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최초의 살인 범죄 재판 기록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입력2012-08-2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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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주와 벌을 보여줌으로써 순종과 복종을 강요한 위대한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신화를 대신할 새로운 범죄 억제 수단이 필요했다.
    • 그것은 바로 법(法)이었다. 기원전 1850년경 수메르에서 일어난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을 디딤돌 삼아 법의 탄생을 들여다보자.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문 장식.

    기원전 1850년경 수메르에서 살인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수메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이 만나는 곳이다. 수메르인은 기원전 3500년경 이 지역에 정착해 우르(Ur), 우루크(Uruk), 라가시(Lagash)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한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살인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약 4000년 전 수메르에서 벌어진 사건을 콕 집어낸 이유는 의미가 남달라서다.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재판 과정이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살인 범죄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대 사법 체계가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수메르 살인 사건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루 신과 쿠 엔릴의 … 아들인 난나 시그와… 루갈 아핀두의 아들…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를 죽였다.”



    세 명의 남자가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를 살해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신전 관리인을 죽인 뒤 피해자의 아내에게 살해 사실을 곧바로 알렸다는 것. 그런데 남편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도 아내는 신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이다.

    피해자의 아내가 신고하지 않았는데도 살인이 감춰지지는 않았다.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가 누구의 아내인지 모두 알 만큼 수메르가 좁은 바닥이기도 했고, 신전 관리인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사건은 금방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수메르의 왕 우르니누르타는 판결을 니푸르 민회에 맡겼다.

    “배심원제로 재판 진행”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수메르 전사.

    민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구였다. 니푸르 민회 역시 행정 업무, 의회 기능, 재판 업무를 담당했다. 민회의 재판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배심원제 혹은 국민참여 재판이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민회 재판이 신전에서 열린다. 신전 관리인을 살해한 범죄인의 재판이 신전에서 열린 것은 우연치고는 뭔가 묘하다. 하여튼 민회 참석자 아홉 명은 신전 관리인을 죽인 남자 셋뿐 아니라 남편의 살해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아내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죽인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 이 세 남자와 저 여자는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의 의자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또 다른 참석자 두 명이 잇따라 반론을 제기한다.

    “루 니루르타의 딸인 닌 다다의 남편이 살해됐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녀가 처형당할만한 일을 했는가?”

    피살자 아내의 유죄 여부를 놓고 의견이 둘로 갈려 팽팽히 맞선다. 오랜 논의 끝에 재판에 참석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내의 무죄를 주장한 두 명의 손을 들어준다. 신전 관리인이 아내를 제대로 부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부양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녀가 왜 침묵해서는 안 되는가?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로 충분하다.”

    결국 세 남자에게만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런데 아내의 행동이 영 개운치가 않다. 살인을 청부했거나 방조했는지도 모른다. 신전 관리인이 아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는 주변의 증언은 이런 의구심을 오히려 증폭시킨다. 복수심에서 또는 재산을 노리고 남편의 죽음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회는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물증 없는 단순한 심증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합리적 의심을 넘어선(beyond a reasonable doubt)’ 증거의 제시를 강조한 것이다. 현대 형사 사건의 판결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수천 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4000년 전은 고사하고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었다. 유전자니 원자력이 뭔지도 몰랐다. 또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경제민주화니 보편적 복지니 하는 주제를 놓고 다툴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많다. 범죄의 경우엔 방식과 수단은 달라졌어도 동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해킹이나 보이스 피싱 같은 범죄는 최근에 새로 생겼지만, 범죄의 동기가 이욕(利慾), 복수심, 분노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고대 사회에서 발생한 살인이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 범죄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의 일탈은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존재하는 문제다. 온라인 게임, 오토바이 폭주족은 없었지만, 청소년기는 예나 지금이나 과도기적 성장 단계다. 신체와 심리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또한 부모의 한계를 깨닫는 시기다. 청소년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반항하고 말썽을 부리는 게 당연하다. 4000년 전에도 청소년은 부모의 속을 썩였다. 길모퉁이나 공공장소에서 빈둥거렸으며 패거리를 지어 말썽을 일으켰다.

    수메르의 한 점토판이 이런 내용을 전한다.

    “어디 갔었니?”

