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은퇴 베이비부머 5070, “우린 ‘액티브 시니어’!”

동문회·향우회 기웃기웃 옛말 온라인 활동·창업 “너무 바빠요”

  • 박은경│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2-08-22 0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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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방 늙은이’는 가라. 이제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시대다.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 노인문화가 바뀌고 있다. 젊은 시절 대중문화를 접했고,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온몸으로 체험한 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집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인터넷 세상을 중심으로 소득·학벌·나이의 벽을 뛰어넘은 다양한 커뮤니티를 구성해 자신들의 문화를 향유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새로운 중·노년들을 만났다.
    은퇴 베이비부머 5070, “우린 ‘액티브 시니어’!”

    회원 수가 400여 명에 달하는 시니어 걷기 모임 ‘프리맨의 도보여행’ 회원들이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

    한여름 더위가 아스팔트를 녹일 듯 맹렬하던 8월 7일, 서울 역삼동 한 빌딩 회의실에 나이 지긋한 어른 10여 명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시니어 일본어 공부 클럽 ‘메구미의 쌩쌩 일본어(쌩쌩 일본어)’ 모임 현장이다.

    “복날에는 개도 자는데 공부를 시키려 해요.”

    “오늘 말복 아닙니까. 삼계탕이 안 되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합시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오자 지각한 여성 회원이 재빨리 지갑을 챙겨 방을 나갔다. 강의를 맡은 이가 교재용 자료를 나눠주며 “꼬투리만 있으면 핑계 삼아 노시려고 한다”고 핀잔을 주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바람 한 점 없는 찜통더위에 거리조차 한산하던 8월 5일 오후 2시엔 지하철 4호선 길음역사 내 ‘만남의 장소’에 등산복 차림의 60대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몇 명이나 나올지 걱정이네요.”

    “회장님은 오늘 일이 있어서 못 나오신다고 했고, ‘무성님’은 화계사 입구에서 합류한다고 연락 왔어요.”

    “오늘 화계사에서 둘레길 따라 북한산 형제봉 입구까지 걷는 코스죠? 이게 3시간으로 될까? 더위에 일찍 지치는 회원이 없어야할 텐데….”

    일행이 다 모이자 우르르 역사를 빠져나가는 이들은 매주 일요일에 만나 함께 걷는 시니어 걷기 모임 ‘프리맨의 도보여행(도보여행)’ 클럽 멤버들이다.

    최근 은퇴가 시작된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한 50~60대를 ‘뉴 시니어’라고 한다. 과거의 시니어와 달리 ‘뒷방 늙은이’의 삶을 거부하는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젊은이 못지않은 정신력과 열정을 갖춘 70대 중에도 이 대열에 가세한 이들이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결성되는 각종 ‘시니어 커뮤니티’는 이들의 주된 활동 공간이다.

    건강 지키고, 새로운 인연 맺고

    은퇴 베이비부머 5070, “우린 ‘액티브 시니어’!”

    ‘프리맨의 도보여행’ 회원들.

    ‘도보여행’ 클럽을 만든 송영록(60) 씨는 기자와 컨설팅회사 최고경영자(CEO) 등을 거쳐 몇 해 전 은퇴했다. 그는 “이제는 은퇴한 뒤에도 길게 살아야 하는 시대 아닌가. 지나간 세월에서 만난 인연은 은퇴와 함께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세월을 살려면 또 다른 인연을 맺고 소중하게 잘 가꿔야 한다”고 했다. 송씨에 따르면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처럼 고위직에서 은퇴한 사람일수록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왕따’시키며 집에 틀어박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단 집 밖에 나오면 시니어가 즐길 수 있는 일,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 모임에도 온라인으로 가입한 뒤 1년간 블로그만 들락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오프라인 걷기에 참가한 사람이 있어요.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는 열성회원이 됐지요.” 송 씨의 말이다.

    이 모임 멤버 이강(69) 씨는 은퇴 후 부인과 함께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40년 역사의 스키 모임과 25년 된 산악회 모임에도 가입돼 있는 그는 “젊을 때는 암벽등반도 했다. 나이 들면서 관절에 무리가 오고 기운이 달려 걷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반면 모임 가입 두 달째인 강윤섭(56) 씨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불편한 몸의 재활을 위해 도보여행을 시작한 경우다. 오프라인 걷기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그는 “혼자 동네를 걸을 때보다 훨씬 몸이 좋아지는 걸 느낀다. 지금까지 이 모임을 통해 걸은 거리는 70km 정도”라고 밝혔다.

