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풍요와 여가의 땅 밀레투스

  • 임성진|철학자 limsj20@daum.net

    입력2013-01-21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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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철학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초의 서양철학자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리스 본토 출신이 아니라 터키 서쪽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밀레투스 출신이다. 서양철학이 이곳에서 탄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밀레투스

    밀레투스는 현재 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내륙으로부터 약 1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서양철학이 생겨날 당시에는 이오니아 지방(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방)의 항구 도시였다. 그리스인이 기원전 11세기 이오니아 지방에 진출해 밀레투스를 세웠다. 밀레투스는 아나톨리아 내부에서 해안으로 운송된 자원과 가공품을 교역하는 중심지였다. 북쪽으로는 흑해,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 남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역 활동을 펼쳤다.

    생산과 교역 활동이 풍요를 가져다준 덕분에 밀레투스 사람들은 신보다는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자연을 통제해야 생산과 교역이 원활히 이뤄진다는 점을 깨달아 자연 세계에도 관심을 뒀다. 신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신화적 사유 대신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사유를 한 것이다.

    호기심이 철학의 산파

    탈레스(기원전 625~545년),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0년)와 같은 최초의 서양철학자가 마주한 밀레투스의 풍요는 여가의 즐거움과 지적 탐구를 위한 자극을 줬다. 플라톤(기원전 427~347년)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가 말했듯 철학은 호기심 또는 경외심에서 생겨난다. 최초의 서양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사람들로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기술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 때문에 철학을 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수천 년 전의 이집트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용적 기술을 개발했으나 철학을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진리와 지식에 대한 사랑을 갖추지 못했던 탓이다. 실용성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철학이 탄생하지 못한다. 철학은 직접적 경험 세계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레투스의 지리적인 위치, 이웃 세력과의 관계도 서양철학 탄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밀레투스는 그리스 세계의 동쪽 끝에 있었다. 밀레투스의 동쪽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바빌로니아 리디아 페르시아 등으로 이뤄진 지역, 즉 동방(東邦)이 있었다. 동방의 사유는 밀레투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밀레투스의 역사를 보면 동방의 사유가 그리스의 사유에 영향을 주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대부분의 이오니아 지방은 리디아의 알리아테스(재위 기원전 610~560년) 왕이 지배했다. 그의 아들인 크로이소스(재위 기원전 560~546년) 왕은 이오니아 지방의 해안지대를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이오니아 지방은 기원전 546년 크로이소스 왕이 키로스(재위 기원전 560~530년) 왕에게 패배한 후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됐다. 밀레투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리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이 밀레투스의 명성과 위력을 존중한 덕분에 밀레투스는 이들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그 나름의 특권과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 밀레투스 사람들은 동방의 사유를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사유의 접촉은 이와 같이 수동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지만, 능동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았다. 진취적인 밀레투스 사람들은 육지로는 동방으로, 바다로는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최초의 서양철학자들도 밀레투스에 은둔하지 않고 동방의 사유를 능동적으로 획득하고자 했다. 특히 탈레스는 이집트를 방문해 기하학을 밀레투스에 최초로 도입했고 나일 강의 범람 원인을 제시했으며 그림자를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고 전해진다. 동방의 사유, 이집트의 사유, 그리스의 사유가 교류하고 접하면서 서양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생각의 자유 막은 이집트

    그렇다면 서양철학이 하필 밀레투스에서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6세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밀레투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렸는데도 이 지역에서 철학이 탄생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 생각의 자유를 인정한 밀레투스와는 달리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전제 정권에 종속된 종교로 인해 생각의 자유를 억압했고 사제들은 생각의 자유로 인해 왕의 권위가 훼손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물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역시 상당한 지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탈레스는 일식을 예언할 때 바빌로니아의 지식을 근거로 했으며 밀레투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덕분에 농업, 도예, 벽돌 제조, 방적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밀레투스는 자신들이 명성을 떨친 직물 제조에서조차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기술을 모방했다.

