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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권태균의 오지 기행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경북 봉화군 물야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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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청암정

약수터 옆에는 호박엿 파는 좌판이 즐비하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인데 옆에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던 권태균 선생의 설명으로 이해가 된다. 엿을 먹으면 자연스레 물을 찾게 되고 물 맛 또한 더없이 좋게 느껴진다는 해석은 무릎을 탁 치게 한다. 그래서 페트병에 약수를 담아 파는 물장수들의 상술이 호박엿 좌판을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수터에서 물을 파는 것은 현행법에 엄격히 규제된다. 그래서 약수터에서는 물값 대신 페트병을 조금 비싸게 팔아 물 파는 이익을 대신 남긴다는 설명에 세상살이의 묘한 이치를 보는 듯하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정자

가을 초입, 물야 들녘엔 담배농사가 한창이다. 군데군데 펼쳐진 들판에서 할머니들은 소박한 담배 꽃과 커다란 담배 잎을 따 자루에 담느라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 새벽 5시 반에 나와 열 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은 6만5000원. 게다가 새참과 중식, 커피까지 제공돼 벌이가 쏠쏠하다고 건강한 모습의 팔순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런데 도대체 이 땅의 영감님들은 모두 어디 가셨는지, 들녘에는 할머니들뿐이다. 사실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오지를 찾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봉화읍 유곡리에는 닭실마을이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충재 권벌의 후손들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충재 고택 입구의 정자가 눈길을 끈다. 푸른 바위에 지은 정자, 청암정(靑巖亭)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위의 땅을 파내 정자를 두르는 연못을 만들었다. 바위틈에다 단풍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고, 둑에는 크고 작은 느티나무, 향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이 둘러 있다. 그 틈을 뚫고 허리를 잔뜩 구부린 떡버들나무가 수백 년 세월을 지키고 있다. 자연을 절묘하게 이용해 건축가들이 다투어 찾는 곳이다. 영화 ‘바람의 화원’ ‘음란서생’, ‘스캔들’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정자를 보며 셔터를 누르는 젊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봉화 땅 물야 들녘은 이미 푸른빛을 시름시름 잃어가고 있다. 나락은 하루가 다르게 금빛으로 물들고 들녘의 콩은 태양빛에 여물어간다. 곧 가을은 깊어갈 것이며 과꽃들도 머리를 떨어뜨리고 저 혼자 바싹 마를 것이다.



칸나에 얽힌 추억들

이렇게 생명의 기운이 잦아드는 들녘에 나 홀로 핏빛으로 독야청청 서 있는 꽃이 눈에 띈다. 칸나다. 아뿔싸, 칸나만큼 기성세대에게 각인된 꽃이 또 있을까. 서울대 미대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구혜영의 소설 ‘칸나의 뜰’은 그 시절 청춘들이 밤새워 읽던 책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때의 청춘들은 졸업 시즌이 되면 저마다 칸나 앨범을 주고받으며 꽃말처럼 ‘행복한 미래’를 맹세하곤 그랬다. 그래서 추억의 또 다른 이름인 칸나 앨범은 그 시절 청춘에게 찌릿찌릿한 설렘을 안겨주던 서랍장 안의 보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1978년, 지금은 역사가 되어버린 TBC에서는 동명의 소설을 토대로 ‘칸나의 뜰’이라는 주말 연속극을 방영해 장안을 울린 바 있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한때 그토록 소중했던 앨범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고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 꽃마저 지금의 도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이국적인 칸나는 청춘을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러나 잠시 칸나가 남몰래 말라가면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진다. 그 농익은 핏빛 꽃잎 때문에 시인 나희덕은 봄이 와도 칸나가 필 때까지는 여전히 겨울이라고 노래했다. 가을이 신작로에 흠뻑 젖어들었다.

‘워낭소리’의 무대에도 가을이 저며들었다


신동아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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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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