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임원, VJ, 캐디, 강사는 근로자일까 아닐까

  • 입력2012-11-21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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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중견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던 나억울 씨는 2007년 4월 직장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이사로 승진했다. 5000만 원에 못 미치던 연봉은 600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회사로부터 법인카드와 중형 승용차를 지급받는 등 대우도 확 달라졌다. 그러나 나씨가 회사에서 맡은 직책은 변함없이 연구소 팀장이었다. 맡은 일도 다른 임원 밑에서 연구·개발 업무를 하는 것으로, 부장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씨는 임원 생활 1년 반 만에 회사로부터 실적 부진을 이유로 계약해지 통지를 받았다. 그는 졸지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2 J학습지회사의 방문학습교사 홍연필 씨는 5년 이상 성실하게 근무해왔고 꾸준히 회원 수를 늘렸다. 그럼에도 오히려 최대 100만 원까지 깎인 보수를 받게 되자 노조를 통해 회사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단체교섭도 계속 요구했다. 회사 측은 이에 불응했고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홍씨 등 방문학습교사 8명에게 위탁계약해지를 통보했다.

    #3 K방송사는 2007년경 2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 근로자를 정규직 근로자로 전환하게 하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소속 VJ들을 정규직 근로자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VJ들에게 사업자등록을 하도록 요구했다. VJ들이 거부하자 방송사는 이들과의 계약을 종료했다. VJ는 방송국에서 지급되는 카메라가 아닌 본인 소유 6mm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하고 출·퇴근시간 등의 근태관리를 받지 않으며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다.

    승진 1년 반 만에 해고

    그렇다면 나억울 씨, 홍연필 씨, VJ들은 해고무효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을까. 우리 법은 정당한 이유 없이 근로자에게 해고 등 징벌을 하지 못하게 한다. 경영상 이유에 의해 부득이하게 해고하더라도 우선 재고용 기회를 주어야 하는 등 고용의 안정성을 꽤 강하게 보호하는 편이다. 근로자의 임금은 회사의 다른 채권에 비해 우선 변제받을 수 있으며 근속연수에 비례해 증가하는 퇴직금도 보장받는다. 또한 일을 하다 다치면 산업재해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을 수도 있고 일자리를 잃으면 실업급여도 받는다.



    그뿐만 아니다. 근로자는 노동조합법에서 정한 권리도 행사할 수 있다. 헌법도 근로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근로자가 노조 조직,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가 근로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면 그 고용주는 부당노동행위로 형사 처벌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근로자는 근로기준법 및 노동조합법의 혜택을 누린다. 문제는 근로자로 인정받느냐다.

    근로자는 일을 해 번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에 대해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근로자는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여기서의 임금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돈을 말한다. 월급이든 주급이든 시간급이든 상관없지만 반드시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급여가 있어야 한다. 기본급 없이 순전히 실적 수당만 지급받는 경우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근로자가 될 수 없다.

    근로자의 근로 형태는 일용직, 임시직이라도 상관없고 육체노동을 하든 정신노동을 하든 무관하다. 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무방하고 심지어 불법체류자라고 해도 근로자가 될 수 있다. 다만 근로자가 하는 일 자체가 불법인 경우에는 근로자로 보호받지 못한다. 성매매, 불법도박, 청부살인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근로자가 될 수 없다.

    근로자는 또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해야 한다. 즉 사용자의 지휘, 감독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법원은 근로자의 업무가 사용자에 의해 정해지는지, 근무를 거부할 수 있는지, 사용자가 근무 시간과 근무 장소를 정하는지, 업무를 지휘감독하는지 등 여러 요소를 종합해 종속성 여부를 판단한다. 이 중 일부 요소가 없더라도 전체적으로 종속성을 인정할 수 있으면 근로자로 본다.

    회사의 임원은 보통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법원은 회사의 이사 또는 감사 등 임원이라고 해도 임원 지위나 명칭이 명목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매일 출근해 대표이사나 다른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일정한 근로를 제공하면서 보수를 받는 관계에 있었다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례1의 나억울 씨가 이사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업무수행에 관해 다른 임원의 지휘·감독을 받아왔다면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학원 종합반의 강사도 학원에서 정해준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 교재로 강의하고 학생 수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지 않으므로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학원 단과반의 강사는 다르다. 기본급여 없이 강의 시간과 학생 수에 따라 성과수당을 받고 출퇴근 시간이 강의일정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면 근로자성이 부인될 수 있다. 보험설계사도 보험유치 실적에 의해 수당이 지급되는 것이라면 보험회사에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다고 할 수 없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대법원-행정법원 다른 판결

    방송국 VJ에 대해선 법원은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VJ들이 취재기자의 기획의도에 따라 작성된 촬영 및 편집 구성안에 따라 촬영·편집 작업 중 지속적으로 수정지시를 받아왔다는 점을 고려해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한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밖에 법원이 근로자성을 인정한 직업은 골프장 캐디, 미용학원 강사, 대학교 시간강사, 외판원 등이었다. 반면 지입차주, 웅진코웨이 정수기 코디, 대리운전기사, 방송국 구성작가, 채권추심원은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입차주는 본인 소유 화물차량을 특정 운송업체 이름으로 등록한 사람을 일컫는다. 지입차주들이 가입된 화물연대가 파업하자 화물운송업체가 지입차주들의 불법파업으로 업무를 방해받았다며 지입차주들을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지입차주들이 운송업체의 지시에 응해야 할 종속적인 노무제공 의무를 갖는다고 볼 수 없고 차주들의 집단적 운송거부가 운송위탁계약의 불이행에 불과하므로 업무방해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학습지교사의 경우 대법원은 2005년 판결에서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학습지교사가 회사로부터 지급받는 수수료는 근로시간이나 내용과는 관계없이 수금실적에 의해서만 지급액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임금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어 대법원은 학습지 교사로 구성된 단체의 단체교섭요구에 회사 측이 응하지 않은 것은 노동조합법상 부당노동행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이러한 대법원 판결과 반대되는 판결을 내렸다. 사례2의 홍연필 씨 등 학습지 교사들은 J학습지 회사의 계약 해지가 근로기준법상 ‘부당해고’에 해당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만든 노조와 교섭을 하지 않은 것은 노동조합법상 ‘부당노동행위’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해당 교사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근로자성을 부인했고 “근로자가 아니므로 부당해고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대등한 교섭력 확보를 통한 노동자 보호라는 노동조합법의 입법 취지와 교사들이 근무 대가인 수수료만으로 생활하면서 상당한 정도로 J학습지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학습지 교사에게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서의 성격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어 “회사가 교사들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한 것은 노조에 가입·활동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것이어서 노동조합법상의 부당노동행위인 만큼 무효”라고 결론을 내렸다.

    임원, VJ, 캐디, 강사는 근로자일까 아닐까
    근로자 범위 가능한 한 넓혀야

    근로자로 인정받는지 여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면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게 될 수 있고 사회안전망에서도 벗어나게 될 수 있다. 근로자의 범위를 가능한 한 넓게 해 우리 사회의 보호 울타리를 크게 쳐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행정법원이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을 구분해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성을 인정한 것은 진일보한 결정이다. 이번 판결이 대법원 판례 변경의 단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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