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호

아디다스 vs 나이키

스포츠용품 시장의 영원한 맞수

  • 전성철 |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dawn@donga.com

    입력2012-12-26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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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디다스 vs 나이키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팅 인텔리전스’는 최근 2007~2008 시즌 이후 5년간 유럽 축구 클럽의 유니폼 판매량을 조사해 발표했다. 공동 1위를 차지한 클럽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국제축구연맹이 20세기 최고의 축구 클럽으로 선정한 레알 마드리드로 140만 벌씩을 팔았다. 인기의 척도인 유니폼 판매량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클럽의 유니폼은 공교롭게도 각각 스포츠용품 업계의 영원한 라이벌 나이키와 아디다스 브랜드를 달고 있다.

    스포팅 인텔리전스가 발표한 유니폼 판매 순위 10위 안에 든 팀을 살펴보면 더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나이키는 이 가운데 3위 바르셀로나(스페인·115만 벌), 7위 아스날(영국·80만 벌), 8위 유벤투스(이탈리아·48만 벌), 9위 인테르(이탈리아·42만5000벌) 등 총 5팀을 후원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포함해 나머지 4위 첼시(영국·91만 벌), 5위 바이에른 뮌헨(독일·88만 벌), 6위 리버풀(영국·81만 벌), 10위 AC밀란(이탈리아·35만 벌)은 모두 아디다스 브랜드였다.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유럽의 최고 인기 스포츠 프로축구에서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셈이다.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

    스포츠용품 업계의 두 라이벌 가운데 브랜드의 역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큰형님’은 당연히 아디다스다. 아디다스는 1920년 독일의 아돌프(아디) 다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형제가 20㎡ 남짓한 어머니의 세탁실에 차린 신발공장에서 만든 수제 스포츠화로 출발했다.

    다슬러 형제의 신발이 처음 빛을 본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였다. 리나 라드케 선수가 아디 다슬러가 만든 신발을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4년 뒤 세계대공황의 그늘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다슬러 형제는 또다시 주목받는다. 아디 다슬러는 스티치로 신발에 스트라이프를 새기고 구멍쇠를 보강한 신형 트랙 스파이크를 선보였다. 독일의 아더 요나트 선수와 미국의 빌 헬미나 선수는 아디 다슬러의 신발을 신고 각기 남자 100m와 여자 100m 달리기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스타 제시 오언스도 아디 다슬러의 신발을 신고 달린 스타다. 그는 특별한 위치에 스파이크를 박은 ‘로우 컷 어퍼’ 신발을 신고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그해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런던 올림픽은 스포츠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화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다. 이 대회에서는 ‘체코의 증기기관차’로 불린 에밀 자토펙 선수가 아디 다슬러의 경량신발을 신고 1만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을 획득하며 스타가 됐다. 아디다스는 그해 삼선(三線)과 함께 브랜드로 상표 등록을 했다.

    하지만 큰 성공은 형제 사이를 갈라놨다. 사업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루돌프 다슬러가 1948년 ‘퓨마’를 설립하고 회사를 떠난 것이다. 아디 다슬러는 이듬해인 1949년 8월 18일 5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를 창립했다.

    아디다스는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스포츠용품 업계에서 독보적인 브랜드파워를 구축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올림픽 역사에서 아디다스를 신었던 스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는 금방 확인된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에밀 자토펙은 7일 동안 5000m, 1만m,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3관왕이 됐다. 미국 출신의 밥 마디아스 선수는 아디 다슬러가 직접 제작한 스파이크를 신고 허들과 장대높이뛰기에 참여해 10종 경기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디다스의 성공시대

    남반구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인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아디다스는 원반 던지기의 전설 알 오터에게 스파이크를 갈아 끼울 수 있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발을 제공했다. 3단 뛰기에서는 발에 전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앞쪽 스파이크 바닥을 개선한 신발을 신은 브라질의 아데마르 파비아노 데 실바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아디다스의 신발을 신은 선수들이 세운 세계 최고기록만 무려 33개에 달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당시 18세 소년이던 무하마드 알리가 아디다스의 삼선(三線)이 선명한 복싱화를 신고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캥거루 가죽에 나일론 스파이크 밑창을 단 초경량 스파이크를 신은 미국의 윌마 루돌프가 육상에서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전체 육상경기 참가 선수의 75%가 아디다스를 신었다. 아디다스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1964년 도쿄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전체 육상선수의 80%가 아디다스를 신었고 그중 99명이 메달을 땄다. 그해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트랙용 신발은 신발 한 짝의 무게가 135g에 불과한 아디다스의 ‘도쿄 64’였다. 1만m 달리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미국 선수 빌리 밀스도 당연히 도쿄 64를 신었다.

