃마당이 됐다. 그해 4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이 촛불을 점화했다. “이제 우리 국민도 맛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싼값에 맘껏 들 수 있게 됐다”는 게 요지였다. 선거에서 유례없는 압승을 거둔 대통령, 실용주의 정치노선을 표방하는 경제대통령의 확신과 자부심에 찬 이 발언은 더없이 큰 정치적 실언이 됐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광우병이 발생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병든 소의 고기가 인체에 치명적이다’ ‘아니다’를 놓고 전문가 사이에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실제로 내가 병든 쇠고기를 먹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집착과 우려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구실을 찾고 있던 정치적 반대세력이 집결했다.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던 일반 국민도 동참했다. 교복 입은 여학생, 유모차를 앞세운 젊은 어머니들이 합류했다. 딱히 구체적인 투쟁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풀 대상과 공간을 찾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모여들었다.

    ‘촛불문화제’라는 이름의 집회는 시위에 대한 종전의 관념을 깼다. 재미있는 시국만담이나 여흥놀이 정도로 비치기도 했다. 정권에 대한 지지·반대를 떠나 국민 사이에 새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고위공직자 인사가 문제였다. ‘고소영’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편중된 인적 구성이다. 널리 품어 안기보다 철두철미 ‘내 편 챙기기’로 비쳤다.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등 이전 정부에서는 인사의 결격사유로 여기던 공직 후보자의 전력을 전혀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인가, 국민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었다.

    삼엄한 검문검색

    야간 촛불집회는 5월 2일부터 7월 10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날을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지고 참석자도 다양해졌다. 신바람 난 일부 청년은 이 집회를 2002년 월드컵 응원에 비유하기도 했다. 5월 14일, 최초로 시위대의 시가행진이 있었다. 물리적 충돌 끝에 일부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수가 연행됐다.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집회가 이어졌지만 종종 청와대 점거, 정권 퇴진의 구호도 등장했다. 정부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대통령이 두 차례나 직접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 ‘광우병 대책회의’ 등 몇몇 급조된 단체가 군중 동원과 선동에 나섰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다. 사전에 신고하지 않은 야간집회는 기술적으로 불법이다. 그러나 불법집회 진압에도 경찰이 지켜야 할 수칙이 있다. 절대로 공격적 진압이어서는 안 된다. ‘방어적’ 진압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필요한 최소한도의 물리력만 사용해야 한다. 실제 상황에서는 이런 기준을 지키기 어렵다. 그래도 끊임없이 이 기준을 환기시켜야 한다. 그게 법이고 인권이다.

    촛불집회가 점화된 지 2주일 남짓 지난 5월 18일, 광주 망월동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인권위원장은 매년 어김없이 참석하는 자리다. 기념식뿐 아니라 국제인권상 시상식 등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시민사회 원로를 만나는 것이 연례행사다. 예정시간보다 훨씬 일찍 식장에 도착했다. 전반적으로 경계가 과했다. 엄청난 숫자의 경찰이 철저한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마치 계엄령이 선포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1980년 바로 그날이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부 의전과 주최 측의 배려에 따라 맨 앞줄에 앉았다. 정당 대표들 바로 옆자리다. 헬기로 도착한 대통령이 전남지사의 안내를 받아 입장했다. 의례적으로 앞줄의 인사들과 차례차례 악수를 나눈다. 공교롭게도 바로 내 앞에서 손잡기를 중단하고 곧바로 단상에 마련된 국가원수 자리로 옮겨갔다. 대통령이 내 얼굴을 알 리 없고, 특히 인권위원장을 유념했을 리도 없었지만 다소 민망했다. 바로 뒷자리에 서 있던 한 야당 국회의원이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대통령님, 인권위원장 손도 좀 잡아주시지요.” 몇 사람이 따라 웃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대통령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다. 시종일관 어둡게 경직된 표정이고 연설도 유연하지 못했다. 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울로 되날아갔다. 과거 선례에 따라 만남과 덕담, 그리고 선물보따리를 기대하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허탈해했다. 퇴장하는 대통령의 뒤를 향해 한 중년여인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외쳤다. 경호원들이 재빨리 끌고 나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한 참석자는 시민을 ‘마치 개 끌 듯이’ 다루는 모습을 보고 분개했다. 나도 우울했다. 식장 너머 멀리 뒷산에 도열한 경찰의 모습도 보였다. 기념식 끝나기가 무섭게 뜀박질로 하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록영화에서 본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본 박준영 전남지사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이듬해, 같은 날이다. 기념식장에는 인권위원장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참석 사실을 통보하고 확인도 했다. 주최 측의 의도적인 무시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부주의였는지 몰라도 1년 사이에 추락한 인권위 위상을 보여주는 듯해 몹시 씁쓸했다. 불과 달포 전인 2009년 3월 30일, 인권위 조직규모가 21% 축소되는 수모를 당한 터였으니 나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몹시 분개하는 인권위 광주 지역사무소장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대통령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립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2009년 5·18 기념식은 위상이 심히 추락한 반면 당파성과 지역성이 강화된 듯해 안타까웠다.

