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영화감독이 되는 이유

  • 이재한│영화감독 johnhleefilm@gmail.com

    입력2012-07-19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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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이 되는 이유

    영화 ‘사요나라 이츠카’ 촬영 현장.

    무엇이 영화감독을 만들까? 영감은 어디서 얻는 것일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난 왜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나이가 들수록 해답은 얻지 못하고 질문만 늘어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유리함은 없다고 한 우디 앨런 감독의 말이 떠오른다. “늙으면 더 똑똑해지지도 않고, 더 지혜로워지지도 않는다. 늙는다는 것은 안 좋은 일이다. 되도록 피하기를 권한다.” 나이를 먹는 나는 과연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 많은 궁금증이 날 영화감독으로 만들었을까? “왜 영화를 만드시죠?”라는 인터뷰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성숙하는 과정 같아요.”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고 하는데 영화감독은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동안 가지각색의 고통을 경험한다. 촬영 규모에 상관없이 제작비에 시달리며, 항상 시간에 쫓긴다. 항상 참는다. 화를 참고, 추위를 참고, 더위를 참고, 잠을 참고, ‘자연의 부르심’을 참을 때도 많다. 긴 촬영 기간 탓에 실연의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프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소임 중 하나다. 일단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은 자꾸 빠지고, 흰머리가 급속도로 늘어난다. 작품 만들기 전과 그 후의 모습은 정말 다르다. 작품이 잘되면 모두 자화자찬이고, 망하면 모두 감독 탓이다. 영화 개봉 후 몇 달간 전화기는 조용하다. 고독과 싸워 이기는 것도 영화감독의 일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출이란 그럴싸하게 그림을 그려 카메라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다. 해는 저물고 있고, 다섯 커트나 찍을 게 남아 있는데, 두 커트밖에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순간, 진정 연출이 뭔지 알게 된다.” 과언이 아니다. 영화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이런 일을 거의 매일 겪는다.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허탈한 상황에 맞닥뜨려 주저앉고 싶을 때도 최선을 다하자는 긍정적 의지를 온몸에서 끌어내야 하는 이가 영화감독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는 습관이 생긴 것은 내가 ‘영화감독’이어서일까?

    왜 난 이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처음엔 이럴 줄 몰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다. 난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을까? 표현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욕망이었던가? 지혜를 얻고자 하는 노력이었던가? 시간은 자꾸만 간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소년과 대화를 나눈다. 항상 영화로 사고하고, 영화로 숨 쉬고, 영화로 꿈을 꽃피우는 맑고 총명한 소년. 그 소년은 어느덧 미래에 영화감독이 되고, 나는 그 소년에게 지금 말한다.



    영화감독 : 요즘도 영화감독을 꿈꾸나?

    소년 : 매일 꾸지. 어제 학교에 단막극 과제를 써서 냈는데, 점수가 D-야. 내 일생 첫 대본이었는데 말이지.

    영화감독 : 내용이 뭐지?

    소년 : 어느 비행소년이 교장실에서 혼나다가 교장선생님을 죽이는 내용이지.

    영화감독 : 거 좀 심했네. 완성도에 상관없이 소재가 점수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듯. 자화상인가?

    소년 : 영화감독은 원래 자기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소설가처럼.

    영화감독 : 넌 너무 진지해. 나가서 야구 좀 하지? 친구들과 뛰어놀고. 여자도 사귀어보고 말이야. 키스도 못해봤지? 일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영화 감상에 쏟아 붓는 것 아닌가? 시커먼 극장에서 혼자 고독하게…, 청춘이 아깝지 않나?

    소년 : 그런 당신은 연애 잘하고 있나? 폼 잡고 다니지 말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면 어떨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봐야 사랑이야기를 걸작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영화감독 : 내가 만든 영화 때문에, 모두 내가 연애를 잘한다고 착각하지. 난 그렇지 않아. 사랑은 허상이야. 모두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할 뿐이야.

    소년 : 중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의 생각과 비슷하군. 나도 공감하지만. 사랑에 대해 그렇게 규정 지으면 살아가기 힘들걸.

    영화감독 : 나도 규정 지은 건 아니야. 모두가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할 뿐….

    소년 : 과연 무엇이 좋은 영화감독을 만들까? 난 정말 좋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거든? 그냥 영화감독이 아니고 말이지. 과시욕에 불타며 노력하는, 가식 속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냥 그런 영화감독 말고….

    영화감독 : 그건 나도 궁금해. 본질을 찾으려 노력할 때, 그게 일단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문턱에 서는 것 아닐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때, 본질을 파헤치며 말이지!

    소년 : 당신은 꿈이 뭐지?

    영화감독 :영화감독이 꿈이었지.

    소년 :지금 영화감독이잖아?

