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코카콜라 vs 펩시

‘톡 쏘는’ 맛 100년 전쟁

  • 전성철|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dawn@donga.com

    입력2012-11-21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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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라(Cola)는 서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높이가 10m가 넘는 벽오동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이다. 현대 산업문명의 상징이자 탄산음료의 대명사인 콜라는 바로 이 콜라나무에서 비롯됐다. 19세기 말 처음 콜라를 만들 때 음료에 카페인 성분을 넣기 위해 이 콜라나무의 열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는 콜라를 만드는 많은 회사가 있다. 최근 국내 대형마트 업계 1위 이마트가 자사 브랜드 제품으로 수입을 시작한 미국의 ‘베스콜라’를 비롯해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코폴라’, 인도의 ‘텀스업’, 터키의 ‘콜라 터키’, 팔레스타인의 ‘스타콜라’ 등이 그것이다.

    한때는 우리나라 기업에서도 콜라를 만들었다. 코카콜라의 국내 라이선스 생산을 담당하던 범양기업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콜라독립’이라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광고카피를 내걸고 815 콜라를 내놓았다. 815 콜라는 이듬해인 1999년에는 내수시장 점유율을 13%대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소비자의 입맛을 완전히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2007년 범양식품이 부도를 낸 뒤 시장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처럼 다양한 콜라가 생겨나고 한 시대 또는 한 지역을 풍미했지만 글로벌 소비자의 머릿속에 콜라 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다. 100년 넘게 콜라 시장을 확실하게 지배해온 코카콜라 컴퍼니와 펩시코, 두 기업의 경쟁사는 산업계에서 세기의 라이벌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약사가 만든 음료



    세계 콜라 시장의 양대 축 가운데 먼저 콜라를 만든 곳은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1886년 5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존 S. 팸퍼트 박사의 손에서 태어났다. 약제사였던 팸퍼튼 박사는 코카콜라 시럽을 생산해 ‘제이콥 약국(Jacob′s Company)’에서 5센트에 판매했다.

    팸퍼튼 박사가 그저 ‘맛있는 음료’라며 만들어낸 이 탄산음료에 이름을 붙인 것은 제이콥 약국의 경리 사원이던 프랭크 로빈슨이다. 그는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짓고 두개의 대문자 ‘C’를 멋들어지게 흘려 쓴 스펜서체의 코카콜라 브랜드 로고까지 만들었다.

    코카콜라라는 기막힌 제품을 만든 팸퍼튼 박사는 생전에 이 음료의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18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여러 파트너에게 사업지분을 쪼개 팔았고 그중 한 사람이 아사 캔들러였다.

    아사 캔들러는 1889년 애틀랜타 저널에 전면광고를 싣고 본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그는 팸퍼튼 박사의 전 동업자인 프랭크 로빈슨 등과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코카콜라 컴퍼니라는 회사도 세웠다. 1893년에는 코카콜라 상표를 미국 특허청에 등록했고, 같은 해 주주들에게 첫 배당금으로 주당 20달러를 나눠줬다.

    공교롭게도 1890년대 초반 라이벌 펩시콜라를 처음 만든 칼렙 브래드햄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뉴번의 약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음료를 처음에는 ‘브래드의 음료수(Brad′s Drink)’라고 판매하다가 1898년 8월 28일 펩시콜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왜 펩시콜라라는 이름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칼렙 브래드햄이 ‘펩 콜라’를 인수해 펩시콜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 그 첫 번째다. 그리스어에서 소화를 의미하는 ‘펩스(Pepse)’라는 단어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펩시콜라가 브랜드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펩시콜라 컴퍼니가 설립된 해(1898년)로부터도 5년이 지난 1903년 6월 16일이다. 펩시콜라 컴퍼니가 펩시코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65년 프리토 레이와 합병하면서부터다.

