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빅토리아 여왕의 술 와인과 스카치위스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입력2012-08-22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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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년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그가 평소 즐겨 마시던 보르도산 포도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게 된 것은 1948년 스코틀랜드에서 휴가를 즐기면서부터다.
    • 로크나가(Lochnagar) 위스키 증류소의 존 베그 씨는 “여왕에게 위스키 제조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왕실 가족은 다음 날 증류소를 방문해 스카치위스키를 시음했다. 이 일이 있은 며칠 뒤 빅토리아 여왕은 로크나가 증류소에 로열 워런트를 하사했고, 보르도산 포도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셨다. 이 칵테일이 ‘빅토리아 여왕의 술’로 불리면서 그동안 저평가됐던 스카치위스키는 영국 상류사회에서 그 위상을 높여나간다.
    빅토리아 여왕의 술 와인과 스카치위스키

    빅토리아 여왕.

    지난 2월 영국에서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II·1926~)의 즉위 60주년 행사(Diamond Jubilee)가 성대하게 열렸다. 1952년 2월 6일 25세의 젊은 나이로 영국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비록 ‘군림은 하지만 지배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이지만, 60년간 재위해오면서 조용한 카리스마와 인자한 자태로 ‘영국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이 2015년 9월까지 재임하면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가 된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앞서 이미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경험했고, 무려 64년간 영국을 통치하면서 최장수 재위 기록을 가지고 있는 왕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이다. 그는 1897년 6월 22일 당시 78세 때 즉위 60주년을 맞았다. 1901년 1월 22일 만 81세로 병사할 때까지 64년 재위 기간 크리미아전쟁과 아편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세포이 반란도 무난히 진압했으며, 산업혁명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고 참정권 확대와 교육 보급 등 영국을 최고 번영기로 이끈 인물이다. 이 때문에 후세 사가들은 그의 통치 기간을 ‘빅토리아 시대’라고 따로 부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획을 그은 시대로 평가하고 있다.

    ‘살아 있는 문화유산’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심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영국의 텔레그래프지(誌)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위 60주년에 즈음해 실시한 가장 위대한 군주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35%)에 이어 2위(24%)를 차지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현역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사실 빅토리아 여왕의 인기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3위는 15%를 받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1533~1603·재위 기간 1558~1603)이 차지해 1~3위 모두 여왕이 싹쓸이한 것이다. 흔히 영국을 ‘여왕의 나라’라고 하는 게 무리도 아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19년 5월 24일 당시 왕이었던 조지 3세의 넷째아들 켄트공 에드워드 왕자와 독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820년 사망했고, 이후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교육과 통제 속에서 과잉보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철이 든 후부터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로 알려진 콘로이 경(Sir John Conroy·1786~1854)의 교육 방침과 후견인 역할에 대해 줄곧 탐탁지 않게 여겼다.



    빅토리아 여왕은 사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와 3명의 삼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두 삼촌은 후사가 없었고, 또 한 명의 삼촌은 두 딸이 모두 어린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그는 공식적으로 다섯 번째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1820년 그의 할아버지 조지 3세가 사망하자 큰 삼촌이 조지 4세(George IV·1762~1830·재위 기간 1820~1830)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조지 4세의 재위 기간 중인 1827년 둘째 삼촌이 사망하고 아버지도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후계자는 셋째 삼촌밖에 없었다.

    셋째 삼촌은 조지 4세가 후사 없이 1830년 사망하자 65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라 윌리엄 4세(William IV·1765~1837·재위 기간 1830~1837)가 된다. 그리고 그 역시 1837년 계승권을 가진 적자(嫡子)를 남기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마침내 빅토리아 여왕은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즉위할 당시 영국 정부는 휘그당(Whig Party) 출신 총리인 멜버른 경(Lord Melbourne·1779~1848)이 이끌고 있었다. 휘그당은 영국 최초의 근대 정당 중 하나로 1832년의 선거법 개정 후 토리당은 보수당(자본가, 지주 대표), 휘그당은 자유당(산업가, 소시민 대표)으로 발전했다. 산업혁명 결과 노동 계급의 성장으로 1906년 노동당이 결성되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체계가 자리 잡게 된다.

    어쨌든 멜버른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여왕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데다 자녀가 없었던 멜버른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대했고,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신뢰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러나 멜버른은 1839년 의회 선거에서 패하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도 어쩔 수없이 반대당인 보수 토리당(Tory Party)의 지도자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1788~1850)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인사 갈등 문제로 그가 정부 참여를 거절하자, 다시 멜버른을 총리로 복귀시킨다. 이후 또 다른 선거 패배로 멜버른은 1841년 다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다음 총리직은 로버트 필이 맡는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인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 가(家)의 앨버트 공(Prince Albert·1819~1861)과 결혼한다. 여기에는 평소 어머니와 콘로이 경의 지나친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멜버른 경의 조언이 큰 몫을 했다.

