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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17

존 F 케네디의 ‘작업주’ 다이키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존 F 케네디의 ‘작업주’ 다이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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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의 ‘작업주’ 다이키리

다이키리를 즐기고 있는 존 F 케네디.

다섯째인 유니스의 딸 마리아 슈라이버는 유명한 보디빌더 출신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혼외정사 스캔들로 이혼소송 중이다.

이처럼 케네디가의 저주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 그 저주의 정점은 뭐니 해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1917~1963)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앞서 기사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그의 부계, 모계 양가는 모두 명문 집안이었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고, 반항적인 행동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1936년 하버드대에 입학해 국제정치 수업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고,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수차의 유럽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그의 학위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0년 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케네디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케네디의 젊은 시절 경력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역시 군대와 관련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에 케네디는 육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만성적인 허리 병(요통)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그해 9월 과거 그의 부친이 대사 시절 해군 무관을 지낸 사람에게 부탁해 마침내 해군에 입대하게 된다. 1943년 8월 소형 어뢰정(PT-109)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중 솔로몬 군도 근처에서 일본 구축함 공격을 받아 배가 격침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케네디는 자신이 부상을 당했지만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선원들의 생명을 건지는 활약을 보였고, 이 전공으로 해군 훈장을 받는다. 이후에도 여러 전투에 참여해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케네디는 1945년 초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명실 공히 전쟁영웅의 신분으로 해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의 형이자 가문의 장남인 조지프(Joseph P Kennedy, Jr·1915~1944)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중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하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집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형이 죽자 그 책임과 짐은 둘째인 존 F 케네디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제대한 뒤 부친의 주선으로 잠시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며 포츠담 회담 등을 취재하던 케네디는 1946년 3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매사추세츠 주 제11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후 6년간 하원의원을 지낸 케네디는 1952년에는 같은 지역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였던 재클린(Jacqueline Kennedy Onassis·1929~1994)과 결혼한다.

44세에 35대 미국 대통령 당선

1956년 그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에서 후보로 선출된 스티븐슨(Adlai Stevenson II· 1900~1965)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경합했지만 그 자리는 에스테스 케포버(Estes Kefauver·1903~1963) 상원의원에게 돌아가고 만다. 그의 부친은 당시 공화당 후보이자 현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1890~1969)의 막강한 경쟁력으로 민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차라리 아들 케네디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그해 선거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재선에 성공한다.

어쨌든 1958년 재선 상원의원이 된 케네디는 1960년 마침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그는 정략적으로 남부 출신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1908~1973)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정한 뒤, 이른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선거에 뛰어들었다.

당시 선거는 미국 정치사상 처음 TV를 통한 후보 간 토론이 시행된,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거전이었다. 메이크업을 하고 나선 젊은 케네디는 준수한 용모와 능란한 언변, 그리고 여유 있고 호소력 있는 분위기로 상대 후보 닉슨(Richard Nixon·1913~1994)을 압도했다.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44세의 나이로 3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선거를 통해 당선된 최연소 대통령(최연소 대통령은 부통령에서 대통령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마침내 1961년 1월 20일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F 케네디는 취임사에서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묻기 전에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먼저 물어보십시오(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라는 명연설을 한다.

그런 그도 결국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영부인 재클린과 무개차를 타고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리 하비 오스왈드는 범행을 부인했고, 사건 이틀 뒤 댈러스 경찰서 뒷마당에서 주 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이후 수많은 추측과 음모론이 난무하면서 지금도 호사가들의 관심 대상이다.

케네디는 술을 즐기는 편이었으나 비교적 절제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던 술 종류는 주로 다이키리(Daiquiri), 블러디 메리(Bloody Mary) 같은 칵테일 종류였는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저녁에 한 잔 이상 마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가 특히 좋아한 다이키리는 오늘날에도 ‘케네디의 술’로 꼽히고 있다.

럼과 라임과 설탕의 조합, 다이키리

다이키리는 럼과 라임(또는 레몬) 주스에 설탕을 탄 비교적 간단한 레시피의 칵테일이다. 공교롭게도 다이키리는 케네디 재임 기간 내내 불편한 관계였던 쿠바에서 탄생한 술이다. 20세기 초 독립했지만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각종 기술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쿠바 남쪽 다이키리 광산에도 미국 기술원조단이 들어갔다. 이들 엔지니어들에게 더운 지방에서 하는 작업이 쉬울 리 없었다. 따라서 쿠바 광산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럼, 라임주스, 그리고 설탕으로 만든 칵테일이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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