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속도 조절하며 남 배려하는 사회 돼야

24시간 활기 넘치는 다이내믹 코리아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06-20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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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좁은 울타리 안을 세상의 전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어느 날 그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면 하늘은 작은 동그라미가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무한의 공간이며,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 위에는 온갖 동식물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 개구리의 입에서는 “어이구! 이런 세상이 있었네!”라는 탄성이 튀어나온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바캉스와 여행의 계절이다. 여행은 매일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오가는 집과 학교, 집과 직장이라는 고정된 장소를 벗어나 가보지 못한 곳, 가보고 싶은 곳을 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요즘 한국인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 그리고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있다.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가 처음 보는 세상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좌충우돌하며 갖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듯이 우리도 낯선 곳에 가게 되면 일단 지금까지 살던 곳에서는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18세기 초 몽테스키외가 쓴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페르시아 사람이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자기 나라와 다른 문물에 감탄하거나 경악하면서 바라본 풍경을 161편의 편지로 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의 목적

    19세기 말 은둔국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 부부,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 바라 등이 쓴 조선 여행기에는 서구인의 눈에 신기하게 보인 조선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그로부터 약 한 세기 후 한국 사람들도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 나도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있으며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 매체들은 세계 곳곳의 신기하고 진기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요즈음 서점에 가보면 진열대의 한 부분이 아예 해외 여행기로 꽉 차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하는 국내 여행기나 답사기도 만만치 않게 많은 양으로 출간되고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모든 현지답사와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장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처음 출발했던 일상의 장소로 돌아와 그곳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물 밖으로 나가 새로운 풍경과 문물을 보며 새로워진 눈은 우물 안의 풍경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매일 보던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게 바로 여행의 효과이고 여행의 선용이다.

    그런데 우물 밖으로 여행을 다녀온 이후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새롭게 보이던 풍물들이 다시 빛을 잃고 당연하게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여행이 가져다준 신선한 시각을 가끔씩 상기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보이는 풍경들이 당연하게 보이기 이전에 그 신선한 느낌을 자세하게 기록해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몇 주일이나 몇 달이 지난 뒤 새로움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당연의 세계가 되돌아온다. 그 다르게 보이던 생생한 풍경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이 글을 연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자취를 감추기 전에 붙잡아두기 위해서다.

    풍경 #19 세종대로와 테헤란로

    속도 조절하며 남 배려하는 사회 돼야

    서울 강남의 번화한 테헤란로 일대.

    세계 여러 나라의 도시를 여행하다보면 그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 조형물, 대로를 만나게 된다. 파리 하면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몽마르트르 언덕과 더불어 샹젤리제 거리가 떠오른다. 서울 하면 남산타워, 63빌딩, 무역센터빌딩, 그리고 세종대로가 떠오른다.

    세종로 한복판에 서면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게 된다. 광화문과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의 푸른 기와가 보이고 그 뒤로 북악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화문광장 입구에 큰 칼을 옆에 찬 이순신 장군이 의자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한강 쪽을 향해 남으로 내려가면 서울시청과 숭례문이 나오고 이내 서울역에 도달한다.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한남대교를 건너면 강남이다. 강남대로를 지나 지하철 강남역 앞에서 좌회전을 하면 그곳은 강남의 세종로라고 할 수 있는 테헤란로다. 청와대와 정부중앙청사가 있는 세종로가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지라면 테헤란로에 있는 대기업의 초현대식 사옥들은 이곳이 경제의 중심임을 말해준다. 하루 날을 잡아 오전에는 세종로 주변을 걸어보고 오후에는 테헤란로 부근을 다녀보라. 이제 서울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의 외모가 나날이 세련되듯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외형도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10년 전의 서울과는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모습이다. 그곳에서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풍경 #20 어느 버스 운전기사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자가용 승용차 없이 살고 있다. 파리에서 자동차 없이 살던 10년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가 알아서 운전을 해주기 때문에 운전에 신경 쓸 일이 없다. 가끔씩 택시를 타기도 하지만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택시의 협소한 공간은 마치 운전기사의 개인 공간과 같아서 낯선 남의 집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 그래서 주인의 눈치를 봐야 한다. 주인의 몸 냄새가 나고 주인 마음대로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버스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 버스는 마음 놓고 걸어 다니는 보행로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에는 운전기사의 개인성이나 쓸데없는 소리가 없다. 넓은 버스 공간에서는 운전기사와 공간적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버스에 탄 다른 승객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도 있다. 게다가 버스는 어두운 지하로 달리는 지하철과는 달리 밝은 지상으로 달리기 때문에 거리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이점마저 있다. 밤에는 전광판과 네온사인으로 장식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버스의 좌석은 승용차 좌석보다 시점이 높고 시야가 넓어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어느 날 오전 10시경 지하철 합정역에서 내려 파주 출판단지로 가는 좌석버스를 탔다. 버스 앞문으로 올라타서 제일 앞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는 이내 복잡한 시내를 떠나 한강변에 들어섰다. 한가한 마음이 되어 하늘을 배경으로 한 한강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는데 버스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파주 출판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규칙대로 뒷문으로 내리려고 하는데 나이가 든 운전기사가 거친 말투로 “앞문으로 내리세요!”라고 했다. 정해진 운행 시간에 쫓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운전기사는 승객이 뒷문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기 때문에 그냥 앞문으로 내리라고 말한 모양이다. 젊은 여성이 다소 기분 나쁘다는 듯이 “뒤로 내려도 상관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목소리를 높여 “나는 문제가 돼요!”라고 무섭게 되받아쳤다. 그 말을 들은 젊은 여성은 겁먹은 듯한 표정과 불쾌한 표정을 교차시키며 운전기사가 명령하는 대로 서둘러 앞문으로 내렸다.