    어쨌든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를 사랑하게 된다. 독일 출신인 앨버트는 처음에는 영국 사회에서 다소 소외되었지만,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교양으로 여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훌륭한 조언자 역할을 해내며 멜버른의 자리를 대신했다. 앨버트의 현명한 중재 역할로 모녀 관계도 나아졌다.

    결혼 후 빅토리아 여왕은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가 남긴 기록을 통해 어머니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고 어머니의 죽음을 비통해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술 와인과 스카치위스키

    윈저 다이아몬드 주빌리 위스키.

    그런데 그해 11월 앨버트는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남 에드워드가 더블린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곳의 한 여배우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장남의 무절제한 행실에 화가 난 앨버트는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 아들을 훈계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에 다녀온 후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당시 유명한 의사 저너(William Jenner·1815~1898)는 장티푸스 진단을 내렸고, 결국 앨버트는 1861년 12월 14일 빅토리아 여왕과의 21년간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숨을 거둔다.

    남편이 허무하게 갑자기 사망하자 빅토리아 여왕의 상심은 매우 컸다. 그는 앨버트가 죽게 된 데는 장남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7세, 1841~1910, 재위 기간 1901~1910)의 애정 행각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원망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계승권자인 에드워드에게 오랫 동안 국정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는 5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각의 회의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앨버트의 사망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스스로 미망인을 자처하며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지내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런던에도 거의 들르지 않고 윈저 궁(宮)에 칩거하며 실질적으로 정무에서 손을 뗀 채 생활했다. 앨버트는 이렇게 빅토리아 여왕의 애도 속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 영국 왕실은 오늘날의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새로운 남자 존 브라운

    빅토리아 여왕은 정치적으로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영국의 국내외 정세에는 크고 작은 일이 있었지만 유능하고 충성심 싶은 각료들이 그의 치세를 영광스럽게 만들어나갔다. 이 중 특히 후세에 명총리로 평가받는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와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1809~ 1898)은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노동당)의 대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양당 체제의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 영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 정책에 중점을 두고 1876년 5월 1일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면서 당시 대영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재임 기간 내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정치 원칙을 따랐다. 특히 앨버트의 사망 이후에는 정무에서 손을 뗐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국가 사안의 결정권만은 끝까지 손에 쥐고 국정을 조율해나갔다. 이는 결과적으로 소속 정파에 관계없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를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일반 대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앨버트의 사망 이후 빅토리아 여왕을 이야기할 때 존 브라운(John Brown· 1826~1883)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존 브라운은 투박하면서 강건한 스타일의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고지대(하이랜드) 출신 남자였다. 그가 빅토리아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들렀을 때 그의 야외 활동을 보좌하는 개인 시종으로 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존 브라운은 빅토리아 여왕의 우아한 품격에 매료되었고, 빅토리아 여왕도 지금까지의 궁중 남자들과는 다른 매력과 성실성을 지닌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1년 앨버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빅토리아 여왕이 존 브라운과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 여왕은 허전한 마음을 그를 통해 달랬다. 이후 그들의 관계는 존 브라운이 1883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빅토리아 여왕은 공개적으로도 수차에 걸쳐 주위 사람들에게 그를 크게 칭찬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갖가지 소문이 횡행했다. 심지어 두 사람 간의 비밀 결혼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을 ‘미세스 브라운(Mrs Brown)’으로 격하해 부르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증거로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튼 빅토리아 여왕과 존 브라운 간의 일화는 두고두고 세간의 흥미를 끄는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97년에는 ‘미세스 브라운(Mrs Brown)’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존 매든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주디 덴치가 빅토리아 여왕 역을, 그리고 빌리 코놀리가 존 브라운 역을 맡았다. 존 브라운은 당시 그들 간의 관계를 이상하게 해석하고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여왕을 보호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어쨌든 빅토리아 여왕의 만년은 행복했다. 1887년 즉위 50주년 행사(Golden Jubilee)를, 1897년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인 즉위 60주년 행사(Diamond Jubilee)를 성대하게 치른다. 보어전쟁이 한창이던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은 64년(정확하게는 63년 7개월 2일)간의 치세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그의 곁에는 60세라는 늦은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 장남 에드워드 7세(Edward VII)와 장손으로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열 워런트

