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

남북 정상회담 비밀접촉 주역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3-01-16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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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회담 등 6개 項 협의완료… 실무만 남은 상황서 깨져
    • MB, 평양서 납북자·국군포로 ○명과 함께 돌아왔을 것
    • 부처 간 불협화음… “소관 의식도 좋지만…”
    • “회담장소 판문점으로 바꾸자 하면 얘기가 되겠어요?”
    • 나와 김성환 외교 장관은 생각 같았으나…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
    “평양으로 가야 국군포로를 데려오는 거지, 장소를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하면 그게 되겠어요? 생각해보라고요.”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이명박 정부 남북관계의 극적인 순간과 관련해 아쉬운 게 많은 듯했다. 그는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났다. 남북은 임태희-김양건 협의로 정상회담 문턱까지 갔으나 최종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이듬해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상회담이 성사됐더라면 한반도 정세는 다른 국면으로 흘렀을 것이다. 임 전 실장이 김 부장을 만난 2009년 10월부터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3월까지 남북한 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태희-김양건 협의 전모와 결렬 과정은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다. 임 전 실장이 그간 철저하게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임 전 실장이 1월 9일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증언을 직접 듣는 것은 남북관계를 취재하는 기자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특종이다. 그가 싱가포르 접촉의 전말과 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신동아’ 인터뷰가 처음이다. 그는 작심하고 증언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른 얘기가 언론에 사실처럼 보도되면서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게 우려돼 내가 한 일의 팩트(fact·사실)를 공개하기로 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것 같았다.”





    “얘기 다 끝난 상태에서 깨졌다”

    임 전 실장은 ‘북한이 정상회담 뒷돈 요구를 거절당하자 천안함 폭침을 저질렀다’는 최근 언론 보도와 관련해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김양건 부장을 설득해 비핵화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다루기로 했으며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고향 방문과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6·25전쟁 전사자 유해 공동 발굴 등을 협의해 서면으로 정리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큰 그림에 최종 합의한 후 남북이 실무 논의를 거쳐 북한이 인도적 조치를 실제로 이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쌀, 비료를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임 전 실장은 특히 이 대통령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한 뒤 국군포로, 납북자와 함께 귀환하는 이벤트가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 “싱가포르 협의 결과가 쌀, 비료가 급한 북한으로서는 얼마나 모욕적인 협상, 자존심 상하는 협상이었겠나”라고도 했다.

    그는 협상 결렬과 관련해 “얘기가 다 끝나고 실무적 사안이 조금 남은 상황에서 깨졌다”면서 “협상이 깨지는 과정의 팩트를 정확히 해두는 것은 앞으로 남북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1월 9일 인터뷰에서는 ‘싱가포르 합의’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 등의 표현을 썼으나 1월 14일 ‘합의’라는 표현을 ‘협의’로 바꿔달라고 했다. 합의문이라는 표현도 ‘서면으로 정리한 문서’로 바꿔달라고 했다.

    임 전 실장이 ‘신동아’에 싱가포르 협의 전모를 밝히기로 한 것은 일부 언론매체가 정부 고위 관계자 A씨의 발언을 대서특필하면서다. A씨는 1월 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은 조건이 맞지 않았다. 쌀 갖고 와라, 기름 갖고 와라 하면서 북한이 구체적 요구조건을 들고 왔는데, 우리는 그런 조건에서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원하는 조건대로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북한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북한이 어느 언론 보도처럼 5억~6억 달러의 현금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환산하면 그 정도가 될 수도 있겠다.”

    ‘비선(秘線) 접촉’ 아닌 ‘장관급 회담’

    이튿날 언론 지면에 A씨의 발언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다. ‘北, 정상회담 뒷돈 요구 거절당하자 천안함 폭침’ ‘北, 정상회담 대가 요구…거절하자 천안함 도발’ ‘北, 쌀·비료 5억 달러 요구했다’등의 제목이 붙었다.

    A씨 발언대로라면 정상회담 개최 대가로 쌀, 비료를 내놓으라는 북측의 요구를 남측이 들어주지 않으면서 2010년 1월 북한의 ‘보복 성전’ 선언→3월 천안함 폭침→11월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것이다.

    임 전 실장은 A씨의 발언에 대해 “적어도 내가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의 사실과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 A씨는 “북한이 우리를 ATM처럼 생각했다”라고도 했습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제가 상대한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A씨는 관료 출신의 정부 고위 인사다.

    “쉽게 말해 제가 당시 일을 가장 잘 압니다. 그냥 간 것도 아니도 장관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다녀온 겁니다(임 전 실장은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다).”

