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목마른 소녀 정윤희

눈부신 외모로 스크린 장악한 1970년대‘트로이카’의 전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2-11-21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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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는 너무도 예뻤다. 작고 까무잡잡한 인형 같았다. 어느 영화에 나오든 오직 그 미모만이 깊은 인상을 남겨, 내용도 배역도 잊히기 일쑤였다. 1970년대 ‘욕망을 좇는 여성’을 연기하면서도 연민을 자아내는 여배우가 그녀 외에 또 있었던가. 아름다웠기에 배우가 됐고, 1970년대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날아올랐던 정윤희.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국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짧은 전성기 후 은퇴를 선택한, 미처 세상을 태우는 불꽃이 되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여배우 정윤희를 추억한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인형 같은 외모로 1970년대 큰 인기를 모은 배우 정윤희.

    서울 무교동 골목에 촌스러운 차림의 앳된 여자가 들어선다.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골목은 잠들어 있다. 골목은 간밤의 흥청망청했던 자취를 숨기고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지난밤 향락이 남기고 간 쓰레기가 바람에 날린다. 네온 불빛이 꺼진 앙상한 간판을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그중 한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유흥업소다. 쾨쾨한 맥주 썩은 냄새와 담배 냄새가 불쾌하고, 테이블 위에 뒤집어 올려놓은 의자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마치 도깨비들의 잔치가 끝난 후의 도깨비 소굴 같은 괴괴한 곳이다. 여자는 향락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술집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선다. 그때 들어서는 남자. 여자는 취직하기 위해 아는 언니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는 시큰둥해하며 요새 취직을 하려 해도 호스티스가 남아돈다며 손사래를 친다. 여자가 도망치듯 문가로 나오자 남자는 반색을 한다. 어두운 홀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아름다움이 밝은 햇살에 드러난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돌아보라는 둥, 고개를 들어보라는 둥 이것저것 주문한다. 여자는 인형처럼 아름답다. 남자는 선심 쓰듯 여자에게 오늘부터 일을 하라고 한다. 도깨비 장난 같은 면접 심사를 한 셈이다.

    밤이 오고 호스티스 대기실 한구석에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 여자. 일수 찍는 아줌마가 들어와 빌린 돈을 갚으라고 닦달을 하고 돈이 궁한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나가자, 이번에는 김밥과 떡을 한가득 이고 할머니가 들어와 아가씨들에게 외상으로 김밥과 떡을 판다. 남자가 오늘 처음 이곳으로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여자를 소개하자 호스티스들이 한마디씩 한다. “웃으며 들어왔다 울며 떠나가는 무교동 바닥”이라고 겁을 주고, 화장품과 옷을 빌려주며 “도깨비 장난 같은 호스티스를 하러 도깨비굴에 총도 없이 뛰어들어?” 신세 한탄 또는 자기비하조의 농을 던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부터 아가씨를 77번이라 부르겠다고 하고 나간다. 여자는 정신이 없다. 커다란 눈망울, 소녀 같은 작은 얼굴의 작은 체구를 지닌 77번 아가씨 정윤희의 무교동 입성 첫날이다. - ‘나는 77번 아가씨’(박호태 감독, 1978)

