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과학적 지식, 상상력, 통찰력을 갖춘 창조적 ‘비전 메이커’

  • 김광웅│서울대 명예교수 kwkim@snu.ac.kr

    입력2012-06-20 09: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위대한 리더는 내일을 예견하고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또 어떤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이다. 리더는 현재를 잘 관리해야 하기도 하지만 내일을 준비하는 일이 훨씬 값지다. 상상력과 통찰력을 바탕에 두고 제시하는 비전은 한 나라의 내일을 내다보게 하는 바로미터다.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의 승리로 집권한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원칙과 신념의 정치인으로 노동당 정부가 고수해온 각종 국유화와 복지정책 등을 포기하고 민간의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중시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한다. 공기업을 민영화해 시장경제를 강화하고, 조세를 인하해 노력의 대가를 개인과 기업이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대처는 또 ‘영국병’의 원인이 강경한 노조에 있다며 노조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나는 평소 우리가 살길은 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소 사업만은 내가 직접 돌봐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옛날 세종대왕께서는 학자들을 집현전에 모아놓고 한글을 만드셨지만 우리도 이제 이 연구소에 유능한 과학자들을 모아서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해야겠어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면서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사다. 한홍택 전 KIST 원장은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먼 미래를 보고 과학기술에 투자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이라며 “박 대통령은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 과학기술체계를 훌륭하게 구축한 과학기술대통령”이라고 회고했다.위의 두 이야기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어떤 비전을 갖고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식과 통찰력

    비전이 바르려면 상상력과 통찰력이 남달라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공부를 잘 해 지식을 충분히 갖춰야 하는가? 아니면 지식이 충분하지 않아도 비전이 바를 수 있는가? 룰라 다 실바(Lula da Silva) 전 브라질 대통령은 후자의 좋은 예다. 초등학교에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나라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정책을 제시해 국가의 부를 이뤘다. 1945년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코 주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일곱 살 때 상파울루 주 산토스로 이주한 뒤, 거리에서 땅콩과 오렌지 등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도우며 초등학교에 다녔다. 1960년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산업기술연수원 선반공 자격증 과정에 등록해 3년간 교육을 받은 뒤 금속공장에서 일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80년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브라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단숨에 국민영웅으로 떠올랐고,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재임했다. 그는 퇴임 때인 2010년에도 지지율이 87%에 달할 정도로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비록 지식은 모자랐을지 몰라도 주변에 훌륭한 참모가 있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기에 바른 비전과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종합지(綜合知)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을 ‘손 지식(hand knowledge)’이라고 한다. 손 지식만 갖고도 얼마든지 논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이 그렇다. 철학자 레비 스트로스도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이런 면을 인정했다. 문제는 리더들이 지식과 더불어 이의 기반이 되는 실재(reality)를 얼마나 알고 비전을 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는 대부분 허상이라는 주장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 주교로, 철학자였던 조지 버클리는 “만물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했다. 우주의 진리를 밝히려는 이들도 실제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 ‘멀티 유니버스(원제 The Hidden Reality)’ 등을 펴낸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교수 브라이언 그린 등이 그렇다. 호킹은 실재라는 것은 모두 우리가 개념이나 모델을 만들어 그것이 실재라고 믿도록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집이나 나무 등을 예로 들면서 ‘모델 의존적 실재(model dependent reality)’라는 표현을 썼다. 그린도 “실재는 우리의 존재를 초월해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나 정의를 만져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했다.

