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광해군 평생 따라다닌 광증(狂症)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1-21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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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광해군. 영화의 내용과 달리 의학적 사료를 통해 만난 그는 의외로 소심하고 항상 불안해하는 ‘보통사람’이었다.

    건강은 어떤 비결에 의해 획득되는 게 아니라 상식적 수준의 지혜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만들어나가는 행위의 산물이다. 의학에 정통한 의사보다 ‘의학’이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 할머니나 벽지 할아버지가 더 건강하게 장수하는 게 그 증거다. 잘 씹되 모자란 듯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늘 걸어 다니고 농사를 통해 끊임없이 몸을 놀리며, 작은 것에 만족하고 걱정거리는 쉬 잊어버리는 그들, 건강할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대를 물려 몸으로 습득한 지혜를 일상으로 만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들보다 장수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습득된 지혜를 누구나 아는 ‘귀찮은 지식’으로 치부하고 훨씬 적은 노력으로 훨씬 쉽게 건강해지려 하는 까닭이다. 게으름은 동서양 의학을 막론하고 건강과 장수의 최대 적이다.

    속이 불처럼 타다

    지난해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가 관객몰이를 했다. 재미와 더불어 독특한 상상력이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역사학도는 사료와는 거리가 먼 내용 때문에 불편해했던 게 사실이다. 건강 측면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광해군 이혼(李琿·1575~1641)을 아주 건강한 남성으로 표현했지만 의사의 눈에 그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건강을 무속에 맡기고 여색을 탐하면서 섭생에는 게을렀다.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저지른 패륜의 왕,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 그의 삶에 거창한 무엇이 있을 것 같지만 의학적 사료를 통해 만난 그는 의외로 소심하고 늘 불안해하는 ‘보통사람’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광해군의 건강에 뭔가 큰 문제점이 있음을 즉위년(1608)부터 기록했다. 인목대비의 광해군 챙기기가 그 실마리다. 그녀가 약방에 내린 교서에는 광해군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주상이 지난번부터 침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미처 상세히 알아보지 못했는데 어제 문안할 때 친히 본 즉, 정신이 예전과 달라 혼미한 듯하고 너무 심하게 야위었다. 수라도 하루 동안에 한 번이나 두 번쯤 드시는데 겨우 한두 수저만 드신다. 주무시는 것도 2~4시간에 불과하니 어찌 이처럼 안타깝고 절박한 일이 있겠는가.”

    광해군 자신도 여러 번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진단을 내렸다. 즉위 2년 후 영의정 한음 이덕형(1561~1613)과 만난 자리였다.

    “어려서부터 열이 많았고, 이것이 쌓여 화증이 나타났으니 이는 조석 간에 생긴 병이 아니다. 항시 울열증(鬱熱症)을 앓아 자주 경연을 열지 못했다.”

    화증(火症)과 심질(心疾)은 실록(광해군일기) 기록상 광해군이 가장 자주 토로한 질병이다. 즉위 3년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1547~1634)이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 서류 결재가 늦어지고 있다”고 걱정한 대목을 봐도 광해군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말한 심질과 화증은 신체 내부에 열이 올라 속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상을 말한다. 한의학 관점에서 보면 울열증은 눈에도 이상을 유발한다. 광해군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안질이고 보면 더더욱 보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조섭해야 마땅하다. 안질 증세가 아침에는 덜했다가 낮에는 심해지니 나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예부터 눈이 나쁘면 쇠간을 먹는 것도 간과 눈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준다. 간염이 심해지면 눈에 황달이 먼저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의학에서 눈은 원래 불이 지나는 통로 기능을 한다. 어두운 밤 고양이의 눈이 파랗게 불타오르듯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물을 포착하는 시력은 모두 불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안(眼) 신경을 위축시킨다. ‘동의보감’은 눈의 병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간에 화가 있으면 피가 뜨겁고 기가 위로 치솟아 오르므로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간의 열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여러 가지 증상이 회복된다.’