    ‘도보여행’의 온라인 회원 수는 400여명. 50~60대가 주축이다. 오프라인 걷기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날씨 좋은 봄·가을에 20여 명,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10여 명이지만, 회원들의 소속감은 남다르다. 기윤덕(54) 씨는 “일본 대지진 때는 회원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후원금을 보냈고, 매년 명절 때마다 노숙자에게 밥 퍼주는 봉사, 독거노인에게 선물 돌리는 봉사 등을 한다”고 했다.

    창립자 송 씨의 바람은 언젠가 멤버들과 함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는 것. 이미 혼자 그 길을 걸었던 송씨는 “처음엔 ‘과연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갈 수 있을까’ 겁이 났는데 하니까 되더라. 그 경험을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늦깎이 열공의 즐거움

    현역에서 은퇴한 뒤 배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시니어도 많다. 지난해 12월 결성된 온라인 클럽 ‘쌩쌩 일본어’는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 실력에 따라 구별되는 초·중·상급 그룹별로 정원이 있어 희망자라도 자리가 없으면 기다려야 한다. 이 때문에 클럽 블로그에는 “대기자 명단에 넣어달라”는 호소의 글이 늘 올라와 있다.

    말복 날 이 모임에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공부한 강성기(78) 씨는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면서 일본어도 배울 수 있어 재미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직장인 시절 일본과의 교역을 담당했다. 하지만 부족한 일본어 실력 때문에 파트너들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한이 돼 은퇴 후 이 모임에 합류했다고 했다. 강 씨는 “어린 시절 배운 일본어는 다 잊었지만, 공부하다 보니 그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좋다”고 했다. 올 초 은퇴한 또 다른 회원 양진형(64) 씨는 “다들 의욕은 넘치지만 아무래도 젊은 시절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져 힘든 면이 많다. 혼자 했으면 금세 지쳤을 텐데, 회원들이 다 같은 처지라 공부 요령을 공유하며 힘을 북돋워주니 좋다”고 했다. 그의 바람은 언젠가 우리나라 고궁 등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안내 봉사를 하는 것. 양씨는 “은퇴 무렵 이후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일본어를 배우며 보람 있는 일을 찾았다”며 웃었다. ‘쌩쌩 일본어’ 회원들은 10월 초, 그동안 익힌 일본어 실력을 확인할 겸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떠난다.

    은퇴 베이비부머 5070, “우린 ‘액티브 시니어’!”

    시니어 일본어 공부 클럽 ‘메구미의 쌩쌩 일본어’ 회원들은 매주 화요일 모여 공부한다. 말복 날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모여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회원들.



    직장생활을 하면서 10여 년간 독학으로 역사를 공부해온 이효일(70) 씨가 2009년 은퇴 후 만든 역사 공부 모임 ‘궁궐이야기’도 활발히 활동하는 커뮤니티 중 하나다. 이씨는 “경복궁을 600번 답사했을 정도로 역사 현장을 찾아 다니는 일을 좋아한다. 우리 선조들의 삶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클럽을 만들었다”고 했다. 50대 후반부터 80대 초반까지 380여 명이 활동하는 이 커뮤니티의 정기 모임은 매달 2번. 이론 공부와 현장답사가 번갈아 진행된다. 이 씨는 이때 강사와 현장 해설사로 나선다. 그는 “65세가 넘으면 지하철이 공짜고, 궁궐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답사할 때 돈 들 일이 없다”며 웃었다. 공부와 답사를 함께 하며 사이가 돈독해진 회원들을 중심으로 사진, 유가사상, 한국화, 도자기 등을 공부하는 소모임도 만들어졌다.

    50대에 뒤늦게 악기를 배워 밴드 활동에 뛰어든 ‘열혈 시니어’도 있다. 밴드 ‘커뮤즈’의 드러머 박양찬(58) 씨가 드럼을 처음 배운 건 6년 전. 그는 “은퇴가 다가오면서 뭘 할까 생각하는데, 기타와 음악에 푹 빠져 지낸 젊은 날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하면 할수록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내친김에 만든 드럼 동호회에는 70대 회원까지 참여해 함께 연습하며 친목을 다진다.