    “아무 데도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집에서 빈둥거리지. 학교에 가서 과제물을 암송하고, 점토판에 필기하고, 과제가 끝나면 선생님한테 보고한 뒤 바로 집으로 와라. 거리에서 방황하지 말고.”

    아버지는 훈계를 계속한다.

    “제발 철 좀 들어라. 공공장소에서 서성거리거나 길에서 배회하지 마라. 길을 걸을 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선생님 앞에서 겸손하고,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여. 선생님을 어려워하면 선생님이 너를 좋아하게 되거든.”

    아버지의 훈계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다른 애들은 나무하기 바쁘지만, 나는 너한테 나무하라고 숲으로 보낸 적이 없잖아. 짐수레를 끌게 하지도 않았고, 밭에서 쟁기를 끌도록 시키지도 않았어.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려라’고 말한 적도 없지.”

    굉장히 친숙한 광경 아닌가? 마치 TV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날 부모들이 야단치는 모습과 어쩌면 그리도 비슷한지 모르겠다. 확실히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신동아’8월호 이 연재를 통해 신화시대의 범죄를 들여다봤다. 인간의 시대로 넘어온 지 수천 년이 흘렀건만 지금도 신화의 힘이 느껴지는 데는 이처럼 우리의 행동에 강력한 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럴진대 수천 년 전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수메르가 나름대로 세속적이고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신(神)은 여전히 만물의 주재자로 군림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을 감싸듯 각종 건물이 세워졌다.

    마침내 法을 만들다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기원전 236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에 전형적인 수메르 설형문자가 기록돼 있다.

    신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강조하는 사회의 경제는 가족 공동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가족이 서로를 위하듯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필요 이상으로 탐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2400년경부터 가족적인 경제체제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사회는 복잡해졌다. 게다가 사제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갖가지 수탈 행각을 벌였다. 장례를 치를 때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요구했고 신을 모시기 위한 토지와 가축, 도구, 하인을 마치 자기 개인 재산이나 노예처럼 부렸다. “사제가 평범한 사람 집 정원에 있는 나무를 함부로 가져갔다. 또 힘 있는 사람이 일반 백성의 집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는 당시 기록은 사제와 권력자의 횡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은 여전히 신을 두려워했지만, 신의 이름으로 잇속을 챙기는 사제나 권력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제를 신의 거룩한 대리인으로 생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권력 남용과 수탈은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가증스러운 ‘범죄’로 취급받았다.

    수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시의 우루카기나(Urukagina)는 사제, 권력자의 수탈을 막고자 법령을 만들었다. 위대한 신화의 ‘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신화를 대신할 뭔가가 필요했다.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옛 사회의 모습을 복구하고자 공포한 법령에는 이러한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법의 탄생에 반드시 필요한 게 하나 있다. 문자가 그것이다. 법령을 말로 전할 수는 없는 노릇. 인류 최초의 법전이 수메르에서 작성된 것은 필연이다. 최초의 문자가 이곳에서 발명되지 않았던가. 수메르인은 지출 내역, 업무 수행 기록 등을 글로 남겼다. 최초의 문자는 상형문자 형태였다. ‘상형’이 ‘문자’구실을 하려면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했다. 상형문자는 효율적이지 못하다. 수많은 세상 일을 모두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림이 점차 기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새긴 설형문자(cuneiform)가 등장했다. 이후 오랜 변화 과정을 거쳐 수메르 문자는 표음문자 체계를 갖췄다. 기원전 2500~2000년 사이 수메르 문자는 낭만적인 문학 표현도 할 수 있을 만큼 발전을 이뤄냈다.