    아디다스 vs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에 진열된 기능성 운동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아디 다슬러는 미국 높이뛰기 선수 딕 포스버리의 의견을 신발에 반영했다. 포스버리는 오늘날 모든 높이뛰기 선수가 따라 하는 ‘배면뛰기(포스버리 점프)’를 선보인 전설적인 선수다. 아디 다슬러의 신발을 신은 포스버리는 이 대회에서 2.24m를 넘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해 밥 비몬은 멀리뛰기 종목에서 기존 세계기록을 55㎝ 경신한 8.9m를 뛰었다. 그 해의 모든 ‘점프’는 아디다스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아디다스는 자국 독일에서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세 개의 나뭇잎 모양 밑에 삼선이 들어간 ‘트레포일(Trefoil)’ 로고를 선보였다. 독일 선수 하이데 로젠달은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아디다스를 신고 멀리뛰기와 400m계주 금메달, 5종 경기 은메달을 땄다. 아디다스는 그녀를 통해 많은 제품을 테스트하면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이던 석션컵 아웃솔 패턴과 단거리용 신발을 개발할 수 있었다.

    ‘쿠바 경주마’ 알베르토 후안토레나가 800m와 400m에서 잇따라 금메달을 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신은 신발도 아디다스의 ‘아디스타 2000’이었다. 이 신발은 바닥이나 취향에 따라 교체가 가능한 스파이크 시스템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해 아디다스를 빛낸 가장 큰 별은 15세의 루마니아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2단 평행봉에서 10점 만점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치열한 냉전으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돼버린 모스크바 올림픽(1980)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84)에서도 아디다스는 여전히 압도적인 브랜드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자토팩처럼 5000m와 1만m를 동시에 석권한 에티오피아의 미루츠 이프터 선수를 비롯해 80% 이상의 선수가 아디다스를 착용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140개국 중 124개국 선수가 아디다스를 착용했고 그들이 딴 메달은 모두 259개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당대 최고의 여성 테니스 선수 슈테피 그라프도 아디다스를 신은 스타였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이전에 이미 4개의 메이저 테니스 대회를 석권한 상태였던 그녀는 결승전에서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를 누르고 ‘그랜드 슬램’을 넘어 ‘골드 슬램’을 달성했다.

    트럭 행상으로 출발한 나이키

    아디다스가 초창기부터 최고의 스포츠 스타에게 자사 제품을 신기며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반면 나이키의 출발은 평범했다. 나이키는 1964년 육상선수 출신 필립 햄슨 필 나이트와 오리건대 육상코치 빌 보워먼이 세운 회사다. 오리건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나온 나이트는 그해 일본 신발회사 오니쓰가 타이거의 러닝화를 수입해 파는 일로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필 나이트는 처음에는 트럭에 러닝화를 싣고 경기장을 찾아다니며 판매를 했다. 회사 이름은 ‘블루리본스포츠’라고 붙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이 끝날 무렵인 1972년 두 사람은 직접 신발을 만들기로 하고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정했다. 나이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나이키는 당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던 대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로고 디자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필 나이트는 데이비슨이 만든 디자인들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선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한 유명한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Swoosh)’ 마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나이키가 데이비슨에게 지불한 돈은 불과 35달러였다. 2011년 기준으로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가 139억 달러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로도 한참 부족한 금액이었다.

    나이키에게 도약의 발판이 된 운동화 ‘와플 트레이너’도 스우시 로고만큼이나 우연하게 탄생했다. 필 나이트의 대학시절 코치이자 동업자인 보워먼은 아내가 사용하는 와플 굽는 틀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와플 틀 속에 고무를 집어넣고 고무와플을 만든 것이다. 그는 고무와플을 잘라 신발 밑창에 아교로 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던 팀 선수들에게 신발을 나누어주고 뛰어보도록 했다.

    보워먼이 아내의 와플 기계를 엉망으로 망쳐놓으면서 만든 신발에 대한 선수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와플 무늬의 고무 밑창이 달린 신발은 탄력성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신발 밑창 무늬가 달 표면에 새겨진 우주인의 발자국과 비슷하다고 해서 ‘달 신발’로 불린 와플트레이너는 나이키에 큰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안겨줬다.

    스타 마케팅은 나이키의 성장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나이키가 가장 먼저 스폰서십을 맺은 스타는 루마니아 출신의 테니스 선수 일리에 너스타세다. 1970년대 최정상급 테니스 선수였던 그는 57개의 단식 타이틀과 51개의 복식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7번이나 우승한 너스타세를 후원하면서 나이키는 글로벌 스포츠용품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발을 뗐다.

    아디다스 vs 나이키

    통기성과 색감이 좋은 나이키 운동화.



    스타 마케팅 대성공

    나이키가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스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구선수로 꼽히는 마이클 조던이다. 1984년 시카고 불스에 입단한 조던은 데뷔 첫해에 한 경기당 평균 28.7점이라는 득점력을 선보이며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듬해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최강으로 평가받던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 63 득점을 올리며 농구 팬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래리 버드가 당시 “신이 조던의 모습으로 변장했다”고 혀를 내두른 일화는 NBA 팬들 사이에는 전설이 됐다.

