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1920년대 서울

  • 박윤석│작가 unomonoo@gmail.com

    입력2012-08-22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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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일본의 힘은 러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수리스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4남7녀를 남겨두고 일본군에 끌려간다. 조선인은 러시아로 쫓겨 올라가고 러시아인은 조선으로 쫓겨 내려온다. 철새는 돌아갈 때가 정해져 있지만 망명객에게는 기약이 없다.
    (제13장)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1915년 무렵 창경원(현 창경궁)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의 개울이 남으로 흘렀다. 창경궁 담장으로 접어든 한림은 걸음을 멈추었다. 북쪽 박석고개 마루를 넘어 곧게 뻗어 내려오던 궁궐의 동쪽 담장이 그 종점을 앞두고 안으로 살짝 꺾여 들어간다. 담장 안에서 나란히 흘러내려오던 물길이 거기서 담장 밖을 나선다. 담장은 이제 개울과 안팎을 바꾸어 흐르다가 또 한 번 크게 꺾이며 궁궐의 남단을 휘돌아 종묘의 담벼락에 가서 붙는다. 물은 담과 갈라져 동으로 머리를 돌린다.

    첫 모퉁이 돌담 아래로 담장 높이만한 너비의 개천이 흘러나온다. 지난 한 주 가랑비가 이어졌고 어제 5mm의 단비가 내린 뒤라 수구(水口)의 창살을 빠져 나오는 물결이 분주히 일렁인다. 담장 안에는 담장 키 두어 배나 되는 회화나무 대여섯 그루가 연초록 잎사귀를 4월의 바람에 살랑대며 물길과 담장 사이에 옅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왕가의 물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아름에 품은 뒷산 응봉 기슭에서 발원해 후원(後苑) 깊숙한 곳 왕의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해 연못도 이루면서 시계 방향으로 흘러 담장 안쪽을 띠처럼 두르며 내려온다. 이어 담장을 벗어나 원남동을 거쳐 인의동과 연지동 사이를 비스듬히 질러 동대문경찰서 뒤로 돌아 종로 4, 5정목으로 빠져 광장시장을 끼고 청계천에 닿는다.

    물은 많이 흐려졌다. 담장 안 지척에 동물원 우리가 있다. 왕족과 궁인이 떠난 궁궐에 어디선가 잡혀온 동물들이 서식한다. 그 위편에 박물관과 식물원도 생겼다. 전각들이 자리를 내주고 헐려나가면서 궁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궁궐 밖 남쪽 몇 동네는 합쳐 원남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창경원은 한 울타리나 다름없는 옆 창덕궁에 순종 이왕이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왕가의 공간이 아니다. 만백성, 아니 경성부민의 놀이터다. 교통이 좋은 요즘은 전국이 하루 생활권이라 국민적 유람지가 되었다. 잡인의 범접을 불허하는 지엄한 공간이라 금천(禁川), 명당수라 해서 옥류천(玉流川)으로 불리던 개울의 이름도 물 좋던 시절까지의 얘기다. 자식 보았다고, 장 담근다고 금줄 치던 풍습보다 먼저 부정 타지 말라고 궁궐에 둘러친 금천이 사라졌다.



    개울에 바짝 붙어 담장 귀퉁이에 뚫린 쪽문 하나가 사람 손닿은 지 오래인 듯 함구하고 있다. 지붕도 없이 다리 들어 넘어야 할 작고 초라한 행색이지만 궁과 그 아래 민가를 잇는 최단 통로였다 한다. 소동문(小東門)이라 하여 일꾼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비상구였다.

    선인문의 사계

    원남동에서 전차를 내린 한림이 창경궁 동남쪽 귀퉁이의 개울과 담장을 지나 거슬러 오르는 동안 종점에서 돌아내려온 전차가 총독부의원 앞에 멈추었다. 올라갈 때 가득했던 전차는 텅 비어 두어 승객을 태운다.

    낯익은 동대문경찰서 직원이 길 건너 함춘원동 언덕길을 뛰어내려오면서 전차 운전수에게 손을 흔든다. 왕궁의 바깥 정원이던 함춘원은 그 다양하던 나무들과 함께 사라지고 동산에는 총독부의원이 넓게 들어서 있다. 그 맨 선두에 적벽돌과 화강암의 웅장한 본관 건물이 동판 덮인 2층 지붕에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목조 전각을 내려다보고 서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 자리를 포함해 동산 전역엔 경모궁(景慕宮)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사당이었는데, 역대 왕 대부분을 합사해 모신 종묘 전체와 맞먹는 규모였다.

    총독부의원 입구의 완만하게 굽은 비탈길을 포드 자동차 한 대가 급하게 오른다. 현관 입구 포치의 석조 아치 아래 자동차가 육중하게 진입하면 누군가 높은 분이 부축을 받아 내릴지도 모른다. 작년에 돌아가신 고종과 지금 창덕궁에 계신 순종의 건강은 총독부의원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점검되고 관리되어왔다. 그렇게 해도 하룻밤 사이 급서를 막을 수 없었고 평생의 심신허약을 돌려놓지 못했다. 당대 최고 귀인의 하나였을 사도세자는 평생을 짓누르는 신경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파멸적 종말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했다.

    한림은 조금씩 높아지는 담장 길을 걸어 선인문(宣仁門) 앞을 지난다. 내시와 신료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궁궐 동쪽의 주출입문이다.

    창경궁에 살던 사도세자를 가둘 대형 뒤주가 영조 임금의 특명에 따라 운반되어 들어가던 문이다. 세자의 비대한 몸집을 감당할 만한 쌀뒤주를 궁내에서 찾지 못했던지 아니면 사용을 꺼린 것인지 선인문 밖 궁궐수비부대에서 물색되었다. 이틀 전 세자는 가뭄 끝에 찾아든 폭우를 뚫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궁궐 담장 아래 수문을 빠져나가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왔다고 한다. 경희궁의 처소에서 창경궁의 아들을 찾아온 국왕 영조의 명에 따라 27세의 세자는 임오년 7월의 화창한 초여름 날 마당을 가로질러 뒤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뒤주를 감시하던 임금은 8일 만에 뒤주를 열어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풍악을 울리며 환궁했다고 한다. 외국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연주하도록 마련한 개선가였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별로 사용할 일이 없던 곡조였다.