    언론은 이제껏 ‘임태희 비선(秘線)’이라고 보도하곤 했으나 임 전 실장은 ‘장관급 회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대한민국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보낸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공식적으로 정상회담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김양건 여러 번 만나

    2009년 10월 북한 고위인사 2명이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 투숙했다. 김 부장과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두 사람은 5박6일간 싱가포르에 체류했다. 10월 15일 베이징에서 날아와 20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접촉 장소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북한 인사가 일반 관광객처럼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보안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은 구면(舊面)이었다. 두 사람은 두 달 전(8월 21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양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김 부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조문 사절로 서울을 찾았을 때 일이다.

    “북쪽과 소통 창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에 참석할 때 대통령 면담을 시켜달라는 요청이 저한테 먼저 왔습니다. 그때 제가 역할을 했습니다.”

    임 전 실장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시절부터 김 부장 쪽과 소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 접촉 이전에도 김 부장을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싱가포르 만남은 두 사람이 그간 논의한 내용을 합의하는 성격이었다.

    ▼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움직인 건가요.

    “그럼요. 장관 신분이 어떻게 그냥 가요….”

    그는 ‘미션(임무)’이라는 표현을 썼다.

    “통-통에서 서명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해놓고 오는 게 (대통령이 지시한) 미션이었습니다. 내가 맡은 임무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언급한 ‘통-통’은 한국 통일부- 북한 통일전선부 회담을 가리킨다. 남북대화 채널은 크게 셋이다. 통일부가 주연 격인 공식-공개 채널은 남북이 협상장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언론에도 보도된다. 공식-비공개 채널의 주연은 정보기관인 예가 많다. 통일부도 공식-비공개 라인을 가동할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비공식-비공개 채널, 즉 비선(秘線)이 있다. 임태희 라인은 ‘장관급 회담’이었다는 점에서 공식-비공개 채널로 봐야 할 듯하다.

    임 전 실장은 김양건 부장과 정상회담, 국군포로 및 납북자 고향방문, 한반도 비핵화, 이산가족 상봉 및 고향방문, 인도적 지원(쌀 비료) 문제, 국군 유해 발굴 등 6개 항목에서 의견 접근을 봤다. 두 사람은 협의한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했다. 정상회담 협의사항은 통-통 채널로 넘겨 최종마무리하기로 했다.

    국군포로·납북자 고향방문 공감대 이뤄

    ▼ 서면으로 정리한 문서에 ‘비핵화’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까.

    “물론 들어가 있죠. 김 부장이 정상회담을 하겠다기에 비핵화 문제를 의제에 올리자고 했습니다. 북측은 초기에는 의제에 올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미 간에 대화할 문제이지, 남북 간에 논의할 게 아니라는 식이었습니다. 대화하면서 의제가 돼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삼기로 정리했습니다.”

    싱가포르 접촉 직전 남북 사이엔 훈풍이 불었다. 북한이 ‘숙이고 들어오는’ 자세를 보인 것. 2009년 9월 6일 북한이 임진강 황강댐 물을 방류해 남측 하류에서 야영하던 남측 주민 6명이 사망했다. 북측은 이례적으로 하루 뒤 신속하게 해명했다. 임태희 라인의 설득 덕분이었다. 2009년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은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지원 없이 이뤄졌다. 쌀을 수십만 t씩 퍼주고도 핵실험으로 뺨을 얻어맞은 과거 정부와는 달리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받아낸 것.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쌀을 주고 이산가족 상봉을 받아와 국내 정치에 활용했다. 북한은 상봉 행사와 쌀, 비료 지원을 항상 연계했다.

    임 전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이산가족 문제, 인도적 지원 문제,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을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삼기로 김양건 부장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정리된 서면에는 “이명박 대통령 평양 방문 시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명의 고향방문을 실시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가리킨다. 납북자, 국군포로의 고향방문이 정상회담 전제조건이었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이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 납북자, 국군포로 ○명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임 전 실장은 이 대목을 특히 안타까워했다.

    “그런 조건이 협의가 됐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 한두 명만 한국으로 돌아왔어도 남북관계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북한이 납북자, 국군포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북한은 그간 국군포로 및 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해왔다.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이 정리한 서면에는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를 인도적 조치(쌀, 비료 지원)와 연계해 해결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쌀, 비료 당연히 요구하죠”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
    서독은 냉전 시절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 사업을 벌였다. 3만3755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대가로 34억6400만 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에 건넸다. 서독은 이 프로젝트를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라고 불렀다. 임 전 실장은 이 방식을 원용해 협상했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북측의 인도적 조치에 상응해서 우리가 식량이나 물품을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협의가 이뤄진 겁니다.”

