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섹시한 커리어 우먼 이미지로 영화판 ‘올킬’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3-01-22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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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여배우들은 고만고만했다. 1970년대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당시 한국 영화의 화두는 ‘노출 수위’였다. 여배우를 얼마나 벗기느냐가 지상과제였다. 여배우들은 그저 소모품으로 여겨졌다. 그럴 때, 전혀 다른 유형의 한 여배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에 착 붙는 청색 투피스를 입은 커리어 우먼. 미모와 지성,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이 신세대 여성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바로 심혜진이었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도대체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란 어떤 밤일까. 1980년대 중반, ‘뼈와 살이 타는 밤’(1985, 조명화 감독)이란 영화가 상영되는 삼류 동시 상영관 앞에서 얼큰하게 술에 취한 나는 친구들과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심야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들과 나는 한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별거 없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치른 서울의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율화됐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그런 세상이 됐는데, 서울의 극장가에는 말과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랑하는 온갖 부인네가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영화들이 판을 쳤다. 조선시대 여인네가 이상한 막대기를 손에 들고 깜짝 놀라는 얼굴로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하는 영화들, 성매매를 하는 비운의 여성들의 벗은 몸이 화면에 가득한 세상이었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말에 생긴 동네 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동네의 유서 깊은 제2개봉관들이 UIP(다국적 영화배급사) 직배 영화관이 되어 개봉관으로 승격됐다. 그 대신 상가 건물의 지하에는 작은 동시상영관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객석이 100여 석 남짓한 이 극장들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버스 정거장 하나에 하나씩 생겨났다. 극장에 들어가면 요구르트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이야! 영화도 보고, 요구르트도 먹고.” 이태원과 압구정동에는 해외여행 자율화로 잠깐 미국 물을 먹은 아이들이 오렌지족이라 불리며 청춘을 불태울 때, 낑깡족임을 자처한 돈 없고 한심한 나 같은 청춘들은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주말 밤에 ‘뼈와 살이 타는 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요구르트를 쪽쪽 빨았다.



    입에 꽃 한 송이를 문 사내 하나가 산마루에 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힘을 쓰자 지축이 흔들린다. 사내가 쏟아내는 오줌발은 소방 호스 물줄기처럼 콸콸 쏟아져 폭포수가 되고 금세 계곡이 되고 강이 되어 버린다. 사내의 반대편 북쪽에선 한 여인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본다. 그러자 단단한 바윗덩이에 구멍이 파이고, 커다란 동굴이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가공할 만한 정력은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남에서 북으로, 여자는 북에서 남으로 짝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남남북녀가 드디어 만나 합궁을 하자 사슴들이 놀라 도망가고 새들이 땅에 떨어진다. 땅과 하늘이 들썩이고 지구가 요동을 치고 은하계가 부르르 떤다.

    변강쇠와 옹녀의 가공할 정력을 다룬 영화 ‘변강쇠’다. 이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야담인 고금소총, 어우야담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당시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여성 인신매매 소재 영화 ‘매춘’ 시리즈, 동물을 사랑하는 유부녀 시리즈들이 1980년대의 극장가를 점령했다. 이런 영화들을 우리는 에로영화라 불렀다. 주말에 여가를 즐길 마땅한 놀이가 없었던 젊은 남자들은 에로영화가 상영되는 동네 극장을 찾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낄낄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70년대 ‘트로이카’라 불리던 여배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여배우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불운했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말 한국 영화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맞았다. 이런 암흑기에 등장한 여배우는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췄어도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미경, 이보희, 나영희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다.

    이보희의 등장은 신선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암담했던 시기에 절치부심한 이장호 감독은 ‘바보선언’(1983)으로 사회적 울분을 토해냈고 관객은 공감했다. ‘바보선언’에서 이보희는 가짜 여대생으로 출연해 그녀의 신선한 외모를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보희 주연의 ‘무릎과 무릎사이’(1985, 이장호 감독)와 ‘어우동’(1985, 이장호 감독)이 개봉됐다. ‘애마부인’ 이야기에 약간의 지적인 해석으로 여성의 트라우마를 넣은 ‘무릎과 무릎사이’는 흥행에 성공했다. 이장호 감독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시대 야담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어우동’을 만든다. 조선시대 여성 수난사의 틀에 에로티시즘을 덧입힌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한다. 연기력으로 그녀의 존재감이 발휘되기 이전, 이보희는 에로틱한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흥행을 이끈 여배우로 각인되고 만다.