    영화감독 : 만족 못해. 아직도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쓸 때 좀 겸연쩍어.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지. 난 아직도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에 깨달음을 갈망하고 있어. 왜 넌 영화감독이 되려 하지? 험난한 길인데. 성공 확률은 현미경으로 살펴봐야 할지도 몰라.

    소년 : 난 몇 년 전부터 단편 작업을 했는데, 영화를 만들 땐 난 나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난 언제부터였는지 정말 극단적으로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에게 말도 못 걸고, 학교에서 어떤 발표도 못하고, 길거리에서 누가 볼까봐 고함도 지르지 못하지.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난 내 그림자를 보는 것이 좋았나? 미국이 날 이렇게 만들었나(웃음)? 하지만 영화작업에만 몰두하면 나의 자아는 어느새 사라지고, 세상 모든 것과 융화를 이루는 그런 기분? 내가 영화감독이 된다면, 내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듯이 남들도 영화감독이 대단하다 생각하겠지?

    영화감독 : 영화감독이 뭐 대단한가?

    소년 : 내 일상은 재미없어. 난 나 자신보다도 남들을 더 알고 싶어. 옆집 아저씨의 과거도 알고 싶고. 대통령은 인터넷에서 뭘 검색하는지 알고 싶고. 지난주 우리 학교에 전학 온 벨기에 여학생의 생각이 궁금해. 파란 눈에 금발머리. 정말 예뻐. 영어가 서툴지만, 모든 남학생은 그녀의 발음에 무너지지, 모세의 기적처럼 그 파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뭐가 달라 보일까?

    영화감독 : 엄청난 감수성이군. 궁금한 것이 많구먼. 영화감독감이야! 벨기에 소녀에겐 말걸어봤나?

    소년 : 하지만 나는 건축과에 지원했지.

    영화감독 :왜? 영화감독은 어쩌고?

    소년 : 영화감독의 길은 너무 위험하잖아? 난 그림을 잘 그리고, 수학 물리 쪽도 잘하니까, ‘딱’이지. 우선 먹고살아야지!

    영화감독 : 꿈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현실을 택했다? 정말 어른스럽군.

    소년 : 난 어릴 적부터 어른이었어.

    영화감독 :(웃음) 언제부터?

    소년 : 미국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지. 열두 살 때 당신은 영화를 통해 뭘 얘기하려 했지?

    영화감독 : 어릴 적엔 뭐든 분명했는데, 솔직히 나이가 들며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야. 그동안 정말 많은 일과 사람을 겪다보니, 이제 사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어쩌지?

    소년 : 이 멕시코 속담 들어봤나? “젊은이는 꿈을 꾸고, 노인은 회상한다.” 당신은 꿈을 꾸나? 회상을 하나?

    영화감독 : ….

    소년 : 난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질 거야. 난 영화를 만들며 나를 발견할 것이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많이 낳고, 잘되면 부와 명예와 행복을 누리겠지?

    영화감독 : 쉽지 않더라, 그게….

    소년 : 어젯밤엔 오스카상 수상 소감을 머릿속으로 읊었지.

    영화감독 : 영화학도라면 한 번씩 해본다는 그것을…. 넌 몇 살이지?

    소년 : 당신은 어떤 계기로 영화감독이 되었지?

    영화감독 : 계기라? 희미해진다. 기억이라는 게….

    소년 : 난 확실히 기억 나. 지난달이었지. 정말 말도 안되는, 정말 후진 공포영화를 보던 중 깨달았어. ‘적어도 난 저것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영화감독 : (웃음) 누군가의 졸작을 위안의 대상으로 삼으면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걸작을 만들어야지. 그런 계기로 어떻게 영화감독의 길을 결심하지? 적어도 난 12세 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스타워즈’같은 영화를 만들 꿈을 키웠어. 걸작이지.

    소년 : 영화 ‘택시 드라이버’와‘데미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건축가 프랭크 라이트, 음악가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영화감독 : 영화‘대부(The Godfather)’와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바흐…

    소년 : 난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거야.

    영화감독 : (한숨) 제발 잘되길 바란다. 꿈을 계속 꾸자, 우리.

    영화감독이 되는 이유
    이재한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뉴욕대학교(NYU) 영화과 졸업

    2010년 제30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제18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작품상 수상

    주요 작품 : ‘더 컷 런스 딥’(2000),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사요나라 이츠카’(2010), ‘포화 속으로’(2010) 등


    지금 깨달았지만 내 작품엔 태양과 그림자가 많이 등장한다. 나와 대화를 나눈 소년은 어릴 적 나다. 그 소년은 분명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 소년은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지혜롭지 않다. 무엇이 영화감독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노력한다. 아쉬움은 떨쳐버리고, 다음 작품에 몰두한다. 당신도, 고통과 성숙이 반복되는 끝없는 여정 속에서, 당신의 꿈이 잊히려 할 때, 한 번쯤 과거의 자신과 대화를 나눠보면 어떨까? 소년이 나에게 속삭인다. 나이는 먹어도, 늙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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