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이것이 한국의 위성이다

  • 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2-08-28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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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 개발 선진국과 북한은 발사체부터 개발했으나 한국은 위성부터 개발했다. 발전한 정보통신(IT)과 전자산업을 바탕으로 실험용 위성을 몇 개 제작해보고는 금방 첨단 위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위성으로 수익을 올리는 단계에 들어갔다.
    • 한국은 시장을 보고 기술을 만들어감으로써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다.
    • 우주 개발에서도 압축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신화를 살펴본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선진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의 우주 탐색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타국의 발사체에 실어 위성을 올렸지만 선진국 못지않게 우주를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개발하려면 항공 기술이 발전해 있어야 한다. 항공기는 하늘을 비행한다는 것이 다를 뿐, 땅을 달리는 자동차와 비슷한 원리로 힘을 낸다. 움직이는 기계인 자동차는 기계공학 분야에 속한다. 따라서 기계공업이 발전해야 항공 분야가 발전하고, 항공 기술이 있어야 우주 개발에 도전할 수 있다. 선진국들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주로 진출했다.

    한국 우주 개발의 메카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은 1989년 10월 10일,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항공우주연구소’를 뿌리로 삼아 탄생했다. 한국 최초의 국책연구소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비하면 30년 늦다. 항공우주연구소가 독립해 한국항공우주연구소(KARI)가 된 것은 1996년 11월 15일이다. 이후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모태기관인 한국기계연구소보다 유명해졌다. 그리고 2001년 1월 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개칭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 양대 국책 연구기관으로 부상했다.

    항우연의 출범이 늦은 만큼 대한민국의 우주 개발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ISAS(‘아이사스’로 발음)라고 하는 도쿄대학의 연구기관이 우주 개발을 이끌다가, 이후 NASDA라고 하는 과학기술청 산하 우주개발 기관이 주도했다. 한국도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발아한 시원(始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우연이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태어난 1989년, KAIST가 한국 최초로 위성 제작에 도전했다.

    KAIST가 선도한 위성 개발



    그러나 기술이 부족해 선생을 모셔야 했다. KAIST는 영국 서리대학을 선생으로 삼았다. 1990년부터 학생들을 서리대학으로 보내 2년간 공동연구한 끝에 48.6kg의 마이크로 관측위성인 ‘우리별-1호’를 제작했다. 우리별 1호의 무게는 1970년 중국이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둥팡훙-1호’(173kg)의 3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성능은 앞섰다. 그 사이 과학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둥팡훙-1호에는 지구 사진을 찍는 장비가 없었으나 우리별-1호에는 있었다. 왜 중국은 둥팡훙 1호에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의 중국 기술로는 인공위성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음악만 발신하는 위성을 만들었다. ‘둥팡훙(東方紅)’은 문화혁명기인 1966년부터 1978년 사이 중국이 공식화하지 않고 사용한 애국가 제목이다. 둥팡훙의 가사는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기에,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중국은 진짜 국가를 지어 대체했다. 지구 궤도에 오른 둥팡훙-1호는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둥팡훙’을 실은 전파를 발신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 전파를 접수하고, 중국이 세계 다섯 번째로 인공위성을 올렸음을 확인했다.

    中 본뜬 북한 위성

    이를 본뜬 것이 북한이다. 북한이 세 차례나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실패한 광명성 위성에는 북한의 애국가나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보내는 송신기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1호 발사체(북한 이름은 ‘백두산’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린 광명성-1호는 잠시 지구 궤도를 돌다 추락했는데, 그때 광명성-1호는 27MHz의 전파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노동신문에 ‘황해도에 사는 한 주민이 밤하늘을 보다가 광명성-1호를 발견하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허무맹랑한 기사를 게재했다.

