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작가 unomonoo@gmail.com

    입력2012-07-24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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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3·1운동의 염원을 모아 국내외 곳곳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양립하는 가운데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1919년의 기대와 열기가 가라앉고 1920년에 들어서자 제2의 러일전쟁이라 할 군사적 충돌이 시베리아 극동의 연해주에서 일어났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과 독립의 꿈이 부풀었으나 나라의 정수리 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경제적·정치적 이유로 고국을 떠난 조선인들의 생활 근거지였다.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191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형(왼쪽), 조카(가운데)와 기념사진을 찍은 최재형 선생.

    최재형(崔才亨·독립운동가)은 창문을 열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크고 높은 러시아풍 창틀의 머리는 딸들의 눈썹처럼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너머로 사위어가는 별빛을 빨아들이며 암청색 허공이 차츰 어둠을 벗어나고 있다. 방에는 어린 딸들이 곤히 잠들어 있다.

    눈 덮인 슬레이트 지붕 아래 러시아식 벽돌집은 소박하고 다부진 모양이 주인을 닮았다. 창밖 희뿌연 마당 너머로 하나둘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 마을 어귀의 기억도 희미한 장승 한 쌍이 언뜻 떠오른다.

    추수해야 할 가을에 흉년 기근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넘어온 것이 반세기 전이다. 강을 건너가면 비옥한 땅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경도 경원 땅을 떠나올 때 그는 아홉 살이었다. 그날 동구 밖 언덕 위에 올라 향촌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할아버지, 머슴살이 하던 양반 집 곡식창고를 털고 도주한 아버지는 월북한 후로도 한참 동안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동포의 시체를 넘고 넘어 북으로 동으로 이주를 거듭하며 정착해갔다. 그리고 이곳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 땅에 뼈를 묻었다.

    최재형은 여기서 사업가로 성장했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 4남 7녀를 두었다. 그는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최고의 유지로 통한다. 몇 달 뒤면 환갑을 맞는다.

    중앙의 현관문과 같은 높이로 좌우에 대칭으로 달린 6개의 큰 창이 바람에 운다. 저 멀리 북쪽 항카 호수의 얼음 냉기를 담고 내려와 넓고 완만한 구릉과 자작나무 숲을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다. 4월에 들어선 지 닷새가 되지만 연해주에 봄기운은 아직 미약하다. 얼음이 떠다니는 북쪽 오호츠크 바다가 뿜어내는 한랭 다습한 기운은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을 통로로 삼아 역류하듯 남하를 거듭해 극동 최대의 항카 호수를 거대한 얼음 항아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4월이 가면 항카 호의 얼음도 풀릴 것이다. 물 항아리 이듯 호수를 떠받들고 선 형상의 이곳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도 그와 더불어 봄이 찾아들 것이다. 남쪽 해안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영하권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러 달 쌓였던 눈도 거기서부터 녹아 올라 여기에 이를 것이다. 1000년 전 발해인들이 여기 살았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눈 쌓인 평원에는 200년 이상 존속했던 발해국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수풀 더미를 헤치다 보면 돌확이 툭툭 튀어나오고 땅을 조금 파면 그때의 지층이 쑥 드러난다. 긴 것 같지만 천 년도 금방이다. 개울 건너듯 두만강 저쪽에서 이쪽으로 철벅철벅 넘어와 산 지가 50년인데 그것 스무 번 하면 1000년이다.

    이곳 극동지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은 최재형이 태어난 1860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국경 개념이 모호한 이곳에 한인들은 수시로 출입하며 농사를 지었다. 두만강변 주민들은 아침에 강을 건너 농사일 하다 저녁에 돌아가곤 했다. 아예 봄에 와서 모 심고 가을걷이까지 머물다 돌아가는 계절 이민자도 있었다. 러시아 관할로 병합된 뒤에도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토지를 감당할 노동력이 없어 버려지다시피 한 이 땅에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을 대신해 개간을 맡았고 그 인구는 차츰 늘어났다.

    그러던 중 1869년 이주가 폭증하는 사태를 맞았다. 그해 가을 조선 북부 지역에 큰 홍수가 지고 이어 서리가 내리는 기상재해로 수확이 불가능해지자 수천 명이 국경을 넘는 이변이 일어났다. 러시아 정부와 조선 정부 모두 당혹스러운 처지였지만 마땅히 통제할 방안이 없었다. 두만강 접경에서부터 항카 호수 이남까지 해안과 내륙을 따라 이주민이 급증하고 한인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최재형 가족도 그 월경 유민(越境 流民)의 틈에 끼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전쟁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항카 호수에는 얼음이 풀리기 전부터 조선반도와 중국대륙 연안에서 겨울을 나고 떠나온 두루미들이 제주도 두 배도 넘는 면적의 호수 주변 습지에 알을 낳고 품으며 겨울의 끝자락을 통과한다. 봄기운이 돌 무렵 두 마리를 부화해 지구 최대의 번식지인 여기서 새 가족이 서식한다. 이 우아하고 장중한 자태의 새들을 여기 러시아령에서는 백학(白鶴)이라 한다. 행복과 장수와 금실의 상징이라 여긴다. 조선에서는 그러한 비원이 천년학이란 말에 담겨 있다. 조선에 살 때 백학은 두루미가 된다. 항카 호 다음으로 일본 북해도 동부에 많이 사는 이 종족은 쓰루(鶴)라 하는데 철새처럼 번식지를 떠나지 않고 가능한 한 출생지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다섯째 딸 올가는 창문 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창가에 선 아버지의 어두운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밤새 뜬눈으로 보냈나 보다. 열다섯 살 올가와 자매들은 밤새 울다 잠이 들었다. 최재형은 일찍 사별한 첫 부인 소생을 포함해 1893년생부터 1914년생까지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을사년에 태어난 최올가 페트로브나 혹은 최송학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1박2일이 지나고 있었다. 1920년 4월 5일의 새벽이었다.