    일찍이 영조의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총애를 받다 마침내 사약을 받은 장희빈이 죽어 이 선인문으로 나갔다. 장희빈이 남긴 아들은 경종 임금이 되고 곧 이복동생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사이 4년간 결벽증이라 할 만큼 예민한 성격의 영조가 느낀 불안감은 극에 이르렀으나 결국은 50년 넘게 재위하는 최장수 국왕이 되었다.

    직계혈통은 아니지만 호적상으로 사도세자의 고손자가 되는 고종은 갑신년의 정변이 일어나던 초겨울 밤을 이 선인문 밖에서 지샌 일이 있다. 개화당과 일본이 연합한 친위쿠데타를 청나라 군대가 진압하기 위해 지휘본부를 선인문 밖에 차려놓고 국왕 탈환작전을 벌인 날이었다. 갑신정변 주도 측이 내건 정강 14조의 첫째 조목은 청나라에 붙들려간 대원군을 모셔오고 청나라에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청국군은 그 2년 전 임오년의 여름에도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황해를 건너와 진압하고, 며느리 부부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대원군을 바다 건너 천진 땅에 유배 보냈다. 그리고 충주 땅으로 몸을 피한 민비를 호위해 서울로 환궁시켰다.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영친왕 이은.

    갑신정변 3일째인 12월 6일 오후 4시를 전후해서부터 자정 무렵까지 창덕궁과 창경궁 안에서 일본 청국 조선 3국인들이 고종 임금을 놓고 벌인 난리를 실록은 다음과 같이 줄이고 줄여 요약하고 있다. 청일전쟁 10년 전에 작은 청일전쟁이 조선의 왕궁에서 벌어졌다. 국내에서 외국 두 나라가 맞붙는 전쟁에서 조선인은 두 패로 나뉘어 붙어 조역을 수행했다.

    청나라 병사들이 궁문으로 들어오면서 총포를 쏘았고 우리나라 병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임금께서 후원에 있는 연경당으로 피하여 (…) 옥류천 뒤 북쪽 담장 문에 이르렀다. (…)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가 병력을 거느리고 상감을 담장 밖 북묘로 맞으러 왔다. 홍영식 등이 왕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주상 전하를 사인교에 태우자 홍영식 등은 다시 절규했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과 박영교를 쳐 죽였다. 사관생도 7명도 함께 죽였다.(…) 원세개가 병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했고 자정 무렵 임금은 선인문 밖에 도착해 오 통령의 청병 지휘소에 머물렀다.

    백성의 궁전

    전차가 또 도착하고 다시 한 차 가득 승객들을 쏟아내었다. 종로4정목에서 연결되는 창경원 노선의 종점이다. 팻말에는 홍화문정거장이라 쓰여 있다. 어른들은 잰걸음으로, 아이들은 달음박질쳐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로 앞 홍화문(弘化門)으로 몰려든다. 창경궁의 정문이다. 범인들은 범접하지도 못하거니와 대궐을 드나드는 양반 나리들이라도 어지간한 지체 아니고는 이 문으로 들락거릴 수 없는 것이 불과 10여 년 전까지의 일이다.

    1920년 4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2층 지붕에 누각을 인 웅대한 홍화문은 활짝 열어젖힌 3칸 대문의 드넓은 관람객 출입구로 모여드는 옛 백성들과 그 후예들을 맞아들인다. 왕궁의 정문이 이처럼 완전 개방되는 것은 왕조의 큰 길흉사가 아니고서는 없는 일이었다. 홍화문의 서늘한 그늘을 통과하자 아이들은 금천을 가로지르는 왕의 다리 옥천교(玉川橋) 돌다리를 내달려 넘어서고 곧바로 펼쳐지는 궁의 정전(正殿)을 향해 활짝 열린 명정문(明政門)으로 뛰어든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얼굴엔 함박꽃이 핀다. 눈을 들어 보면 궁궐은 온통 꽃대궐이다. 명정전(明政殿) 드넓은 정방형 뜰의 박석바닥 위에 서면 사방은 봄눈이 내린 듯 벚꽃 천지다. 그 꽃무리의 기운은 동쪽 담장을 건너 전개되는 경모궁 터와 총독부의원의 동산 일대로 뻗어 장관을 이룬다.

    휴일이 아닌데도 이렇다. 엊그제 주말은 사실상 벚꽃 시즌의 끝물이라 할 수 있었는데 미처 못 온 사람들은 이번 주에도 넘쳐날 것이라 한다. 벚꽃은 이미 지고 있다. 지난 주말은 대단했다. 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춘색은 자못 무르녹아 대도회인 서울은 꽃동산을 이루었다. 28만의 온 도시 인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자연의 봄빛과 따뜻한 햇살에 싸여 한강으로 남산으로 우이동으로 일요일을 이용하여 나가는 사람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다. 18일은 아침부터 창경원을 향하여 물밀어오는 노소남녀의 사람 물결 가운데로 달려드는 자동차와 인력거가 함께 섞여 헤쳐나아가지도 못할 만치 복잡한 광경을 이루었다. 꽃 우산을 펼친 듯한 벚꽃 동산 사이로 가벼운 봄옷을 입고 사뿐사뿐 걸어가고 걸어오는 청춘남녀는 에덴의 낙원을 일시에 세상에 나타내는 듯하였다.

    그날 입장객은 2만8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창경원이 생긴 10년 이래 최대 성황이라 했다. 경성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 전국에서 몰려든 것이다. 그날 인파에 한림도 한몫을 했다. 창경원의 정문 앞에서 하나코와 만나 꽃구경을 하기로 했는데 만나지 못했다. 한자리에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이 떠밀리며 두 시간을 서성였는데 하나코는 찾을 수 없었다.