    ▼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로 쌀과 비료를 요구한 것은 아니고요?

    “앞서 밝혔듯 그것은 잘못 알려진 얘깁니다.”

    그는 이렇게 부연했다.

    “북측에서야 당연히 쌀, 비료를 요구하죠. 예전엔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조건으로 쌀, 비료를 줬습니다. 북측이 원하는 게 있듯 우리도 원하는 게 있으니 그것을 연계해서 하자는 거였습니다. 북측이 우리가 원하는 조치를 시행하려면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쌀과 식량이었습니다. 두 정상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해 해법에 합의한 후 북측이 조치를 취하는 것에 따라 남측이 경제지원을 하는 게 협의의 골자입니다. 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로 얼마를 주기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접촉한 그 라인 말고 북측의 다른 곳에서 엉뚱한 얘기를 한 것일 수는 있지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제가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 도중에 북측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회담이 무산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도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보도의 근거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 나중에 지원할 쌀, 비료를 합치면 그 정도 되는 것 아닙니까.

    “노무현 정부 때 한 해 남북협력기금이 7000억 원가량이었습니다. 북한에 쌀, 비료 주던 예산입니다. 해마다 쌀 30만~40만t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한 번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프라이카우프 방식에서 인도적 지원은 이 예산 범위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 고향방문을 실시하면 ○t, 상봉을 실시하면 △t, 서신 교환을 하면 ◇t 이런 식으로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겁니다. 북한 처지에서 쌀이 급하면 고향방문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고향방문이 이뤄지지 않으면 쌀을 덜 주면 되는 것이고요.

    고향방문 하면 쌀 주는 방식

    예를 또 하나 들어보죠.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대한민국 국민이 고향을 방문합니다. 그 사람에게 남측 정부가 쌀을 줘서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지역 식량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거고요. 고향방문 1만 명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고향방문이 이뤄질 때마다 쌀을 얼마를 줄 것인지 등은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큰 그림에 합의한 뒤 실무자들이 만나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납북자, 국군포로, 이산가족과 관련해 생사 확인, 서신왕래, 상봉, 고향방문 등 여러 패키지가 있잖아요. 고향방문의 영향력이 가장 크지 않습니까. 북으로선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고요. 그것에 대해선 많은 인센티브를 주자, 이런 식이었습니다 .

    또한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협상하지 말자, 정례화해 상시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인도주의적 문제가 없습니다. 예컨대 상봉으로 끝나면 쌀을 △t만 주고, 고향방문을 하면 ○t을 준다면 고향방문이 성사될 것 아닙니까.”

    ▼ 비유하자면 북한이 ‘인도적 외화벌이’를 하는 거군요.

    그가 정색하고 답했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것은 그렇게 표현하는 게 아니죠. 대한민국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남북관계가 잘 안 돼요. 그러면 우리는 인신매매하는 거라고 봐야겠네…. 그런 식으로 사안을 보면 안 된단 말이에요.”

    ▼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은 뭡니까.

    “우리가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을 남쪽에서 하고 있잖아요. 우리의 전쟁 기록을 보면 승리한 기록은 자세히 서술하고 패배한 기록은 간단히 거론합니다. 전투 기록에 따라 유해를 발굴하면 중공군, 북한군 유해가 주로 나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국군 유해 발굴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의 전쟁 기록을 살펴봐야 해요. 그래야 국군 유해 발굴이 제대로 이뤄진다는 말이죠. 북한군이 승리한 곳에서 유해를 찾아야 해요. 내가 김 부장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합리적이잖아요. 협상은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구 말마따나 협박을 당하고 칼이 들어와도 체제 간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합리적이어야 그 사람도 평양에 가서 설명을 하죠. 협상이 진전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을 세워줘야 합니다.”

    ‘所管의식’ 탓에…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정상회담 논의 과정 및 협상 결과에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결국 남북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2009년 11월 7일, 14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정상회담 조건을 놓고 대화했으나 협상이 결렬됐다. 통-통 회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역시 그간 엄밀한 증거(hard evidence)가 포착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임 전 실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이 지금껏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서다.