    다시 2008년 5월 21일, 촛불집회와 관련된 최초의 진정이 들어왔다. 경찰의 인권침해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어 줄줄이 7월까지 130여 건이 접수됐다. 언론에서도 여러 형태의 인권침해를 예시했다. 7월 11일, 인권위는 상임위 의결로 직권조사 결정을 내렸다.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인권운동가들도 날아왔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I)의 조사관도 왔다. AI는 한국지부가 있다. 그러나 지부는 소재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게 업무수칙이다. 일부 정부부처와 수사기관에서는 AI 조사관의 행방을 인권위에 문의했다. 엄연히 한국지부가 있는데도 말이다. 인권위를 이들과 공모한 ‘패거리’로 본다는 증거다. 상식의 결여와 편견을 드러낸 것이다. AI 조사관은 집회, 시위의 진압과정에서 공권력 남용이 있었다면서 시정을 권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21일 AI보고서에 대한 법무부의 반박성명이 발표됐다. 인권위는 진정사건과 직권조사를 병행해 진행했다. 유능한 조사관 6명을 투입했다. 2개월에 걸쳐 심도 있는 조사가 이어졌다. 주 7일, 하루 14시간 이상의 전력투구였다. 도합 256명의 대상자를 조사했다. 시위와 진압이 가장 격렬했던 6월 1일(안국동 로터리)과 28일(종로, 태평로)자 두 건에 집중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 등 각종 법령은 물론 경찰 내부의 훈령과 지침도 검토대상이 됐다. 국제규범도 참조했다. 핵심 쟁점은 법리적으로 ‘경찰비례의 원칙, 최소의 원칙’을 준수했는지였다. 방패와 경찰봉 및 물포의 사용, 후퇴하는 사람에 대한 공격, 지켜보는 사람이나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폭행을 만류하는 사람·넘어진 사람·비무장의 청소년과 여성·의료지원 활동자에 대해 정당한 공무집행의 범위를 넘어선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를 봤다.

    쇄도하는 진정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인권위는 시위자에게는 평화로운 집회를, 경찰에게는 방어적 진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권위 스스로 ‘인권지킴이단’을 결성해 시위현장에 투입, 감시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경찰에 통보하고 협조를 구했다. ‘인권지킴이’임을 공시하는 노란색 조끼를 입고, 경찰과 시위자 쌍방의 과격행위를 말리고 달래는 일에 나섰다. 상임위원들도 지킴이단에 합류했다. 그러다 인권위 직원이 경찰의 진압봉에 맞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내가 강한 항의의 메시지를 전하자 어청수 경찰청장이 사과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강하게 비판했다. 인권위와 경찰이 공동으로 정립한 기준이 있지 않나, 왜 그 기준을 지키지 않느냐고. 그는 그 기준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예상을 넘어선 폭력사태에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이른바 ‘명박산성’이 설치되기 직전의 일로 기억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악몽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28회 기념식에 참석한 후 자리를 뜨며 정당 대표들과 인사하고 있다.

    나 또한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불필요한 과격성 때문에 정당한 주장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것을 아쉽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강하게 주장해 경찰을 상대로 한 진정사건의 결정문에 시위자에게 평화적 시위의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법리적으로는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인권위가 균형 있는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고 믿었다.