    비전과 실재

    그렇다면 실재가 뭔지도 모르면서 지식을 쌓고 비전을 제시해도 되는 것인가? 대부분의 리더가 주장하는 정책 내용, 그리고 비전이 얼마나 속이 찼는지 우리는 일단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나는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나는 해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는 철없는 소년이었다. 가끔은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하고 기뻐했지만,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완전한 미지의 세계였다”고 고백했다. 실재를 헤아리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이 궁금하다. 또 얼마나 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리더의 비전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를 알기 위해 정책공약을 들여다보게 된다. 대사기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747 공약’으로 17대 대선에서 승리했다.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어 우리나라를 세계 7대 경제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이 공약은 나라의 내일을 열려는 비전이었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3.5% 경제성장에, 2만 달러를 약간 상회하는 소득에, 13위 경제 강국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비전은 상상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내일을 보고 약속하는 것인데, 이 대선 팀은 세계 경제에 위기가 올 것이라는 ‘내일’을 볼 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국민을 속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배세력을 바꾸겠다는 뚜렷한 비전을 갖고 국정에 임했다.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부를 가진 집단(propertied class)’이 국가 권력을 전횡하니 이 구도를 바꾸지 않으면 나라가 제대로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했거나 삼성그룹에서 일하거나 서울 강남에 사는 사람은 지배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상정했다.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려 한 것도 지배세력을 바꾸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 화해와 공존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이 땅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집념으로 6·15공동선언을 만들어냈다. 직전 정부가 세계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진 빚을 그대로 떠안은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도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신지식인을 고무해 기존의 계급의식에 수정을 가하려고 하는 의도도 뚜렷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세계화 기치를 내걸었다. 눈을 나라 밖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아직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일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것은 이 비전의 일환이었다. 또 금융실명제 도입에서 알 수 있듯 국정을 투명하게 운용하려 했다. 선진국이 되려면 정부가 투명해야 한다고 본 그의 이 결단은 지금까지 좋은 평가를 받는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조망하고 선진 공업국 도약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시대적 명제로 삼았다. 산업구조를 농업에서 공업으로, 그것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꾸준히 이행한 성과가 오늘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나라 최고 지도자건 백성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불평등한 대접을 받지 않게 하며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오르도록 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러나 경제며 정치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에도 흐름이 있어 곤두박질할 때가 있다. 이때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리더의 적절한 비전과 타당한 정책 제시가 필수다. 1930년대 세계공황이 덮친 미국의 예를 보기로 한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경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선언하고, 빈민구제 및 실업 해소를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 대통령의 비전

    당시 미국은 표면적으로 경제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만성적인 공급 과잉과 실업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주가가 폭락했다. 이 여파가 사회 각 부문에 급속도로 퍼져 물가 폭락, 생산 축소, 경제 활동의 마비 등을 야기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뉴딜 정책 이후 미국은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고 소외계층의 지위가 향상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이름 없고, 비합리적이며, 근거 없는 공포는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대통령이 국가가 직면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비전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미래, 경제, 건강보호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첫째, ‘미래’는 투표를 통해 ‘변화냐 현상유지냐’를 선택하라는 의미로, 변화를 위해 자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둘째, ‘경제’는 국가 채무 해결에 자신이 적역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국민을 우선하고 국민이 안정적인 미래를 확보하는 데 투자하라, 책임과 함께 기회를 부여하라, 중산층을 보호하라, 정부를 재창조하라’를 기치로 내걸고 중산층 조세감면, 전 국민 건강보험, 직업 훈련에 대한 공공 투자, 교육 개혁을 주창했다. 셋째, ‘건강보호’는 빌 클린턴이 가장 중시한 비전이었다.

    CNN의 미국 역대 대통령 평가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링컨 전 대통령도 비전과 의제 설정 면에서 최고 수준에 오른 지도자였다. 취임연설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백악관을 개방했다. 개방과 포용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히스패닉이든 아시아인이든, 우리는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변화, 이것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라는 연설로 변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희망을 파는 상인”

    다른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나는 현재 우리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프랑스 젊은이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나는 대통령직에 대해 다른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했고, 부자증세, 은행규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등에 대한 정책을 제시했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는 2014년까지 극빈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 ‘빈곤 없는 브라질’을 모토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현재 시행 중인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프로그램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의 수혜 대상 가운데 6세 이하 자녀를 둔 극빈층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영양 부족이나 각종 질병을 앓는 어린이를 위해 전국에 설치된 ‘서민약국’에서 의약품을 무료로 공급하도록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온 국민이 단결하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푸틴은 각종 제도 개혁을 통해 투자환경을 대폭 개선하고 경제 현대화를 위해 혁신산업을 육성하는 등 신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 민간 부문 활성화와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17년까지 석유·가스, 통신, 금융 부문 등의 국유기업 20개를 민영화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국으로 우뚝 일어서겠다는 ‘대국굴기(大國·#54366;起)’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대국굴기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줄곧 표방한 발전 노선으로, 급속한 경제 발전 이후 일고 있는 중국위협론, 빈부격차와 지역 간 갈등 등의 내부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 중국이 결국은 망할 것이라는 일각의 ‘중국 붕괴론’에 맞서는 개념이다.