    코카콜라의 보틀링 사업

    콜라는 식음료 부문에서 단연코 대중문화의 상징이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건 가장 가난한 사람이건 똑같은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도 코카콜라를 즐길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코카콜라는 동일한 맛이고, 돈이 많다고 해서 더 맛있는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콜라의 대중화를 주도한 것은 코카콜라였다. 1894년 미국 미시시피 주의 조지프 비데한은 약국의 소다수 기계를 통해 판매하던 기존 방식 대신 코카콜라 원액을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는 이른바 ‘보틀링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현재 전 세계 콜라시장의 표준이 된 보틀링 비즈니스 사업의 모델은 여기에서 비롯했다.

    빨간색이 코카콜라의 상징색이 된 것은 이 무렵이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코카콜라의 광고문구는 흑백으로 인쇄됐다. 1890년 말 컬러인쇄가 보급되자 코카콜라는 로고에 빨간색을 쓰기 시작했다. 코카콜라는 애틀랜타에서 처음 판매를 시작할 무렵, 콜라를 판매하는 약국 외벽 흰 천 바탕에 빨간 글씨로 ‘맛있고 상쾌한 코카콜라! 맛있는 코카콜라가 5센트’라고 적은 옥외광고를 했는데 그 이미지를 광고에도 사용한 것이다.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새겨진 로고는 이후 코카콜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가 됐다.

    코카콜라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사품이 쏟아지자 코카콜라는 1916년 어둠 속에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컨투어 병을 만들어냈다. ‘콜라병 몸매’라는 말까지 생겨난 유명한 콜라병이 탄생한 것이다.

    컨투어 병의 모태가 된 첫 스케치는 1913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코코넛 삽화에서 비롯됐다. 밋밋하고 직선적인 선을 쓰는 다른 음료 병과 차별화하기 위해 코코넛 열매의 굴곡 있는 모양을 차용한 것이다. 컨투어 병은 1950년 소비재 가운데 최초로 시사 주간지 ‘타임’의 커버 모델이 됐고 1960년에는 미국 특허청에 상표 등록돼 누구도 베낄 수 없는 코카콜라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코카콜라는 새로운 패키지 디자인의 인기를 등에 업고 1920년대에 이미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 홍콩, 필리핀, 중앙아메리카에까지 퍼져나가 글로벌 탄산음료 시장을 휩쓸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코카콜라에 큰 기회가 됐다. 코카콜라사의 당시 사장이던 로버트 우드러프는 미군이 배치된 모든 전장에 코카콜라를 한 병당 5센트에 공급했다. 전쟁 기간 50억 병의 코카콜라가 그렇게 팔려나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럽과 남태평양 등지에 64곳의 보틀링 공장이 지어졌다. 코카콜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도 그 직후인 1950년대 6·25 전쟁을 거치면서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

    반면 펩시콜라는 초창기에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전역에 보틀링 공장을 건설하며 승승장구하던 펩시콜라는 1920년 선물거래를 통해 비싸게 사들인 설탕 값이 폭락하며 큰 위기에 처했다. 브래드햄은 코카콜라가 자신의 회사를 사주길 원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펩시콜라는 파산해 주인이 바뀌는 시련을 겪었다.

    처절한 상황의 후발주자 펩시콜라가 꺼내 든 건 결국 저가전략이었다. 1934년 펩시콜라의 가격을 코카콜라의 반값에 내놓은 것이다. 시장점유율은 순식간에 14%선까지 높아졌고 이는 회생의 발판이 됐다.

    펩시콜라는 1950년대 이후,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며 끈질기게 코카콜라를 추격했다. 젊은 소비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 전략을 구사하면서 ‘짝퉁 콜라’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젊은 브랜드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코카콜라에 대한 펩시콜라의 공세가 절정에 다다른 것은 1973년 TV광고에서다. 펩시콜라는 소비자들에게 눈을 가리고 자사 콜라와 코카콜라를 시음하도록 했고 그 과정에서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쪽에 손을 든 소비자의 모습을 전파에 실어 내보냈다. TV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광고는 코카콜라에 아픈 한 방이 됐다.