    조던이 시카고 불스에서 1980년대 내내 득점왕을 차지하고 1990년대 초반과 중반 두 차례에 걸쳐 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신화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조던의 시그니처 운동화 ‘에어 조던’을 앞세운 나이키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1985년 처음 선을 보인 에어 조던 시리즈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운동선수의 이름을 붙인 신발이란 것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에 다른 농구화에 비해 2, 3배 가격인 에어 조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모습은 경쟁업체들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농구화는 당연히 하얀색이라는 당시의 편견을 깨고 검은색, 빨간색까지 사용한 과감한 디자인도 에어 조던의 인기에 일조했다. NBA는 다른 선수들과 색깔이 다른 농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는 규정을 뒀지만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는 스타였던 조던은 시합마다 벌금을 내가며 에어 조던 농구화를 신었다. 전 세계로 중계된 그의 경기에서 나이키가 얻은 광고효과가 조던이 낸 벌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에어 조던의 큰 인기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새로운 디자인의 에어 조던이 나올 때마다 나이키 매장에 강도가 들이닥치는가 하면 신발을 빼앗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까지 생겨났다. 나이키는 학생들이 에어 조던 신제품을 사기 위해 학교를 빠지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제품 발표 시기를 주말로 바꿔야 했을 정도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나이키의 스타 마케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나이키는 1996년 우즈를 후원하면서 골프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우즈가 주요 대회를 휩쓸면서 ‘걸어 다니는 광고판’ 역할을 하면서 나이키골프의 옷과 모자, 골프용품 판매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09년 말 여러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즈가 추락하자 컨설팅업체 액센추어, 스포츠음료 업체 게토레이 등 수많은 기업이 후원을 중단했다. 하지만 나이키는 끝까지 우즈를 지켰다.

    결과적으로 우즈를 버리지 않은 나이키의 선택은 옳았다. 미국 ‘포브스’지가 2012년 브랜드 연구기관 레퓨컴과 함께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즈는 후원업체에 총 1890만 달러의 홍보효과를 가져다준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키는 특히 우즈를 통해 1810만 달러가량의 광고 효과를 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골프선수 가운데 2위를 차지한 로리 매킬로이의 1290만 달러보다도 무려 500만 달러 이상 높은 수준이다.

    ‘코트의 악동’으로 유명한 테니스 선수 존 매켄로도 나이키가 후원한 대표적 스타플레이어다. 7개의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과 9개의 그랜드 슬램 남자 복식 타이틀, 그리고 1개의 그랜드 슬램 혼합복식 타이틀을 차지한 매켄로도 나이키에는 훌륭한 광고판이었다. 매켄로는 심판을 향해 “농담 좀 하지 마쇼”라고 윽박지르는 등 기행으로 일거수일투족이 늘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같은 관심 덕분에 나이키는 매켄로가 신은 테니스 슈즈를 1주일 만에 2만 켤레나 팔 수 있었다.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의 양대 축인 두 업체의 광고 캠페인은 숱한 패러디까지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광고 카피도 불꽃 대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자면 ‘그냥 해봐’ 정도의 뜻인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은 나이키라는 브랜드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문장이 된 유명한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1988년 광고대행사 ‘위든 플러스 케네디’와 나이키의 만남에서 나왔다고 한다. 위든 플러스 케네디의 설립자 댄 위든은 엉뚱하게도 악명 높은 살인마 게리 길모어가 처형 직전 남긴 마지막 말 ‘렛츠 두 잇(Let?s do it)’에서 이 슬로건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키는 제품을 조명하는 대신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여준 뒤 ‘저스트 두 잇’이라는 도전정신을 제안하는 광고를 시작했다. 검은 화면에 강렬한 하얀색 글자로 된 3단어를 던지는 이 광고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운동화 시장에서 나이키의 시장점유율은 큰 폭으로 뛰었고 ‘저스트 두 잇’은 ‘애드버타이징 에이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광고 슬로건 톱 5에 뽑혔다.

    아디다스의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 캠페인도 2004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무하마드 알리와 그의 딸 라일라 알리가 경기를 벌이는 모습을 담은 광고로 큰 관심을 끌었다. 무하마드 알리의 전성기 때 경기 화면에 라일라 알리의 복싱 장면을 합성한 이 광고는 큰 울림을 낳았다.

    “불가능은 사실이 아니다. 의견일 뿐이다. 사람들은 ‘여자는 복싱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해냈다. 나는 링에 섰다. 내 아버지 알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싸워라, 내 딸. 넌 할 수 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와 딸이 수십 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화면 속에서 멋진 복싱을 선보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TV 화면 속에서 가능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은 아디다스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2007년에는 리오넬 메시, 데이비드 베컴, 길버트 아레나스 등 스포츠 스타들이 나서서 자신이 힘든 시절을 딛고 스포츠스타가 된 이야기를 담은 새로운 형식의 광고를 내놓았다.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로 시작하는 광고내레이션은 다양한 버전의 패러디를 낳았다. 이 광고는 불가능에 도전하려는 이들의 첫걸음에 박수를 보내는 메시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디다스는 2011년에는 ‘아디다스 올인(adidas is all in)’ 브랜드 캠페인을 새로 선보였다. 이 캠페인은 나이와 성별, 지역, 직업을 뛰어넘어 열정(Passion)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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