    파리에서라면 운전기사가 나이가 좀 들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에게 그렇게 거칠게 대하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더구나 승객이 뒷문으로 내린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다시 목소리를 높여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파리의 젊은 여성 같았으면 운전기사와 대판 말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끌었을 것이고 원래 자기가 하려고 했던 대로 기어이 뒷문으로 내렸을 것이다.

    풍경 #21 음식점 인심

    파주에 도착해서 출판사 사람들과 파리에서 집필한 나의 원고 출판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옆 테이블에서는 네 명의 남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금방 음식이 차려진 상이었다. 그때 그 가운데 한 남성이 주인아주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떡갈비가 타서 나왔어!”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지체 없이 달려와 사과를 하고 다시 구워 주겠다고 했다. 남자 손님은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달려가서 묵무침 한 접시를 서비스로 가져다준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남자가 계산대로 가니까 아주머니는 떡갈비 값은 계산에서 제외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남자들은 단골손님이었던 듯하다. 그래도 음식이 다소 잘못 나왔다고 돈을 받지 않는 경우는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파리의 식당에서 만약 태운 음식을 내놓았다면 그 음식을 다시 해주는 한이 있어도 다른 음식을 서비스로 제공하거나 음식 값을 안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파리 사람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그렇게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옛말에도 지나친 공손함은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라서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아무튼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얼른 기지를 발휘해 서비스 음식을 제공하는 기동성은 한국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풍경 #22 운수와 팔자

    현진건의 작품 가운데 ‘운수좋은 날’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알게 된 일이다. 이삿짐센터의 요금이 날짜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운수가 좋은 길일(吉日)이 미리 정해져 있는데, 그런 날의 이사비용은 다른 날보다 20~30% 비싸다. 파리 사람들은 평일보다 주말이 더 비싸다면 이해하겠지만 주중인데도 길일이라고 더 비싸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단지 미신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우리의 전통이라고 보아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농촌사회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구세대들만 운수 좋은 날을 따지는 게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온갖 새로운 정보에 접하는 신세대들도 운세를 따진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 의류 상가, 대학로와 홍대 앞, 종로 일대에는 간이 포장을 치고 점을 보는 점집이 수두룩하다. 젊은이들은 재미로, 아니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기에 들어간다. 취업과 사랑에 대한 운수를 알아보기 위해 점쟁이에게 생년월일시를 말해주고 점쟁이의 예언을 진지하게 경청한다.

    2002년 파리로 떠나기 전에 동료들과 함께 재미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쌀점을 보는 신기 들린 젊은 무속인은 나를 보고 “이제 고생 다 끝나고, 물고기가 바다로 향하는 형국이다”라고 말했다. 파리로 가서 10년 동안 살다온 게 바다로 나갔다 온 건지도 모르겠다. 파리 생활 10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를 보고 파리에서 ‘널널하게’ 지내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팔자 늘어지는’ 생활을 하다 돌아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먼 바다를 떠나 편안한 뭍으로 올라온 형국이란 말인가?

