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호

탄생 주역은 羊이었다

19세기 영국서 근대 경찰 첫 등장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입력2012-12-26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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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법과 질서의 수호자라는 인식을 줄 때 경찰은 시민에게 사랑받는다. 신뢰에서 나온 권위는 총, 칼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 19세기 영국 경찰이 그랬다.
    탄생 주역은 羊이었다
    범죄를 말하면서 경찰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범죄와 경찰은 창과 방패다. 새로운 창이 만들어지면 곧 새로운 방패가 나타난다. 범죄가 인류 역사와 시작을 같이한다는 말은 경찰 또한 그때부터 존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초기 경찰의 모습이 지금과 같을 수 없다. 과거에는 군과 경찰의 구분이 흐릿했다. 외적에 대한 대비는 군이 맡고 나라 안 범죄는 경찰이 전담하는 분담제가 선보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4000여 년 전 고대 수메르 기록에 치안활동을 하던 조직이 나온다. 기원전 1400년경 이집트에 해양경찰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또 기원전 600년경 페르시아에는 도로와 우편경찰 조직이 만들어졌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로마에 체계적인 경찰 조직은 필요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를 14개의 지역으로 나눠 각각의 지역에 치안장관을 임명해 지역 치안과 소방을 맡겼다.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랑스에도 일찍이 경찰조직이 존재했다.

    근대 경찰은 1829년 영국에서 출발한다. 그럼 그전에 존재했던 경찰은 뭔가? 경찰 기능을 행사했으니 경찰은 맞지만 근대 경찰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근대 경찰의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는 전문성에 있다. 로마나 프랑스에서 경찰은 순찰, 수사 등 경찰 고유의 일만을 전담하던 조직이 아니었다. 일반 행정업무도 담당하고, 세금을 걷기도 했다. 감옥 관리도 이들의 업무였다. 하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서 근대 경찰이 출범하면서 비로소 경찰은 순찰이나 수사와 같은 치안업무만 담당하게 됐고, 순찰 부서와 수사 부서를 분리해 전문성을 강조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 경찰이 탄생한 것은 특이하면서도 역설적이다. 사실 영국은 가장 늦게 경찰을 만들어야 정상인 나라였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모든 국가가 경찰이나 이와 비슷한 조직을 갖고 있을 때도 경찰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1829년 경찰이 만들어지기까지 경찰 없이 수백 년 이상을 버텨왔다. 경찰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게 경찰인데 영국은 왜 경찰을 그토록 멀리했을까. 그렇다고 영국의 치안 상태가 경찰 없이 잘 굴러갈 정도로 양호하지도 않았다.

    탄생 주역은 羊이었다

    현재 형태의 ‘근대 경찰’은 1829년 영국에서 창설됐다.

    고함 지르기와 10호반



    영국은 원래 ‘고함 지르기(hue and cry)’나 ‘10호반(tithing)’ 같은 제도로 치안을 유지했다. ‘고함 지르기’는 말 그대로 도둑이 들거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고함을 질러 이웃의 도움을 청하는 제도다. 고함이 들렸다 하면 의무적으로 도와주도록 했다. 동화 ‘늑대와 양치기’에서 동네 사람들이 양치기 거짓말에 쉽게 속은 것에는 고함을 치면 의무적으로 뛰쳐나와서 도와주게끔 돼 있는 탓도 있다.

    탄생 주역은 羊이었다

    영국 경찰의 성공 비결은 정치적 중립이었다.

    ‘10호반’은 10가구를 하나로 묶어 치안에 활용한 것이다. 원래는 ‘tything’으로 불렀는데 훗날 ‘tithing’으로 바뀌었다. 영어에서 ‘10’ 단위의 접미사는 ‘twenty’ ‘thirty’ ‘forty’처럼 대부분‘-ty’로 끝난다. 그래서 ‘tything’은 열 단위를 의미한다. ‘10호반’은 범죄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주는 기능을 했으며, 1066년 노르만족이 침공한 뒤 열 명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연대 책임 형태로 운영한 ‘10인제(Frankpledge)’로 바뀐다. 10명 중에 누가 범죄를 저지르면 나머지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체포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연대 처벌을 했다. 조선시대 다섯 집을 하나의 통(統)으로 묶어 서로 돕고 감시하게 만든 오가작통(五家作統)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오가작통제 역시 만약 이들 집에서 범죄자가 발생하면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모두 엄한 처벌을 받게 했다. 경찰력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나름대로 묘안으로 짜낸 해결책이었다.