    콜라 시장에서 100년 가까이 선두를 지켜온 코카콜라의 반격도 녹록지는 않았다. 코카콜라는 1980년대 들어 청량음료 시장에 ‘올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거액의 개발비를 들여 1985년 개발한 ‘뉴 코크’는 기존 소비자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하지만 코카콜라가 2개월 뒤 뉴 코크 대신 기존 코카콜라 제품의 생산을 재개하자 CNN을 비롯한 주요 언론은 이를 속보로 다루며 뜨거운 환호를 보냈고 시장점유율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코카콜라는 그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기존 코카콜라 사업이 축적해온 엄청난 성공을 보여주는 일”이라며 반겼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코카콜라는 꾸준히 펩시콜라와의 격차를 벌리며 확고하게 1위를 수성했다.

    차별화로 몸집 키운 펩시코

    펩시는 콜라 시장에서 코카콜라의 벽을 넘지 못하자 돌아가는 전략을 택했다. 전체 사업에서 콜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고 대신 각종 주스와 스낵류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종합식음료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1998년 트로피카나를 인수한 데 이어 2001년에는 게토레이로 유명한 퀘이커오츠와 합병했다. 2006년 10월 펩시코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인두라 누이는 과일주스와 건강음료 사업에 힘을 실어주며 이 같은 변신에 속도를 더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펩시코는 2004년에는 매출액, 2005년에는 시가총액과 순이익에서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펩시코 하면 흔히 음료회사로 알고 있지만 이 회사가 지난해 전 세계에서 올린 670억 달러의 매출 가운데 49%는 식품과 스낵 사업부문에서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펩시콜라의 이 같은 전략이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펩시콜라는 2010년 탄산음료 시장에서 코카콜라의 ‘코크’와 ‘다이어트 코크’에 1, 2위 자리를 모두 빼앗기고 3위 브랜드로 추락했다. 대표제품의 위상 추락은 펩시코의 주가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인드라 누이가 올해 초 “콜라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사주를 매각하거나 합작사를 설립할 수도 있다”며 펩시콜라에 대한 대대적 투자를 선언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다. 펩시코는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1%, 순이익은 2% 늘렸지만 이 같은 안정적 상황에 만족하는 대신 과감한 구조조정을 택했다. 8700명을 감원하고 여기서 아낀 비용 15억 달러를 펩시콜라 마케팅에 쏟기로 한 것이다. 취임 5년 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인드라 누이가 올해 8월 한국을 처음 방문하면서 이재혁 롯데칠성음료 사장과 김용수 롯데제과 부사장을 만난 것도 콜라전쟁을 다시 시작하면서 우군(友軍) 네트워크를 공고하게 다지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롯데칠성음료는 36년째, 롯데제과는 7년째 펩시코 제품을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녀는 방한 기간에 기자들과 만나 “롯데와 함께 다른 국가에 진출할 가능성도 있다”며 협력 확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산타클로스 전쟁

    펩시코가 콜라 시장에서 코카콜라에 또다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두 라이벌 기업의 전투는 산타클로스로부터 시작하는 모양새다.

    빨갛게 상기된 볼과 수북한 흰 수염, 빨강모자와 검정 부츠를 신은 넉넉한 몸매의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사실 코카콜라의 발명품이나 다름없다. 생트 헤르, 페르 노엘, 크리스 크링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기념 방식이나 기념일도 제각각이던 산타클로스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1931년 코카콜라의 광고였다.

    미국의 화가 해든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이 코카콜라의 상징인 빨간색 옷과 콜라 거품을 본뜬 흰 수염을 모티프로 삼아 오늘날의 산타클로스 모습을 그려냈다. 1931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 광고에 등장한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인물도 선드블롬의 친구 로 프렌티스(Lou Prentice)였다.

    선드블롬은 친구 프렌티스의 얼굴을 보고 산타클로스를 그리다가 프렌티스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새 모델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한 지인이 그에게 거울을 들여다보라고 조언했고, 선드블롬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죽은 프렌티스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스스로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됐다.

    산타클로스가 종교적 진지함이나 엄숙함을 벗어버리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왔다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들이켜는, 어린아이들의 익살스러운 친구 이미지가 된 것도 결국 선드블롬과 코카콜라가 한 일이다.

    펩시코가 콜라 시장으로 다시 눈을 돌리면서 픽업한 모델은 산타클로스였다. 코카콜라의 상징이 된 산타클로스를 아예 자사 광고에 내세운 것이다.