    청와대와의 소통 채널은 오래전에 끊어져 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나는 청와대와 사적인 소통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무실을 통하지 않은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새 정부 들어서도 이 원칙을 고수했다. 다소 편협하지만 독립기관의 장으로서 유지해야 할 원칙으로 믿었다. 전임 위원장도 그랬을 것이다. 청와대 직제로 볼 때 인권위는 민정수석실 관장이다. 사정(司正)을 담당하는 부서인 만큼 대체로 검사 출신이 민정수석에 기용됐다. 검사는 태생적으로 인권위에 대해 비우호적이다. 인권위의 설립부터 강하게 반대한 법무부였다. 다만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해도 인권위의 정체성 자체를 인용하느냐 아니냐는 대통령의 인권철학과 민정수석의 개인적인 태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소통이 단절된 청와대

    이명박 정부의 초대 민정수석 이종찬 변호사는 취임을 축하하는 내 전화에 답신을 보내왔다. 자신의 업무가 안정되면 만나서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를 포함한 제반 사항을 논의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자는 답례를 해오지 않았다. 한두 차례 접촉해보다 포기했다. 그와는 과거에 약간의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어쩌다 정부 기념식이나 연회장에서 마주치면 멋쩍어하면서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어색한 표정을 짓곤 했다. 복잡한 심사가 교차했다. 2011년 1월, 그는 감사원장에 지명되었으나 낙마했다. 억울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검사 시절 쓴 박사학위 논문이 성의 있고 실무가로서는 수준도 높았다는 형사법 교수들의 칭찬을 들은 바 있다.

    촛불집회 진정사건 등에 대한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청와대의 한 비서관이 은밀하게 만나고 싶다고 했다. 특별히 교분이 있지는 않았지만 초임교수 시절부터 알 만한 거리에 있던 사람이다. 자신의 업무는 아니지만 내 사정이 너무 안타까워 청와대 내부 분위기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밀명을 갖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고 순수한 동기를 믿었다. 둘의 은밀한 만남을 이제라도 공개하는 것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에게 불편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인권위는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오로지 정부의 잘못만 지적하는 곳임을 잘 알지 않느냐?” 나는 거듭 강조했다. 지극히 예의 바른 그는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떠났다.

    집회 초기에는 일부 인권위 직원들이 구경에 나섰다. 주말에 가족 나들이 하듯 문화제를 참관한 셈이다. 더러는 군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참여연대를 지목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 출신으로 인권위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도표로 그려내기도 했다. 참여연대 설립 초기에 집행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지낸 나도 물론 지목 대상이었다. 민변 출신 위원과 사무총장도 언급됐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인권위가 진보 세력의 정치적 보루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실로 안타까운 편견이다.

    신중한 심사

    시위의 강도가 더해가면서 반정부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강한 경고와 당부를 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시위 현장에 ‘참여’하지 말라고. 인권위 고위 간부가 직접 시위에 참여한 증거가 있다며 내게 귀띔해준 경찰간부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경위를 파악해 엄중 조치할 테니 증거를 달라고 했다. 그는 나의 입지를 생각해 스스로 적절한 조치를 취했노라고 했다. 처음부터 증거물이 없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가 나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평소 경찰의 애로에 대해 동정적인 편이었다. 특히 전경들의 힘든 사정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기회 닿을 때마다 그들이 ‘제복 입은 시민’이라는 걸 강조하곤 했다. 진압과정에서 부상당한 전경을 위문하기 위해 경찰병원도 방문했다. 대체로 냉랭한 반응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경찰도 적지 않았다. 후일 내게 사적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 경찰도 많았다.

    어느 주말,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비서울대 출신으로 텃세가 센 서울대에서 교수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면서 많은 후배의 신망을 얻은 분이다. 한 총리는 걱정이 태산 같다고 했다.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정치적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정서는 이해한다면 위로했다. 그는 다른 위원들도 나처럼 균형 있는 판단을 하도록 위원장이 유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외무부 장관과 유엔총회 의장을 역임한 그다. 누구보다도 국제적 기준에 정통해 있는 그분이 인권위 고유 업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총리가 인권위원장을 상대로 압력을 넣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부 내 강경기류를 전해주면서 내게 위로와 격려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 총리는 그해 11월, 인권위가 주최한 국제회의의 개회사를 맡아주었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인권위가 촛불집회 사건의 결정문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개회에 앞서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고 말했다. 한 총리는 “인권위는 인권위대로의 기준이 있는 것이니까” 하면서 대범하게 넘겼다.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사건은 상임위원을 포함해 3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먼저 다룬다. 소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사건은 전원위원회에 상정된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처음부터 전원위원회가 다룬다. 촛불집회사건은 9월 10일에야 전원위원회로 넘어왔다. 이후 4차에 걸쳐 심도 있는 논의를 열었다. 시민사회가 압박을 가해왔다. 일부 시민단체는 인권위가 정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끈 것은 아니다. 다만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건 숫자도 많았다. 경찰 측에도 의견을 충분히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또 이 사건은 단순한 집회·시위의 자유 문제로 취급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결론은 뻔하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몹시 쫓기고 있는 정부에 대고 더 큰 타격을 주는 것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장마와 폭서, 그리고 강경진압으로 촛불이 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속히 정부가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인권위 의견서를 만장일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의견이기에 찬반이 갈리면 대외적 설득력이 더욱 약해진다. 1954년의 미국 브라운 판결이 생각났다. 인종을 기준으로 한 ‘분리’ 교육은 그 자체로 불평등하다는 내용으로, 미국 연방대법원 사상 최고의 민권 판결로 청사에 길이 남아 있다. 이 판결을 전원일치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던 워런 당시 미국 대법원장의 일화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나 역시 수위를 낮추더라도 반드시 하나의 의견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의견서에는 경찰이 보인 자제와 인용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나의 지도력이 모자랐던 것 같다. 10대 1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시위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고집했다. 전직 판사였다. 평소 그는 인권위의 결정 기준이 법원 판결에 준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인권관과 인권법리를 납득할 수 없다.