    해 뜨는 집

    길은 점점 경사가 높아져 오른쪽으로 크게 휘면서 박석고개로 오른다. 궁궐의 담장도 고개마루를 따라 오르는데 그 초입에 문 하나가 나 있다. 월근문(月覲門)이라 쓰여 있다. 달마다 찾아뵙는 문. 길 건너로 이어지는 동산 위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으로 가는 최단 통로다. 아들 정조가 만든 문이다. 그때 즉위 3년을 맞은 정조의 나이 27세. 아버지가 고인이 되던 나이였다. 경모궁 참배 때만 열리는 이 문을 나서 맞은편 언덕을 오르면 일첨문(日瞻門)이 열려 있다. 날마다 바라본다는 뜻의 문이다. 마치 첨성대에서 별을 바라보는 심정과도 같이 정조는 열 살 때 사별한 아버지를 찾아 그 문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에게서 정을 받지 못한 사도세자. 정 붙일 아버지를 일찌감치 상실한 정조. 정조가 오래 살았던 창경궁의 처소에서는 월근문과 일첨문이 정동향으로 바라다보였다. 달과 해는 아침저녁으로 그곳에서 떠올랐다. 부정(父情)을 상실한 두 사람은 그렇게 두 문을 사이로 오래도록 마주 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전각 20개 이상이 6개 이상의 권역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는 경모궁의 규모와 그 참배에 기울인 정성은 아들 정조가 겪은 슬픔과 통한의 깊이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준다. 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가던 날, 영조임금 앞에 죄인처럼 엎드린 사도세자 곁에 함께 엎드린 열 살 세손은 할아버지 왕에게 간절히 청했다. 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그보다 더 절절할 수는 없었다. 왕은 지상의 신이었다.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할아버지의 대답은 한마디, “나가라”였다.

    10년 전 세손이 될 아기가 탄생하던 날, ‘음성이 우렁차고 코가 우뚝 솟았으며 입이 커 골상이 특이’한 아이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나를 빼닮았다”며 그날로 호를 지어 내리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그날의 영조가 아니었다.

    훗날 정조는 왕이 되어 경모궁 참배를 위해 월근문을 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 걸러 배례하여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매년 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간 그날부터 죽어 나온 그날까지 8일간을 기해 경모궁 밖을 나오지 않고 사당 안 재실에서 지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 의해 가혹한 처지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일가의 문제를 넘어 왕조 자체가 가혹한 운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조는 그의 아들과 손자 대를 거치며 조정과 나라가 크게 곤두박질치고, 다시 아버지 사도세자의 피를 이은 이복형제들의 가문에서 우여곡절 끝에 왕통을 이어받아 왕조 최후의 몇 대를 장식하게 될 줄은 미처 알 수 없었다.

    성균관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경모궁의 옛 터전을 바라보며 한림은 고개를 넘어섰다. 오른편 언덕 위로 뻗어 오른 총독부의원의 중앙시계탑이 후두부를 드러내며 꼭대기 돔의 동판을 번쩍이며 서 있다. 사방으로 달린 원형 시계가 굳이 없다 해도 4층 높이에 이르는 탑신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형상만으로도 두 시간 간격의 재래식 시간 짐작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이곳에 깃든 왕실의 흔적은 고종이 왕좌에서 밀려난 1907년 의과대학과 대학병원을 겸한 대한의원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여기 입원한 최고위급 인사는 이완용이었다. 1909년 연말에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던 총리대신 이완용은 해를 넘겨 회복되었다. 그 공적으로 대한의원장 이하 의료진 5명이 훈장을 받았다. 나흘 뒤인 8월 22일,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국 황제에게 양위한다는 내용의 조령을 발표하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해 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다음해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다. 총독부의원 역시 많은 고위층 환자를 치료했지만 그 으뜸은 작년까지 병원장 이하 의료진이 심혈을 기울인 전 국왕 고종 이태왕이었다.

    궁궐의 담장은 왼편 산줄기를 따라 북으로 휘돌아 오르고 길은 담과 갈라져 혜화동을 향해 내리뻗는다.

    박석고개에 박석은 보이지 않는다. 창경궁으로부터 경모궁으로 흐르는 낮은 지맥을 보강하기 위해 네모진 돌 박석(薄石)을 깔아서 박석고개라 한다. 고개 아래 왼쪽 길로 접어들어 경학원(經學院)을 바라보며 걷는다. 창경궁 뒷담 너머 성균관이 500년 이상 된 이름을 잃고 경학원으로 격하된 지도 10년째다. 유생들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우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는 길목은 교교하다.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의 지도이념, 그리고 그 지배질서에 채용되는 관리의 등용문으로서 성리학이 왕조와 더불어 운명을 다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인원은 격감했다. 명나라와 청나라를 합친 기간만큼 존속한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합친 것보다 더 성리학적인 나라였다.

    유생들이 벅적이던 명륜당 앞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고갯마루에서 헤어졌던 창경원 담벼락과 다시 마주친다. 높다랗게 치솟은 옛 궁궐의 담장은 이끼 빛이 선명하고 그 아래 배꽃과 복사꽃이 난만히 피어 있다. 불현듯 궁의 후원 한 켠에라도 들어온 듯한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은 꽃잎이 동풍에 하염없이 우수수 내려앉는 집 앞에 한림은 멈춰 섰다.

    반지 규수

    왕세자 전하의 가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3년 동안의 긴 세월을 끌어오더니 28일에 동경 왕세자저에서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다. 이때를 맞아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13년 전 세자전하께옵서 열 살 되시던 해에 경성에서 민영돈(閔泳敦) 씨의 따님이 간택에 뽑혀 이태왕 전하와 엄비께옵서는 친히 규수에게 금반지를 하사까지 하셨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지고 인사가 변함에 따라 세자전하께옵서는 일본궁 방자여왕 전하와 결혼을 하시게 되어서 성대한 혼례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민 규수(閔 閨秀)는 요사이 어떠한 형편인가.

    이 기자가 거기까지 쓰는 것을 보고 한림은 신문사를 나와 이곳까지 왔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민 규수를 찾느라 무진 애를 써서 이미 만나보았다는 이 기자는,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치 그 집에 대신 가서 외삼촌 되는 분에게서 얘기를 좀 듣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신문이 새로 생기고 한 달이 안 되었는데 마치 몇 달이나 지난 것처럼 기사가 많다. 왕세자 이은의 혼인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총독 이하 일본인 조선인 고위층이 대거 동경으로 떠나고 없다. 마치 작년 1월에 고종이 쓰러지던 때와 꼭 같았다. 그때 연기된 결혼이 이제 성사되는 것이다.