    법이 효용을 가지려면 교육이 필수적이다. 법전을 읽으려면 글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울 수는 없었다. 평민 대부분은 생업에 바빠 글을 배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특히 설형문자는 배우기도, 쓰기도 매우 번거롭고 복잡했다. 자연스레 글은 귀족과 사제 등 특권층의 전유물이 됐다. 일반 백성은 법전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설명하면 ‘그런가’ 할 뿐이었다. 그래서 특권층은 문자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려 했다. 특권은 글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20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토판에는 500명에 달하는 필경사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 아버지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다. 아버지들의 직업은 신전 관리인, 군대 지휘관, 선장, 세무 공무원, 감독관, 건설현장 책임자, 공문서 관리인이었다. 필경사는 모두가 부유한 집안 자제였다.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경제민주화 강조한 고대 법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함무라비왕은 282개조로 이뤄진 법전을 만들었다. 그의 업적을 기록한 흙벽돌.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기원전 1750년경 만들어진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을 떠올리는 이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기원전 2050년경 수메르 왕 우르남무(Ur-Nammu)가 법전을 만들어 공포한 바 있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가량 빠르다. 우르카기나(Urukagina) 법전은 기원전 2350년경에 반포됐으니 우르남무 법전보다도 300년 전에 만들어졌다. 우르카기나 법전은 다른 문헌에 인용될 뿐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훗날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우르카기나 법전 혹은 이보다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현재까지 법전의 형태로 발견된 것 중에는 우르남무 법전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르남무 법전은 앞면과 뒷면에 4개 부분씩 모두 8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우르남무 법전의 공포 취지다. “공정하고 불변하는 책임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법전을 작성했다고 적혀 있다. “고아가 부자의 먹이가 되지 않고, 미망인이 강한 자의 먹이가 되지 않고, 1셰켈을 가진 이가 1미나(60셰켈)를 가진 이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법전을 만들었다고도 쓰여 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경제민주화’ 주장이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전에도 중요한 이슈였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정의와 복지가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핵심 과제라는 점을 우르남무 법전이 보여준다고나 할까. 기원전 14세기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 하름합(Harmhab)은 세무 관리가 가난한 사람을 갈취하면 벌칙으로 코를 자르고 추방하는 법령을 공포한 바 있다.

    어찌 됐든 우르남무 법전의 상당 부분은 훼손이 심해 해독이 어렵다. 해독이 가능한 5개 법규 가운데 범죄와 관련한 내용은 3개다.

    “만약 발이 잘렸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은 10셰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뼈가 부러졌다면 은 1미나(60셰켈)를 지불해야 한다.”

    “만약 코가 잘렸다면 은 3분의 2미나(40셰켈)를 지불해야 한다.”

    우르남무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Lex Talionis)이 대세인 고대 법률체계와 다르게 벌금형으로 처벌하게 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후대에 등장하는 함무라비 법전이 동해보복법을 토대로 한다는 점을 볼 때 우르남무 법전의 벌금형은 관대하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유대가 강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지역의 법률은 결국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신체형 처벌로 바뀌고 만다. 범죄 억제 효과 등 실효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을 내놔라

    우르남무 법전이 몇 개 조문밖에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은 데 반해 함무라비 법전은 282개의 조문을 비롯한 법전 내용이 거의 모두 전해진다. 따라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법체계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법전으로 평가받는다. 더욱이 함무라비 법전의 동해보복 원칙은 그리스와 로마법을 거쳐 현대 법체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준 바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로니아 제1왕조(기원전 1830~1530년)의 제6대 함무라비왕이 수메르 법전을 비롯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법전을 종합해 펴낸 것이다. 함무라비왕은 법을 널리 알리고자 주요 도시 신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주에 법전을 새겨놓았다. 당시에는 신전이 도시의 중심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전문(前文)에는 정의를 실현하고 사악한 사람과 악마를 물리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것을 막고자 법전을 제정한다고 명시돼 있다. 정의 실현과 복리 증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르카기나 법전, 우르남무 법전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은 피해자가 입은 손해만큼 가해자에게 손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계급이라는 변수가 있다. 같은 자유인일 경우 눈을 다치게 하면 눈에 상해를 가하고, 뼈를 부러뜨리면 가해자의 뼈를 부러뜨리는 등 동해보복이 원칙이지만 자유인이 평민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은 1미나로 배상하면 된다. 또 노예의 눈을 다치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노예 가격의 2분의 1을 돈으로 배상하게 했다.