    영국은 ‘10호반’ 10개를 모아 100가구로 이뤄진 ‘100인제(Hundred)’를 편성해 일종의 자경대 대장 격인 컨스터블(Constable)을 선출했다. ‘100인제’가 여럿 모여 오늘날 영국의 주(州)가 되는 샤이어(Shire)가 됐으며 샤이어의 우두머리를 리브(Reeve)라 불렀는데 미국 보안관인 셰리프(Sheriff)의 어원이 바로 샤이어 리브(Shire Reeve)에서 유래했다. 1215년 최초의 인권보장 헌장으로 유명한 마그나카르타가 만들어지고 1285년 윈체스터 협약이 체결된다. 윈체스터 협약의 결과로 작은 도시에도 야간에 파수를 보는 야경인(Night Watch)제도를 도입했으며 모든 주민에게 범죄자를 추적할 의무를 부여했다.

    좀도둑질만 해도 교수형

    이렇게 공식화된 경찰조직 없이 시민에 의존하는 치안 시스템이 19세기 초 최초의 근대 경찰이 창설될 때까지 이어졌다. 도시가 커지기 전까지 이런 시스템은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여 사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웃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는지 알 정도로 친밀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먼 곳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큰 위험이 따랐기 때문에 이동도 많지 않았다. 외지에서 온 사람은 금세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범죄가 발생하면 범인이 누군지 바로 알았고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 처리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다. 모직 가공 같은 공장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공장이 하나둘 늘어났고 싼값에 일할 수 있는 노동자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공장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도시가 만들어졌다. 특히 런던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16세기 중반 인구 5만 명에 불과하던 런던은 17세기 초 50만 명 넘게 사는 대도시로 변해 있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이동 또한 빈번해졌지만 ‘10호반’도 ‘100인제’도 존재할 수 없었다. 주위는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외지인은 계속 밀려들어왔다. 공장 일은 하루 16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할 만큼 가혹했지만 일자리가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자리가 없다고 다시 시골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스레 범죄가 늘 수밖에 없었다. 곧 극심한 상황이 닥쳤다. 당시 런던 시민의 3분의 1이 범죄자라고 할 만큼 심각했다. 궁여지책으로 충격요법을 썼다. 사과 하나를 훔치다 잡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실제로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좀도둑질을 하다 잡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다. 도둑질 아니면 달리 먹고살 방법이 없는 이들에게 사형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사형과 같은 엄벌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못한 데는 잡힐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없으니 마땅히 도둑이나 강도를 잡을 조직이나 사람이 없었다. 도둑질하다가 잡힌다는 것은 정말 재수가 없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였다.

    정부는 연좌제를 적용해 범죄자를 신고하지 않으면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처벌한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한 공권력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민병대를 동원해 순찰과 범죄자 체포에 나섰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민의 의용조직인 민병대도 믿을만한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순찰과 체포가 부실함은 물론이고, 설사 현행범으로 잡히더라도 약간의 뇌물만 쓰면 빠져나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범죄사냥꾼, 조너선 와일드

    조너선 와일드라는 희대의 인물이 등장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와일드의 활약상은 헨리 필딩이 쓴 ‘조너선 와일드전(傳)’이란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헨리 필딩은 1748년 와일드의 경험을 토대로 훗날 영국 경찰의 모태가 되는 보우가 치안대(Bow Street Runners)를 만들기도 했다. 1692년 영국에서는 노상강도법이 제정된다. 범죄자를 잡는 사람에게 보상금을 줘 범죄를 줄이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러자 이른바 현상금을 노리는 범죄사냥꾼이 나타났다.