    ▼ 정상회담 논의가 이뤄지는 흐름에 불만을 가진 쪽에서 싱가포르 협상 사실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런 게…. 쉽게 말하면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하고 장관 할 때하고 달라지더라고요. 그 점만 제가 얘기할게요. 우리나라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종의 흔히 얘기하는 소관(所管)의식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려는 것도 좋고, 책임지고 챙기는 것도 좋은데, 그게 일을 이뤄지도록 하는 쪽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데….”

    대북 라인이 ‘협상파’와 ‘대화파’로 갈라져 남북관계가 꼬였다는 관측도 있다.

    ▼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은 원칙을 강조했고, 임 전 실장은 대화를 강조해 서로 부딪쳤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의 의견이 달랐다면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저를 싱가포르에 보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제가 장관 자격으로 다녀온 것인데, 대통령이 그런 어설픈 상태로 보냈겠습니까.”

    ▼ 11월 7일, 14일 개성회담에선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나는 그것에 대해선 모릅니다. 내가 맡은 미션은 통-통 회담을 잡아놓고 오는 것까지였습니다. 통-통 회담이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 장관급 회담에서 이만큼 해간 것을 두고 실무적으로 뭘 논의했는지는 알지 못해요.”

    그는 “내가 직접 한 일만 말하겠다”고 했다. 개성회담 때 그는 노동부 장관이었지만 이후 대통령실장을 맡았다. 대통령실장은 대통령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수석비서관 회의는 물론이고 각종 긴급회의에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그랬던 그가 11월 7일, 14일 발생한 일을 실제로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상회담 논의가 결렬되는 과정과 관련한 그의 언급에는 행간을 읽어야 할 대목이 많다.

    “장관급 회담서 이만큼 해놨는데…”

    흘러나오는 얘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북측이 쌀, 비료의 선(先)지원을 요구하면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등과 관련해 싱가포르 협의 내용을 뒤집어 결렬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측이 싱가포르 협의 때보다 많은 최소 10명 이상의 국군포로, 납북자 고향방문을 요구했으며 서울 혹은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열자고 제안해 북측이 “왜 말을 바꾸느냐”고 반발하면서 회담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임 전 실장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정상회담 대가로 쌀, 비료 등) 요구하지 않은 것을 요구했다고 지금 우리 측에서 얘기하는 것인데,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제가 협상을 했겠습니까. 또 북이 그런 요구를 했는데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문제는요, 남북대화를 아예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앞으로 남북이 대화할 때 이 문제와 관련한 팩트가 매우 중요해요. 김양건 부장은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임 전 실장은 1월 9일 인터뷰 때 이 대목에서 이러저런 얘기를 했으나 나중에‘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해와 관련 언급은 기사에 싣지 않는다.

    ▼ 남측이 고향 방문하는 국군포로, 납북자 수를 10명 이상으로 늘리고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하자고 해서 결렬됐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러니까….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면 국군포로를 어떻게 데려옵니까. 평양 갈 때 데려오는 거지. 그것을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그러면 되겠어요, 얘기가? 생각해 보라고요.”

    이와 관련해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말로는 원칙을 지켜가면서 대화하자고 해놓고 결정적 순간에 거꾸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망신을 줬다고 생각한다. 국군포로, 납북자를 남쪽으로 보내기로 한 것은 북한이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통 큰 양보를 하면서 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남측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긴다”고 주장했다.

    “당시 협의 토대로 대화 시작해야”

    ▼ 북측이 뒤통수 맞았다고 여긴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내 얘기가 바로…. 신뢰라고 하는 것은….”

    그가 말허리를 돌렸다.

    “그때가 진행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단 말이에요. 일부 실무적 사안이 조금 남았는데, 통-통 회담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회의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간 논의돼 정리된 내용이 아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식이었으면 신뢰가 깨지죠. 다 얘기가 끝났는데 새로운 문제를 내놓으면…. 어느 쪽에서 뭘 새로 제의했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통-통에서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지는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북측에서 인도적 조치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서 쌀부터 달라고 했으면 저쪽이 깬 겁니다. 우리 쪽에서 인도적 조치와 관련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 ‘너네는 무조건 달라고만 하느냐’고 했으면 우리가 북측에 실례를 한 거고요.”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런 내용을 전혀 모릅니까.

    “당선인에게 직접 설명드릴 기회는 갖지 못했습니다.”

    ▼ 임태희-김양건 협의를 새 정부가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당시에 의견 접근을 본 부분을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게 신뢰 구축에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완해야 할 것은 보완해야 하겠고요.”