    KAIST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우리별-1호를 만들 때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나왔기에 KAIST는 우리별-1호에 광학카메라를 실었다. 그러나 작은 위성이라 최대 해상도 400m에 만족해야 했다. 서리대학이 선생이 되고 KAIST는 학생이 돼 제작한 우리별-1호는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 프랑스가 만든 아리안-4 발사체로 쏘아 올려져 지구 궤도에 올라갔다. 한국은 세계에서 25번째로 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KASIT가 주도한 우리별 사업은 유럽(아리안, 1호), 유럽(아리안, 2호, 1993년), 인도(PSLV, 3호, 1999년)의 발사체에 실어 띄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우리별-2호의 사진 해상도는 200m, 3호는 13.5m까지 높아졌다. 13.5m 해상도에서는 얼추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3호는 1호보다 배 이상 큰 100kg짜리였기에 훨씬 더 정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싫든 좋든 우리의 맞상대는 북한이다. 남북한 대결과 관련해 우리별-1호 위성의 역사성은, 북한의 광명성-1호보다 6년 앞서 우주로 올라갔다는 데 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우리별-1호는 외국 기술로 제작했고, 광명성-1호는 북한이 자체 개발했다. 우리별-1호는 지상 촬영도 했으나 광명성-1호는 음악만 발신했다. 우리별-1호는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구 궤도를 돌았으나 광명성-1호는 바로 떨어졌다. 우리별-1호는 외국 발사체로 올라갔으나 광명성-1호는 북한 발사체로 올라갔다 등등….

    KAIST가 우리별 사업을 하고 있을 때 KT(한국통신)가 지상 3만5786km까지 올라가는 정지위성인 방송통신위성을 쏘아 올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의 한국은 이런 위성을 만들 능력이 없어 ‘무궁화’로 명명된 이 위성 제작을 미국의 록히드마틴 사에 맡겼다. 직육면체로 된 이 위성의 몸체 크기는 1.42×1.96×1.74m였다. 태양전지판을 활짝 폈을 때의 길이는 15m였고, 추력기를 단 총 무게는 1460kg이었다.

    KT가 시작한 무궁화위성 사업

    무궁화위성-1호는 1995년 8월 5일 미국 플로리다 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맥도널 더글러스 사의 델타-2 발사체에 실려 우주로 올라갔다. 델타-2 발사체는 1단에 9개의 부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부스터는 다 타면 자동으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가 제때에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추력이 떨어져 무궁화-1호는 3만5786km의 정지궤도에서 6350km 모자란 곳까지만 올라갔다.

    다행히 상당히 높은 고도였기에, 무궁화-1호는 달고 있는 소형로켓을 가동해 3만5786km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로켓의 연료 소모가 많았기에 10년으로 예정된 수명이 4.5년으로 줄어들 것으로 판단됐다. 예상 수명이 줄어들긴 했지만 무궁화-1호가 올라감으로써 대한민국은 22번째로 상용위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적도 직상공에는 많은 정지위성이 같은 고도로 올라가 있어 혼잡하다. 따라서 새로 올라가는 정지위성은 자국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다. 무궁화-1호는 적도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직상공에 자리 잡고, 한반도로 방향을 잡았다. 무궁화-1호가 올라간 후 우리나라에서는 TV 난시청 지역이 사라졌다. 안테나만 있으면 한반도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로 나가 있어도 깨끗한 TV 화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사는 교포들도 안테나를 구입하면 한국 방송을 보게 되었다.

    무궁화-1호 발사 후 한국통신은 예비용인 무궁화-2호의 발사를 준비했다. 2호는 1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동시키는 것이라, 1호와 똑같이 만들었다. 2호는 1996년 1월 14일 성공적으로 발사돼, 예비용으로 있지 않고 문제가 생긴 1호와 분담해 임무를 수행했다.

    1999년 한국통신은 4.5년으로 예상 수명이 줄어든 무궁화-1호를 대체하기 위해 역시 록히드마틴에서 제작한 3호를 아리안-4호 발사체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3호의 무게는 1호보다 배 이상 무거운 2800kg이었다. 그에 따라 1호에서는 12기이던 통신중계기가 27기로 늘었고, 방송중계기도 3기에서 6기로 증설되었다.