    1979년에 데뷔한 원미경은 아름다운 외모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하고 ‘김두한형 시라소니형’(1981, 김효천 감독) ‘종로 부루스’(1982, 김효천 감독) 같은 깡패 액션 영화의 조연을 맡거나 고만고만한 멜로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오히려 애욕에 가득한 여인으로 등장한 ‘반노’에서의 노출 때문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부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이두용 감독)를 통해 비로소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인정받기 전까지 그녀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노출 여배우들의 시련

    나영희는 ‘어둠의 자식들’(1981, 이장호 감독)로 영화계에 데뷔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 정진우 감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녀를 화제의 중심으로 만들어준 영화는 역시 ‘매춘’(1988, 유진선 감독)이었다. 그녀는 데뷔작인 ‘어둠의 자식들’에서 ‘카수 영애’로 등장, 가수를 꿈꾸었으나 창녀로 전락한 한 많은 여자를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매춘’에서 매춘녀 역을 맡으며 최고의 흥행을 거둔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아무도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가슴 노출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1980년대 후반엔 대놓고 에로배우라는 칭호를 받는 여배우들도 등장했다. 1984년 ‘산딸기2’(김수형 감독)로 등장한 선우일란, ‘애마부인’ 출신의 오수비, ‘어울렁 더울렁’(1986, 차성호 감독), ‘요화 어울우동’(1986, 김기현 감독)의 김문희 같은 이들이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심혜진, 최민수가 주연한 영화 ‘결혼이야기’.

    1970년대 말부터 한국 경제는 발전을 거듭해 1980년대에는 호황기로 접어들었다. 돈을 주고 여성을 사는 성매매 문화는 ‘빠’에서 ‘룸싸롱’으로 옮겨갔고, 무교동 유흥가는 강남 유흥가에 자리를 내줬다. 1980년대 중반 ‘꽃피는 남서울 영동’이란 가사의 노래가 나올 정도로 강남은 유흥문화의 중심이 됐다. 성매매 여성이 부족해지자 인신매매라는 극악한 수법으로 여성을 매춘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범죄가 사회 전반에 퍼진다. ‘매춘’이란 영화는 인신매매에 걸려든 불행한 여성들을 다룬 영화였지만, 그녀들의 고통을 표현하기보다는 그녀들을 벗겨서 눈요깃감으로 만드는 데 급급했다.

    에로영화가 넘쳐나던 이 시기에 임권택 감독은 인간의 고통과 한국 사회의 갈등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답이 베니스 영화제 수상이었다. 조선시대 여인 수난사를 다룬 이야기인 ‘씨받이’(1986)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강수연. 아역 배우 출신인 강수연은 이 영화로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받았고, 일약 충무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여배우로 등극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 영화의 화두는 역시 노출의 수위였다. 검열에 걸리지 않고 여배우를 얼마나 벗기는가, 이것이 ‘애마부인’ 이후 한국 영화의 목표였고, 남성 관객들은 여배우의 가슴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이 시기의 여배우들은 오로지 남성 관객과 공모한 남성 영화 제작자들의 볼거리로 소모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등장한 여배우들은 모두 고만고만했다. 1970년대의 여배우들과 비교하면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영화도 다 그렇고 그렇다. 그 시기 한국 영화를 본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교양과 품위를 지닌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보지 않았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배용균 감독) 같은 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면 입에 올리는 정도였다.