    가장 유명한 범죄사냥꾼이 와일드다. 그는 도둑맞거나 강탈당한 재물을 되찾아주고 사례금을 받아 챙겼다. 경찰도 없던 당시, 잃어버린 귀중품을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와일드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와일드는 큰 재산을 모으는 한편 일약 런던 시민의 해결사가 되었다. 와일드는 남다른 비결을 갖고 있었다. 그가 찾아준 귀중품은 사실 그의 부하들이 훔친 것이었다. 원래 주인 것을 되돌려주고 돈만 챙긴 셈이다. 그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부하들은 정부 당국에 알려 감옥으로 보냈다. 범죄자를 신고했으니 당연히 보상금도 챙겼다.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와일드 자신이 원래 도둑이었기 때문에 범죄의 속성에 대해서도 훤했다. 때로는 현상수배 중인 부하를 신고해 포상금을 챙긴 뒤 감옥에서 탈옥시켜 다시 도둑질을 하도록 해서 포상금을 대폭 올리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신출귀몰한 와일드도 몰락의 순간은 피할 수 없었다. 투옥과 탈옥을 손바닥 뒤집듯 해치웠던 그였지만 1725년 2월 15일 부하의 탈옥을 돕다 잡힌 뒤 재판을 통해 그간의 수법과 죄악이 공개됐다. 시민의 지탄 대상이 된 그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고 만다. 와일드가 얼마나 유명했느냐 하면, 그의 교수형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구경하기 가장 좋은 장소를 파는 관람 티켓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런 지경이었지만 영국은 경찰 창설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했다. 영국이 경찰에 대해 극도의 혐오 태도를 보인 것은 이유가 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 이후 힘들게 의회민주주의를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1649년 청교도혁명과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절대 왕권의 복귀를 철저하게 힘으로 막았다. 왕이 지배하는 왕정은 당시 유럽 대부분 나라가 채택하던 체제였다. 특히 바다 바로 건너편 프랑스는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가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절대 왕정 국가들이 왕권을 누리는 기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게 경찰이었다.

    루이 14세는 과거 영주에게 속해 있던 경찰업무를 경찰대신에게 귀속시키면서 직접 통제했다. 또 무샤라고 하는 비밀경찰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끔 했다. 여관 주인들은 매일 아침 투숙객에 관한 인적 정보는 물론이고 대화 내용까지 비밀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귀족이 사는 집의 하인 역시 경찰 정보원이었고 우편 검열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루이 15세 때 경찰대신이었던 사르틴은 루이 15세에게 “길거리에서 3명이 얘기할 경우 그중 한 명은 우리 정보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였다.

    신성로마제국 역시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제국경찰법’을 제정하고 교회가 갖고 있던 교회행정을 제외한 일체의 국가 행정업무를 경찰 관할로 두었다. 황제의 권한은 곧 경찰 활동을 통해 이뤄지는 셈이었다.

    영국 의회는 경찰을 만들면 오랜 시간 피 흘려 쟁취한 의회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경찰권으로 무장한 군주가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 왕정체제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이다.

    근대 경찰 창설 늦어진 까닭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커다란 변화는 항상 예상하지 않던 곳에서 시작된다. 어찌 보면 ‘나비효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근대 경찰 탄생의 주역은 양(羊)이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봉건 영주들이 농사를 짓는 대신에 농민들을 몰아내고 목장을 만들어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양을 길러 양털을 뽑아내 모직물 공업의 원료로 팔아넘기는 것이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인클로저란 울타리를 두르는 것을 의미한다. 양이 도망치지 못하게 울타리를 두르고 농지를 목장으로 바꾼 것이다.

    대대로 농사만 짓고 살던 농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이들은 하나둘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됐다. 사정이 이랬던 터라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인클로저 운동을 거세게 비판한 바 있다. 1700년부터 1760년 사이 300만 에이커의 울타리가 새로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은 기술 혁신이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만들고,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하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됐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상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기차가 발명돼 사람과 상품이 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교통 혁명의 발판을 놓았다. 영국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식민지를 통해 상품의 대량생산과 소비가 이뤄졌다. 주식시장이 생겨 대규모 자본 투자 또한 가능해졌다.