    어제 이미 가족들은 가장과 작별을 고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아침에 최재형은 아들 파벨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 일본 군대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접근해온다는 급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곳 니콜리스크만이 아니었다. 남쪽 해안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북쪽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의 합수점인 하바로프스크에 이르기까지 연해주 곳곳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일제히 전개되었다고 했다. 세계대전은 끝났는데 시베리아에서는 1년 반 넘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전쟁의 불똥 하나가 유라시아의 극동에서 새로운 전쟁으로 번지고 있었다.

    유럽 전쟁의 와중에 제정 러시아를 몰락시킨 볼셰비키 중심의 적위파(赤衛派)에 대항해 왕정복고를 꾀하는 구체제 지도그룹 중심의 백위파(白衛派)가 내전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시베리아에 공동 출병해 반혁명파 백군(白軍)을 지원해왔다. 올해 초 마침내 백위파 정권이 붕괴하자 미국을 위시한 국제간섭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홀로 남아 적위파 붉은 군대 소탕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제2의 러일전쟁과도 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일본의 저의가 러시아의 불안정한 정세를 이용한 시베리아 영토 점령에 있는 것 아니냐는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 대규모 공세가 4월 4일을 기해 벌어진 것이다. 내전과 외전이 뒤엉켜 전장과 마을이 구분이 안 되는 이 기괴한 난장판에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은 민간인이었다. 붉은 군대 빨치산과 붉은 깃발의 일본군 그 사이에 조선인 이주민들이 있었다.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러시아 우스리스크에 있는 독립투사 최재형 선생의 집.

    떠났던 최재형은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스무 살 아들 파벨, 최성학은 아버지와 헤어져 빨치산 부대로 갔다고 했다. 집안은 시가전을 앞둔 민가처럼 암운에 휩싸였다. 딸 올가는 먼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거리는 벌써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 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출가 전인 우리 네 딸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내가 떠나면 일본인들은 어머니와 너희들 모두를 체포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나를 배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많이 살았다. 나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편이 낫다.’

    우리는 모두 울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와 작별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최재형은 사업을 크게 벌이는 한편으로 연해주의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해왔다. 그는 세 차례 거주지를 옮겼다. 1905년 을사년과 1910년 망국의 해, 그리고 1918년 러시아에 내전이 시작되고 일본이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해 들어오던 때였다. 무장투쟁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지난해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교통총장에 추대된 국민의회의 문창범과 마찬가지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러시아 종교를 가지고 러시아 이름을 지닌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기여는 어디까지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지원하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보였다.

    불타는 신한촌

    올가가 잠에서 깨고 5분쯤 지나 현관에 무기를 든 일본군이 보였다. 찬바람이 한꺼번에 불어닥쳤고 식구들은 옷을 걸치고 서둘러 현관 계단을 뛰어나갔다. 저 멀리 손이뒤로 묶인 채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밤사이 극동 연해주 전역에서 러시아 혁명 세력에 대한 공격과 무장해제가 진행되었다. 소총 기관총 대포를 동원해 방화 파괴 학살이 벌어졌다. 그와 함께 한인들에 대한 대량 검거가 실시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볼셰비키의 기관들이 섬멸되었고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의 학교와 신문사, 가옥들이 불탔다. 신한촌에 있는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노인단, 애국부인회의 활동가들은 도피했다. 처음으로 일본군에 장악된 신한촌은 노령 한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해온 구심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일본헌병대에 붙들려 간 한인은 최재형 외 70여 명이었다.

    4월 참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앞서 3월에 북방 아무르 강 하구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이틀간 벌어진 또 하나의 참변에 대한 보복을 겸해 일어났다. 러시아인 한인 중국인의 연합 빨치산이 이 북양어업의 중심 겸 전통의 군항 도시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그곳 주둔 러시아 백군과 일본 육군수비대 및 일본 거류민을 대거 학살하고 마을을 불살랐다. 일본 영사관이 소실되고 영사는 살해되었다.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이 벌어지고 일본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자는 배일운동이 번져가던 때였다. 그러잖아도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들 간의 연대 강화에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일본군은 이에 격앙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반격의 구실을 얻게 되었다.

    요사이 세상이 하도 소란하고 뒤숭숭하니까 조선 안에서도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만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더구나 해외에 나가있는 조선 사람의 안부는 교통이 불편하여 잘 들을 수가 없으므로 친척 중 해외로 건너간 사람이 있는 사람은 항상 근심에 쌓여 있다. 태평통 제생당(濟生堂) 주임 김제현 씨의 아우와 매부가 최근에 해삼위(海參威) 신한촌에서 무참히 죽었단 말을 듣고 김씨를 제생당으로 방문한즉 김씨는 답하되…

    제생당은 장안에서 손꼽히는 약국이다. 남대문 안 태평통 2정목에서 위장약 판매를 석권하고 있다. 신한촌을 비롯한 연해주 동포들의 참변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진 것은 7일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기사에 따르면 김 주임의 아우는 10년 전 인천 살 때 상선을 타기 시작해 항해술을 배워 일본사람의 배도 타다가 돈을 모아볼 작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 철도 기관수가 되었다고 한다. 해삼위는 극동 군항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이다.

    “매년 한 번씩은 집에 다니러 나왔습니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벌이를 하면 돈 몇 만 원은 벌어가지고 나오겠다더니 그 후 러시아 돈의 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져서 거기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번대야 여기 돈으로 몇 푼 되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고 항상 편지에 그런 말을 쓰더니 이번에 그 지경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식구라고는 처와 어린 딸들뿐인데….”

    기사는 김씨의 말을 그렇게 전하고 있다. 매부 되는 사람은 헌병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 관계로 변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원래 그 해삼위라는 땅은 살기가 매우 위험한 곳이올시다. 이야기를 들으니까 밤에는 불량한 도적놈들이 칼과 올가미를 가지고 다니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 합니다. 그런데다 저렇게 질서 문란하게 과격 적위파가 횡행한 후로는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러시아 백성들에게는 어떤지 모르나, 조선에서 건너간 이민들의 처지에서 볼 때 좋은 시절은 제정 러시아와 더불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내전의 혼란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이야 말할 것도 없고 볼셰비키 급진정부에 저항하는 백러시아 정권이 무너지면서 한인들의 생활 여건에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한 조짐은 1920년에 들어서며 더욱 뚜렷해졌다.

