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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17

현대음악의 차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현대음악의 차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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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차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2010년 3월 한국에서 공연된 독일 출신의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대표작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의 야성적인 음악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러시아 예술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며 러시아 발레를 서구 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일등공신인 디아길레프는 천부적인 흥행사이며 기획자였다. 그 역시 학창시절에는 스트라빈스키처럼 모양만 법대생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스승 림스키코르사코프 문하생이 되기를 원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작곡가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예술세계’라는 아방가르드 잡지를 발행하며 밀려드는 서구 음악 조류를 소개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근무하면서 예술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천부적인 경영 안목도 보여줬다.

그는 러시아로 발레를 수출했던 프랑스에 ‘러시아산 발레’를 역수출한 인물이었다. 발레는 프랑스 관객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마케팅 승부를 벌일 수 있는데다, 최고 기량의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이 펼치는 화려하고 수려한 작품으로 묘한 동경과 신기함을 줄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해줄 음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발탁한 작곡가가 바로 스트라빈스키였다. 발레에 쓸 관현악 편곡을 맡긴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시각적인 발레가 청각적인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서 어떻게 융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현대는 음악으로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춤과 음악이 종속 관계가 아니라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안무가를 설득했고, 대중이 원하는 재미와 자극을 찾아 나섰다. 디아길레프가 뽑은 스태프들과 작업하며 스트라빈스키는 비로소 대가다운 면모를 발산했다. 발레 ‘불새’(1910)와 ‘페트루슈카’(1911)를 들고 유럽을 순회하면서 러시아 음악의 진수를 알렸다. 각 악기는 다채로운 기교를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사용했고, 그동안 맛볼 수 없었던 눈부시고 오묘한 음향을 선사했다. 관객은 열광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무명 작곡자였던 그는 일약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최고의 신예 작곡가로 발돋움했다. ‘불새’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화조(花鳥)’로 번역돼 소개됐다.

논란도 많았다. ‘페트루슈카’가 러시아에서 공연되었을 때, 그의 오랜 동지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 사단은 스승의 음악과 멀어지는 그의 음악을 놓고 “프랑스 향수를 뿌린 러시아 보드카”라고 혹평했다.

그의 경력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공연은 1913년 5월 29일 밤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한 ‘봄의 제전’일 것이다. 디아길레프 제작, 스트라빈스키 음악, 그리고 동성연애자로 디아길레프의 연인이자 러시아 발레 계승자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매진 사례를 만들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이교도들의 원시적인 의식을 연출하기 위해 미간이 찡그려지는 불협화음과 불규칙적인 변칙리듬을 연속적으로 사용해 관객의 불만을 샀다. 관객은 막이 오르자마자 웅성거렸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른바 예술적 파괴 강도는 폭발했고, 급기야 관객이 공연 중단을 요청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프랑스 향수 뿌린 러시아 보드카”

‘봄의 제전’은 태초의식의 민속적 초상을 통해 약동하는 봄기운과 거대한 자연의 원초적 기운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관객은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감미로운 음악에 토슈즈(toeshoes)를 신고 투투(tutu·발레 치마) 자락을 허공으로 날리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난도 기술로 표현하는 품격 넘치는 예술에 환호했다. ‘봄의 제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무대 위 무용수들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에 발작 수준의 어그러진 몸짓으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용수들의 동작도 일사불란하지 못해 마치 관객을 조롱하는 듯했다. 이유는 이렇다. 당시 무용수들은 음악보다는 무대 뒤의 니진스키 구호에 맞춰 안무를 연습했다. 구호가 10 이상 되면 음절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빠른 박자에서는 뒷자리 숫자로만 구령해야 했다. 하지만 관객의 야유에 당황한 니진스키는 10이상의 숫자를 모두 호명해 박자가 엉망이 됐다. 흥분한 관객의 난동으로 무용수는 니진스키의 구령이 잘 들리지 않았고, 안무는 더욱 엉망이 됐다. 무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 공연은 불행 중 다행으로 문학이나 미술에서 제창하는 ‘아름다움만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슬로건을 음악과 발레에 적용해 새로운 흐름을 가장 강력하게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봄의 제전’으로 한때 그는 ‘음악 파괴자’로 불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불멸의 금자탑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시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는 법이다.

전쟁은 스트라빈스키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트라빈스키는 병든 아내와 유모,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에 정착했다. 전쟁 발발 전부터 어수선한 국제정세 때문에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거기에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둔 돈은 ‘인출불가’였으며, 자신의 저작권은 모두 독일출판사에 소속돼 있어 수입은 ‘제로’에 가까웠다.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반주를 하거나 돈벌이가 되는 소품의 작곡에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 생활을 청산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 프랑스에 정착했다. 사촌이었던 아내 예카테리나와 평안한 결혼생활을 15년간 이어가던 어느 날, 스트라빈스키는 무대 디자이너 수네이킨의 부인인 화가 베라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39세와 33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두 사람은 배우자들의 묵인 속에 연인 관계를 지속해나갔고, 아내 예카테리나가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하자 1939년에 정식으로 혼인한다.

스트라빈스키가 사망하는 1971년까지 베라는 스트라빈스키를 옆에서 충실하게 보살폈다. 하지만 자녀들은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의 두 집 살림을 목격한 터였다. 새엄마 베라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평생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고 소 닭 보듯 외면했다. 그럼에도 두 연인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죽음이 임박할 당시 재산을 둘러싼 베라와 자녀들의 마지막 암투는 심각했다. 장례식도 뉴욕과 베네치아에서 따로 치러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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