    펩시코는 지난해 산타클로스가 휴양지에서 펩시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담은 광고를 만들면서 ‘여름엔 펩시’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코카콜라를 자극했다. 펩시코는 산타클로스의 변심을 주제로 광고를 제작한 것 외에도 오디션 프로그램 ‘더 엑스팩터’를 후원하면서 광고시장에서부터 ‘아메리칸 아이돌’을 후원하는 코카콜라와 정면승부를 다시 시작했다.

    지속 가능한 지구 만들기

    코카콜라와 펩시코의 경쟁은 탄산음료 시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착한 기업, 착한 브랜드가 화두인 오늘날 두 회사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부문에서도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산타클로스와 함께 코카콜라의 오랜 모델인 북극곰을 보호하기 위해 코카콜라가 벌이는 캠페인이 그 한 예다. 북극곰은 코카콜라가 1993년 코카콜라 클래식 광고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에지 크리에이티브(Edge Creative) 프로덕션과 컴퓨터 애니메이션 전문업체 리듬 앤 휴(Rhythm · Hues) 사에 의뢰해 만든 캐릭터다. 애니메이터들이 실제 북극곰의 사진과 필름을 연구해 만들어낸 이 캐릭터는 세계인에게 코카콜라 브랜드가 한층 친숙하게 인식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코카콜라는 지구 온난화로 북극곰이 멸종위기에 놓이자 자사 모델 구하기에 나섰다. 세계적 환경보호단체인 세계야생기금(WWF)과 함께 북극곰을 살리기 위한 모금에 나서는 한편 다양한 환경보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00% 재활용이 가능한 혁신적 친환경 용기인 ‘플랜트 보틀’을 개발하고 공장에서 사용한 물은 정화해 가뭄이나 농번기에 농업 및 공업용수로 공급해 수자원 이용 효율성을 높였다. 2007년부터는 ‘어스 아워(Earth Hour·지구촌 불끄기 행사)’에도 글로벌 후원사로 참가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일을 돕고 있다.

    국내에서도 코카콜라는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2008년 우리나라 정부가 추진한 탄소성적표지 시범사업에 참여해 국내 음료업계 최초로 음료제품에 대한 탄소성적 인증을 취득한 것이 대표적이다.

    2010년에는 국내 음료제품 중 가장 가벼운 14g짜리 페트병을 사용한 생수제품 ‘휘오 순수’를 출시해 화제가 됐다. 기존 제품 ‘순수 100’의 패키지를 리뉴얼한 이 제품은 페트병 무게를 18g에서 14g으로 줄였다. 이는 1억 병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072t가량 줄일 수 있는 수준이다.

    펩시코는 ‘목적이 있는 성과(Performance with Purpose)’라는 슬로건 아래 △인류의 지속가능성 △환경의 지속가능성 △재능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인류의 지속가능성은 다양한 종류의, 맛있고 건강한 식음료를 생산해 인류가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다. 펩시코가 글로벌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통곡물, 식이섬유, 과일, 채소, 견과류 및 저지방 유제품의 비중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그 일환이다.

    비즈니스 활동에서 물, 토양, 에너지 및 포장재 혁신과 효율적 사용을 통해 지구의 천연자원을 보호하는 우수 시민이 되겠다는 의미인 ‘환경의 지속가능성’도 펩시코의 중요한 목표다. 이를 위해 제품 원료공급, 생산, 포장, 운송과정을 혁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산시설에서 매립해야 할 고체 폐기물을 근절하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다. 물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농산물 생산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환경보호와 관련해 펩시코는 몇 가지 구체적인 글로벌 목표를 세웠다. 올해 말까지 포장재 무게를 17만5000t가량 절감하겠다는 것이 그 첫 번째다. 2015년에는 개발도상국에서 300만 명분의 안전한 식수 이용을 지원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재능의 지속 가능성’은 임직원에 대한 투자를 통해 이들의 성공을 돕고, 기업의 성장을 촉진할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동시에 더 많은 고용기회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펩시코가 세계 각국의 사업 현장에서 해당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나 협력업체에 충분한 리소스를 제공해 해당 지역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 일은 바로 이와 관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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