    민 규수의 집은 3년 상중(喪中)이다. 아버지는 작년 1월 별세했다. 고종이 숨지기 19일 전이었다. 그를 세상에 데려다준 아버지와 장래의 시아버지로 여겼던 어른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이다. 한때 부부가 될 것으로 안 이은과 그는 나란히 아버지 3년상을 겪게 되었다. 온 백성이 국상을 당해 명목상 3년 상중인 셈이지만 그건 말이 그럴 뿐이다. 부친상 이후 졸지에 가장이 된 민 규수는 시름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하고 아홉 살 이상 차이 나는 어린 동생들을 거두며 맥없는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혼사가 비록 늦긴 했지만 23세의 꽃 같은 양갓집 처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다.

    아버지는 1년 동안 울화 쌓여 술을 폭음하다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55세였다. 한 해 전 1918년 2월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규수의 외삼촌 이 씨는 말도 시작하기 전에 온 미간이 일그러졌다.

    -재작년 그때 덕수궁에서 금반지를 도로 거두어 갔습니다. 왕가에서 하는 일이니까 뭐라 감히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규수의 집에는 그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으므로 민영돈 씨는 감히 옳다 그르다 말은 못하나 병을 얻어 신음했습니다. 그가 작고한 후에는 살던 집까지 팔고 바로 내 집으로 와서 지금까지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해 벽두에 영친왕 이은이 고국을 다녀간 뒤로 덕수궁의 상궁들이 민 규수의 집에 몰려들어 약혼반지를 회수하겠다고 통고했다. 2주 동안 상궁들이 농성하다시피 진행된 실랑이 끝에 반지는 돌려주고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로부터 몸져누운 할머니는 5개월 뒤에 세상을 떴다.

    11년간 간직해온 반지였다. 1907년 여름 고종이 폐위된 뒤 황태자가 된 이은은 겨울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황태자가 덕수궁을 떠난 지 19일이 지난 날 덕수궁에서 금가락지가 왔다. 약혼반지라고 했다. ‘시국이 혼란스러워서 예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 그냥 택일을 하여 선물을 전달코자 하니 그리 알고 받으라’는 전갈이 미리 있었다. 12월 24일의 오후였다. 다홍공단 거죽에 초록공단 안감으로 된 겹보 위에 큰 가락지 두 짝을 곤두 세워 다홍실로 동심결(同心結)을 맺어 네모지게 싼 믿음의 징표 신물(信物)이 수표동 민 규수의 큰 기와집에 들어설 때에 먹 글씨 뚜렷한 ‘약혼지환(約婚指環)’ 네 글자는 민씨 집안을 전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집 부근 수표교와 장통교를 건너 남쪽 구리개 황금정을 넘어 명동의 천주교회 뾰쪽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서편 덕수궁 너머로 기우는 동지 녘 짧은 햇살을 받으며 발길을 재촉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흘 전 동경의 황태자 집에는 명치천황이 방문해 차고 있던 금시계를 풀어 이은에게 선사했다.

    인연의 고리

    떨림과 함께 찾아왔던 금반지는 통곡과 함께 사라졌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왕조의 쇠망기에 왕가의 안정을 위해 무리하게 시도된 정략혼약이 불러온 참화라 할밖에 없었다. 민 규수는 하체가 얼음같이 차갑게 마비되고 상체는 불같이 뜨거운 병에 걸려 1년을 누워만 지냈다. 왕조가 해체되어가듯 집안이 해체되어갔다.

    민 규수의 집안은 명성황후의 친정 가문인 데다 새로 황제가 된 순종의 외척인 윤씨 집안과 사돈관계로 다시 맺어진, 말하자면 무너지는 왕조의 떠오르는 권문세가였다. 아버지 민영돈은 장원급제 후 24세에 임금의 말과 명령을 받아 적고 지어 올리는 한림(翰林)을 첫 관직으로 시작해 왕세자 이척의 글동무 겸 선생 역할을 3년간 수행했다. 그는 고종보다 11세 아래면서 순종보다 11세 위였다.

    세자의 공부가 발전해 대학(大學)을 거의 끝내갈 무렵인 1889년 1월 28일. 실록은 민영돈이 왕세자에게 강의할 다음 책자를 조정 신료들에게 문의하니 다들 논어(論語)를 천거했다고 전하고 있다. 좌중에는 민영환(閔泳煥)도 배석해 있었다. 임금은 의견이 이와 같이 모아졌으니 논어로 넘어가자고 교시했다. 왕세자 이척은 15세, 고종 37세 때였다. 책걸이를 맞아 큰 잔치를 지시할 민비의 나이 38세 때였다. 세 가족으로서는 가장 우환이 적었던 시기 중 한때였다.

    민영돈은 이후 성균관의 최고책임자를 거쳐 동래(東萊)의 부윤을 6년간 역임했는데 그 종반기에 민 규수가 태어났다. 할머니의 회갑년이어서 갑완(甲完)이라 이름을 지었다. 1897년 10월 20일이었다. 그날 이은도 태어났다.

    닭띠 해에 민갑완은 새벽이 아직 시작하기도 전인 한밤중 첫 시각 자시(子時)에 수표동에서 탯줄을 끊고 나왔다.

    조금 뒤 닭 울음이 나기 전인 꼭두새벽에 경운궁의 경효전(景孝殿)에서는 민비의 생신날을 맞아 참배식이 열렸다. 경복궁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날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생일이었다. 일주일 전 그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같은 날 대한제국의 황제로 격상된 고종과 황태자로 책봉된 아들 이척이 고인의 혼전에서 46번째 생신을 기리는 예를 올렸다. 지난달 이곳에서 부자는 고인의 둘째 기일을 맞아 제사를 올렸었다. 3년상을 마친 셈인데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2년이 넘도록 다섯 차례나 연기된 국장은 한 달 뒤에 열리기로 되어 있다. 민갑완과 명성황후의 생일인 그날이 끝나갈 무렵 경효전 인근 처소에서 황제의 아들 이은이 태어났다. 마지막 해시(亥時)였다. 왕비가 가고 없는 경복궁을 빠져나온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의 제일 큰 방에 깃들어 살 때 왕자는 궁인 엄씨에 수태되었다.

    민갑완이 태어나기 1년 전인 1896년 10월 18일 러시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로 갈아타고 귀국하던 민영환은 부산항에 기착했을 때 마침 동래부윤 민영돈이 그달에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서 민영환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지 못하고 떠났더라는 일지를 남기고 있다. 민영돈은 민영환과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한 민씨 척족 일문이었다.