    호스티스의 탄생

    1970년대 중반. 지금은 양재역 사거리라고 불리는 서울 말죽거리는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나무 널빤지를 깔아놓지 않으면 도저히 다닐 수 없었고, 과수원과 비닐하우스밖에 없는 허허벌판에 들어선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에 이사 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신사동 사거리까지 나와 버스를 타고 제3한강교를 건너 시내로 들어와야 했던 그 무렵. 서울 제일의 환락가는 단연코 무교동이었다. 대우, 삼성, 현대라는 대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그곳에 취직을 하면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그런 회사들에서 일하는 남성들을 샐러리맨이라 불렀고 그들은 회사일이 끝나면 접대다 회식이다 하며 불나방처럼 환락가 무교동을 향해 몰려들었다. 방석집이라 불리며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흘러간 옛 노래나 부르며 막걸리를 팔던 술집은 도시 변두리로 물러나고 그 대신 맥주를 팔고,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홀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유흥업소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일하는 접대부 아가씨들을 호스티스라 불렀다. 홀에서 일하는 호스티스 아가씨들은 33번 77번 같은 번호가 이름이었고, 저녁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1970년대 한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사회였다. 자원도 기술력도 없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경쟁력은 노동인력이었다. 그중 값싸고 고분고분한,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이 청계시장과 구로공단의 공장 노동자로, 중산층의 가정부로, 버스 안내양으로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던 그 시절에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영화가 있었다. 1973년 발표된 조선작 단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원작으로 소설가 출신의 당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쓰고 신인 배우 염복순을 주연으로 해신인 감독 김호선이 만든 ‘영자의 전성시대’(1975)였다. 영화 포스터는 유례가 없을 만큼 도발적이었다. 고딕체의 영화제목이 포스터의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속옷 차림의 여주인공이 의자를 거꾸로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신인 여배우 염복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는데, 영화에서 왜 노출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염복순은 자신의 가슴이 작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당돌한 대답을 해 다시 한 번 장안의 화제가 된다.

    정작 영화의 내용보다 여배우의 노출에 관심이 쏟아졌지만, 김호선의 데뷔작 ‘영자의 전성시대’는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의 비극적인 몰락이 비교적 잘 표현된 영화였다.

    영자의 전성시대

    신인 배우 염복순이 연기한 농촌 출신 영자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집의 가정부로 일한다. 공장의 젊은 노동자 창수의 구애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자는 연애보다는 돈을 벌어 시골집의 살림에 보태는 것이 더 중요한, 어리지만 나름의 꿈과 계획이 있는 똘똘한 아가씨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주인집 방탕한 아들의 강간으로 깨지고, 영자는 쫓겨난다. 서울에 먼저 올라와 자리 잡은 고향 언니가 사는 중랑천변의 무허가 판잣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영자. 호스티스 일을 하는 언니가 남자를 데리고 오면 영자는 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쫓겨나와 여인숙에서도 가장 값싼, 여러 사람이 합숙을 하는 방의 차가운 윗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버틴다. 기술이 없는 그녀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봉제 공장에서 실을 감는 일을 한다. 드디어 월급날. 그녀가 받은 월급에서 가게 외상값, 여기저기서 빌린 빚을 갚고 나자 동전 몇 개만 손바닥에 남는다. 그녀의 언니와 영자는 손바닥 위의 동전 몇 닢을 보고 히스테릭하게 웃는다. 언니가 ‘빠’에서 버는 돈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무하고 웃기는 돈이다. 영자는 ‘빠’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언니를 따라 나서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무렵 영자에게 꿈이 생긴다. 여자 택시 운전사가 되는 것이다. 일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버스 안내양이 되는데, 만원 버스에 매달린 영자가 손님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를 쓰는 순간. 뒤에서 오던 차에 그녀의 손이 부딪히고 잘려진 그녀의 팔은 빌딩 숲 사이로 날아가버린다. 외팔이가 된 영자는 팔 한쪽 값으로 30만 원을 받고 그 돈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있는 시골로 전부 보내버리고 자살을 결심한다. 사는 것도 어렵지만 죽는 것도 어려운 일. 그녀는 팔이 없는 빈 소매를 등 뒤로 감추고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 전형적인 신파 멜로드라마지만, 주인공들이 전전하는 목욕탕 때밀이, 철공소 직공, 식모, 버스 안내양, 봉제 공장 노동자, 호스티스 같은 직업과 그들이 일하는 곳의 풍경을 리얼하게 묘사하려 노력한 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신인 염복순은 백치미를 지닌 여배우라는 평을 들으며 이후 1980년대 한국 여배우들의 관능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백치미란 단어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고 여배우가 주인공인 호스티스 영화의 기틀을 다진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정윤희가 주연한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한 장면.