    경찰 간부의 징계를 권고하는 부분에는 두 위원이 반대의견을 냈다. 경찰의 인권침해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징계 권고에 반대한 것이다. 언론은 대체로 5대 5로 점쳤다. 그래서 캐스팅보트를 쥔 위원장의 태도에 관심이 쏠렸다고 한다. 청와대에 제출한 일부 정보기관의 첩보도 그랬던 것으로 들었다. 10월 27일, 마침내 인권위 결정이 공표됐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언론 반응이 나왔다. 갈라진 민심이 수습되고 인권위도 평상심으로 업무에 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소망이었다.

    촛불이 꺼진 후

    그해 11월 늦은 어느 날, 비교적 균형 감각이 있는 청와대의 모 수석을 만났다. 민정 라인이 막혀 있어 다른 길을 뚫어보고 싶었다.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를 추진해달라고 부탁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실장과도 이야기한 바 있었다. 특히 2010년부터 한국이 맡게 될 ICC 의장국 건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을 강조했다. 이제 촛불도 꺼졌고 정부도 안정됐으니 대통령께도 크게 보실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권했다. 그는 난색을 표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그 말의 의미를 깨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후일 알고 보니 이미 이때부터 청와대에서는 ‘괘씸한 인권위’에 대한 보복조치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권위에 대한 행정안전부와 감사원의 연이은 특별감사가 실시됐다. 되돌아보니 청와대의 목표가 분명했다. 인권위 기구 축소와 ‘좌파 척결’이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때쯤 적어둔 단상이 있다.

    “새로 단장한 청계천을 내리 걷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 왠지 청계천에는 물고기도 화초도 슬프다. 고도성장과 고도상실, 청계천에는 두 마리 귀신이 함께 덮친다. 이 개천에서 승천했다는 용의 정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이룬 용꿈으로 국민이 얻은 게 무엇이고 잃은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 합은? 행여나 욱일승천, 비상을 거듭하던 용이 추락하여 미꾸라지 신세로 전락하기라도 하면 어쩌지. 한참 타오르던 영롱한 촛불들을 덮어버린 청계천의 잿빛 물줄기조차 말라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악몽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1984년 미국 샌타클래라대 법학 박사

    제4대 국가인권위 위원장(2006.10~2009.06)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 ‘법과 사회와 인권’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평전’ 등


    4년이 지났다. 공교롭게도 그때와 같은 날인 올해 5월 2일, 다시 서울광장에서 집회가 열렸다. ‘미 쇠고기 수입 중단’이 구호다. 그 직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사실이 보도됐다. 인도네시아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언론이 잠시 반짝 뜨거웠다. 그러나 촛불은 이어지지 않고 이내 사그라지는 분위기다. 4년 전과는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당시는 새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국민이 분노하고 항의할 대상이 확실했다. 이제는 사실상 죽은 정부나 마찬가지다. 국민의 관심은 이미 차기 정부에 쏠려 있다.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이명박 정부는 이룬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를 탄압함으로써 국내 정치에서 얻은 단기적 성과보다 국제사회에서 잃은 신뢰가 더 크다. 이명박 정부 초반에 겪은 촛불사건은 차기 정부와 인권위의 향후 행보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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