    민갑완이 수태되던 시절 민영돈이 통치하고 있던 동래부(東萊府)는 당시 전국 13도 9부의 행정구역 중에서 한성부 개성부 인천부에 이어 경기 이남의 유일한 부였다. 민갑완의 첫돌 무렵 민병돈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순회하는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고 이후 6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외교사절로 봉직했다. 민영익과 민영환으로 대표되는 민비의 영자 돌림 친척 조카들에 주어지는 코스를 답습한 것이다.

    구미에서 돌아온 민영돈은 민비 사후 10년이 되는 1905년에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시는 경효전의 책임관도 맡았다.

    그리고 1907년, 아들을 동경으로 떠나보낸 궁중의 엄비에게서 금가락지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변칙적인 혼인언약은 일찍이 왕실에 없었다. 민가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자영과 갑완

    -반듯한 이목과 정기 어린 눈매의 민갑완을 보면 너무나 영리하여서 명성황후를 방불케 한다.

    이런 유의 뒷말들이 민갑완의 파혼 무렵 조정 깊숙한 곳 어디선가 들려오곤 했다고 한다.

    1866년 봄, 왕비로 간택될 때 민자영(閔玆暎)은 15세였다. 약혼반지 보내고 어쩌고 없이 당장 초간택에서 5명 선발되고 재간택에서 단독으로 뽑히어 삼간택 면접에서 최종 결정되어 운현궁 흥선대원군 집에서 바로 왕비 수업에 들어갔다. 대원군과 제휴해 수렴청정을 펴는 대왕대비 조씨에 의해 정월 초하루 날 전국의 처자들에 금혼령이 내려지더니, 대보름에 간택 후보 처녀들에게 분(粉) 이외에 연지나 색조 화장은 금한다는 지침이 떨어지고, 한 달 뒤 간택 절차에 들어간 것이었다.

    민씨 집안은 숙종의 비 인현왕후를 5대 전에 배출한 명문이었지만 장희빈에 의해 궁 밖으로 밀려난 한때의 인현왕후처럼 어느덧 쇠락해 있었는데, 이 같은 집안의 배경이 민자영을 왕비로 끌어올렸다. 60년에 걸쳐 국정을 농단한 외척들의 세도가 이로써 근절되리라는 소망이 대원군 부인 민씨의 민자영 추천에 힘을 실어주었다. 형제남매가 모두 일찍 죽고 외동딸로 자라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고단하게 헤쳐온 소녀 시대는 이로써 끝났다. 국가의 치란(治亂)과 흥망을 담은 사서(史書)를 읽는 것으로 달래어온 그 영리하고 냉철하며 강인한 자존감은 유례없이 성대한 혼례식을 거쳐 창덕궁의 중전으로 들어간 그해 병인년의 봄날로써 보상받고 이제 새로운 개화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왕과 왕비의 가마를 뒤따르는 대원군 부부의 표정 또한 내우와 외환이 더는 없는 흥국의 나날에 대한 기대로 충만한 듯 보였다.

    고종 3년 음력 3월 20일의 실록은 인정전(仁政殿)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고 간단히 적고 있다. 꼭 같은 문장이 1851년 음력 9월 25일, 민자영이 태어나던 날의 실록에도 적혀있다. 그날 즉위 2년의 철종이 왕비를 맞아들였다. 그날의 실록에는 왕의 혼인이 갖는 의미에 관해 몇 구절이 보태진다.

    제왕이 나타나 다스림은 배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변란을 다스리는 열 명의 신하 가운데 부인도 들어있어 훌륭한 보좌를 받았었고, 집안을 한결같이 바로잡아야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어진 임금의 급선무였다.

    규수의 각오

    남편으로부터 정을 받지 못한 민자영. 정 붙일 남편을 애초부터 잃어버린 민갑완. 부정(夫情)을 상실했던 두 사람은 아버지의 정으로부터도 일찍 멀어졌다.

    창경궁과 성균관 사이 꽃그늘 아래에서 우수에 찬 지난 일을 회고하는 외삼촌의 말이 잠시 끊어지는 동안 한림은 수백 년 된 고궁의 담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 담벼락을 바라보며 지내고 있을 민 규수의 마음을 무심코 그려보았다.

    -지는 꽃 우는 새와 더불어 가는 해 지는 달을 무심히 맞고 무심히 보낼 뿐이다.

    저 담장 너머 창덕궁과 그 아래 종묘에서는 내일 이은 왕세자의 혼인식을 하루 앞두고 조상들께 아뢰는 고유제(告由祭)가 거행된다. 모레 혼인식 당일에는 현지 시각에 맞추어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창경궁 안 인정전에 명부를 갖추어놓고 왕가의 친척과 고위관리 및 귀족 이하 유력인사들의 축하서명을 받기로 되어 있다. 당일 복장은 프록코트나 모닝코트 기타 이에 준하는 예복을 착용토록 고지되어 있다.

    민 규수는 요사이 책으로 벗을 삼고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며 지낸다고 외삼촌은 전한다. 섬섬옥수는 아버지 3년상을 치르느라 차츰 물빛이 들어간다. 초하루와 보름이면 누구 도와줄 사람 없이 부엌에 들어가 제물을 만들어 올린다고 한다.

    “여간한 사람으로서는 어려울 일입지요. 아직은 부친의 상중이니까 말없이 지내고 있지만 규수의 행동이 너무도 엄격해서 그 심중을 헤아릴 순 없습니다.”

    어려운 조카의 앞일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고 외삼촌은 둘러말한다. 매형을 따라 외국 근무도 해보고 소소한 관직에도 있어보았지만 그 자신 앞날도 스스로 예측하기 힘든 세상이 열리고 있다.

    -무슨 보물을 내렸는지요?

    얼마 전 민갑완을 어렵사리 만나보았을 때 이 기자는 그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고 한다. 약혼반지를 보낸 이후 궁중에서 시절 따라 절기 따라 귀한 예물을 챙겨 보냈다는 소문에 관한 것이었다. 민갑완은 한마디로 대답했다 한다.

    -그런 것 묻지 마세요. 말 한마디 잘못하면 우리 식구는 모두 귀신도 모르게 죽습니다.

    파혼당한 슬픔에 앞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는 성싶었다고 이 기자는 말해주었다.