    4자는 불길하다 해 건너뛰고, 2006년 8월 22일 한국통신은 미국과 러시아 노르웨이 우크라이나가 합작으로 만든 시론치(Sea Launch) 사를 통해 프랑스의 알카텔(Alcatel) 스페이스 사가 만든 무궁화-5호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시론치 사는 미국의 보잉(지분 40%), 러시아의 에네르기아(25%), 노르웨이의 크베르너(20%),우크라이나의 UMZ(15%)가 만든 해상 발사 전문회사다. 이 회사는 노르웨이 크베르너 사의 석유시추선 오디세이호에 러시아의 에네르기아와 우크라이나의 UMZ 사가 공동 개발한 ‘제니트-3SL 발사체’를 싣고 적도로 가 발사한다. 무궁화-5호는 성공적으로 정지궤도에 진입했다.

    무궁화-5호는 3호의 두 배 정도인 4470kg의 무게를 가졌다. 당연히 성능도 크게 향상됐다. 5호는 민간용 통신 중계기뿐만 아니라 우리 군이 시용하는 통신 중계기도 실었다. 이로써 대한민국군은 무궁화-5호가 커버하는 각도 안에서는, 어느 곳에 있든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다. 5호의 수명은 15년이므로 상당 기간 한국통신과 우리 군은 안정적으로 위성통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5호는 방송장비는 싣지 않고 민군용 통신중계기만 실은 것이 특징이다.

    2009년 KT는 자사의 통신 서비스 명칭을 ‘올레’로 정하고 무궁화-3호를 대체할 무궁화-6호를 준비하면서, ‘올레-1호’로 고쳐 불렀다. 올레-1호는 프랑스의 탈레스가 제작했다. 이 위성은 2010년 12월 29일 남미 기아나에서 아리안-5 발사체에 실려 정지궤도에 올라갔다. 올레-1호에는 통신중계기는 빼고 방송중계기만 실었기 때문에 무궁화-5호보다 훨씬 가벼웠다.

    KT가 약진하고 있을 때 국내 1위의 이동통신업체인 SKT가 일본의 MBCO와 공동으로 미국 회사에 세계 최초로 DMB용 위성 제작을 의뢰했다. SKT는 이 위성을 ‘한별-1호’로 명명했다. 두 회사는 이 위성을 미국의 아틀라스-3A 발사체에 실어 2004년 3월 13일 지구 정지궤도에 쏘아 올렸다. 한별-1호의 수명은 12년이므로 SKT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이 기간에 빨리 달리는 차 안에서도 DMB 방송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시장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다