    18세 어린 나이에…

    광해군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결정타는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 29일 열여덟 살 둘째 아들 이혼을 세자로 책봉한다. 5월 20일 평양에 머물면서 “세자 혼은 숙성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전에 결정하였거니와 군국의 대권을 총괄토록 하며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노니 무릇 관직을 내리고 상벌을 시행하는 일을 편의에 따라 결단해서 하게 하노라”(난중잡록, 조경남)고 천명한다. 조정을 나눠(分朝) 광해군은 전쟁을 수행하게 하고 본인은 일본군에 쫓겨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광해군은 1592년 6월 14일부터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했다.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군량과 말먹이를 수집하고 운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가 분조를 끌고 다닌 지역은 험준한 산악과 고개를 넘는 일이어서 거동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왜군과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심리적 압박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중건해놓고도 “궁내의 대조전이 어둡고 유령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선조 시대 주부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진 유대조(兪大造)가 올린 상소(광해군일기)는 산악지역에서 광해군과 함께 보낸 노숙생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 산길이 험준하여 일백리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하여 노숙하였으니 광무제가 부엌에서 옷을 말린 때에도 이런 곤란은 없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비를 맞으면서 끝내 모두 온전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험난한 산천을 지나느라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광해군은 그 후유증으로 1593년 봄과 여름 동안 해주에 머물며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 구중궁궐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왕손에겐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런 질병을 ‘노권(勞倦)’으로 규정한다. 노력하고 힘써서 피로한 병이라는 뜻으로, 그 원인과 병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몸의 원기가 줄어들게 된다. 음식물의 기(氣)가 부족해 상초(上焦·심장의 아래, 위장의 윗부분)가 막히고 하초(下焦·위의 아래, 방광 윗부분)가 통하지 못해 속이 더워지면서 가슴속에서 열이 난다. 화가 왕성하면 비토(脾土·지라)를 억누른다. 비(脾)는 팔다리를 주관하기 때문에 노곤하고 열이 나며 힘없이 동작하고 말을 겨우 한다. 움직이면 숨이 차고 저절로 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며 불안하다. 이런 데는 마땅히 마음을 안정하고 조용히 앉아 기운을 돋운 다음 달고 성질이 찬 약으로 화열을 내리고 신맛으로 흩어진 기를 거둬들이며 성질이 따뜻한 약으로 중초(中焦·위장 부근)의 기를 조절해야 한다.”

    임진왜란 후 벌어진 왕위 계승 문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광해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더했다. 1608년 선조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북인 정권의 영수이자 대북(大北)파였던 정인홍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라고 건의하는 한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파 영의정 유영경을 공격한다. 선조는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준 후 문안을 드리러 온 광해군을 문전박대한다. 심지어 더 이상 왕세자 문안을 운운하지 말고 다시 오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16년 공들여온 왕세자 자리가 무너질 듯한 상실감에, 광해군은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광해군은 즉위에 이르기까지 정신, 육체 양면에 걸쳐 극도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즉위 후에도 광해군의 건강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경연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위한 왕의 공부 도량이자 현실 정치의 토론장이었던 경연을 거르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그는 신하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즉위 2년 승정원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연 재개를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나의 건강이 회복되면 말을 하겠다. 우선 기다리라’‘근간에 감기가 걸려서 마땅히 조리하고 즉시 할 것’‘내가 비록 병을 참고 견디며 경연을 열고자 하나 만약 이른 아침에 거동하면 더 아플까 염려되니 조금 미뤄서 하자’는 말로 경연을 피해갔다.

    오랜 전란과 왕위 계승 암투 속에서 광해군의 몸과 정신은 날로 쇠약해갔지만 그는 스스로 체력 회복을 위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실록은 이런 광해군을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군주로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모범을 보이는 대신, 여색에 집착하고 유교 사회에선 음사(淫事)인 무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출발은 상궁 김개시였다. 실록은 비방(秘方)이란 말로 여색을 탐닉한 광해군을 비난한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로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 춘궁(春宮·동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에게 간택이 되어야 (왕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실록은 환시 이봉정의 입을 빌려 왕의 여성 편력을 까발린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경연을 오랫동안 폐하고 일반 공사의 재결도 태만해서 매양 결재의 날을 넘겼다. 더러 밤에 들이려 하면 왕이 항상 침내(寢內)에 있었기 때문에 환시들도 뵈올 수가 없었다.’ ‘왕이 여색과 놀기를 좋아해 매양 총희(寵姬) 서너 명을 데리고 후원을 노닐었다. 그러다가 꽃나무와 물 바위 등에 이르면 밤낮이 다하도록 지칠 줄 몰랐다.’

    광해군은 각종 약재와 섭생으로 몸을 돌보는 대신 무속에 집착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할 기회를 잃었다.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푸닥거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유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무당이 유학의 성지인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근대 이전의 질병 치료는 병의 원인과 본질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질병을 신의 처벌로 여기면 죄를 회개해야 했고, 귀신이 들어 병이 생겼다고 보면 귀신을 쫓아야 했다. 비문명 세계에선 무속인이 곧 의사였다. 광해군이 오랜 질병으로 힘들어하던 즉위 3년의 기록을 보면 그가 무속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광해군은 여색에 집착하고 무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상궁 김개시는 온갖 비방으로 광해군을 침실로 끌어들였고 정치적 최측근이 됐다.