    한림은 편집국으로 돌아와 그날 메모한 내용을 정서해서 넘겼다. 다음 날 신문에 나온 기사는 그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다.

    세상의 무정함을 갖추갖추 겪은 결과에 세상일은 아주 끊어버리고 공부나 하겠다 하여 요사이도 난만히 핀 뒤뜰의 배꽃은 홀로 피고 홀로 지든지 말든지 알은체도 아니 하고 산보 한 번 하는 일도 없이 방 안에만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고 열심히 공부만 한다는데 규수는 독습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지금 보통 책은 넉넉히 볼만하다더라.

    원수의 여인을 아내로

    훗날 한림은 민갑완이 고국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서울을 떠나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는 것이었다. 왕세자의 결혼식은 물론 동경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아버지의 3년상도 끝난 뒤였던 것 같다. 외국 경험이 있는 외삼촌이 미리 떠나 거처를 마련하고 그 다음에 민갑완은 남동생을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러한 소식은 신문에 일절 나지 않았다.

    한림이 이 기자의 팔에 끌려 명월관으로 향한 것은 그날 초저녁이었던 것 같다. 장안의 명물인 명월관에서 이 기자는 명물로 통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특히 여자 종업원들은 그를 손님이라기보다 오라비 대하듯 했다. 모던한 기생오라비. 한림은 그런 표현을 떠올리며 그의 노는 모양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모든 기생 오라비. 만약 그가 별명을 요청한다면 그렇게 붙여줄 의향도 있었다. 그의 그 재미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는 동경에 유학했고 연극 활동도 했다고 한다. 한림으로서는 근처에도 못 가볼 배경인데 동갑인 그는 재미없는 한림을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그는 상을 마주보고 방석에 앉자마자 한림에게 물었다.

    -동경 혼사가 있고 나서 다음 달 독립신문에 났다는 그 비난 의견을 들어 보았나.

    -보았지.

    -어땠나.

    -내 생각과 많이 다르데.

    -그게 조선인 일반의 평균적 생각이야.

    -사람이 어디 평균치에 맞춰서만 살 수 있나.

    -그게 바로 자네고.

    이 기자는 옆자리로 파고든 여인들을 의식한 듯 대화를 간결하게 매듭지었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독립신문은 이은의 결혼 열흘 뒤인 5월 8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역적이나 패륜아에게 적용될 만한 최고 수준의 저주와 욕설을 섞은 글이었다.

    오늘부터 영친왕이라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던 이은은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인 까닭이다. 죄악 많은 이조(李朝)의 역사는 적자(賊子) 이은으로 인하여 오늘로서 영원히 정죄(定罪)함을 받았다. 이은이 도적 이등박문에게 끌려서 적의 서울로 갈 때는 유년이라 동포는 그가 인질로 잡혀감을 슬퍼하였거니와 지금은 이미 성년이니 그를 아직 지각이 부족한 아이라고 생각해서 용서할 수는 없다. 구국일보(救國日報)는 분개하여 이르되 “아비가 죽으매 서러워할 줄을 모르고 형(의친왕)이 잡히매 슬퍼할 줄 모르고 이제 원수의 여인을 아내로 맞으니 이은은 금수이다”라고 했다. 금수가 아니라면 어찌 차마 그 부황과 모후를 시해하고 그 황위를 빼앗고 그의 동족을 해친 원수의 여자를, 그의 2천만 형제와 자매가 조국을 위하여 피 흘려 싸우고 있는 오늘날에 아내로 맞을 심장이 있을 것인가.

    -오라버니들~ 무슨 그런 재미적은 이야기들을 나누세요, 이 대 명월관에서~?

    -맥주를 마셔야지?

    이 기자가 기민하게 선회했다.

    - ……

    한림은 선잠에서 깨어나듯 생각에서 빠져나와 눈의 초점을 주위에 맞추었다.

    -비루한 세상에선 비루가 제격이야.

    어느 새들 불렀는지 보이의 문 여는 소리가 이 기자의 말에 후렴을 넣었다.

    -탁주는 없을까?

    한림이 무심코 낸 한마디에 좌중이 서늘해졌다. 오래전 창경원 뒷담장에서 뿜어나는 듯 느껴지던 냉기 같은 것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기린 비루? 아니면 삿포로?

    홍도라는 기생이 분위기를 털 듯 콧소리를 드높이며 노래하듯 물었다.

    -삿포로.

    진하게 끓이고 식혀내 얼음 탄 보리차와도 같은 느낌의 그 냉하고 쌉쌀한 황갈색 액체를 두어 잔째 받아들고서 잠이 들었나 보았다. 한림은 꿈을 꾸었다.

    꿈은 말한다

    해방이 되어 있었다. 상해에서 남들처럼 민갑완은 남동생과 함께 귀국선에 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독립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남반부에는 미군이, 북반부에는 소련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과거 청국군이, 일본군이 진주하는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해방 조국의 모습이라는 것이 말만큼 그렇게 새로운 모양으로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노론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파의 사생결단식 이전투구가 이제 좌니 우니 하는 신식 개념으로 이름을 바꿔 반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과거와 지금이 무엇이 다른가. 일본인이 떠나고 왕조가 사라진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를 말하고 있었다. 옛날식으로 부르자면 친러파쯤 될 것 같은 좌익이라는 신종 당파의 사람들은 이은을 민족반역자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기들과 그 부모형제들은 무엇이었다는 뜻인지 모를 일이었다.

    민갑완은 보기 드문 유형의 망명객이었다. 아홉 살 아래 남동생을 데리고 상해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사람들과 그의 삶은 다른 것이었다. 이런 망명은 없었다. 한 번도 얼굴 본 일 없는 남편 예정자 때문에 파혼당하고 협박당하고 유배된 망명자.