    산업화는 도시화를 낳았다. 농지를 잃은 농민과 대규모 기계 생산에 밀려 일자리를 잃은 수공업자가 도시로 밀려들었다. 런던은 인구폭발과 도시팽창을 겪었다. 1800년경 인구 100만 명을 넘은 런던은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 도시의 인구밀집은 많은 사회문제를 유발했다. 영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분배는 공평치 못했다. 노동자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여성은 물론 어린이도 하루 16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공장에서 안전은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산업재해로 병들고 불구가 됐다. 재해 보상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인구가 갑자기 크게 늘자 주택보급과 상하수도 위생 상태는 말할 것도 없이 끔찍했다. 다리를 제대로 뻗지 못한 채 새우잠을 자야 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했고 위생 환경이 좋지 못하다보니 전염병이 항상 돌았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고 이는 잦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실 도시가 없을 때 폭동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도시화로 인구가 밀집한 상태에서, 그것도 불만이 팽배해 있는 실정에서 폭동은 항상 준비돼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불만 댕겨주면 바로 타오르는 짚더미와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한편으로 종교 갈등도 폭동 발생의 원인이었다. 1780년 영국 런던에서 ‘고든 폭동’이라고 부르는 큰 폭동이 일어났다. 1778년 의회에서 가톨릭 해방법이 통과되자 이에 반대하는 조지 고든이란 20대의 젊은 하원의원을 필두로 프로테스탄트들이 1780년 6월 의사당 건물을 포위하고 일부는 폭도로 변해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의 상점과 주택 그리고 해방법에 찬성했던 정치인들의 집을 약탈하고 심지어 런던 시내 뉴게이트 감옥을 습격했다. 경찰이 없으니 폭동진압은 군대의 몫이었다. 군은 협상과 관리보다는 전투와 무자비한 살상에 익숙한 집단이다. 폭동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이 인정사정없는 군의 총칼에 죽거나 다쳤다.

    새롭게 부르주아 계층을 형성한 신흥 자본가들이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폭동은 약탈로 이어졌고 주로 상점과 은행이 털렸다. 전통적인 귀족들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들 부르주아 계층은 정부와 의회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경찰이 필요했다. 정부도 경찰 창설에 찬성했다.

    하지만 의회는 이번에도 경찰 창설을 반대했다. 경찰의 창설이 자칫 왕당파의 친위 쿠데타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주된 이유였다. 영국 의회는 신흥 부르주아 계층과 정부의 경찰 창설 요구를 애써 무시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변명이었다.

    정치적 중립이 성공 비결

    경찰 창설의 필요성에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로버트 필 당시 내무장관이 나섰다. “경찰은 정치적인 개입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의회 설득에 나섰다. 하원에 포진해 있는 자신의 옥스퍼드대 동창생을 일일이 만나 경찰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신경찰 11원칙’을 만들어 경찰의 정치 불개입을 조문화하기도 했다. 의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부르주아 계층의 압력과 필의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의회는 끝내 경찰 창설을 용인하기에 이르고 1829년 런던수도경찰청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행여 의회가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는 노파심에 필은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청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경찰의 비리와 부패를 막는다는 것을 강하게 피력하기 위해 자녀가 3명 이상이면 경찰에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경찰관은 당연히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초대 경찰청장 역시 정치와는 상관없는 인물로 충원됐다. 초대 경찰청장에 두 명이 임명됐는데, 찰스 로완은 강직한 군인 출신이었고, 리처드 메인은 젊고 유능한 변호사였다. 이 두 사람의 경찰청장은 철저하게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한편 오로지 경찰 전문화에만 매달렸다. 직업정신에 투철한 프로페셔널리즘만이 영국 경찰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엄정한 기강을 강조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경찰상을 확립하려고 힘썼다.

    영국 경찰은 또한 8대 업무지침을 마련해 의회와 시민의 의심을 불식하고자 했다. 8대 업무지침은 ①엄정한 기강 확립 ②준법 철저 ③무력 사용의 최대한 자제 ④정치적 중립 ⑤민주적 책임 ⑥국민에 대한 봉사 ⑦예방치안 ⑧효과적인 치안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200여 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세계 모든 경찰의 귀감이 되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과 지침이 지금까지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필을 중심으로 영국 정부가 경찰개혁과 운영을 전적으로 경찰에 맡겼기에 가능했다. 경찰청장의 인사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덕분에 찰스 로완과 리처드 메인 초대 경찰청장은 각각 21년(1829~1850)과 39년(1829~1868) 동안 경찰청장직을 맡았다. 이렇게 오랜 기간 경찰청장이 재임했기 때문에 일관되게 정치적 중립성과 경찰의 전문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1829년부터 1868년까지 무려 15번이나 총리가 바뀌고 토리(보수)당과 휘그(자유)당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음에도 경찰청장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영국 경찰이 이후 150년 넘게 세계 경찰의 교과서와 같은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경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정부 또한 이를 존중하고 지켜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권위보다 강한 무장 없다”