    ‘이때 상(上·임금)이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좌도(左道)에 심히 미혹했다. 명과학(命科學)과 점술에 능한 정사륜, 환속한 중 이응두 등이 궁중에 진출해 상을 모셨는데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신임이 두터웠다. 상은 한결같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일이 있으면 길흉이나 금기만 따지는 그들의 말만 들었다. 조회를 하러 정전으로 옮기는 일조차 이들의 말을 따랐다. 심지어 귀신을 섬기고 복을 비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거처를 새 대궐로 옮길 때에는 매일 음사를 하느라 북소리 장구소리가 대궐 밖으로 흘러넘쳤다. 도성 백성들이 말하기를 죽어서 귀신이 되면 수라간의 음식을 실컷 먹겠다고 했다.’

    무속과 저주가 부른 병

    왕비에 대한 기록은 무속과 더욱 밀접하다.

    ‘상궁 김씨(개시)가 왕비(폐비 유씨)를 심하게 투기해 원수처럼 대했다. 그러다 궁중에 저주가 크게 일어나 흉악한 물건이 (왕비의) 침실에 가득했다. 왕비가 병이 들자 의원들은 사악한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총애를 받은 무당 복동의 기록은 광해군의 질병관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다.

    ‘복동이 저주를 한 것 때문에 국문을 당하였는데,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왕이 그에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상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권세가 조야를 흔들었다.’

    광해군 5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와 이 사건을 배경으로 벌어진 ‘폐모살제’에도 무속과 저주가 난무했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 없이 죽고 계비인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사이에 왕위 계승 암투가 벌어졌다. 1607년(선조 40년) 겨울 선조가 앓아누웠을 때 궁중에선 선조의 와병이 죽은 의인왕후 박씨의 탓이라는 소문들이 흘러나왔다. 기록에는 인목대비의 수하 나인들이 의인왕후가 묻힌 목릉으로 사람을 보내 주술을 거는 행동을 했다고 적고 있다. 의인왕후의 사촌 박동량은 저주와 관련해 실록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묻힌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목릉. 인목대비는 선조의 와병이 죽은 의인왕후 탓이라며 수하 나인을 시켜 목릉에 저주를 걸었지만 그녀 또한 그곳에 묻혔다.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의 사람들은 선조가 질병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의인왕후에게서 찾고 있다.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잇따라 목릉에 가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이 일이 말할 수 없는 곳(인목대비)과 관련이 되어 있어 더 이상 따지지 못했다.”

    계축옥사 이후 즉위 7년, 광해군은 왜란으로 불탄 창경궁을 중건해놓고도 “궁내의 대조전이 어둡고 유령이 나올 것 같다(幽暗不便)”며 가기를 꺼렸다. 도망가듯 다른 궁궐로 자주 옮겨 다니곤 했다. 이 때문인지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짓는 데 국력을 낭비하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급기야 광해군 9년 성균관 유생들은 전국 각도 유생들에게 돌린 통문에서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영혼을 저주했으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여우 뼈와 목인을 궁중에 묻고 무당을 끌어들여 빌었다. 저주를 수년 동안 계속했고 닭, 개, 염소, 돼지 등의 온몸을 궁중에 던져 임금을 해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옹호한 서인의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기록은 반대로 광해군을 공격하고 있다. “부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저주로 인목대비를 해치려 했으며 귀매(鬼魅)를 궁중으로 몰아넣어 질병을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온갖 주술이 총동원된 전대미문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질병관(觀)은 어떤 의학체계에서든 치료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조선의 의료체계에서 유학과 무속은 나름의 치유체계를 갖고 있었다. 유학은 구체적인 몸의 치유 문제를 마음과 결합시키고 경건하게 마음을 닦는 수양론에 집중했다. 무속은 인간의 감정을 의례를 통해 안심시키면서 감정을 달래주는 측면이 강했다. 전자가 요즘 말로 ‘힐링’이라면 후자는 위약(僞藥)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에 비유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광해군의 질병관이 무속에 경도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형제 간의 왕위쟁탈전과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심신의 피로와 고통은 의약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가해진 엄청난 심적 부담을 힐링과 마인드컨트롤로 극복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서인들과 인목대비가 보내는 노골적인 질시와 저주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었을 터. 그의 병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조선 최고의 鍼醫 허임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임진왜란, 여색과 주술 집착, 폐위 등의 수난 속에서도 광해군이 67세까지 산 것은 조선 최고의 침의였던 허임과 그의 보사 침법 덕분이었다.