    동해보복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잔혹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무한보복보다는 훨씬 진보적이고 발전한 형태다. 무한보복이 허용되면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 격앙된 상태에서 당한 것 이상의 과도한 보복을 하게 마련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막상 살인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남편을 살해하면 아내를 말뚝으로 찔러 죽인다’는 조항처럼 특수한 사례에 대해서만 처벌 규정이 있을 뿐이다. 살인하면 사형시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로 여겨졌기에 별도로 처벌 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고조선의 팔조금법(八條禁法) 역시 동해보복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살인자는 즉시 사형으로 배상케 한다(相殺 當以時償殺)’라든지 ‘절도범은 그 집의 노비로 삼고, 노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는 조항이 탈리오(Talio) 법칙에 따른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을 논하면서 응보(應報)적 차원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 실현뿐 아니라 약자 보호, 복리 증진을 매우 중시한다. 범죄의 처벌뿐 아니라 사회정책적인 내용도 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과부와 고아를 낳게 마련이다.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역시 잦은 전쟁으로 수많은 과부와 고아가 생겨났다. 생계 수단이 마땅치 않은 이들은 크나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복리를 보장하는 조항이 담겨 있다. 또한 최저 임금 기준을 명시하고 있으며 미성년자와 채무자를 보호하는 규정도 포함돼 있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더라도 손색없는 법 내용이 적지 않다. 강도 탓에 목숨을 잃으면 도시와 시장이 피해자 가족에게 은 1미나(당시로는 거금)를 보상해야 한다고 규정(제24조)하고 있으며,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면 채무자는 그해 채무를 갚지 않아도 되고 이자 역시 면제받는다(제48조). 법전의 주된 내용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배상과 관련한 것이다. 계약 위반을 비롯한 각종 불법행위와 관련해 철저한 배상을 강제하고 있다. 절도의 경우 신전이나 왕궁의 물건을 훔치면 절도한 물건 가격의 30배, 평민 소유물일 경우엔 10배를 배상하게 했다(제5조).

    아이가 죽으면 유방을 자른다

    돈으로 피해를 배상하게 하는 벌금형과 복리의 강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는 일부 학자의 평가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심지어 현대의 사회 안전망이 과연 이때보다 우월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킨다.

    함무라비 법전은 이렇듯 현대적 관점에서도 타당성을 갖는 조항이 담겨 있으나 일부 내용은 시대적 한계를 또렷이 드러낸다. 이를테면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면 아들의 손을 자른다(제195조), 유모가 아이를 돌보다 실수로 아이를 사망하게 하면 유모의 유방을 자른다(제194조), 부실공사로 인해 집이 붕괴돼 집주인이 사망하면 집을 지은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제229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집에 구멍을 내고 침입하면 그 구멍 앞에서 침입자를 사형에 처한 후 그 자리에 매장한다(제21조) 등의 조항은 범죄 행위의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심지어 술집 주인이 바가지를 씌웠다가 들통 나면 물에 빠뜨려 죽였다.

    필요 이상의 가혹한 처벌은 고대는 물론이고 중세에도 실시된 전형적 범죄 억제 방법이다. 경찰을 비롯한 범죄 통제 기구가 부족했기에 처벌의 두려움을 극대화해 범죄를 억제하고자 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전(前)근대성은 시죄법(試罪法) 방식을 채택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죄법이란 피의자를 물에 빠뜨리거나 불 위를 걷게 하는 등 가혹한 시련(ordeal)에 처하게 한 뒤 유·무죄를 판단하는 재판 방식이다. ‘죄 없는 사람은 신이 잘 안다’는 식이다. ‘다른 사람을 주술혐의로 고소하고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피고소인은 강물에 뛰어들어야 하며, 만일 피고소인이 가라앉으면 고소인은 피고소인의 주택을 취득한다(제2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한 사실이 없는데도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신성한 강물에 뛰어들어야 한다(제132조).’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무지몽매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신 공양이나 마녀 사냥 등 말도 안 되는 일의 이면에도 정치·사회·경제와 관련한 복잡한 속셈이 숨어 있는 것처럼 시죄법에도 고도의 정치적, 계산적 요소가 담겨 있다. 어차피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애매하게 판결하기보다 책임을 신에게 전가하는 일종의 ‘꼼수’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강조함으로써 신의 대리인인 통치자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속셈을 반영하듯 법전이 적힌 석주의 앞면 상단에는 함무라비왕이 태양신 샤마슈(Shamash)를 경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함무라비왕이 신으로부터 법전을 만들어 공포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의 권능을 빌려 법의 실효성을 높이고자 상징을 조작한 셈이다.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에서 마침내 법이 만들어졌다. 정의 실현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법에 따라 처벌됐다. 법을 어겨 처벌받은 사람 중에는 예수와 소크라테스도 있었다. 이들은 무슨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가. 그들은 정치범이었다. 법은 모호했다.

    ● 이창무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형사사법학(Criminal Justice)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패러독스 범죄학’(2009)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남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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