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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제복(祭服)과 땔감

  • 최성각│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제복(祭服)과 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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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을에서 이 나무들을 내게 선물했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은 작년 정월에 내가 일하는 연구소 이름으로 마을에 선물한 제복(祭服)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느끼고 있고, 이장 또한 그런 암시를 희미하게라도 한 것만 같다.

제복 이야기는 이렇다. 작년 겨울, 마을 총회 때였다. 총회가 끝나고 50대 이상 남자들만의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그때 팔씨름도 하고 발씨름도 하고, 노래방 기기를 틀어 노래도 불러쌓고 한바탕 잘 놀았는데, 그러던 즈음, 누군가가 마을의 동제(洞祭)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에서 매년 동제를 지내는데, 최 선생, 그걸 알고 계시우?”

내게 팔씨름은 이기고 발씨름은 진 전 이장 정씨가 막걸리 사발을 건네며 물었다.

“듣긴 들었지만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이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 동제는 음력 삼월삼일 밤에 지낸다”고 했다. 제관(祭官)이 셋인데, 제관들은 그 열흘쯤 전부터 부부생활이나 몇 가지 금기를 지키며 조신하게 동제를 기다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쪽으로 이야기가 번지자 “논 한가운데에 있는 서낭이 비록 초라해 보여도, 예전에 댐을 짓기 전의 큰 홍수 때 주변의 집들이 모조리 쓸려나갔어도 그 서낭당만은 멀쩡했다”고 누군가 보탰다. 말하자면, 마을에서 그곳을 매우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긴다는 이야기였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는 이 나라 어느 마을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취중이었지만 마을 서낭당 이야기를 하는 이웃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순간 정갈했다. 그래서 나 역시 예를 다한 얼굴로 동제 이야기를 듣다가, “제관들은 그날, 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겠군요?”라고 깊은 밤 동제를 올리는 제관들을 떠올리며 묻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머쓱해지면서 “아니, 아직까지 뭐, 제복은 못 갖추고, 그냥 깨끗한 옷을 입고 그저 정성을 다해…”, 지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자, 그러잖아도 마을 사람들에게 늘 받기만 하고 준 게 없었다는 생각이 든 나는 “아, 그렇담, 혹시 괜찮다면, 제관들이 동제에 입으실 제복을 저희 연구소에서 마련해드려도 될는지요?”라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볍게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후, 우리는 여기저기 알아본 뒤에 한 불구점(佛具店)에서 흰색 두루마기와 검은 허리띠, 그리고 제관(祭冠)까지 구했고, 그것을 정성스레 분홍 보자기에 싸서 마을 이장에게 전달했다. 제복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이 나라 다른 마을에서는 동제를 올릴 때 제관들이 어떤 복식을 취하는지 알아보는 시간도 다시 생각해보니 즐거운 시간이었다.

총회 뒤풀이 때 술자리에서 한 약속을 연구소에서 잊지 않고 지키자 마을 사람들이 받은 작은 감동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러곤 아마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겠나 싶다.

“거 참, 우리가 귀한 제복 선물까지 받았는데 연구소 최 선생을 어떻게 하나? 그 양반이 평소 뭘 좋아하실까?”

제복(祭服)과 땔감
최성각

1955년 강원 강릉 출생

1979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환경단체 풀꽃세상 창립

등의 소설집과 생태에세이집 를 펴냄

교보환경문화상 수상

現 작가 겸 환경운동가, 풀꽃평화연구소장


“그분이야 탱천에 땔감, 땔감 하는 분이지요.”

“아 그래요? 그렇담, 우리가 그 양반한테 겨울 땔감이나 선사하는 게 어떨까?”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가 돌아가지 않았겠나, 추측된다.

올겨울의 한파는 전례없이 혹독하건만, 나는 이 한파를 그리 차고 매섭게 여기지 않으니, 곧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푸짐한 땔감 때문이다. 난로 속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내가 받은 것이 꼭 땔감뿐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그렇겠지만, 시골에서는 가끔 난데없이 감동적인 일이 일어나곤 한다.

신동아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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