    ▼ 당시 협의 내용에서 출발하면 단기간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상황이 달라졌어요. 우선 북측 지도자가 바뀌었습니다. 쌀, 비료를 레버리지로 쓰는 게 예전 같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북의 사정이 긴박하지는 않다고 듣고 있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협상 레버리지가 별로 없습니다. (싱가포르 협의가) 북한 처지에서 얼마나 모욕적인 협상이었겠습니까. 아주 모욕적인 협상이죠. 북한 처지에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어요? 식량 문제가 없었다면 그런 식의 협의를 했겠습니까. 문제가 뭐냐면, 여러 경로를 통해 북에 물자가 들어가고 북한 당국이 사(私)경작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식량 사정이 좀 개선될 겁니다. 이 경우 쌀과 비료를 레버리지로 쓰기가 어렵게 되죠. 그러면 남북관계를 풀기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게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그는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나빠질 것 같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했을 때까지의 일에 대해선 팩트를 정확하게 알려야 앞으로 남북대화 할 때 왜곡이 발생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얘기를 한 겁니다. 김정일이 사망했고, 기왕에 이런저런 보도가 나온 상황에서 팩트는 팩트대로 밝혀놔야겠더군요. 남북이 나중에 대화를 재개할 때는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 해인 2008년 20대 국정전략 및 100대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그중 남북관계는 ①북핵 폐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 ②비핵·개방·3000 구상(나들섬 구상 포함)을 추진하겠다 ③남북 간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겠다 등 세 가지다. 이 셋 가운데 성과를 낸 것은 하나도 없다.

    ▼ 이명박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성과를 낸 게 거의 없습니다.

    “경위야 어떻든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남북대화가 지속되기 어렵게 됐죠.”

    ▼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은 왜 일어났다고 봅니까.

    “북한 내부 사정 탓 아니겠어요?”

    “외교 장관은 나와 생각 같아”

    ▼ 쌀, 비료를 안 줘서 도발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남북관계가 잘 안 될 때 안 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면 쉬울지 모르겠지만 그런 시각은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는 언론에 하고 싶은 얘기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신동아’가 남북관계가 잘 흘러가는 쪽으로 기사를 쓰려면 북한을 ‘땡깡’이나 놓는(떼쓰는) 곳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까 질문에서 나온 것처럼 ‘외화벌이나 하는 곳’이라는 식으로 다루면 안 돼요. 보수 언론은 북한과 협의하면 ‘원칙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합니다. 고집을 부리면서 협상을 깨고 오면 원칙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보수 언론이 균형 감각을 갖고 그런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무식한 협상가가 자기 고집만 세우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곤 소신을 펼치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협상에 나갈 자격이 없는 거예요. 하수(下手) 중 하수죠. 남북관계를 진지하게 다뤄주세요. 어떤 점 때문에 분위기가 바뀌었나, 북한에선 뭘 더 하려 했고 우리는 뭘 더 하려 했나…, 그런 게 있을 겁니다. 당시엔 협의가 틀어질 이유가 없었어요.”

    ▼ 한 인터뷰에서 “현 정부 들어 임기 내내 남북관계가 경색됐는데 내가 실장으로서 좀 더 강하게 관계 회복을 권유해야 했다”고 말했더군요.

    “그런 말을 내가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천안함, 연평도에 발목 잡혀 아무것도 못하면 역사적으로도, 남북관계의 현재를 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 건의했습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 때 대통령 연설문에 ‘더 이상 천안함, 연평도에만 머물면 안 된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 것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나와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우리보다 강경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민주평통 행사 때 그런 원칙을 천명하는 것에 그치고 행동으로는 못 간 게 아쉽습니다. 대통령이 말씀한 것을 받아 앞으로 나가기 위한 조치를 추진했어야 하는데….”

    ▼ 역량 부족이었나요, 못 챙긴 건가요.

    “실장이 챙길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동남권신공항, 복수 노조, 과학벨트, 농협법, 검경 수사권, 저축은행, 대학 구조조정, FTA(자유무역협정) 비준 등이 모두 2011년에 해결된 겁니다. 남북대화 문제까지 실장이 관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주무 부처 장관도 아니었고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한 헌법 제3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통일 정책, 대북 정책은 한반도 미래와 직결돼 있다. 임 전 실장이 밝힌 비밀접촉 관련 내용에는 박근혜 정부가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내용이 가득하다.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 정책 열쇳말은 ‘신뢰’다. △강력한 억제력 △대화의 유연성을 토대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현해나가겠다는 것. 그러려면 싱가포르 비밀접촉, 개성에서의 협상 결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남북간에 일어난 일을 임 전 실장의 말처럼 ‘팩트 중심’으로 복기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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