    70년대 트로이카

    영화 ‘나는 77번 아가씨’의 정윤희도 처음에는 야쿠르트 배달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아준다고 속인 날건달 같은 사내 김희라에게 딸을 빼앗기고, 딸을 되찾기 위해 무교동 바닥에 들어선 것이다. 그녀들의 말대로 무교동 바닥에 들어선 여자치고 사연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정윤희는 단시일에 최고의 인기 호스티스가 되고, 그녀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김희라와 그녀의 몸뚱이만을 노리는 온갖 종류의 남성들 사이에서 딸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978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호스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극장가를 점령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극장가는 남자가 주인공인 무협영화와 여자가 주인공인 호스티스 영화로 양분됐다.

    1970년대 중반. 1960년대 극장가를 수놓았던 여배우 트로이카가 사라진 빈자리를 대신하려 수많은 여배우가 등장했다. 아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성인 영화 ‘별들의 고향’과 ‘어제 내린 비’에 출연한 안인숙, 깜찍하고 발랄한 연기로 떠오른 ‘바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의 이영옥, 미스 롯데였던 서미경, ‘성숙’으로 신인 연기대상을 받은 유망주 양정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염복순 등등. 수많은 여배우의 등장과 퇴장 속에서 ‘나는 77번 아가씨’의 여주인공 정윤희는 최고의 흥행 여자 배우로 등극했고 비슷한 시기 주가를 올리던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새로운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사람으로, 제작자들이 찾는 1순위 여배우가 됐다.

    사실 데뷔 초기 정윤희에 대한 충무로 제작자와 감독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예뻐서 인기는 많은데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등장한 장미희 역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1960년대 트로이카 문희나 남정임, 윤정희에 비하면 그녀들의 연기는 초보 수준이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액션과 대사표현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당시 모든 신인 여배우의 대사는 성우가 대신 했으니 그녀들에게서 대사 표현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으로만 연기력을 보자면 1970년대 장미희의 표정은 다채롭지 못하고 뭔가 억지스럽다. 장미희가 표현하는 표정이 10여 가지라면 정윤희는 고작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빈약했다. 그렇지만 예뻐서 인기는 있으니 난감했다.

    다방 레지, 꽃순이

    정윤희는 1975년 정소녀 주연의 영화 ‘욕망’(이경태 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청춘극장’(변장호 감독)에서는 비교적 비중이 높은 조연을 맡았는데, 여주인공 김창숙과 신영일을 놓고 삼각관계에 놓인 부잣집 막내딸이었다. 이 영화에서 정윤희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인형같이 예쁜 얼굴을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한 여자를 연기하는데 아름다운 얼굴만 아니라면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릴, 특별할 것 없는 배우였다. 이후, 그녀는 하이틴 영화 ‘고교 얄개’와 ‘고교 우량아’에서 얄개 이승현의 예쁘고 철부지인 여대생 누나로 나와 귀여운 얼굴을 내비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해태제과 CF에 출연하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만천하에 알렸지만, 영화에서는 아직이었다.