    민간 사업자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별’이라는 작은 저궤도위성을 제작해본 한국은 무궁화, 올레, 한별 같은 정지위성을 외국 업체에 의뢰해 띄웠다. 한국은 위성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한 나라가 되었다. 위성의 효용을 이해해야 위성을 제작하고 위성을 쏘는 사업을 할 의지가 생긴다. 선진국이 탐험을 하듯이 신기술을 개발한 후 시장을 창출했다면, 한국은 후발주자이기에, 시장을 보고 기술을 개발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시장을 보고 기술을 만드는 것은, 목표가 분명한 도전이기에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대도약을 뜻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항공우주연구소가 한국기계연구소에서 독립한 1996년부터 본격화했다. 그때 북한은 1차 핵실험을 선포하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한국은 북한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정찰위성을 갖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궁금증을 충분히 해소해주지 않았다. 이에 한국도 관측위성을 띄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우리별’은 영국 기술로 만든 ‘남의 별’이라는 시비가 있었으므로 진짜 우리 위성을 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한국이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관측위성을 만든다고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에, 항우연은 다목적실용위성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다목적실용위성의 별명은 ‘아리랑’으로 정했다. 항우연은 해상도 10m의 사진을 찍는 500kg의 아리랑-1호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개발 도중 계획을 바꿔 해상도를 6.6m로 높였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이렇게 크고 정교한 위성은 만들어본 적이 없기에 항공우주연구소는 미국의 위성 제작사인 TRW사를 ‘선생’으로 모셨다. TRW사는 미국의 정찰위성 ‘KH-12’ 제작에 참여했던 회사다. 항공우주연구소는 TRW에 연구진을 보내 ‘도제’처럼 설계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1999년 12월 2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개소 첫 작품’으로 아리랑-1호를 미국의 토러스 발사체에 실어 우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항우연은 바로 돈을 버는 사업에 참여했다. 미국의 유명 필름제조사인 ‘코닥’이 운영하는 위성사진 전문 판매회사인 ‘스페이스 이미징’사를 통해 아리랑-1호가 찍은 사진을 판매하기로 한 것. 당시 상업용 위성사진의 해상도는 최고 1m까지 올라가 있었으므로 6.6m인 아리랑-1호의 사진은 좋은 값을 받기 어려웠다. 빈약한 출발이었지만, 항우연이 돈벌이를 하며 위성 사업을 시작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아리랑-1호는 예상 수명을 넘겨 2008년 2월 20일부로 임무를 공식 종료했다. 아리랑-1호 발사 후 항우연은 흑백 해상도는 1m, 컬러 해상도는 4m인 카메라를 실은 아리랑-2호 제작에 도전했다. 1호와 달리 2호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만 과외선생을 모셔와 배우는 ‘우리 주도’ 방식을 택했다. 항우연은 본체의 80% 이상을 자체 제작하고 카메라는 이스라엘의 ELOP사를 과외선생으로 모셔 제작했다.

    한국, 2개 관측위성 운영

    상업성을 지향할 때는 생산단가를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건비도 절감해야 하지만, 값싸게 위성을 올리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당시 러시아를 비롯해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CIS)의 경제난이 자심했다. 이 중 몇몇 나라는 구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러시아를 상대로는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을 추진해 보유한 핵무기를 줄였다. 동시에 러시아를 제외한 나라에는 상당한 지원을 해주고 그 나라가 갖고 있는 핵무기를 없애는 비핵화협상을 추진했다.

    러시아와 CIS 국가들은 핵탄두를 제거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우주발사체로 개조해 위성을 발사해주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연히 위성을 쏘아주는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보잉과 록히드마틴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도 이러한 나라의 회사들과 협력해 위성 발사 단가를 낮추어야 할 정도였다.

    항우연은 가장 싸게 위성을 발사해주겠다고 한 러시아 흐루니체프 사의 로콧(Rockot) 발사체로 아리랑-2호를 올리기로 했다. 이때 항우연과 맺은 인연으로 흐루니체프는 그 후 두 번 발사에 실패하는 나로호의 1단을 만들게 된다. 2006년 7월 28일 러시아의 블레세츠크 공군기지에서 발사된 로콧은 아리랑-2호를 궤도에 진입시켰다.

    아리랑-2호가 찍은 사진을 고화질로 뽑아내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영상은 정보량이 많아 전송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항우연은 아리랑 2호가 촬영한 사진을 ‘스폿 이미지’사를 통해 판매했다. 1호 때보다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아리랑-2호는 설계수명 3년을 넘겼지만 지금도 쌩쌩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여담 두 가지를 밝히고 넘어가자.

    첫째는 아리랑-2호를 중국의 장정(長征) 발사체에 실어 쏘려다 좌절된 경우다. 항우연이 아리랑-2호 발사를 국제시장에 발주했을 때 가장 좋은 조건으로 응찰한 것은 중국 항천(航天)과기집단이었다. 항우연은 여기와 계약을 했는데 갑자기 미국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리랑-2호에는 미국산 부품이 탑재돼 있다. 미국은 이 부품을 공급하면서 아리랑-2호를 발사할 때는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보고 있기에 미국산 부품이 들어간 아리랑-2호를 중국의 발사체로 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기에 항우연은 즉각, 그러나 매우 조용히, 발사체를 러시아의 로콧으로 바꿨다.