    헐리는 왕가

    한림은 야주현 고개 앞에서 전차를 내렸다. 큰길 안쪽에 서 있는 우람한 궁궐 대문을 보고 서대문이라 짐작했는데 다가가 보니 큰 글씨로 영성문(永成門)이라 쓰여 있다. 물어보니 여기는 덕수궁의 북문이라 한다. 경복궁 방면을 오갈 때 주로 출입하는 문으로, 과거 고종임금이 경복궁을 나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피하던 그날에도 이 문을 거쳐 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동쪽 대한문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대문 너머 우아한 전각들은 선원전(璿源殿)과 그 부속건물이라고 한다. 역대 왕의 영정을 모셔두는 곳이라는데 조만간 헐리고 그 자리에 여자중고등학교와 소학교가 대문 좌우로 나란히 생길 것이라 한다. 신위는 궁궐 밖 종묘에 모시고 영정은 궁궐 안 선원전에 모셔서 때마다 참배하는 것이 조선 왕실의 법도이자 임금의 중요 일정이었는데 덕수궁의 왕은 지난해 세상을 떴다. 헐릴 선원전은 순종 이왕이 계신 창덕궁에 자리를 새로 얻어 옮겨갈 것이라 한다.

    선원전이 철거되기에 앞서 영성문은 먼저 헐려나갈 것이라 한다. 덕수궁의 남문인 인화문(仁化門)은 일찌감치 사라졌는데 올여름 북문 영성문이 없어지면 여기서부터 거기 인화문 위쪽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뚫린다 한다. 야트막한 둔덕을 가로질러 덕수궁을 관통해 영국영사관과 미국영사관 사이로 길이 나면 정동길과 여기 새문안길이 남북으로 바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영성문은 어디로 옮겨가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인화문이 어디로 갔는지 서대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영성문인들 알겠느냐고들 한다. 그러면 서대문은 어디냐고 물으니, 전찻길이 서대문길이니 쭉 따라 올라가면 서대문 자리가 나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한림은 영성문과 선원전을 뒤돌아보며 다시 큰길로 돌아나온다. 내렸던 전차정거장에는 서대문정1정목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길 건너에 한일은행 지점이 보인다. 한일은행은 지난 일요일에 봄맞이 직원 운동회를 경복궁의 신무문(神武門) 밖 춘당대(春塘臺)에서 열었다. 문무관의 과거 시험을 치르던 때에만 백성의 출입이 허용되던 곳이다. 궁중악단의 후신인 경성음악대가 흥을 돋우며 직원 130여 명과 가족 친지 1000여 명이 오전 10시부터 해질 무렵까지 신나게 놀았다는 소식이다. ‘춘당대 연못에 노니는 금잉어 태평성세를 자랑한다.’ 경기도 민요 경복궁 타령은 춘당대를 그렇게 노래했다.

    한림은 야주개를 지나 새문안길을 걸어간다. 200m 앞에 다시 놓인 정거장에는 흥화문(興化門)이라 쓰여 있다. 새문안 대궐, 즉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이 5년 전까지 서 있던 자리라 한다. 흥화문은 그 현판 글씨가 야밤에도 진주처럼 빛난다고 해서 흥화문 앞 언덕은 야주현(夜珠峴)이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이 경희궁 동쪽의 정문은 지금 저기 남쪽 담장가에 옮겨가 붙어 있다.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에 경희궁 터 서쪽을 거의 내주고 도로까지 확장하다보니 그만 갈 곳 없어 그리되었다고 한다.

    옮겨진 흥화문과 경성중학교를 오른편에 바라보며 사라진 서대문을 향해 걷는 한림은 왼쪽 언덕 위 저편에 마치 성채처럼 솟아 오른 러시아영사관의 건물 머리를 올려다본다. 그중 크다는 미국영사관에 비해도 대지 면적이 두 배가 넘어 보이고 건물의 위용은 그 어느 영사관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마치 주재국 황제를 영사관에 모시게 될 기회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축성했나 싶을 정도의 장관이다.

    정면에 보이는 고개에 전차가 멈춰 서 있다. 북서 방향에서 흐르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던 성곽이 언덕길에서 잠시 끊겼다가 길을 건너 다시 남동쪽으로 나타나 내려간다. 그 언덕 길목에 서대문이 있었다 한다. 돈의문(敦義門)이라 현판이 붙어 있던 서대문은 저 아래 흥화문이 옮겨지던 그 시절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렇게 길목에 이름만 남겼다. 서대문 정거장을 출발한 전차가 고개 넘어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간다. 오른편 성벽 바깥 능선을 등지고 앉은 길가에 수입품 전문점 맨포즈 상사가 성업 중이다. ‘Manfords’라 영어로 병기된 간판에는 양복모직(羅紗) 철물 화장품 잡화 등 서양물품 일체가 취급품목으로 올라 있다. 그 아래로 서대문경찰서 고양군청 서대문우편국이 줄지어 사거리까지 들어섰다.

    한림은 서대문정거장에서 왼쪽으로 틀어 성곽 안쪽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정동(貞洞) 길의 서북쪽 입구다. 웅장한 러시아영사관의 좌측과 정면이 저 위 언덕 정상에서 펼쳐진다.

    희랍교당은 코앞에 있었다. 정동 길을 들어서자마자 왼편 야트막한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정문은 한옥 솟을대문이고 교당은 비잔틴풍이 가미된 양옥과 기와집이 섞여 있다.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 한다.