    1976년 정윤희는 ‘고교 얄개’에서 연인 사이로 연기한 하명중과 함께 ‘목마와 숙녀’(이원세 감독)에 출연한다. 악성빈혈에 시달리는 발랄한 여대생 정윤희는 운동밖에 모르는 순진하고 무뚝뚝한 대학 야구선수 하명중과 만나 사랑을 하고, 죽음으로 이별을 한다. 미국 영화 ‘러브 스토리’와 비슷한 내용의 멜로드라마였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이듬해 출연한 사극 ‘임진왜란과 계월향’에서 정윤희는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배우는 좋은 감독을 만났을 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으악새’ 영화(액션 폭력 영화에 대해 무시하는 표현으로 배우들이 ‘으악’ 하며 쓰러지는 장면만을 찍는다고 붙여진 이름)를 닥치는 대로 찍었던 그 옛날의 임권택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던 변화기의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이 영화와 배우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 친구였던 제작자 정진우 감독의 부탁으로 TV에서 인기가 있던 정윤희를 써 TV 방송국에 작품을 팔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참”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윤희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77번 아가씨’가 만들어졌다. 얼굴은 예쁘지만 연기는 안 되는 배우. 그러나 대중은 그녀가 나오는 영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출연해 남성 관객의 욕망을 충족해주는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정윤희는 남성 관객의 욕망과 그것을 정확하게 노린 영화 제작자들에게 몇 년간 소모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김국환이 부른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꽃순이를 아시나요?’ 로 더 유명한 영화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협 감독, 1978)에서 정윤희는 시골에서 서울로 와 다방 레지가 됐다가 사진작가, 레슬링 선수 등등의 남자를 거치면서 결국 ‘꽃순이’란 이름으로 환락가를 전전하는 몸이 되는 역을 맡는다. 이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은 거의 모두 비슷하다. 발랄하고 청순한 여대생 아니면 순진한 시골처녀로 서울에 올라와 불행에 빠지는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다. 남성 관객들은 그녀가 무엇을 연기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만을 보러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1979년. 정윤희가 영화배우로 기억된다면 그래도 이 작품이라 할 만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겨울여자’(1977)로 1970년대 후반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김호선 감독의 영화 ‘죽음보다 깊은 밤’(1979)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망연한 얼굴로 누워 있다. 죽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잠에 빠진 것인가?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그녀는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이어 유행가 소리. 여자들의 악다구니 소리. 술주정뱅이들이 길 구석에서 구토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뒷골목 술집 거리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정윤희. 여대생이다. 의처증에 걸려 걸핏하면 술손님들에게 패악질을 하는 아버지, 모진 수모를 참아내며 족발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정윤희는 자신의 집인 족발집 앞에 섰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달아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남자친구가 일을 하는 밤업소. 음대생인 남자친구는 밤업소의 밴드에서 건반연주와 노래를 하며 학비와 생계비를 벌고 있다. 정윤희는 남자친구가 부르는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나는 불꽃처럼 세상을 태워 한 움큼 재가 되어 세상에 흩어진다네” 여대생인 정윤희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여자다. 그녀는 어머니처럼은 안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불태우는 찬란한 불꽃이 되고자 하는 여자다.

    죽음보다 깊은 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정윤희는 1984년 사업가 조규영 씨와 결혼하며 스크린을 떠났다.

    1978년 상업적인 성격이 농후한 한국 영화에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이 노골적으로 나온 예는 흔치 않다. 정윤희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1970~80년대 한국 여성의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여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키가 160cm 밖에는 안 되는 작은 여자’라 말하며,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은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현실에서의 정윤희와 배우 정윤희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듯한 대사를 한다. 이제 정윤희는 한 사람의 여배우가 돼가는 것이다.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의 등에 올라타 부잣집 담장을 넘겨다보며 커다란 정원과 아름다운 조경수를 사달라고, 소꿉장난을 하듯 자신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처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그녀가 날아오르거나 불꽃으로 타버릴 유일한 장점이자 약점이다. 잘생긴 재벌 2세의 눈에 들어 모델 제의를 받고 와인과 양식을 대접받고 가난한 남자친구의 자취방으로 들어온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김치찌개를 발로 차서 뒤엎어버리고 “이게 뭐야. 이렇게 살 바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라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끝내 남자친구를 별 볼일 없는 딴따라라고 부정하며 재벌 2세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 1970년대 말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여성의 욕망.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지고 남자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싶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여성을 정윤희는 연기한다.

    이 시기에 그녀는 가수로도 데뷔한다. 데뷔곡은 ‘목마른 소녀’. 음정이 미묘하게 뒤틀린 그녀의 노래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욕망을 좇는 여주인공은 대개 부정적으로 보이기 일쑤인데, 정윤희는 전혀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연민을 자아낸다. 이른바 굿 캐스팅이었던 셈. 정윤희는 악녀도 아니고 팜 파탈도 아닌, 작은 체구로 남자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기 인생의 성공을 꿈꾸는 목마른 소녀였다.