    제2의 인생

    ‘시니어 일과 삶 연구소’의 조연미(49) 소장은 “과거 시니어들은 향우회나 사우회, 동문회처럼 연고를 중심으로 형성된 좁고 폐쇄적인 모임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뉴 시니어’는 연고를 떠나 낯선 세계에서 낯선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양한 시니어 모임이 급속히 생겨나고 활발히 활동하는 배경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가 있습니다. 이들이 시니어로 편입되면서 과거의 노인과 다른 행동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 소장의 말이다. 그는 은퇴자들이 사회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시니어 명함 교류회(명함 교류회)’를 운영 중이다. 조 소장은 “은퇴한 뒤 자신을 소개할 명함이 없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고, 무기력증에 빠지며 타인과의 교류를 꺼리는 이가 많다. 이들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명함을 만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4기까지 이어진 ‘명함 교류회’의 1기 회원 이재현(59) 씨는 “처음엔 명함에 뭘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퇴한 동년배들과 함께 앉아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내가 가진 지식과 노하우가 뭔지, 앞으로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고민하다가 ‘면접 전문가’라는 새로운 비전을 찾았다”고 했다. 은퇴 후 소속이 없는 그가 명함 만들기를 하면서 그 속에 새겨 넣을 문구와 직종을 궁리하다 발견한 것. 그는 현재 텔레마케터 채용 관련 사업을 구상 중이다. 이 모임의 다른 회원들은 ‘당신의 침대! 절대 믿지 마세요. 침대 건강해결사 최○○’ ‘시니어 재물지킴이 신○○’ ‘희망을 여는 사람 최○○’ 등의 목표와 희망이 담겨 있다.

    은퇴 후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싶은 이들도 모임을 만들었다. 미술교사로 생활하다 은퇴한 장영희(57) 씨가 지난 3월 결성한 ‘자서전 쓰기 모임’에는 40대 후반부터 70대까지 21명의 회원이 참여 중이다. 10여 년 전 자전적인 에세이를 펴낸 적 있는 장 씨는 “살아온 길을 정리해보고 싶은데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니 누가 옆에서 부추기고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사람이 많더라. 이런 분들을 돕자는 취지로 ‘자서전 사업단’이라는 이름의 비영리법인 설립을 신청해둔 상태다. 우리 멤버들이 자서전을 다 쓰고 나면 그들과 함께 다른 분들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시니어들의 온라인 활동이 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 포털 서비스도 활발해지고 있다. 2008년 문을 연 ‘유어 스테이지(www.yourstage.com)’는 회원수가 36만 명에 달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다양한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시니어 커뮤니티에 블로그 공간을 제공한다. 현재 ‘도보여행’ ‘쌩쌩 일본어’ ‘궁궐이야기’ 등 500개 클럽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은퇴 베이비부머 5070, “우린 ‘액티브 시니어’!”

    역사 공부 모임 ‘궁궐이야기’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모여 한 번은 이론 공부, 한 번은 현장 답사를 한다. 회원들이 함께 남한산성을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왼쪽).

    수평적인 공동체

    중소기업청이 주관하고 소상공인진흥원이 운영을 맡고 있는 시니어포털 ‘시니어넷(www.seniorok.kr)’은 4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창업·취업 정보를 제공하며, 역시 커뮤니티 운영을 지원한다. ‘시니어 일과 삶 연구소’를 운영하는 ㈜리봄은 이 사이트의 ‘시니어 그룹 지원 사업’을 한다. 리봄 관계자는 “그룹 운영 계획서를 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행사당 최대 20만 원까지 지원해준다. 현재 자서전 쓰기 모임, 시니어 명함 교류회 등 15개 그룹이 지원금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지방자치단체별로 있는 노인복지관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니어봉사대, 시니어 밴드, 시니어 인형극단 등이 활동하고 있다.

    ‘유어 스테이지’를 운영하는 ㈜시니어파트너즈의 노준형 팀장은 “요즘 시니어들은 ‘노인’이나 ‘어르신’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이 못지않게 정보 통신 기술을 사용하는 데 능하고, SNS도 잘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최근 시니어 모임에서는 나이와 소득, 학벌 등에 관계없이 회원들이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며, 그 결과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다는 설명이다. 바야흐로 ‘액티브 시니어’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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