    정동의 희랍교당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러시아정교회 신자는 그리 많지 않다. 1900년이 되어서야 신부가 처음 들어왔고 이 교회당이 생긴 것이 1903년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당원자격 및 투쟁방식을 둘러싸고 레닌이 민주노동당의 다수파인 과격파를 이끌기 시작한 해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인이 강제 출국되면서 선교는 활발하지 못했다. 을사조약과 병합을 거치면서도 명맥을 유지해온 정교회는 1917년 혁명으로 본국에 수립된 볼셰비키 정권으로부터 지원 중단 통보를 받았다. 지금 선교회는 폐지된 상태다. 교당의 그 고립무원 상태가 마치 조선인의 처지와도 같다.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니콜라스 성당 앞은 적막한데 옆집 모리스 상회는 문전성시다. 간판에는 자동차 및 부속품, 인테리어, 굿이어 등등 판매라고 쓰여 있다. 서양인촌이지만 조선인 손님도 많다.

    한림은 비스듬한 축대 위로 조성된 한 길 너비의 돌계단을 여남은 개 오르다 잠시 멈췄다. 솟을대문과 왼쪽으로 이어진 담장, 그리고 행랑채 옆 굴뚝은 한때 벼슬깨나 했던 양반네 자취가 남아 있다. 오른쪽은 담장도 건물도 모두 서양식이다. 고종으로부터 집터를 하사받아 지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부는 살리고 일부는 헐어내 러시아식으로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솟은 대지 위에 다시 우뚝 솟은 둥근 돔의 종탑이 멀리서도 이 집의 정체를 알리고 있다. 솟을대문 기와지붕 밑 현판에는 ‘ORTHODOX CHURCH’라 쓰여 있고 좌측 조선식 돌담에는 예배시간 안내문이 영어와 한문 한글로 붙어 있다.

    한림은 계단 위에 멈춰 서서 작은 공책 첫 장에 적어온 질문사항 몇 가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부장이 하는 말을 받아 적은 것이다. 나라 안과 밖에 사건이 즐비하게 일어나고 있어 편집국에 몇 안 되는 일손이 더욱 부족하다. 연해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해외의 일이라기보다는 국내의 일에 가깝다. 장마철이 다가오기 전에 지붕 손보는 일을 하던 한림도 불려나왔다. 어디 있는 누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저렇게 몇 가지를 물어보고 말하는 요지를 받아 적어오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예상 기사라고 하면서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어주었다.

    “로서아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로국 군인 대위의 자격으로 수천 명의 로국 군사를 거느리고 오스트리아 전선에 나갔던 서계홍(徐季弘) 씨가 최근 사업차 경성에 왔다는 말을 듣고 새문안 로서아인이 경영하는 희랍교당으로 그를 방문한 즉…”

    서울의 고려인

    서계홍 씨는 교당 안에 있었다.

    -나는 조선말을 잘하지 못하오.

    그는 천천히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검푸른 양복을 입었는데 조선풍이 아니다. 비슷한 체구에 외모인데 같은 조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그란 눈이 조선인 같다가도 눈방울을 굴리고 얼굴 표정을 짓는 품은 완연한 러시아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 태생이다. 그의 선조는 함경도 길주에서 살다 40년 전에 해삼위로 이주했다고 한다. 조선에는 첫 방문이다.

    -하도 그곳이 소란하니까 좀 휴양도 할 겸 나왔습니다. 최근 러시아 과격파와 일본군이 충돌해서 조선인이 많이 사는 신한촌이 함몰되다시피 참화를 당했다 하는데, 나는 3개월 전에 그곳을 떠나 경흥 땅에서 두 달 있다가 여기 경성에 온 지 열흘 남짓 밖에 안 되어 그 소식은 여기서 들었습니다.

    볼셰비키는 민주적 자유주의 단계 같은 것은 거치지 않고 무산자들을 동원한 폭력적 정권탈취로 바로 간다는 점에서 과격파라 불리며, 사회민주노동당의 다수파다.

    동족 간의 내전과 외국 침략군과의 외전이 동시 진행 중인 난리를 피해 고국 땅을 찾아왔지만 일가붙이 없는 낯선 서울에서 그에게 편안하고 든든한 의지처는 러시아교회당인가 보았다. 그의 고향에서 서울 오는 것보다 해삼위 가는 거리가 더 가깝다. 러시아 한인은 원활한 정착을 위해 그곳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보통이다. 러시아는 정교일치의 나라여서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정교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말을 익히는 것 못지않은 필수 사항이다. 그가 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언덕마을 신한촌의 정교당에는 교당학교가 있어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정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미 교회재산은 몰수되었고 종교교육은 금지되었다. 국유화와 함께 사기업이 사라지고 강제노동이 도입되었다. 언론도 국가통제하에 들어갔고 자유와 민주와 헌법을 운운하는 자는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상층 및 중간계층 사람들은 재산을 잃고 차별 대우를 받으며 혐의자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왕정을 능가하는 독재체제가 점점 구축되어갔다.

    -러시아령에 가서 사는 조선 사람이 대략 오륙만 명인데 그중 러시아 국적을 얻은 사람 중에 훌륭하게 된 사람이 많습니다. 군인으로는 사단장까지 있고 그 아래로 대위 중위 소위가 저 아는 범위 내에서 70여 명이나 됩니다. 문관으로는 대학 졸업하고 판검사 된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과격파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조선 사람과 러시아 사람 사이에 별로 구별이 없었습니다만 과격파가 세력을 얻은 후로는 좀 그렇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소학교가 둘, 고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전에는 조선인과 로국인이 다 같이 교육비를 부담하였는데 과격파 정부가 된 뒤로부터 조선인 생도 한 명의 1년 부과금이 1500원이고 로국인에게는 400원이니 1000원 이상 차별이 있습니다. 너무 분해서 그곳 면사무소에 가서 여러 번 말하고 거류 조선인들이 연명하여 지방청에 청원까지 하였으나 내가 올 때까지는 좋은 해결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회주의는 이념으로만 국제적이고 현실에서는 민족적인가. 집권한 볼셰비키는 혁명에 헌신하느라 인민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인가. 한림은 느려서 오히려 또박또박 받아쓰기 좋은 이 러시아혁명 실체험자의 말을 새겨들으며, 글자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는 혁명이나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몸으로 겪는 혁명이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이 사회민주노동당에서 이끌고 키워온 과격 당권파는 애당초 민주는 관심사가 아니고 정권을 어떻게 힘으로 탈취하느냐, 그리고 획득한 정권을 독재 방식으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하느냐 하는 전략에 집중하는 직업적 소수정예 조직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레닌 스스로가 기회 있을 때마다 누누이 상기시킨 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혁명은 상상 가능한 가장 권위주의적인 일이었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엄격한 통제, 무자비한 억압, 강철 같은 규율, 그리고 독재였다.