    둘째는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아리랑-2호가 그 사실을 포착했느냐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하던 열차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숨진 곳이 전용열차가 맞는지, 서방 정보기관들은 북한 공식 발표 전에 김정일의 사망을 포착했는지 등에 큰 관심이 쏠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과 서방의 모든 정보기관은 북한 발표 전에 김정일 사망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유는 사전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죽을 것 같다’는 정보가 있었으면 중국과 서방국가들은 모든 정찰·관측위성의 초점을 김정일의 동선에 맞췄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각국은 늘 하던 대로 탄도미사일 기지를 비롯한 북한의 전략시설에 변화가 없는지 등을 관찰했다. 아리랑-2호도 김정일이 숨졌다고 하는 시각에 전용열차를 촬영하지 못했다.

    이는 휴민트(HUMINT·인간정보)가 없으면 이민트(IMINT·영상정보)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리랑-2호를 통해 상업용 위성사진 분야에 제대로 진출한 항우연은 해상도 70cm의 카메라를 실은 아리랑-3호 제작에 들어갔다. ‘퀵버드’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상업위성이 해상도 60cm의 사진을 찍고 있고, 일본 역시 해상도 60cm의 사진을 찍은 ‘광학-3호’ 위성을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항우연은 1t 무게의 아리랑-3호를 독자 개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메라에서 핵심 중의 핵심 기술은 개발하지 못해 유럽 EADS 아스트리움 사의 도움을 받았다. 항우연은 아리랑-3호도 가장 싼값에 쏘아 올리고자 했다.

    아리랑-3호 일본 H-2A로 발사

    그 시기 자국 위성만 쏘아 올리던 일본이 갑자기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자국 위성만 발사해주다보니 발사 횟수가 적어 단가가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국 위성을 유치해 발사해주면, 발사 단가가 내려가 자국 위성도 싸게 올릴 수 있다고 보고 러시아나 중국보다도 낮은 단가로 위성 발사 대행업에 뛰어든 것이다(2009년).

    한일 간에는 독도영유권 문제, 과거사 문제, 역사 왜곡 등 많은 현안이 있다. 그 시기 후쇼(扶桑)사가 만든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계약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는데 항우연은 ‘감정은 감정이고 실리는 실리다’라는 논조로 국민을 설득해, 일본과 아리랑-3호 발사 계약을 맺었다. 올해 5월 18일 일본은 다네가시마(種子島) 발사장에서 H-2A 발사체로 아리랑-3호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현재 아리랑-2호는 설계수명을 넘겼지만 건실히 작동하고 있으니 한국은 광학카메라를 탑재한 2기의 관측위성을 운용하게 된 것이다.

    적외선카메라 위성, SAR위성 제작

    봇물이 터지자 항우연의 위성 사업은 매섭게 질주했다. 구름만 덮여 있지 않으면 주야간 촬영이 가능하고 핵실험을 하거나 발사체나 미사일을 쏜 것을 탐지하는 적외선카메라 위성과 구름이 끼어 있어도 전천후 촬영이 가능한 레이더영상(SAR)위성 제작에 나선 것. 항우연은 적외선카메라를 탑재한 위성을 아리랑-3A(무게 1t)로 명명했다. 아리랑-3A는 3호보다 뛰어난 55cm 해상도의 광학카메라와 5.5m 해상도의 적외선 카메라를 싣는다.

    적외선카메라 해상도는 광학카메라보다 열 배 정도 떨어지니 5.5m는 우습게 볼 수 없다. 아리랑-3호 제작 경험이 있는 항우연은 아리랑-3A호에 실을 광학카메라를 대부분 국내에서 제작했다. 그러나 적외선카메라는 처음이라 독일의 AIM 사로부터 핵심 부품을 제공받았다. 아리랑-3A 본체는 T-50을 제작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AP우주항공이 조립했다.