    밀레투스인 역시 그리스 수학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수학에 힘입어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5년)에 따르면 기하학은 이집트에서 시작돼 밀레투스로 전해졌고 밀레투스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하루를 12부분으로 나누는 법과 천구(반원천장 모양의 해시계), 그노몬(해의 방향과 고도를 가리키는 삼각자 혹은 직각 막대)을 배웠다. 이집트인은 기하학에서 뛰어났고, 바빌로니아인은 산술에서 우수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가 밀레투스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졌고 더 높은 수준의 수학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은 지식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실용적 목적에 도움이 되는 기술에만 관심을 가졌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이집트는 개인이 소유한 땅의 직사각형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나일 강의 범람으로 땅의 면적이 줄어들면 땅 소유주의 요청에 따라 왕의 측량사들이 와서 줄어든 땅의 면적을 재고서는 세액을 조정했다.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에서 이런 문제가 기하학의 발전을 자극했다고 설명했다. 이집트의 기하학은 토지 측량이나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에 불과했다.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탈레스

    바빌로니아에서 종교는 삶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천체 현상과 관련해 해석되곤 했다. 종교와 연계돼 있다보니 바빌로니아인에게 천문학은 중요했다. 이곳에서 천문학은 별, 특히 떠돌이별을 신들과 연결하는 별 숭배 관행과 하늘의 사건이 절기, 기후 등과 연관돼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발전했다. 이들은 천문학의 발전에 힘입어 별의 현재 위치에 비춰 왕이나 왕국의 운명에 대한 단기적 예언을 할 수 있게 됐다. 관찰과 계산은 꽤나 정확했지만 이들의 천문학은 종교 의식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기술에 만족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선 궁구하지 않았다. 밀레투스 사람들, 나아가 그리스인은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원인을 물었으며 원인에 대한 관심은 일반화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은 불이 벽돌을 딱딱하게 만들고, 집을 따뜻하게 하며,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불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해 ‘불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예컨대 바빌로니아인은 두 숫자를 곱한 값과 두 숫자를 더하거나 뺀 값을 제시하고서는 원래의 두 숫자를 구하라는 문제를 풀 수는 있었지만 계산할 때 필요한 수식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집트인은 기하학을 직사각형 형태의 개인 농장과 관련지어 생각했으나 그리스인은 어디에서든 동일한 특성을 갖는 직사각형의 본질을 궁리했다. 그리스인에게만 형상이 감각에서 개념으로 나아간 것이다.

    결국 기원전 6세기 밀레투스인들은 실용적 차원을 넘어선 사유를 통해 철학을 일으켜 세웠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최초의 서양철학자는 천문학, 수학, 우주론, 기상학, 생물학, 영혼론 등의 분야에서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들이 서양철학을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최초의 서양철학자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 7현인(탈레스, 피타코스, 비아스, 솔론, 클레오브로스, 킬론, 페리안드로스) 중 한 명이다. 그는 ‘항해용 천문 안내서’ ‘지점(至點·동지점과 하지점)에 관하여’ ‘분점(分點·춘분점과 추분점)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탈레스는 우선 천문학자로 여겨진다. 천문학에서 탈레스의 가장 유명한 행적은 일식 예언이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낮이 갑자기 밤으로 바뀌는 변화, 즉 일식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해에 실제로 일식이 일어났다.

    탈레스는 수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발견했다. 이집트에서 기하학을 배워 이를 밀레투스에 최초로 도입했다. 그리스 기하학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서 볼 수 있듯 측정이나 계산이 아니라 일반적 정의와 정리에 초점을 맞춘다.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아테네 학당

    일식 예언한 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우주론에 관한 생각 두 가지를 후대에 전해주는데, 하나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이다.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적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이 폭넓게 퍼져 있었다.

    물론 탈레스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적 우주론을 단순히 답습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는 지진의 원인을 지하에 있는 물의 운동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설명은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고 전제해야 가능하다.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는 탈레스의 발상은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나올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설파한 4원인[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은 한 사물에는 질료인(그것이 어떤 질료로 되어 있는가), 형상인(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운동인(무엇이 그것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목적인(그것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존재하는가)이 존재하며, 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설명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 탈레스가 말하는 물을 질료인으로 해석한다. 그는 모든 것의 자양분이 축축하다는 것, 열 자체가 물에서 생긴다는 것, 물에 의해 모든 것이 생존하는 것을 보고서 탈레스가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모든 사물은 물로 이뤄져 있음을 의미한다. 탈레스는 ‘모든 사물이 무엇으로 이뤄졌는가’라는 질문을 최초로 제기한 후 물이 사물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과 달리 탈레스는 물이 세계의 기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땅이 물 위에 떠 있다는 착상과 잘 연결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신화에도 함축돼 있다.