    신세대 여왕벌의 등장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받던 1980년대, TV 광고 속의 한 여성이 젊은 남성들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몸에 착 달라붙는 짙은 청색 투피스를 입은 회사원 여성이었다. 그녀는 키가 또래의 남자들보다 조금 더 크거나 대등했고, 팔꿈치로 옆자리의 남자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그녀는 남자의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아, 알았어!’라는 뜻을 전하곤 다시 일에 몰두한다. 미모와 지성, 섹시함을 두루 갖췄을 뿐 아니라 자기 힘으로 돈을 번다. 바로 커리어 우먼의 등장이었다.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던 여성이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 말 이 광고를 본 수많은 여성은 광고 속의 여성과 닮으려고 노력했고, 당시 나이 어린 여자들은 커서 이 여자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세련됐으며 섹시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들 앞에서 당당하고 존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 옆의 남성들도 모두 한가락 하는 멋쟁이이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뭔가 모자라 보였다. 매혹적인 신세대 여왕벌, 그녀는 심혜진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얻은 여자 연예인을 놓치지 않는 것이 영화계다. 그녀는 바로 영화에 진출했다. 첫 출연작은 ‘물의 나라’(1989, 유영진 감독). 이 영화에서 심혜진은 사장의 내연의 처 역을 맡았다. 그 후 ‘그들도 우리처럼’(1990, 박광수 감독)에서 다방 레지로 출연했고, ‘하얀 전쟁’(1992, 정지영 감독)에서는 스트립걸로 나왔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코카콜라 광고에서 보여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했다. 자칫 한때 반짝하고 지나가는 그런 여배우 중 하나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던 중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1992)가 개봉됐다. 스태프와 영화 제작자 모두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힘을 뭉쳐 만든 영화였다. 심혜진은 이 영화에서 몇 해 전 코카콜라에서 보여주었던 그 당당한 여성, 새로운 여성의 등장을 완결짓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공동묘지의 묘비가 보인다. 묘비명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 앗! 이게 뭐지? 공포영화인가?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여 묘지 앞 커다란 나무로 다가간다.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남녀가 옷을 벗어 집어 던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결혼을 앞둔 최민수에게 이미 결혼한 직장 동료와 선배들이 한마디씩 한다. “결혼은 뜨거운 감자, 차라리 감옥이 낫다. 마누라가 없는 곳, 그곳이 천국이다.” “좀 더 신선하고 스릴 있는 자살 방법을 생각해라. 결혼은 초라하고 냄새나는 진부한 자살 방법이다.” 최민수는 그들이 하는 말이 실감이 안 난다. 그냥 질투하는 것 같다.

    남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여자

    장면이 바뀌면 심혜진이 여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중 한 여자는 화를 내며 심혜진에게 “네가 결혼하면 당장 절교다”라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러나 동료와 선배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최민수와 심혜진은 결혼에 돌입한다.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최민수는 PD이고, 심혜진은 단역 성우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친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이 서고, 서로의 엉덩이로 손이 간다. 최민수가 심혜진의 엉덩이를 톡톡 치자, 심혜진도 지지 않고 최민수의 엉덩이를 토닥여준다. 그러고는 춤을 추듯 서로의 엉덩이를 부딪치며 애정공세를 펼친다. 남녀의 대등한 애정 표현이 이만큼 발랄하고 상쾌했던 한국 영화가 있었을까.

    영화는 단숨에 관객의 호응을 얻어냈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최민수는 1960년대 한국 남성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런 남성이다. 다만 그때의 남성들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착하고, 여유롭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은 어머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랑으로 부부관계의 험난함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심혜진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어머니나 여성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신세대 여성이다. 최민수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눌러 짜라고 하고, 심혜진은 그냥 아무렇게나 눌러 짜면 안 되느냐고 맞선다. 최민수는 심혜진이 목욕을 하고 난 뒤 세면대에 붙은 머리카락에 진저리를 치고, 심혜진은 최민수가 소변을 보고 난 뒤 좌변기에 떨어져 있는 ‘물방울’에 진저리를 친다. 그녀는 남편과의 섹스에서는 전혀 얻어내지 못했던 흥분과 희열을 대타로 얻은 배역에서 멋지게 성공한 후 얻는다. 자기 일의 성취감에서 느낀 흥분은 섹스 따위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다.

    최민수는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 깜짝 놀라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심혜진이 자기의 진짜 세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자기의 진짜 세계와 결혼의 세계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한다. ‘나의 진짜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침대처럼 가구의 일종인가?’ ‘여성은 남편에게 섹스를 대주는 빨래판인가?’ 결국 심혜진은 선언한다. “당신과의 결혼생활은 나에겐 악몽이었다”고. ‘결혼이야기’의 성공 이후 남자들 앞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신세대 여성의 캐릭터를 획득한 심혜진은 단숨에 1990년대 새로운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994년작 ‘세상 밖으로’(여균동 감독)에서 그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하게 뛰어논다. 그녀의 배역은 젊은 부자의 세컨드 또는 호스티스다. 그런 그녀가 두 탈옥수 문성근과 이경영을 만나 날뛰기 시작한다.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그녀가 파출소에 끌려간 부분인데,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하자 “내가 나인데 왜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냐”며 대든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데 왜 증명서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문성근과 이경영을 욕하면서 그녀는, 남자들에게 동등한 위치와 똑같은 의리를 요구한다. 그녀는 자신을 ‘썅년’이라 욕하는 이경영을 제압하는 기를 지녔다. 쫓기는 자들이기에 그녀는 항상 뛰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그녀는 뛰는 것이 싫다고 외친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 병수발을 들면서 설거지를 마치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학교로 달려가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또 뛰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심혜진은 달랐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에 출연할 당시의 심혜진(오른쪽)과 진희경.