    현재 아리랑-3A호는 최종조립을 끝내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 수정하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수정 작업은 2014년 9월경 끝난다. 아리랑-3A 제작이 한창이던 2009년 항우연은 아리랑-3A호를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기업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드네프르 발사체로 쏘아 올리기로 계약했다.

    항우연은 SAR 위성인 아리랑-5호 제작에도 도전했다. 레이더영상위성도 처음 만드는 것이라 선생을 찾아가 배우기로 했다. 여러 나라의 기업을 접촉한 끝에 이탈리아의 알레니아를 선생으로 정했다. 알레니아는 그 후 프랑스의 탈레스와 합병돼 TAS(탈레스-알레니아 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레니아는 TAS-I(이탈리아)로 개칭됐기에, 항우연은 이 회사로부터 최고 해상도 1m의 레이더영상위성 제작 기술을 배우게 됐다.

    아리랑-5호는 해상도를 1m로 하면 5km 폭을 관측하나, 해상도를 20m로 높이면 100m 폭을 관측할 수 있다. 보통은 3m 해상도로 30km 폭을 관측한다. 아리랑-5호의 제작은 이미 완료됐다. 항우연은 5호도 러시아의 드네프르로 쏘아 올리기로 계약했다.

    드네프르는 소련이 실전배치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 R-36을 개조한 것이다. 미국과 맺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따라 러시아는 R-36을 58기만 남기고 전량 폐기하게 되었다. 러시아 국방부는, 핵탄두는 떼어내 희석한 후 원자력발전용 연료 등으로 팔아버리고, 몸체는 러시아(45%)+우크라이나(45%)+카자흐스탄(10%)이 공동 투자한 코스모트라스(KOSMOTRAS) 사에 넘겨 발사체로 사용하게 했다. 코스모트라스는 우크라이나 기술로 R-36을 위성을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해 ‘드네프르(DNEPR)’로 이름 지었다. 발사는 러시아 발사장이나 카자흐스탄 발사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러시아 국방부의 심통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러시아의 ICBM인 R-36을 개조한 드네프르 발사체.

    코스모트라스는 후발업체인 만큼 낮은 가격을 써내 아리랑-5호와 3A호 발사를 낙찰받았다. 그런데 R-36 사용권을 불하해준 러시아 국방부가 코스모트라스에 더 많은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꼬여버렸다. 코스모트라스는 항우연과 계약을 맺고 중도금도 받았는데, 러시아 국방부가 ‘내 몫을 더 내놓으라’며 허가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드네프르를 발사하지 못하게 된 것. 이 때문에 5호는 제일 먼저 제작을 끝내고도 일본의 H-2 발사체로 쏘기로 한 3호에 발사 우선 순위를 넘겨주었다.

    항우연은 아리랑-4호는 만들지 않았다. 4는 불길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4호대신 3A호로 명명했다. 아리랑-3호, 3A호, 5호는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졌다. 사업을 시작할 때 정해놓은 순서가, 입찰과 개발 과정에서 늦어지고 빨라지면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사업에 착수한 것은 3호였지만,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5호였다. 3호는 국내 기업들이 대거 참여해 국산화하느라 진행이 더뎠다. 5호는 이탈리아 기업이 이미 개발해놓은 탑재체 기술을 활용했기에 가장 빨리 완료됐다. 그런데 5호는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드네프르 발사체 이용이 연기되면서 아직 우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코스모트라스와 러시아 국방부 간의 다툼은 상당히 심각하다. 항우연과 우리 정부는 러시아 정부 측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는 코스모트라스와 러시아 정부 간의 문제라며 일축하고 있다. 이 문제가 풀려야 한국은 아리랑-5호를 쏘아 올리고, 2014년 적외선 카메라를 탑재한 3A 역시 쏘아 올릴 수 있다. 이는 ‘싼 것을 찾아가다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된’ 경우라고 하겠다.

    항우연은 아리랑 사업을 계속한다. 아리랑-6호는 SAR위성으로 제작해 2016년 발사하고, 7호는 해상도를 더욱 높인 광학카메라를 탑재해 2017년쯤 올린다.