    빅토리아 여왕은 긴 재위 기간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술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당시 여왕이라는 직위의 특성상 그가 폭음하거나 본격적인 애주가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웠겠지만 그 역시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즐겼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의 술에 관한 일화 중 대표적인 것은 역시 한 스카치위스키 제품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에 관한 것이다. 로열 워런트는 왕실에서 구매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왕실 조달 허가증을 뜻하는 왕실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증을 말한다. 당연히 해당 상인으로서는 큰 영광이다. 이에 상응하는 상당한 경제적 실익도 보장받을 수 있다. 로열 워런트는 이론적으로는 다른 왕실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를 지칭한다.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치세에는 로열 워런트 허가 권리를 가진 사람이 4명 있었다. 여왕 자신을 포함해 에든버러 공(여왕의 남편)과 왕세자(찰스), 그리고 왕세자비가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하면서 현재는 3명이 로열 워런트를 수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로열 워런트의 문장 모양은 수여자에 따라 다르다.

    로열 워런트 수여 과정을 보자. 5년 이상 왕실과 꾸준히 거래한 업체가 신청을 하면 심사위원회에서 심사 대상 리스트를 만든다. 이를 대상으로 심사해 수여권자 3명 중 1명의 최종 결정이 나면 수여한다. 후보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국 국내 기업이 아니어도 된다. 인가를 받게 되면 5년간 워런트가 나오는데,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자동으로 연장된다. 로열 워런트는 상속, 계승, 양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등 특정 전문 직종과 구인중개, 이벤트 회사 등 에이전시 형태의 사업자, 정부기관, 언론사, 유흥 직종은 허가대상에서 배제된다.

    영국에서 로열 워런트 역사는 1155년 헨리 2세(Henry II)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무래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국력의 획기적인 신장과 함께 크게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처음 위스키 제품에 대한 로열 워런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브라클라(Brackla)라는 스카치위스키를 통해서였다. 사실 영국에서는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진(gin)이 가장 인기 있는 대중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부자들은 프랑스산 와인과 브랜디를 즐겼다. 스카치위스키는 당시만 해도 거의 대부분 불법 상태에서 밀주 형태로 제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품질도 낮았을 뿐 아니라 술에 대한 인식 자체도 형편없었다. 1810년 한 해에 스코틀랜드의 스페이사이드(Speyside) 지역에서만 400개의 불법 증류기가 압수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왕의 위스키

    그러나 상황은 점차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큰삼촌인 조지 4세는 1822년 역사적인 스코틀랜드 방문에서 스코틀랜드의 국민적 소설가이자 시인인 월트 스코트 경(Sir Walter Scott·1771~1832)을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지 4세는 당시만 해도 영국 귀족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하이랜드 몰트위스키(Highland Malt Whisky)를 요청해 마시면서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 제의를 했다. 이는 명백히 스카치위스키의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마침내 그 이듬해인 1823년 관련 법령(the Distilling Excise Act)에 의해 스카치위스키의 제조와 판매가 합법화됐고, 글렌리베트(The Glenlivet)가 최초의 주조 회사로 등록하게 된다. 이후 스카치위스키는 영국 상류사회에서 꾸준히 그 위상을 높여갔다.

    앞서 말한 브라클라 위스키는 1812년에 프레이저(William Fraser)가 만들었다. 브라클라는 위스키의 합법화 후 여전히 성행하는 스코틀랜드 고지대 불법 밀주업자들과의 부당한 경쟁을 피해 주로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과 잉글랜드에 판매시장을 넓혀나갔다. 그 결과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1835년 윌리엄 4세의 로열 워런트를 받기에 이른다. 이는 위스키 역사상 최초의 로열 워런트였다. 로열 워런트를 수여받은 브라클라 사는 감격해 당시 신문지상에 자사 제품을 ‘왕의 위스키’로 소개하며 대대적인 선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윌리엄 4세는 불과 2년 후인 1837년 병사하면서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때문에 그 자신은 이 술을 제대로 즐길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왕위를 이어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선왕 윌리엄 4세의 의견을 존중해 즉위 이후 브라클라 위스키에 대한 로열 워런트를 재허가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위스키가 이름 앞에 왕실을 뜻하는 로열이라는 글자를 붙여 ‘로열 브라클라(Royal Brackla)’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빅토리아 여왕의 술 와인과 스카치위스키