    그동안 준비한 대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학교에 수학했으나 1년쯤 다니다 그만두었다. 일본 경찰이 따라다닌다는 말을 듣고 프랑스조계로 들어갔다 다시 영국조계로 옮기기도 하고 이곳저곳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외로운 남매별이라더니 남매의 처지가 그러했다. 프랑스 조계 안에 파묻혀 있는 임시정부 사람들은 나라의 독립문제에 바빠서인지 민씨 남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의 하늘 아래에서 단 하나 믿을 곳이던 외삼촌은 얼마 안 가 숨졌다. 날개 잃은 금지옥엽 양반집 규수는 편물(編物)을 직업으로 삼아 섬섬옥수로 동생을 거두어 먹이고 교육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왕세자가 결혼 7년 만에 소원이던 세계일주 여행길에 처음으로 올라 동부인해 상해에 기착한 일이 있었다. 그를 납치할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부부는 뭍으로 내리지 않고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떠났다. 이은을 납치해 독립운동 전선에 합류케 한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영친왕 이은이 혼인을 하기 5개월 전에 의친왕 이강이 압록강을 넘어 상해로 가려다 발각돼 돌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날개 잃은 왕자들을 확보해서 무엇을 어떻게 이루어내겠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바다를 건너왔다. 10년이 하루 같기도 하고 하룻밤이 만리장성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라 그 사이 놓인 숱한 나날에 대해 뭐라 길게 말하고 싶은 일이 없다. 피신생활을 접으며 헤아려보니 4반세기가 흘러 있었다. 20대 전반의 나이가 50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겨 맞아줄 사람이 남아 있으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과연 그랬다. 임시정부 초대 요인들과 비슷한 체류기간을 보내다 귀국한 서울은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사반세기의 세월은 그 사이 인연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두고 그들을 냉랭히 맞았다. 다시 제3국으로 이민하는 기분이었다. 수표동 집도, 성균관 앞집도 갈 수가 없었다. 서울의 하늘 밑을 전전하면서 셋방살이를 이어갔다.

    전쟁이 터졌다. 러시아 군인이 내려오고 미국 군인이 올라갔다. 그들을 따라 조선인이 두 패로 나뉘어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오르내리며 서로를 원수처럼 잡아 죽였다. 오직 일본 물러나기만을 소원하고 독립과 민족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들이 그랬다. 외국인보다 동족이 어떤 면에서는 더 무서웠다. 해가 바뀌자 이번에는 중국 군인이 밀고 내려왔다. 일본이 만약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마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꺼번에 벌어진 것 같은 모양이 아니었을까. 1월 4일에 남으로 피난 가는 행렬에 끼어 부산까지 흘러 닿았다. 나라 밖으로 피난 갔다 25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 5년도 못 되어 또 피난이었다.

    그렇게 내려온 부산이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다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남매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38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조로써 복수할 뿐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

    한림은 그렇게 생각하며 흠칫 깨어나 식은 거품 걸린 맥주 잔 가장자리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회사 피로연 때도 졸더니 또 자네.

    얼마나 지났느냐고 물으니 두어 잔 마셨다고 한다. 4월 초에 여기서 회사 첫 피로연을 하던 그날 저녁에도 쏟아지는 잠을 깨러 마당에 나갔다가 쟁반 받쳐 들고 지나치는 하나코와 마주쳤다. 작년 9월 초 부산항 선착장 부두 식당에서 보고 처음이었다. 창경원 가서 벚꽃 구경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못 만났다. 하나코는 지금 여기 있을까. 한림은 다시 꿈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민갑완을 꿈속에서 보았다. 규수는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규수였다. 꼽아보니 창경궁 담장 뒤 집으로 찾아간 지 벌써 38년 만이었다.

    벽에 풀로 정성스레 붙인 한 장짜리 1년 달력은 머리맡에 1958년을 알리고 있다. 연도보다 훨씬 큰 글씨로 지역구 국회의원 이름이 아래쪽을 떠받치고 있다. 백성의 대표를 국정에 참여시키자며 선동연설과 가두시위를 주도하다 급진적 위험분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가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승만이 지금 대통령이 되어 다른 당파 국회의원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때는 늦여름이었다. 환갑을 넘은 할머니가 흰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단정히 왼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다. 길고 큰 귀, 높은 이마, 넓은 미간, 곧고 시원스레 뻗어내린 콧날, 그 아래로 길고 넓은 문전옥답처럼 받치고 앉은 인중 터, 굳은 심지를 보여주는 듯 자연스레 다문 입술. 그 갸름한 얼굴을 세월의 풍상을 감안하여 찬찬히 바라보면 순식간에 흘러버린 그 옛날의 민갑완이 복원되는 듯도 하다. 한림보다 두 살 위다.

    장소는 부산이었다. 동래의 온천장. 너무나 낯익은 곳이어서 한림은 놀랐다. 민갑완이 서울 수표동 양반가에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낼 때 한림은 이 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전차 종점은 그대로 있었고 전차도 그대로 다니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떠나간 지가 13년이라는데 크게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좀 어수선해진 가운데 사람이 많아진 것밖에 없었다.

    온천장 여기저기 더운 김이 솟아오르고, 목욕탕 앞 노점들마다 콩국을 내놓고 있었다. 삶아 하늘거리는 우뭇가사리에 얼음 콩국을 채운 사발이 뿜어내는 차가운 김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온다. 찐빵이 삼베자락 덮개 위로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 걸로 보아 겨울이 아니고 여름이 분명해 보인다. 꿈속에서 오감은 꿈밖보다 어쩌면 더 생생하다. 더 생생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두 칸 셋방에 민갑완은 남동생 내외와 그 자제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혼이었다.

    한림은 거기서 신문기자가 민갑완을 찾아가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고 있다. 그의 지나온 사연이 38년 만에 다시 신문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8월 하순이었다.

    왕비의 별자리(星座)가 민족의 비운과 더불어 창파(蒼波)를 타고 흘러흘러. 고독이 천품이 되고 기아가 양식인 양 망명지역을 숨어 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구겨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민갑완 씨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모르고 민 규수, 더 구체적으로는 왕실의 최후의 계승자가 될 뻔한 왕세자 이은(李垠)씨의 약혼자인 것이다.

    기자는 그렇게 쓰고 있다. 그도 이 기자였다.

    -나의 지조로써 우리의 비운을 복수하는 것 뿐입니다.

    주름살 진 얼굴로 민 규수는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주름살이 늘어가기 시작하는 한림은 잠시 방문을 나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낮은 처마지붕 아래 한 가닥, 그리고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걸린 또 한 가닥의 빨랫줄에 온 가족의 옷가지와 이부자리가 무성한 햇살 아래 촘촘히 사이좋게 걸려 있다. 누추할지 모르나 아마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얼굴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면서 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절개를 지키시는군요.