    항우연은 아리랑 위성들이 찍어온 한반도 사진 가운데 일부는 국가정보원이나 국방부 등에 제공해 안보 목적으로 사용하게 한다. 일부는 여타 부처에 제공한다. 그리고 민간이나 해외에서 주문이 있으면 그에 맞는 사진도 찍어 제공한다. 항우연은 수익을 내는 연구소인 것이다.

    아리랑위성을 제작하던 시절 항우연은 ‘천리안’으로 명명한 최초의 정지위성 제작에 도전했다. 한국에서 제작한 것 가운데 가장 커서 무게가 2.4t에 달했다. 천리안은 무궁화-올레위성처럼 적도 직상공 3만5786km에 떠서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통신 서비스와 기상관측, 해양관측을 한다.

    이 위성을 만들기 위해 항우연은 프랑스의 EADS 아스트리움을 선생으로 모셨다. 천리안에 탑재된 통신장비는 무궁화-올레위성이 하지 못하는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천리안은 2010년 6월 26일 프랑스령 남미 기아나에서 아리안-5 발사체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돼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99년 우리별-3호를 발사했던 KAIST가 106kg의 우리별-4호를 만들어 2003년 9월 27일 러시아의 블레세츠크 발사장에서 러시아의 코스모스(COSMOS)-3M 발사체로 발사했다. 우리별-4호는 우주와 지구 관측을 주목적으로 했기에 ‘과학기술위성-1호’로 불렸다.

    2009년 8월 25일 항우연은 한국 땅에서 최초로 위성을 띄우기 위해 나로-1호를 발사했다. 나로-1호에 탑재된 것이 우리별-5호에 해당하는 KAIST 제작의 ‘과학기술위성-2호’(99.9kg)였다. 나로호는 저궤도에 위성을 올리는 발사체를 시험 삼아 쏴보는 것인 만큼 당장 사용할 실용위성은 싣지 않고 우리별을 이은 과학기술-2호를 실었다. 그러나 이 위성은 나로호가 마지막 단계에서 페어링 분리에 실패함으로써 지구 궤도에 머물지 못하고 추락했다.

    우주 강국 머지않았다

    2010년 6월 10일 항우연은 나로호 2차 발사에 들어갔다. KAIST는 나로호를 2번 발사할 것으로 보고 과학기술위성-2호를 2개 만들었기에, 남은 것을 2차 발사에 들어간 나로호에 실었다. KAIST는 나로호 1차 발사에 실었던 것은 과학기술위성-2A호, 2차 발사에 실은 것은 과학기술위성-2B호로 구분했다. 그러나 2차 발사를 한 나로호가 공중폭발했기에 2B호도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올해 가을 항우연은 나로호 3차 발사를 하는데, 여기에는 KAIST가 새로 만든 나로과학위성이 탑재된다. 나로과학위성은 과학기술위성-2호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그동안 발전한 기술을 접목했기에 꽤 뛰어난 관측장비를 싣는다고 한다.

    항우연이 중심이 돼 추진해온 한국의 위성 사업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우주개발 선진국들은 발사체를 먼저 개발한 후 위성을 개발했으나 한국은 거꾸로 위성부터 개발했다. 덕분에 발사체는 완성하지 못했는 데도 위성만큼은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는 퀀텀 점프를 했다. 위성은 거의 대부분이 전자장비로 구성된다. 한국은 전자산업과 IT(정보기술)산업 강국인 만큼 위성 제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은 만들어봐야 할 위성은 대부분 다 제작해본 것이다.

    이제부터는 위성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큐브 위성처럼 소형 위성을 무더기로 띄워 한국형 GPS 망을 구성해내야 한다.

    위성 분야는 한국이 우주 강국으로 가는 노정에 처음으로 돌파한 관문이다. 이어 발사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우주 강국 한국은 생각보다 빨리 구현될 수 있다. 원자력 강국에 이어 한국이 우주 강국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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