    조선에 온 러시아 망명객

    -과격파가 횡행한 후에는 러시아에 입적한 사람은 관계치 아니하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 사람은 생명이나 재산 피해를 많이 당했습니다. 조선 사람의 생활수준은 별로 풍족하다고 할 것은 없으나 제일 부유한 사람으로 한 30만 원 현금 가진 사람은 여럿 보았습니다. 어떤 부잣집 조선 노인 한 사람을 아라사 과격파 사람들이 잡아가지고 수이푼(秋風) 지방의 고개로 넘어가다가 한 삼십 걸음 앞에 세우고 총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격파도 처음에 시작한 사람들은 좋은 주의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지만 그 아래 있는 사람 중에 악한 자가 많아서 자연 위험하게 됩니다.

    30만 원은 웬만한 규모의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돈이다. 한림의 신문사는 자본금 100만 원의 주식회사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주식 모집이 부진해 곤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서씨는 7년 전에 군에 입대해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령 폴란드 남부와 우크라이나 중서부에 걸친 갈리치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맞서 싸웠다. 독가스도 한 번 마시고 탄환을 다리에 두 번 맞고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뒤 2년 만에 귀향했다. 그러자 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지금은 저렇게 질서가 문란하지만 얼마 안 가 회복될 줄 압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혁명이 일어나서 그만큼 되지 않는 나라가 있겠습니까.

    그는 어떤 이야기든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한림은 부장이 꼭 물어보고 오라고 당부한 내용을 끝으로 질문했다.

    -독립운동 말씀입니까. 이것은…저는 말릴 수 없습니다. 다만 나의 바라는 것은, 조선사람들도 어떻게 해서든지 어서어서 교육을 보급해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교육이 보급된 후에야 되니까요.

    서울 와보니 어떠냐고 하자 그는 천진하게 대답했다.

    -산천이 모두 낯설어서 고국이라고 반가운지 만지 합니다. 사시사철 눈에 쌓인 아라사 산천이 그리웁게 됩니다.

    황색 얼굴에 아담한 체구의 그와 작별했다. 나오는 길에 키 크고 흰 얼굴에 훤칠한 체격의 러시아 노신사와 마주쳤다. 서시베리아의 옴스크에 근거를 두었던 반혁명정부에서 사법대신을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과격파에 밀려 반혁명정부가 와해되자 조선으로 쫓겨온 것이라 한다. 여기 와서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꽃 심기, 산보하기로 음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다고 한다. 나라 밖으로 망명한 조선인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조선에 망명 온 외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볼셰비키에 대항해 수립된 옴스크 정부는 지난해 말 적군에 치명적 패배를 당하고 동쪽으로 퇴각했다. 피난길의 목적지는 극동 시베리아 연해주였다. 그들을 지원하는 일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서남쪽 끝에서 동남쪽 끝을 향해 혹한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던 도중 지도자 콜차크 장군은 올해 2월 적군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그를 따르던 군인과 민간인 상당수는 영하 수십 도의 바이칼 호를 건너던 중에 동사했다. 두꺼운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아 호수를 가득 덮은 인파가 투명한 얼음장 아래 물고기들과 대면하고 있을 터였다. 쌓인 눈으로 무덤을 대신한 채 아무도 치워주지 못하고 냉동 상태에 있는 숱한 주검은 조만간 얼음이 풀려 꺼짐과 동시에 자연스레 호수에 수장될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생전 얼음 낚시하던 물고기들의 밥이 될 것이다. 물 맑기로 으뜸인 바이칼 호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호수인데 그 이름의 뜻은 몽골어로 자연이라 한다.

    떠도는 황족

    우수리스크의 독립투사 최재형을 만나다

    러시아 사회주의 붕괴 뒤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성당’에 세워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 동상.

    조선인은 러시아로 쫓겨 올라가고 러시아인은 조선으로 쫓겨 내려온다. 국경 부근 연해주로 갔던 조선인은 점점 더 멀리 북서쪽으로 이주해가고 극동의 땅끝 연해주까지 내몰린 러시아인들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온다. 철새는 돌아갈 때가 정해져 있지만 망명의 객에게는 기약이 없다. 제정 러시아의 망명객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에 대거 몰려가 있다. 요 몇 달 블라디보스토크는 망명자들이 대탈주를 벌이는 비상구처럼 되었다.

    해삼위 정변으로 일본 모지(門司)에 피난해온 러시아 의용함대 모기로프 호는 4월 14일에 구라파로 떠날 터인데 일본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 사람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하여 그 배를 타려는 사람이 많다. 러시아 황제의 시종 장관도 이태리로 향할 모양인데 그 배는 망명객만 잔뜩 태우게 되었다.

    탈출 행렬에 오른 것은 산 사람만이 아닌 것 같았다. 러시아의 황족 8명의 시체가 남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운반되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떠돌아다닌다. 러시아 황족의 시체를 담았다는 수상한 궤짝이 하얼빈과 장춘을 지나 봉천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북경으로 가는 화물차에 실어 발송했는데 러시아인 세 명이 호송한다는 것이다. 중구난방의 기사들을 요약하면 이런 요지다.