    역사 속에도 위대한 비전을 제시한 리더는 있다. 나폴레옹은 “리더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는 말로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보전하면서 새롭고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프랑스 국민이여! 평등, 자유, 대의정치에 기반을 둔 통합된 공화국에 충성할 것을 우리와 함께 맹세하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러한 비전의 제시 이후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강력한 통치 원칙을 제시하는 새 헌법을 공포했다.

    나폴레옹은 근대 세계에서 가장 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국가원수 중 하나다. 1785년 5월 19일 그가 이끄는 이집트 원정함대는 지상군 3만 명과 해군 1만6000명을 400여 척의 전함과 수송선에 싣고 프랑스를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이 함대에는 2000문의 대포와 더불어 언뜻 보기에는 전쟁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색다른 집단이 승선하고 있었다. 천문학자, 수학자, 생물학자, 기하학자, 광물학자, 화학자 등 175명의 전문가였다. 온갖 실험 도구, 기계 그리고 책을 담은 상자 수백 개도 실려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이 유럽과 동방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과의 관계는 물론 지중해의 해사와 아시아의 장래와도 관련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한 사람의 꿈은 꿈이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유목민의 생활습관인 기마전술과 전법을 활용해 역참제를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1995년 12월 특집기사에서 “인터넷이 발명되기 7세기 전 몽골인은 글로벌 통신망을 개척했다”며 역참제를 ‘중세의 인터넷’으로 평가했다. 칭기즈 칸은 ‘정보’와 ‘속도’의 중요성을 알고 그에 맞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과학과 미래

    리더는 항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내일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려면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 MIT 대의 선임 교수이자 조직학습협회(SOL·Society for Organizational Learning Council) 창립 회장인 피터 센게는 “현재 세계에는 복잡한 과학적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산화탄소 배출과 기후 변화의 진행 방향을 알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고 했다. 대기 중 온실가스를 안정적인 수준으로 낮추려면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70% 이상 줄여야 한다. 이는 교토협정과 같은 기존의 다자간 협정에서 설정한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만약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화석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기업과 정부 부문의 리더 가운데 이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피터 센게의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노력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카이스트 총장을 지낸 바 있는 199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로버트 러플린은 논문에서 “지구의 기후는 인간이 정책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든다고 일산화탄소가 덜 발생하고 지구온난화가 늦추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핵에너지 분야의 전문가인 리처드 뮬러 UC버클리대 교수의 책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원제 Physics for the Future Presidents)’은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과학 분야 이슈 11개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을 모르면 대통령을 하지 말라는 뜻과 같다. 물론 대통령이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단편적인 지식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적인 마인드를 갖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며, 과학기술로 인해 달라지는 사회 변화를 감지하고 대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해외의 지도자 중에는 과학 전공자가 꽤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도쿄대 공학부, 스탠퍼드대 공과대학원).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도쿄공업대 응용물리학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칭화대 수리공정학부),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총리(베이징지질대 광산학),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칭화대 공정화학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라이프치히대 물리학, 구동독 아카데미 양자화학 박사),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옥스퍼드대 화학),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국립과학기술대 교통공학),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MIT대 건축학),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케임브리지대 수학) 등이 그렇다.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은 금속노조 활동을 했고, 타바레 바스케스 전 우루과이 대통령과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의학을 전공했다. 이들은 아무래도 과학기술 발전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비과학도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과학으로 인한 오류를 파악하는 것도 리더의 몫이다. 과학은 때로 권력과 결탁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리더의 올바른 길은 미래의 과학기술과 사회 변화를 인지하고,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하면서, 새로운 눈을 뜨고 영혼이 깃든 디지로그(Digilog·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된 제품 및 서비스)를 실천하는 것이다.

    미래의 창조 리더는 새로운 정신과학, 신경과학, 분자생물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철학, 미학, 인지심리학, 정신분석학,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등을 합친 ‘정신의 생물학’을 통해 뇌와 정신을 철저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제대로 알아야 리더다. 그러고 나서 사회 구성체의 집합성과 복잡성을 헤아려야 한다.