    물이 세계가 생겨난 기원이라는 사유는 세계의 기원이 어떠했고, 현재의 세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탈레스는 세계가 태초에 물에서 나왔는데, 세계는 여전히 물 위에 떠 있고, 물은 지진과 같은 자연 현상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구성요소로서의 물이라는 생각과 기원으로서의 물이라는 생각을 함께 가졌을지도 모른다.

    탈레스는 최초의 서양철학자지만 근원적 질료인 물에서 다른 사물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설명하지 않았고, 땅을 받치고 있는 물은 어떤 것으로 받쳐져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보다 더욱 정교한 주장을 펼쳐 스승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노몬을 바빌로니아에서 도입했고 해시계 위에 그노몬을 세워 지점과 분점을 표시했으며 시간을 알려주는 계기도 만들었다. 그는 또 땅과 바다의 경계를 처음으로 그렸고 천구를 만들었으며 처음으로 지도를 내놓았다. 그는 ‘자연에 관하여’ ‘땅의 회전’ ‘붙박이별에 관하여’ ‘천구’ 등의 책을 썼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을 ‘아페이론’(무한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페이론은 물, 불과 같은 질료와는 다르다. 이것은 영원하고, 늙지 않으며, 모든 세계를 둘러싸고, 하늘과 그 속의 세계를 생겨나게 한다. 아페이론은 공간적 한계를 갖지 않는 무한히 큰 것이고, 시간적 한계도 없으며, 특정한 것으로 정해져 있지도 않다. 이것은 물도 불도 아니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이것은 신적인 것이고, 사멸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영원히 운동하는 것이기에 세계를 생겨나게 한다.

    만물의 근원을 사유하다

    우주는 아페이론에서 대립자들이 떨어져 나오면서 발생한다. 우주의 발생에서 주요 대립자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다. 대립자의 도입은 근원적 질료인 물에서 다른 사물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탈레스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설 실마리를 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산출하는 것이 아페이론에서 분리돼 나온다고 설명한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은 동등한 힘을 가지고 동시에 산출되는 까닭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불꽃과 공기다. 불꽃은 껍질이 나무를 둘러싸듯 땅 주위의 공기(짙은 안개)를 감싸고 자란다. 불꽃이 부서져 둥근 것들로 될 때 해와 달, 별이 나타난다. 땅 주위의 공기인 짙은 안개는 인간이 숨을 쉬는 공기와 인간이 밟는 땅으로 분화하는데, 축축한 땅은 태양에 의해서 마르고 남아 있는 습기가 바다를 이룬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물의 기원에 대한 설명도 제시했다. 더 단순한 것에서 더 복잡한 것이 생기며, 생겨나는 것은 어떤 것 속에 둘러싸여 있다가 밖으로 터져 나와 존재한다. 최초의 생물은 가시투성이 껍질로 싸여 있다 나중에 껍질을 터뜨리고 나왔으며 사람도 물고기 같은 생물 속에 갇혀 있다 성장한 다음 껍데기를 터뜨리고 나온다. 사람이 물고기 같은 생물 속에서 길러졌다는 발상은 최초의 생물이 축축한 것에서 생겨났다는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사람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에는 무기력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착상의 기발함을 보여준다.

    철학의 탄생 덕분에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통해 여러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밀레투스에서 탄생한 철학은 터키 서부 이오니아 지방으로 전파됐고 곧이어 남부 이탈리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오니아에선 이오니아 학파가 형성됐으며 이탈리아 남부에선 엘레아 학파가 꾸려졌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가 등장하기 전의 철학자를 보통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또는 자연 철학자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하기 전까지 자연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했다.

    철학적 사유가 발전한 것은 탈레스가 기원전 6세기에 밀레투스에서 서양철학을 탄생시켰고, 그 뒤를 이어 아낙시만드로스가 철학의 기반을 어느 정도 마련한 데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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