    일찍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황제와 그 일족이 참살당한 후 황제와 황비의 가까운 혈족인 네 사람의 대공(大公)과 네 사람의 대공비(大公妃)도 살해돼 그 부근 지방 탄광에 버려졌다. 콜차크가 이끄는 반혁명정부가 황제 가족의 시체 수색대를 조직해서 널리 찾아보았으나 도저히 찾아낼 방도가 없어 거의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다행히 대공 부부들의 시체를 탄광 속에서 발견하여 즉시 반혁명 정부가 있던 옴스크 땅에 안장하였다. 그들의 시체를 담았다 하는 관들이 북경에 무사히 도착하여 러시아인 묘지에 옮겨 매장되었다는 것인데 대체 누가 왜 옮겼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중국에 와 있는 전직 고관이 자기 재물을 관에 담아 빼돌리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모진 송장 냄새가 코를 찌를뿐더러 봉천에서 화물차에 갈아 실을 때 관의 뚜껑이 열려 사체가 드러났다는 말도 있다.

    황실의 최고위 친인척들인 그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에서 끌려나와 사살된 것은 1919년 1월이었다. 그에 앞서 유폐되어 있던 황제와 황후, 공주와 왕자는 이미 그 전해 7월에 볼셰비키에 의해 비밀리에 사살되었다. 막 내전이 발발해 우세를 보이던 반혁명 백군 콜차크 부대가 시베리아로부터 진격해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감금 장소로 접근해 오던 때였다. 황제와 그 가족은 우랄 산맥에 접한 한 민가에서 평민과 같은 의식주 생활을 하며 연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독일계 왕조 홀슈타인-로마노프 왕가의 종말이었다.

    4년 전 세계대전을 촉발한 오스트리아의 황실 처지 역시 러시아에 못지않았다.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에서 암살되자 선전포고를 한 오스트리아 황실은 전쟁이 끝나자 혁명으로 몰락하고 공화제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유럽 최대, 제일의 황실 가문으로서 500년 가까이 존속해온 합스부르크 왕조는 그렇게 소멸했다. 그 왕족의 근황을 경성의 사람들이 신문에서 읽고 있다.

    저무는 왕조의 시대

    세계의 대전이 끝난 후 사회 상태의 변천으로 인하여 일어난 여러 가지 비극은 일일이 말할 수도 없거니와 듣기에도 가련한 것은 오스트리아국 전 황실과 모든 황족의 지금 신세다. 오스트리아의 황실은 구라파의 모든 황실 중에 가장 오래인 황실이므로 그 왕족의 수효도 가장 많은데 옛 황제의 종형제와 종자매만 합해도 무려 84명이나 된다.

    황족들은 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거의 재산 없는 사람이 되어 모두 이웃나라 스위스에 망명하여 생계에 헤매이게 되었다. 존칭은 살아 있다 하나 지금 세상은 높은 칭호로만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하릴없이 음악과 여러 기예를 활용하여 극장의 배우도 되고 혹은 광대도 되며 또는 부잣집의 가정교사도 되고 예법 강사가 되어 눈물과 한숨으로 이슬 같은 목숨을 이어간다. 한번은 어느 옛 왕비가 신문 광고를 보고 장사하는 사람의 아내를 찾아가 자기를 써달라고 한즉 그를 알아보고 “당신 같은 양반을 모시기 어렵습니다”며 퇴박을 당하였다. 지금 취리히의 삼등 여관에서 그릇을 닦는 하등 노역을 하며 불상한 처지에 있는 이도 많다. 어느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실 중에 가장 돈이 많았으나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고 그의 사랑하는 딸은 날품을 받는 간호부가 되어 보석반지로 영롱히 단장하였던 섬섬옥수는 지금 더럽고 냄새 나는 병자의 살을 만지게 되었다.

    검푸른 새벽길이 오늘 따라 낯설다. 뒤를 돌아보면 집과 가족이 미명 속에서도 환히 보일 테지만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어제 아침 집을 떠날 때 몸은 이미 떠났고, 마음만 다시 돌아와 나의 터전과 가족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듬고 내려준 뒤 지금 떠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황제도 그랬을까. 그가 어떤 모습으로 누구에게 이끌려 어디로 어떻게 거쳐갔는지 모르지만 네 딸과 외아들, 부인을 동반해 가는 심정이 홀로 가는 나의 심정과 어떻게 같고 다를까 궁금하다. 황제의 맏딸은 이름이 올가라 했다. 나의 딸 올가보다 열 살이 많다. 소문대로 2년 전 여름에 일가족이 모두 몰살했다면 공주의 나이는 스물세 살에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가족을 안전하게 두기 위해 이렇게 붙잡혀 떠난다. 황제는 평민의 삶을 강요받으면서 죽는 그날까지 가족들과 단란하게 생을 공유했다고 전한다. 가족을 두고 홀로 가는 내 마음이 황제보다 불편해야 할까. 모를 일이다. 나보다 여덟 살 아래인 황제는 나이 오십에 생을 마감했다.

    왕조의 시대는 갔다. 이민 첫 세대인 나의 시대도 이로써 간다. 종의 아들로 태어나 도망치듯 피난한 타향천리에서 다른 나라의 조선 사람이 되어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일으켜서 가족과 이웃에게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살다 가니 여한은 없으나 마음은 무겁다. 바뀌는 세상은 왕조보다 더 좋은 체제여야 할 텐데 어찌될지 답답하다. 가족 모두와 헤어져서 지내다 작년에 고종명(考終命)한 고국의 고종이 더 복 있다 할 것인가, 궁전의 왕족일 때나 민가의 평민일 때나 일가족이 함께 동고동락하다 일시에 생을 끝낸 러시아의 황제가 더 복이 있다 할 것인가. 백성 봉기와 혁명을 모면하고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며 왕족을 유지한 편이 좋은 것이었는가, 러시아 혁명을 맞아 평민들에게 통치권을 넘겨주고 왕족도 빼앗긴 편이 더 나은 것이었는가. 모를 일이다.

    1896년의 그날이 떠오른다. 최재형은 모스크바에 있었다. 즉위 3년을 맞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이 열리고 있었다. 5월이었고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그의 생의 5월이었다.