    1995년 심혜진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오병철 감독)에 출연한다. 강수연, 이미연과 함께 출연한 그녀는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여성을 연기한다. 대학 때부터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그녀는 돈 많은 산부인과 의사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편은 아내인 심혜진과 섹스를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며 세컨드 여자와 거리낌 없이 외도를 한다. 그러나 심혜진은 남편에 맞서기 위해 똑같이 맞바람을 피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심혜진은 서울 강남에 사는 부유한 여성의 욕망과 고통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심혜진은 자세히 뜯어보면 결코 예쁜 얼굴을 가진 배우는 아니다. 돌출된 입과 말처럼 긴 얼굴, 약간 사이가 먼 눈. 이것만 놓고 보자면 전형적인 여배우의 얼굴은 아니다. 1960년대였다면 주연 자리는커녕, 배우 근처에 발도 못 붙일 얼굴과 키였다. 하지만 1990년대는 그녀를 원했다. 1980년대의 격변기를 치러내고, 욕망이 발산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그 시기에 그녀는 가장 1990년대다운 여배우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잘 모르는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1990년대를 떠올렸다.

    아쉽게도 나는 그녀가 ‘이게 뭐람?’이라 생각했을 법한 영화에서 같이 일했다. 연출부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 감독)’에서 같이 일을 했고, ‘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은 시골 마을마다 꼭 한 명씩은 있었던 약간 모자란 처녀 바보 옥님이 역을 맡았다. 도회적 이미지의 그녀가 1950년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바보 처녀 역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역이었다.

    심혜진은 자신의 촬영분이 있기 며칠 전부터 바보 옥님이의 의상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첫 촬영분이 있기 전날에도 그녀는 진도의 시골길을 옥님이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진도의 들판에 홀로 서서 논밭 너머 멀리 해가 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짜 바보 옥님이가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녀가 코카콜라 광고로 뜬 그렇고 그런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초록 물고기’에서 심혜진은 깡패 두목 문성근의 애인이며, 문성근의 부하인 한석규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심혜진은 등에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는, 과거를 알 수 없는 여자였고 이유도 없이 기차를 타고 혼자 어디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깡패들이 나오는 영화이니, 그들이 활개를 치는 밤 시간에 주로 촬영이 이뤄졌다. 깡패의 애인이니, 그녀 역시 밤에만 주로 활동했다. 그녀가 낮에 촬영한 신은 영화의 첫 장면인 기차 신과 마지막 장면인 버드나무집 신뿐이었다. 그녀의 촬영 시간은 늘 새벽 2시부터 6시까지였다.

    가장 아름답게 보여야 할 여배우가 매일 밤잠을 설치면서 촬영장에 대기하는 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배우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조감독인 나는 그녀 때문에 항상 스릴을 맛보곤 했다. 그녀가 촬영장에 제 시간에 도착한 날은 앞의 촬영분이 끝나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 해서 그녀의 살벌한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고, 그녀가 좀 늦는 날은 공교롭게도 앞 신의 촬영분이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모두가 그녀를 찾아 나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톱스타의 정중한 사과

    강행군으로 밤 촬영이 진행되어 모두가 피곤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그녀가 일을 냈다. 좀 늦게 오기는 해도 조감독인 나만 알고 감독과 스태프는 모르게 촬영 시간을 잘 맞춰왔던 심혜진이 그날은 아주 늦어버린 것이다. 새벽 2시에는 와야 할 그녀가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스태프가 짜증을 내고 그들의 원망을 한눈에 받던 나는 눈길을 피해 촬영장인 나이트클럽의 문 밖 계단에서 스릴을 만끽하며 서 있었다.

    늦어도 꽤 늦은 시간. 드디어 그녀와 매니저가 나타났다. 욕을 덜 얻어먹을 방법은 먼저 화를 내는 거라고, 매니저가 내게 화를 내며 불평을 늘어놓으려 입을 떼자 심혜진은 매니저의 말을 막으며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에 대한 원망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톱스타 여배우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본 것은 그때 심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심혜진은 대단히 쾌활하고 천방지축이며 어찌 보면 맹한 구석도 있는 명랑한 배우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웬만한 남자보다 멋진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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