    영국 왕실의 위스키를 생산하는 스코틀랜드 로크나가 증류소.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이 위스키 증류소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는다. 1985년 폐쇄됐다가 1991년 생산을 재개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로열 브라클라라는 이름의 위스키는 찾기 어렵다. 대신 조니워커 골드나 드와르(Dewar)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의 주요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빅토리아 여왕이 위스키 로열 워런트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여러 해 후인 1848년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자연 풍광과 문화를 사랑해 재임 기간 중 여러 차례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의 첫 스코틀랜드 방문은 즉위 5년 후인 1842년 앨버트와 결혼한 지 2년 후에 이루어졌다. 1844년과 1847년에도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 부부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조금 더 안정되고 기후가 좋은 장소를 찾게 된다. 그렇게 결정된 장소가 지금까지 왕실 저택으로 남아 있는 발모랄 성(Balmoral castle)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부부는 1848년 9월 8일 발모랄 성에 도착해 첫 휴가를 즐기게 된다. 그런데 부부의 체류 기간 중인 9월 11일 저녁 9시 여왕의 개인 비서(Mr G.E. Anson)는 인근에 있는 로크나가(Lochnagar) 위스키 증류소의 존 베그(John Begg)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존경하는 여왕님께 위스키 제조 과정을 직접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오후 6시까지 증류소가 풀가동될 예정이니 그때까지 오셨으면 합니다.”

    방문 시한까지 명시한 편지는 불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로크나가 증류소는 존 베그가 3년 전인 1845년에 만든 위스키 증류소였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증류소 방문 초청 편지를 보낸 존 베그는 다음 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4시경 여왕과 앨버트가 증류소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존 베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들을 맞았다. 여왕 일행에는 왕세자와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류소 문을 들어서면서 앨버트가 “베그 씨, 당신 일을 구경하러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스카치위스키를 사랑한 여왕

    존 베그는 감격한 상태에서 왕실 가족들에게 자신의 증류소를 보여주면서 스카치위스키 제조 과정에 대해 정성껏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증류소까지 방문해준 데 대해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모든 왕실 가족이 로크나가 위스키를 한 잔씩 맛보았다.

    여왕 일행도 당시의 로크나가 증류소 방문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했다. 방문 며칠 후 로크나가 증류소에 로열 워런트를 하사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방문을 통해서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즐겨 마시던 프랑스 보르도산 적포도주(claret)에 로크나가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일종의 폭탄주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적포도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칵테일을 ‘빅토리아 여왕의 술’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로크나가 위스키는 로열 워런트를 수여받은 이후 자랑스럽게 제품 앞에 ‘로열’이라는 글자를 붙여 오늘날까지 이 위스키는 ‘로열 로크나가(Royal Rochnagar)’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존 베그 입장에서는 자신의 증류소에서 정성껏 만든 위스키를 빅토리아 여왕이 포도주에 섞어 마시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사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음주법을 두고 보르도 적포도주와 스카치 몰트위스키라는 두 가지 훌륭한 술을 모두 망치는 음주법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술에 관한 한 전문가도 아닌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그 술을 마셔준 영광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어쨌든 로크나가 증류소와 영국 왕실의 인연은 꾸준히 이어져 1965년 증류소 설립 150주년 기념식에 현 찰스 왕세자가 공식적으로 증류소를 방문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증류소 중 ‘로열’이라는 글자를 제품에 붙이게 된 증류소는 브라클라와 로크나가 외에 하나 더 있다. 바로 ‘글레너리 로열(Glenury Royal)’이라는 이름의 증류소인데, 이 증류소는 아쉽게도 1985년 폐쇄된 이후 생산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로열 로크나가 증류소 방문 이후에도 수시로 발모랄 성에 머물면서 영국의 귀족, 정치가, 유력 사업가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스카치위스키를 소개하면서 스카치위스키는 영국 사회에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존 브라운도 여왕과의 오랜 친분으로 함께 지내면서 스코틀랜드 출신답게 스카치위스키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술에 취해 여왕 앞에서 크게 넘어지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거친 몰트위스키 맛으로는 영국 상류사회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빅토리아 여왕 때문에 스카치위스키는 발전의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런 인연 탓인지 1897년에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에 맞추어 지어진 한 증류회사는 증류소 이름 자체를 아예 ‘임페리얼 증류소(Imperial Distillery)’로 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스카치위스키는 발전을 거듭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지금은 개성 있고 품질이 우수한 몰트위스키까지 소개되면서 스카치위스키의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위의 비난을 감수할 자신만 있다면, 오늘 밤에는 좋은 레드 와인 한 잔에 스카치위스키를 살짝 타서 마시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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