    풍경 #23 계약보다는 인정

    서울에선 가끔 가격 흥정을 하게 된다. 지난번 이사할 때 이삿짐센터의 용역비만이 아니라 아파트에 와서 청소며 여러 가지를 도와줄 아주머니들의 용역비도 흥정해야 했다. 몇 군데 전화로 가격을 알아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와 계약을 했다. 물론 구두 계약이다. 이삿짐센터에서는 용달차 두 대가 왔는데 이삿짐을 다 내려놓고 나서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며 가격을 조금 더 생각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원래 정한 가격에 얼마를 더 얹어주었다. 일단 가격을 싸게 불러서 고객을 잡아놓고 나서 나중에 얼마를 더 요구해 결국은 다른 업체와 같은 가격을 받아가는 전략 같았다.

    청소를 하기 위해 부른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해서 느긋하게 일하다가 계약한 근로 시간이 반쯤 지나자 커피를 한잔 타 마셨다. 그러고는 그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는데, 일이 끝나갈 무렵에는 더욱 열심히 했다. 그러고 나서는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아파트가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들어서 좋다”라든지 “오래된 아파트지만 위치가 좋다” 등의 말을 하면서 주인의 기분을 좋게 했다. 그러고 나서 일을 마치고 갈 때쯤 되자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고 말하며 인정에 호소하는 데야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 더 낫게 사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들 처지를 생각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약해져 하는 수 없이 계약한 금액보다 얼마를 더 얹어주었다. 아주머니는 만족한 표정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고 떠난다. “부자 되세요!”

    풍경 #24 일상의 예절

    서울과 파리의 일상 예절은 다르다. 예절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다.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기도 하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등의 간단한 표현은 일상의 예절에서 흔히 쓰이는 말들이다. 파리에서 살면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미안합니다”라는 뜻의 파르동(pardon)과 “감사합니다”에 해당하는 메르시(merci), “괜찮으시다면”이라는 뜻에 가까운 실부플레(S‘il vous plait) 등이다. 남과 부딪치거나 버스에서 내릴 때 앞 사람에게 ‘파르동’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이 자리를 내어주면 메르시라고 한다. 카페나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면 실부플레를 외친다.

    파리 사람들이 그런 일상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정에서 부모에게 교육받지 못한 걸까. 가정에서 그런 예절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면 ‘일상의 예절 지키기 시민운동’이라도 필요한 것 아닐까.

    서울과 파리의 일상 예절에서 눈에 띄게 다른 풍경은 출입문과 관련돼 있다. 파리에서는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게 기본 예의다. 아파트 현관의 대문이나 학교 강의실의 출입문이나, 지하철의 유리문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뒷사람을 위한 배려가 없다. 자기만 들어가면 그만이다. 문은 각자 자기가 열고 들어간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술자리에서는 술잔을 돌리면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냉정하다. 그러나 카페에서 혼자 맥주를 따라 마시기를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문을 잡고 기다려준다. 예의와 예절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도 필요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일생에 그저 한번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다.

    풍경 #25 넘치는 음식문화

    파리보다 서울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어디를 가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식생활은 지난 10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서울사람들은 이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미식가들이 되었다. 직장인들 가운데는 점심 식사 시간에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순회하는 ‘런치 노마드족’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아직도 중국 음식점이 많지만 이탈리아 음식점과 퓨전 음식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정통 인도식 카레 전문점과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 등 음식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한국어에는 반 농담으로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표현이 있고 주어진 최소한 임무를 마치고 나면 “오늘 밥값은 했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먹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 음식의 특징은 푸짐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친구들과 한국 음식점에 가면 상 위에 놓인 반찬만 보고도 탄성을 지른다. 전식, 본식, 후식이라는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음식을 먹던 그들은 상 위에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 식습관에 놀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식 인심이 후하다. 손님이 오면 아무리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음식을 차려야 예의를 갖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는 남은 음식을 보관했다가 다시 먹으면 되지만 음식점에서는 상 위에 올랐다가 남은 음식은 모두 버리게 된다. 기본 반찬은 말할 것도 없고 주문하는 음식도 많이 시켜서 꼭 남겨야 직성이 풀린다. 음식물을 남기고 나올 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순두부, 칼국수, 수제비, 북엇국 등 서민 음식 전문 식당들 가운데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김치를 식탁 위의 통에 넣어두고 손님이 자기가 먹을 만큼만 떠먹게 해놓은 곳도 있다. 그런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우리 동네 순두붓집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식당 주인의 이모님이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 날이 많다. 자주 가다보니 그 이모님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내가 이사한 날에도 그 순두부 식당에 갔다. 그날 오간 대화 내용은 이렇다.

    이모님: 부자 되는 꿈 꾸셨어요?

    나: 순두부 먹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랍니까?