    다시 들어가니 기자는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무쇠와도 같이 굳세어 보이던 민 규수의 표정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지나가듯 하더니 눈물 한 방울이 안경을 흐리는 것이었다.

    이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어 들자 펄펄 뛴다. 내 얼굴을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겠느냐는 말이다. 작년 환갑 날, 가족사진을 찍을 때에도 한사코 사양했다고 동생은 전한다. 동생은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누님! 우리 평생에 단 한 장밖에 없을 기념이니 찍어주십시오.

    그렇게 단 한 장의 가족사진이 남았다고 한다. 반쪽 가족의 반쪽 세월의 기념사진.

    50년의 금반지

    옆방에선 언쟁이 붙었다. 이 방에선 흥얼대고 깔깔대느라 한껏 흥이 올랐다. 이제는 왜 조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나혜석이 결혼식을 올렸다면서요. 덕수궁 뒤 정동예배당에서. 보았어요? 한번 가서 보았으면 싶었는데.

    그런 말도 귓전을 울린다 생각하며 한림은 다시 꿈길로 접어들었다.

    이은이 결혼하고 2주일 뒤에 경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변호사와 결혼한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 종합예술인 나혜석은 민갑완보다 한 살 위다.

    4월은 한림이 태어난 이래 주야로 가장 바쁘게 보냈다. 익숙하지 않은 술이라 그런지 맥주를 입에 대면 잠이 쏟아지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가 꿈속이고 어디가 꿈밖인지 아득하다.

    1968년 2월 19일. 민 규수는 부산 초량동 성 분도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 우수였다. 서울 수표동 집에서 금가락지를 빼앗기던 그날이 꼭 50년 하고도 6일 지났다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 옆에 우수 절기의 도래를 알리는 기사가 나란히 섰다.

    버들가지 살쪄 오르는 강둑에 서면 얼음장 깨지는 소리에 봄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낀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이날, 남쪽으로부터는 매화 개나리의 화신이 날아들고 밀 보리밭을 밟는 농부들의 가슴에 봄갈이의 꿈이 부푼다.

    유족으로는 올케와 세 조카. 동생은 공교롭게도 보름 전에 사망했다. 평생을 누나와 함께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상해에서 울면서 다짐하던 동생이었다.

    아버지가 부윤으로 있던 동래에서 남매는 인생 후반을 살다 묻혔다. 신문은 민갑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이렇게 적었다.

    고 민갑완 규수의 영결식이 23일 상오 10시 40분 부산시 동래 천주교회에서 김 알릭스 신부의 집전으로 엄수됐다. 상오 10시 10분 장전동 자택을 떠난 유해는 3대의 경찰 사이드카와 6명의 동래여고생들이 펴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수녀 300명이 뒤따랐다. 시내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고혈압과 후두육종을 앓으며 누워 지내던 민 규수는 1966년 2월에 순종황후 윤대비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졸도해 병세가 악화되었다. 부산시장 되는 김현옥이라는 이가 병석의 그를 방문해 쌀 한 가마와 위문금을 전달했다. 관직으로만 보자면 민갑완이 태어나기 전부터 동래부윤을 지냈던 그의 아버지 민영돈의 먼 후임자 격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순종이 돌아가시던 해 출생이라 했다.

    민갑완이 유명을 달리하기 5년 전에 이은은 고국에 영구 귀국했다. 이동침대에 누운 채로 비행기를 내려 앰뷸런스 편으로 명동성모병원으로 직행해 계속 거기 누워 지내는 중이었다. 민갑완이 별세한 2년 뒤 그도 세상을 떴다. 결혼 50주년을 맞고 3일 지나서였다.

    서양 풍속에는 결혼 50주년을 금혼식(金婚式)이라 하여 금으로 된 선물을 부부가 주고받는다 한다. 민갑완은 11년간 지니던 금가락지를 죽기 50년 전에 되돌려주고 파혼했고 그 다음해 이은은 조선왕가의 상징 이화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방자 여왕에게 주고 다음해 결혼했다. 이은은 거의 전신 불수의 상태에서 성모병원 병상에서 기념 케이크를 놓고 금혼식을 치렀다. 금가락지나 그밖의 금붙이 예물을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벚꽃 빛 분

    -하나코? 하나코는 둘인데? 주방 일 보는 일본 아이 하나코 말이에요~ 아니면 손님 옆에 앉은 화자 말이에요?

    -일본…

    -그 아이 관두었어요. 지난주부터 안 나오네요.

    -어디로…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지난번처럼 나가보면 있을까 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화자가 한림의 양복 재킷을 옷걸이에서 집어오다 주머니에 불룩 나온 분갑(粉匣)에 호기심을 보인다. 4월 18일 창경원에서 발길을 돌리고 오던 길에 연지동 박가분(朴家粉) 제조소에 들러 도매가로 구입한 것인데 요즘 인기 최고의 화장품이라 한다.

    -꺼내봐요.

    -박가분이네.

    -맘에 들면 가지고.

    한림은 가벼워진 옷을 걸치며 담배 연기 내뿜듯 말했다.

    -좋긴 한데…우린 요새 수입품 써요. 일본 것.

    삿포로 마지막 잔이 탁한 목줄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하나코는 삿포로에서 왔다고 했다. 그것밖에 아는 게 없다. 하나코는 어디로 갔을까. 만약 다시 보게 된다면 삿포로에는 벚꽃이 언제 피는지 물어보아야겠다고 한림은 생각했다.

    마치면서

    이 연재를 통해 우리 근대의 한 측면을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에 기초해 재조명해보고자 했다. 그 기초 근거는 대개 문자의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일부는 사진이나 그림의 형태, 혹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온다. 이것이 한 나라의 문화의 두께이며, 이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선행 연구자들의 학문적 예술적 공로 때문이다. 참조한 선행 연구들을 하나하나 주석으로 밝혀두지 못한 점을 양해 바라며 다음을 기약하고자 한다. 독자의 관심과 질정(叱正)에 감사드린다.



    송우혜, ‘마지막 황태자’1권~4권. 푸른역사, 2010~ 2012/ 정병설, ‘권력과 인간’, 문학동네, 2012/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민영환, ‘해천추범’, 책과함께, 2008/ 정조실록/ 순조실록/ 고종실록/ 동아일보/ 독립신문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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