    월북자를 잡아오라

    최재형은 조선 접경 한인 집단 거주지인 안치혜(煙秋) 마을의 읍장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인정하는 한인자치구역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그는 전국의 공직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대관식장에 참석해 황제로부터 직접 예복도 하사받았다. 그리고 정부 훈장도 받았다. 앞서 니콜라이 2세 취임 이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 1회 전 러시아 읍장 회의에 참석해 아버지 황제 알렉산더 3세의 연설을 경청한 바도 있다.

    유라시아대륙 동방의 끝인 그의 마을에서 서방의 끝인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는 이미 10대 시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 번이나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 또래 아이들이 학교 가거나 농사일 도울 때 그는 러시아 상선을 타고 6년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해안을 따라 몇 달씩 계속되는 항해를 하며 온갖 나라에 기착하는 생활을 해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종점이었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항로였다. 훗날 그의 딸 올가와 가족들은 그의 지나온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1세 때 그는 집을 나가 한없이 걸어가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지쳐 쓰러졌다. 양식 축낸다고 구박하는 형수에게 누룽지 접시를 뒤집어씌우고 가출한 길이었다. 눈을 뜨니 작은 항구 포시에트였다. 전함과 상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를 깨운 선원들은 소년을 신기한 듯이 구경하다 배의 선장실로 데려갔다. 선장의 부인은 처음 보는 행색에 깜짝 놀라다가 이내 거울 앞으로 데려다놓고 웃기 시작했다. 소년의 땋은 댕기머리는 빗질이라고는 하지 않은 듯했다. 햇볕에 탄 검은 얼굴을 거울에 처음으로 비춰본 소년은 즐겁게 깔깔 웃었다. 선원들은 소년의 머리를 깎고 목욕시켜 견습 선원의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였다. 그날부터 그 배는 소년의 집이 되었다. 선장 부부는 이 총명한 소년을 매우 예뻐했다. 읽고 쓰기와 과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선해 온갖 곳의 온갖 사람의 생활을 구경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인이 되었다.

    6년을 그렇게 보내다 배가 낡아 더 이상 못쓰게 되었다. 양부모나 다름없이 된 선장 부부는 최재형에게 그리스정교 세례를 받게 하고 표트르라는 이름을 주었다. 가운데 이름은 선장의 이름을 따서 주었다. 그리고 대부와 대모가 되어주었다. 선장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업가 친구에게 그를 맡겼다. 18세가 된 최재형은 3년간 그 밑에서 사업을 벌이며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고 떠나온 집을 찾아 가족들과 재회했다. 그로부터 세상은 그의 편이었다.

    그가 굶주림과 학대를 피해 가출한 1871년은 가족들이 고향을 탈출한 지 2년 되던 해였다. 북부 조선 지역의 흉년 기근과 학정은 몇 년째 희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기근은 계속 유민을 내몰고 정부는 월경자를 막기 위해 국경 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면서 세금을 감면하고 관리들의 착취를 금지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넘어간 자들도 돌아오면 처벌하지 않고 식량과 토지를 지급한다는 약속도 했다. 돌아오는 백성은 거의 없었다. 최재형 가족이 두만강을 넘던 무렵의 왕조실록은 임금의 교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종의 나이 17세 때였다.

    해마다 흉년이 거듭되었는데 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다. 사정이 봄철 보릿고개보다 더 곤궁하다. 북관(北關)의 흉년 근심에 감영과 고을에서 돌볼 대책을 어떻게 취하고 있는지 모르나 요즘에 변경마을에서 국경을 넘는 일은 듣기에 여러 가지 놀라운 바 있어, 심지어 중국에 외교문서를 보내 그 무리들을 잡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자기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몰래 낯선 고장으로 달아나는 것이 어찌 보통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요역(·#53953;役)이 무겁고 세금이 가혹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어 그렇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함경감사와 북병사에게 물어보아 국경마을 백성들과 관계되는 모든 문제는 궁궐에 바치는 중요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경감할 수 있는 것은 경감해주도록 하라. 지방의 여타 세목에 대해서도 탕감하여 없앨 것은 없애도록 하라. 이 하교의 내용을 한문과 언문으로 베껴서 방방곡곡에 게시하여, 몰랐다고 한탄하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게 하라.

    모스크바의 조선인

    최재형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내 우즈벤스키 사원 안에서 정교회 의식에 따라 장엄 화려하게 진행되는 황제 대관식을 지켜보는 동안 그 바깥 망루에서도 별도로 참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리에 모자를 쓴 채로 교당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희랍정교의 예법인데, 이들은 모자를 벗지 않아 출입이 안 되고 대신 삼위일체 망루에 올라앉아 예식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페르시아, 터키, 청나라, 그리고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었다. 조선인은 민영환(閔泳煥)과 그의 부관 윤치호(尹致昊) 및 3명의 수행원이었다. 민영환 일행은 공식 일정 사이에 시가지 풍물을 자주 구경했는데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그 일행이 오히려 구경거리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기한 복장과 외모를 한 그들을 구경꾼과 아이들이 따라다녔다.

    대관식 이틀 전 각국 공사관으로 사절단을 예방하는 길에 청국 공사관에서 민영환은 이홍장(李鴻章)을 만났다. 이홍장은 조선이 개항한 이래 20년간 조선에 대한 청국의 모든 정책을 주도해왔다. 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언제 서울을 떠났나요.

    - 우리는 음력으로 2월 19일(양력 4월 1일) 떠났습니다.

    - 국왕은 아직도 러시아 공사관에 있나요.

    - 그렇습니다.

    - 대원군은 여전히 정력적이고 활동적인가요.

    - 그렇습니다.

    -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나요.

    - 78세입니다.

    - 민영환 당신은 대원군파에 속합니까, 그를 반대합니까.

    (민영환은 이 질문에 황당했으나 눌러 참았다)

    - 누가 황후를 시해하였나요.

    - 공식적인 보고가 나갔으니 각하께서는 누가 일을 저질렀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 왜 김홍집이 살해되었나요.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 그는 왕후 시해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 민영환 당신은 일본당에 속합니까.