    정치적 중립만 보장한대서 전문 직업경찰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경찰관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경찰업무에만 전념하려면 충분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고 이는 국가 재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돈’이 있어야 제대로 된 경찰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경찰조직을 갖고 있던 프랑스나 다른 나라가 아니라 경찰조직이 전혀 없던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 경찰이 만들어진 것은 산업혁명과 도시화에 따른 범죄 급증과 폭동 등에 대처할 필요와 함께 영국 정부의 재정이 튼튼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영국에서 최초의 근대 경찰이 만들어진 것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해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된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영국 정부는 경찰 조직을 정부 예산만으로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재정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폭동과 시위가 영국에서 근대 경찰이 만들어진 주요한 이유이지만 영국 경찰이 처음부터 시위를 효과적으로 막은 것은 아니다. 경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시위를 막는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예사고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영국 경찰은 인내를 강조했다. 아무리 시위대가 극렬하게 나오더라도 시위대를 자극하는 어떤 언동도 자제했다. 절제만이 시민의 호응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권위를 갖는 것보다 강력한 무장은 없다는 것이 당시 영국 경찰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영국 경찰이 총기를 휴대하지 않고 경찰봉만을 들고 다니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이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오로지 법과 질서의 수호자라는 인식을 줄 때, 그래서 국민의 신뢰를 얻을 때 경찰의 권위가 바로 서며 이는 어떤 총이나 칼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 경찰의 경우는 과잉 강경 진압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도시들은 영국처럼 극심한 시위와 폭동을 겪는다. 미국 뉴욕에 있어 1834년은 ‘폭동의 해(Year of Riots)’로 기억될 정도다. 많은 정치인은 경찰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결국 1844년 뉴욕에 경찰이 만들어졌다.

    뉴욕선 돈 내고 경찰 돼

    하지만 당시 뉴욕 경찰은 런던 경찰과는 달랐다. 경찰 수뇌부가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어서 경찰이 정치적 목적에 악용됐고, 부패했다. 시민은 경찰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경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시위 현장은 곧 전장(戰場)이었다. 1849년 아스터 플레이스 폭동은 경찰의 시위 진압 능력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 경찰은 폭동을 전혀 제압할 수 없었다. 결국 민병대가 동원됐다. 민병대와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주위를 지나가는 행인들도 마구 때렸다. 총검과 실탄이 진압의 도구였다. 때에 따라서는 대포가 동원되기도 했다. 1863년 징병 폭동, 1871년 오렌지 폭동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뉴욕시의 폭동과 시위는 갈수록 과격해져갔다. 시위대에 경찰은 법과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단지 적일 뿐이었다.

    미국 경찰이 20세기 초반까지 계속 정치에 종속된 것은 시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다. 경찰관의 부정을 막기 위해 런던 경찰은 런던 시민은 아예 경찰관에 지원할 수 없게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뉴욕 경찰은 지역주민에서 경찰관을 충원했다. 지역 사정을 잘 알아 치안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지역주민과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치안의 효과성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는데, 엄격하고 공정한 충원과정을 거치지 못한 경찰은 부정과 부패, 비효율을 낳을 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달러 정도를 내면 누구나 경찰관이 될 수 있었다. 1880년 경찰관의 평균 연봉이 900달러였으며 일반 공장 노동자들은 1년에 불과 450달러를 받았으니 경찰의 급여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경찰관이 된 뒤에는 뇌물 등 부정부패에 연결됐다. 신임 경찰관들은 정규 훈련을 거의 받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뉴욕 경찰의 경우 초기에는 제복조차 입지 않았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컸기 때문에 제복을 입고 돌아다니다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경찰이 신뢰를 확보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신뢰를 쌓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권위는 사용하기 전에 먼저 부여받아야 한다.” 월터 배지홋의 이 말은 특히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범죄는 점점 더 복잡해져가고 이에 대응하는 노력 역시 훨씬 많은 비용과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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