    짧은 전성기, 빠른 은퇴

    영화배우로 5년 차에 접어들 무렵. 그녀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 출연한다. 1970년대 초 ‘으악새 영화’나 찍는다며 무시를 당하던 이두용 감독이 작심하고 만든 걸작이다. 제작사는 감독의 재능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으며, 감독도 쫓기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이 영화에서 정윤희는 빨치산 대장의 딸로 기구한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나와 그럴듯한 연기를 해낸다. 요란한 술집 작부 화장을 한 정윤희가 방석집의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은 기구한 운명을 산 여성의 절망이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장면이다. 이쯤 되면 “어라 정윤희도 연기를 하네”라며 놀랄 수밖에 없다. 정윤희도 자신이 남성 관객의 눈요깃감으로 소모되는 그런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즐긴 모양이다. 오대산 정상에서 촬영할 때의 일이다. 자신의 촬영분을 모두 마친 정윤희가 산 아래에서부터 갖고 올라온 꽁치통조림을 까서 불을 피워 꽁치를 굽고 술 한잔을 준비한 뒤 촬영에 지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어여쁘고 귀여운 목소리로 “자 와서 꽁치 한 점과 술 한잔 하세요”라고 청해 모두를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때는 1980년. 이두용 감독의 야심작이며 한국 영화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인 ‘최후의 증인’은 갈가리 찢겨져 2시간 30분짜리 영화가 1시간 30분으로 잘리고 도려내졌다. 극장에서도 일주일을 못 채운 채 내려져 관객과의 만남을 원천 봉쇄당하고 만다.

    이듬해 정윤희는 다시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이번엔 ‘만다라’를 만들고 물이 잔뜩 오른 임권택 감독이었다. 영화 제목은 ‘안개마을’ 시골 학교의 여선생으로 출연한 정윤희는 마을의 바보이며, 이상한 남자 안성기에게 강간을 당한다. 안성기는 바보지만, 여성이 섹스에 목말라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여성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이상한 남자다. 그의 존재에 대해 마을 남성들도 여성들도 모두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정윤희가 약혼자와의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히스테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안성기가 따라와 그녀를 강간한다. 정윤희는 처음엔 반항하지만, 그와의 섹스로 뭔가가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임권택 감독은 마을을 떠나게 된 정윤희를 클로즈업해 여러 가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정윤희는 몇 해 전 ‘임진왜란과 계월향’을 찍을 때 인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찍었던 그런 배우가 아니었다. 아직 성에 차지는 않지만 임권택 감독이 주문하는 복잡한 감정을 미묘한 표정의 변화로 전달하는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뿔사! 그녀가 슬슬 연기자가 되어 가려던 그때. 그녀에게 들어온 영화는 ‘벌레 먹은 장미’였고, 몇 해 뒤 간통 사건이 터지고 그녀는 결혼을 하며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름다웠던 여인

    나는 정윤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동시대에 관람한 기억이 없다. 그녀가 조연으로 출연한 ‘고교 얄개’와 ‘고교 우량아’가 그녀를 극장에서 본 작품의 전부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거나 중학생이던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중 정윤희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애간장을 졸인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 이야기에 낄 자리가 없다. 정윤희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감독, 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감독, 1981)를 본 그들의 경험담을 듣다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면 그들은 대개 나를 깔보곤 했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오승욱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조소학과 졸업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영화제 각본상 수상


    고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 버스를 타고 이태원 앞을 지난 적이 있다. 신호에 걸린 버스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나는 인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내 눈길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 한 여자가 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작고 까무잡잡하지만 아름다운 인형 같은 여자. 영화 촬영 중인 정윤희였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들어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신호가 바뀌고 차는 떠났다.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몇 해 전 DVD로 나온 정윤희 주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보고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정윤희의 얼굴이 예쁘다는 기억만 남은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배우 정윤희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지만, 미처 세상을 태우는 불꽃이 되지는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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