    - 나는 어떤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 나는 그렇게 믿지 않소. 조선인들은 일본을 좋아하지 않나요?

    - 몇몇은 그렇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청국인이 그런 것처럼.

    (마지막 이 한방이 이 노인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청일전쟁에 패배해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넘겨준다는 조약에 날인한 이홍장이었다. 이후 민비시해와 고종의 아관파천에 이르는 일본-러시아의 세력 다툼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청일전쟁에서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일본 최고 책임자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가 청국 공사관으로 그를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고 갔다고 한다.

    고종과 니콜라이 2세

    민영환 일행은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다. 황제의 대관식을 경축하고 민영환을 통해 축하선물을 보낸다는 내용의 친서에는 고종의 인장과 성명과 함께 외부대신 이완용의 도장이 찍혀 있다. 민영환은 그의 일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행은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문을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조금 나아가 다시 무릎을 꿇고 황제 앞에 이르러 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관을 벗고 일어서 있고 황후 또한 일어서 있다. 그 옆에는 단지 시종 한 명만 서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 축하의 글을 읽자 윤치호가 영어로 번역해서 전하였다. 내가 친서와 예물단자를 받들어 바치니 황제는 친히 받아 시종에게 건네준다.

    친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근에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흉내 내고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 한다. 짐은 폐하가 짐의 나라의 실정을 동정하여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 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하여 주시길 바라고 바란다. 끝으로 짐은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이 보낸 이 편지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해주고 민영환 일행이 시베리아를 건너 연해주를 거쳐 귀국한 10월에 러시아로부터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파견되었다. 그 밖에 다른 조치는 없었다.

    러시아 황제는 지난해 10월 을미사변에 대해 주한 공사관이 올린 보고서를 읽은 뒤 겉장에다 이런 감상을 적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어 통역관의 수요가 급증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52명의 청장년이 서울로 불려가 통역관에 임명되고 후한 봉급과 높은 직급을 받았다. 러시아 공사관에 배속돼 베베르 공사와 고종 사이의 통역을 맡은 뒤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결국 고종 부자의 커피에 독약을 넣는 일을 벌인 김홍륙(金鴻陸)도 그중 하나였다. 그 당시 최재형에게도 같은 제안이 왔었다. 하루빨리 귀국해 국사를 도우라는 조서가 수차 내려왔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6만 리 길

    두 황제의 편지 교환은 이어졌다. 1904년 니콜라이 2세의 외동아들이 탄생했을 때도 축하편지가 갔다. “이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축전을 치는 것이 도리였으나 일본의 방해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제 서한으로 축하를 드리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곧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주기를 바란다”고 친서를 보냈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 또 편지를 보냈다.

    “일본은 미리 작성해온 조약문에 국새를 강탈해 날인하고 짐의 서명을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황제께서는 유럽 문명국에 일본의 만행을 알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주시기를 거듭 앙망한다.”

    니콜라이 2세는 이렇게 답했다.

    “국내 문제로 더 이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다.”

    1905년,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제국을 배 속 깊숙이 뒤집어놓고 있었다.

    대관식의 각종 행사는 끝났다. 광장에 운집한 인파가 당국에서 나눠주는 빵 한 덩이 고기 한 덩이씩을 받기 위해 몰려들다 1000명 이상이 압사하는 사고가 있었다.

    민영환 일행은 한 달 반가량 각지의 근대 문물을 견학하고 나서 귀국길에 올랐다. 떠나올 때의 바닷길과 반대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코스였다. 일행은 가던 길에 민비의 생일을 맞아 아무르 강을 떠가는 배 안에서 국기를 걸고 탁자를 놓고 향불을 피우고 동쪽을 보고 네 번 절했다. 그들은 가는 곳곳에서 조선인과 마주칠 때마다 일이 풀리는 대로 고국으로 어서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아무르 주 총독이 찾아와서 인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관찰사가 인사를 왔다. 민영익은 우리 유민들을 잘 보호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들은 삼가 마땅히 지시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최재형은 민영환 일행과 비슷한 경로로 조금 더 일찍 출발해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두 사람은 러시아 땅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나이는 한 살 차이지만 그 밖의 모든 조건은 천양지차인 두 사람이었다. 하층 집안 출신의 최재형은 왕조가 타도된 러시아에서 내전에 개입한 일본군에 총살되어 60세에 이민 생활을 접었다. 최상층 가문의 민영환은 러시아에서 돌아온 9년 뒤 을사조약을 맞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4세였다. 민영환의 생부는 개화정책에 반발하는 하급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 때 피살되었다. 민영환의 양부는 수구대신이라고 갑신정변 때 살해되었다.

    민영환과 일행은 10월 20일 인천항에 닿았다. 많은 사람이 서울에서 내려와 영접했다. 며칠씩 머무르며 기다리는 친지도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의 베베르 공사와 비서승 김홍륙도 나와 반겼다. 개항장을 관리하는 감리서(監理署)에서 술과 안주와 저녁밥을 준비해 보내 배부르게 먹고 그대로 잤다. 내일이면 서울에 당도한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이번 길은 7개월 걸렸는데 8개국을 거쳤고 6만8000리를 두루 지났다.

    민영환은 여행일지의 끝장에 그렇게 기록했다. 실제로 그가 거쳐 간 나라는 11개국이었다. 영국의 속국 아일랜드, 러시아의 속국 폴란드, 그리고 캐나다의 국경지역 밴쿠버를 거쳐 갔으나 이들 세 나라는 국가 수에 계산해 넣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인식 착오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정확한 현실 인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영환은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결을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민영환은 자신의 소중했던 여행의 일지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오는 서울의 오후 7시 45분이다.



    이정은, 최재형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0집, 1996/ 박환,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2008/ 조재곤 편역, 민영환, 해천추범, 책과 함께, 2008/ 노주석,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 한국학술정보, 2009/ 국사편찬위원회, 러시아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2008/ 니콜라스 랴자놉스키·마크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까치, 2011/ 동아일보/ 매일신보/ 고종실록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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