    상상력의 힘

    리더는 숨은 충동과 통찰력을 이끌어내 텅 빈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욕구 이상으로 반성을 통해 배우고, 다양한 체험과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리더에게 상상력과 통찰력은 필수인 셈이다. 그런데 관료사회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이나 군대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에게 상상력과 통찰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문성이 높으면 저절로 상상력과 통찰력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분야에 빼어난 사람이 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과학에 인문학과 예술을 입혀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냈다. 15세기에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상상력과 통찰력도 지금껏 회자된다. 그럼 우리가 아는 리더 가운데 상상력과 통찰력이 빼어난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 단연 세종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의 경전뿐 아니라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등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다른 책은 보통 30번씩 읽었다.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췄다. 경전의 문구를 외우는 수준을 넘어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학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주문했다. 이는 세종이 문치(文治)의 이상을 실현하는 바탕이 됐다. 태종이 세종을 후계자로 선택하며 “국가에 큰일이 생겼을 때는 의견을 내되, 모두 범상치 않은 소견이 의외로 뛰어났다”고 했으니, 세종의 상상력과 통찰력은 리더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의 창의력은 음악과 과학 등으로도 뻗어갔다. 아악과 향악을 정리하고, 측우기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우연은 아니다.

    외국 지도자 중에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있다. 과학전문지 ‘네이처’가 뽑은 세계 10대 천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셰익스피어, 뉴턴,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선정된 그는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을 뿐 아니라 정치가·교육자·철학자로 미국 건국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 철학·자연과학·건축학·농학·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창조력과 상상력을 가진 리더였다.

    아랍에미리트 부통령으로 두바이의 통치자인 셰이크 모하메드는 창조력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의 전형이다. 그는 “불가능은 단지 상상 속에 있을 뿐”이라며 사막 위에 스키장과 잔디 골프장, 불꽃 모양으로 흔들리는 빌딩 등을 세웠고, 이후 두바이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가 됐다. “두바이를 중동의 뉴욕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비전이 국민 개개인의 도전 정신을 일깨우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도시가 완성된 것이다. 비전 제시형 리더, 즉 ‘꿈꾸는 지도자’가 나라를 바꾼 사례다.

    희망과 믿음

    리더가 이처럼 상상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려면 현장 경험을 통해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더불어 부단한 지적 연마도 필요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창조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기르려면 (1)의문과 호기심과 탐구욕을 자극하는 큐리오지타(curiosita) (2)경험이 지혜의 심장이라는 디몬스트라지오네(dimonstrazione) (3)탁월한 감각의 센사지오네(sensazione) (4)애매한 상황을 가리는 직관력의 스푸마토(sfumato) (5)예술과 과학의 융합 감각인 아르테와 사이언자(arte/scienza) (6)몸으로 움직이는 코포리타(corporita) (7) 창조의 지름길인 연관성 찾기의 커넥지오네(connecssione) (8)형상화와 추상화를 반복하는 포마지오네와 아스트라지오네(formazione/astrazione) (9)다원적 사고를 촉구하는 멀티디멘지오네(multidimenssione) 그리고 (10)생각을 정리해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 모델로(modello)가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의 경영학자 톰 피터스는 “지도를 새로 그릴 수 있는 용기, 아니 완전히 새로운 지도를 창조할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감히 리더라고 말하지 마라”고 했다. 애플, 구글, 3M,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같은 창조적 기업은 상상력을 경영의 핵심 화두로 삼고 있다. GE는 아예 ‘상상력으로 돌파하기’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과학적 지식, 상상력, 통찰력을 갖춘 창조적 ‘비전 메이커’
    김광웅

    1940년 서울 출생

    서울대 법대,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한국행정학회장, 초대 중앙인사위원장 역임

    저서 : ‘국가의 미래’ ‘통의동 일기’ ‘서울대 리더십 강의’ ‘융합 학문, 어디로 가나’ 등


    리더는 비전 메이커가 돼야 한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는 “만일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으면, 사람을 불러 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라”고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이 비전 안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바다에 대한 동경과 희망, 믿음이 있을 때 그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배를 열심히 만들 듯, 대통령이 제시하는 정책이 믿음을 줄 때 그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동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가형 리더, 비전 메이커로서의 리더가 올 12월에 탄생하길 소망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