    이모님: 가진 게 많으니까 욕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나: 가진 거 많은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기를 쓰지 않나요?

    풍경#26 고효율성의 사회

    파리를 떠나면서 10년 동안 쓰던 가구며 전자제품들을 모두 프랑스 친구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왔다. 가구래야 전부 조립식 가구들이어서 가지고 올만한 게 못되었고 10년이나 쓴 전자제품을 무겁게 서울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도착한 이후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비품을 다시 사들여야 했다. 전자제품 대리점에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등의 물건을 알아보러 들어갔다. 대리점의 젊은 직원들은 냉장고 세탁기 등 여러 가지 제품의 특성을 비교해가면서 효과적으로 잘 설명해주었다. 고객이 질문한 내용을 하나하나 다 성의껏 답변해주면서 고객의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했다.

    10년 전 파리에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파리 15구에 있는 전자제품 종합판매장에 가서 텔레비전,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을 일괄 구입했다. 그때 파리의 대리점 직원들은 지금 서울의 대리점 직원들에 비하면 너무 훈련이 돼 있지 않은 느낌이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프랑스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친구는 서울 생활의 효율성을 이야기하면서 물건을 사러 가면 합리적 선택이 가능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빠른 시일 안에 배달하고 설치해주는 데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사회가 한국 사회의 효율성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는데, 당시에는 그 친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물건을 사러 다니면서 그 친구의 말을 전적으로 수긍하게 되었다.

    주문했던 전자제품은 며칠 내로 배달되어 정해준 자리에 설치되었고 몇 시간 후 전자제품 회사 서비스 본부에서 전화가 와서 “잘 설치되었느냐” “기사들은 친절했느냐”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물었다. 정말 한국 사회의 효율성은 지난 10년 사이에 엄청나게 높아졌다.

    풍경 #27 다이내믹 코리아

    서울 생활이 편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 곧바로 물건을 배달해준다는 점이다. 슈퍼마켓뿐 아니라 자장면, 김밥, 덮밥, 햄버거, 돈가스 등 간단한 식사도 아파트 동수와 호수만 대면 금방 배달해준다.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장소로 급히 서류나 물건을 보낼 일이 생기면 ‘퀵 서비스’에 연락하면 된다. 전화 한 통화면 서울 시내 어디라도 한 시간 만에 물건을 전달해준다. 거리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때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출발 자세를 하고 있는 퀵 서비스 배달원들의 긴박한 모습을 보면 한국은 정말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회 같다. 그야말로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아미타이 에티오니(Amitai Etioni)라는 미국 사회학자의 책 제목을 따르자면 한국은 ‘액티브 소사이어티’(Active Society·활발하게 움직이는 사회)다. 대형 슈퍼마켓에 가보면 밤 12시가 넘어도 장보는 사람이 즐비하다. 그러니까 서울은 그냥 ‘액티브’한 도시가 아니라 24시간 ‘액티브’한 도시다. 큰 도로에는 밤 12시가 넘어도 계속 자동차들이 줄지어 다니고 24시간 편의점의 불빛은 밤이 깊어도 꺼질 줄을 모른다.

    며칠 전 저녁 식사 후 책을 보다가 답답해서 아파트 단지 옆에 붙어 있는 근린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밤 12시 무렵이었다. 공원 입구에는 배드민턴 연습장이 있고, 더 걸어 들어가면 여러 가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농구장도 있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운동 기구에 매달려 있는 몇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공원 가장자리에 설치된 벤치 부근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의 남자 아이가 엄마와 나란히 앉아 리코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곡조는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로 시작하는 동요였다. 엄마는 아이에게 ‘레파파미 레파파미 레파미…’ 라는 계명을 불러주기도 하고 리코더를 직접 불면서 본을 보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들의 모습이 퍽 다정해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 풍경은 다음 날 있을 음악시험에 대비해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한 연습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건 입시 위주, 점수 위주로 이루어지는 한국 교육의 한 장면을 보여준 것 아니었을까.

    속도 조절하며 남 배려하는 사회 돼야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그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실내에 불을 훤하게 밝힌 143번 시내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버스에는 사람이 꽤 많이 타고 있었다. 파리의 시내버스는 밤 9시만 되면 대부분 다 끊어진다. 타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들 집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서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그렇게 늦게 귀가하는 것일까? 서울 사람들은 밤이 깊어도 계속 움직인다. 휴식 할 줄 모르는 기계처럼 보인다. 많은 수의 서울 사람이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된다. 그런데 나는 왜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동네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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