    즉위 10년 광해군은 “내가 평소부터 화증이 많은데 요즈음 상소와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가 번잡하게 올라와 광증(狂症)이 생겨 살펴볼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질병을 화증을 넘어 광증에 이르고 있다고 자가 진단한 것.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이후 6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는 불안증과 그릇된 질병관은 그의 심신을 괴롭혔다.

    그래도 광해군이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까지 장수한 것은 침의 위력 때문이다. 그는 무속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한편 침구 치료에 매달렸다. 그의 곁엔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이 있었다. 허임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더불어 분조활동을 하면서 생명을 같이한 전우였다. 각 기록에 조선의 명의로 이름을 올린 그는 선조를 침으로 치료한 공으로 상인 출신임에도 어의(御醫)와 부사까지 지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그 진가를 인정받는 ‘침구경험방’의 저자이기도 하다. 광해군 즉위 2년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침의였는지를 드러낸다.

    “침의 허임이 전라도 나주에 가 있는데 위에서 전교를 내려 올라오도록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오만하게 집에 있으면서 명을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군부를 무시한 죄를 징계하여야 하니 국문하도록 명하소서.”

    이뿐만 아니다. 광해군 6년에는 사간원이 아뢴다.

    “어제 임금께서 ‘내일 침의들은 일찍 들어오라’는 분부를 하였습니다. 허임은 마땅히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급히 들어와야 하는데도 제조들이 모두 모여 여러 번 재촉한 연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악스러워하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자기 편리한 대로 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 차례 사간원의 요청이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한술 더 떠 허임은 치료를 잘한 공로로 가자(嫁資), 즉 포상금까지 받는다.

    조선시대 불세출의 명의이자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허준조차 침에 관해서는 허임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선조 37년 허준이 임금의 물음에 답한다.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허준의 나이 58세, 허임의 나이 34세 불과한 점에 비추어 보면 대단한 칭송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초기에 궁중에 들어와 광해군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왕의 총애를 받은 허임 침구법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허임은 침을 놓는 기법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선조 37년 실록은 “선조가 편두통을 앓자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았으며 허임은 침을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으로 미뤄 허임은 침 자리나 침에 대한 이론보다 침을 놓는 실제 방법을 중시했다.

    광해군 살린 補瀉法

    그의 침법인 보사법(補瀉法)은 수법파 기술의 결정판이자 비법으로 ‘허임 보사법’으로 따로 분류된다. 그가 쓴 침구경험방의 서문에도 침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불민한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의학에 몸담은 뒤로…환자를 치료하는 데 진료의 요점과 질병의 변화과정, 보사법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허임 보사법의 보법은 만약 침을 5푼 깊이로 찌른다면 2푼을 찌르고 멈추었다 2푼을 찌르고 나머지 1푼을 찌르면서 환자로 하여금 숨을 들이마시게 한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과 같이 내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 넣는 것이라 해서 보법이라 한다. 사법은 이와 반대의 방법을 쓰며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자침한다. 특히 그는 “오른손으로 침을 놓는다면 왼손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혈(穴)이라고 하는 침 자리의 특성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혈은 구멍이지만 피부로 덮여 막혀 있으므로 왼손으로 문질러 내면의 기를 활발하게 만든 후에 자침을 해야 한다는 것. 기가 활동하면 블랙홀처럼 구멍이 열리고 기의 흐름이 더욱 활발해지면 그때 침을 놓아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치다. 그의 침법은 천지인(天地人) 침법으로도 불리는데 세 번으로 나눠 2푼, 2푼, 1푼씩 상중하 차례로 찌르는 것에 기인한다. 그의 침법은 단순하지만 이처럼 본질을 읽어내고 임상이라는 실전에 적용한 비법이다.

    필자는 이 침법을 복원해 임상에 적용해보았더니 다른 질환에도 효과가 좋았지만 자기 몸이 일으킨 면역의 반란인 알레르기 질환에 특효를 보였다. 알레르기 비염은 꽃가루나 온도 변화 등 외부에 우리 몸이 필요 이상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콧물이나 재채기도 이런 외부적 요인을 없애기 위한 자의적 반응일 뿐이다. 허임의 보사법 중 사법은 외부 자극에 대해 지나친 긴장감을 풍선에서 바람 빼듯 치료한다. 난치병으로 알려진 이명도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의 흥분을 진정시킴으로써 좋은 효과를 보았다.

    무속과 여색에 빠진 왕 허임 침법이 살리다!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조선 최고의 침의인 허임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즉위 15년에 사라진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바로 그해다. 광해군은 자신의 질환을 신하들에게 누설한 것에 분노해 그를 파직한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의지에 따라 수없이 궁을 들락거린 그였지만 광해군이 유배를 당해 권좌에서 쫓겨난 후 다시는 어의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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