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통섭 공부’ 함께 한 기숙사 인맥 ‘통합 정치’ 단결력 발휘할까?

박근혜 ‘인재 풀’ 거론 정영회(正英會) 이야기

  • 구자홍 기자│jhkoo@donga.com

    입력2013-01-22 17: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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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찬·한덕수 총리 배출한 인재 산실
    • 육영수 여사, 청와대 초청 만찬 열어줘
    • 박정희 대통령, 책 선물하며 각별한 관심
    • 朴 당선인, 연 3~4회 소그룹별 만남
    “회원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자로서 재학 중에 정영사(正英舍)에 재사(在舍)했던 자로 한다.”(정영회 회칙 제4조 회원의 자격)

    정영회(正英會)는 1971년 11월 20일, 서울대 우등생 기숙사 정영사 출신 졸업생 84명이 창립한 모임이다. 이후 1972년부터 1985년까지 매년 졸업 사생(舍生) 60여 명이 신입회원으로 가입해 총회원이 680명에 달한다.

    회원 가운데 정운찬(1기)·한덕수(2기) 2명의 국무총리가 나왔고, 류우익 통일부 장관(2기),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장(6기), 이재원 법제처장(11기) 등도 배출됐다. 최성재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은 1기,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2기,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3기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김대환 인하대 교수도 3기다.

    지난해 4월 치러진 19대 총선에서는 5명의 정영회 출신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오제세(3기·민주당), 신경민·장병완(6기·민주당), 나성린(7기·새누리당), 여상규(8기·새누리당) 의원이 그들이다. 서상섭 16대 의원(3기)과 박종웅(6기) 14~16대 의원도 정영회 회원이다. 이처럼 정계에 진출한 회원도 여럿이지만, 회원의 60%가량은 대학교수다. 의대, 치대 졸업자 중엔 고향에서 개업한 경우가 많다.

    정영회의 모태가 된 정영사는 1968년 5월 15일, 서울대학교병원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의과대학원 기숙사 터에 3층 건물로 문을 열었다. 당시엔 2학년과 3학년 재학생 각 40명씩 80명이 입사했다. 1975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정영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금 1000만 원과 국고지원 1600만 원으로 서울대 의대 구내에 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평균 학점 3.5 이상만 入舍

    정영사라는 명칭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를 따온 것이다. 정영사 1기인 허종덕 명예회장은 “‘정영’은 ‘바른(正) 영재(英)’란 뜻이므로 영어로는 ‘엘리트(elite)’가 되고 정영사는 ‘엘리트 기숙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정영사는 1985년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의대 기숙사로 전환됐다.

    원래 3층 건물로 지어진 정영사는 곧 1개층을 증축했다. 2, 3학년에 이어 4학년까지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학교 측이 “2학년 입사를 위해 4학년은 방을 비워달라”고 요구하자 당시 사생(舍生) 대표였던 허종덕 명예회장이 최문환 당시 서울대 총장을 3차례 찾아가 면담한 끝에 청와대의 도움으로 1개층을 증축해 2, 3, 4학년 각 40명씩 120명이 생활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최문환 총장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20여 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최 총장을 찾아가서 ‘어떻게 총장께서 제자들에게 식언을 하실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최 총장이 ‘마지막으로 청와대에 얘기해보자’고했고, 3학년이던 이계식(전 제주도 정무부지사) 군이 편지를 써서 육영수 여사에게 보냈다.”(허종덕 명예회장)

    ‘우등생’ 선발을 원칙으로 한 정영사는 직전 학기 평균학점 3.5 이상만 들어갈 수 있었다. 재사(在舍) 중에 3.0 이하로 떨어지면 퇴사해야 했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13기)은 “학점이 떨어지면 곧장 짐을 싸야 했기 때문에 다들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인재 육성에 관심이 많았던 육영수 여사는 정영사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정영사가 문을 연 지 열 달째 되던 1969년 3월 25일, 육 여사가 정영사를 찾았다. 다음 날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통섭 공부’ 함께 한 기숙사 인맥 ‘통합 정치’ 단결력 발휘할까?
    육 여사 “밀가루 음식 권하라”

    “육영수 여사는 25일 저녁 닭볶음과 사과 선물을 갖고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방문, 학생들과 저녁을 같이 들면서 담소. … 이날 80여 명의 기숙생들은 육 여사를 특별초청, 입을 모아 ‘어머니를 떠나 객지에 나와 있는 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기분에서 타이르는 말씀을 듣고 싶었다’고. 저녁밥에 보리와 콩이 섞인 것을 보고 육 여사는 ‘청와대 식탁에는 이보다 많이 잡곡이 섞인다’면서 ‘밀가루 음식은 건강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으니 어머니와 누나에게 권하라’고 당부. ‘퍼스트레이디의 요리가 먹고 싶다’는 어느 학생의 주문에 ‘매년 2월에는 수석 학생들을 청와대로 초대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그때 오라’고 조크. 육 여사는 ‘레크리에이션 시설이 너무 없다’면서 전축 한 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미대 학생 신현덕 군은 육 여사에게 풍경화 한 폭을 선사.”

    육영수 여사는 1969년 첫 방문 이후 해마다 정영사를 찾아 학생들이 지내는 방을 둘러보고, 필요한 생활용품이 있으면 챙겨 보내줬다. 정영사 기숙생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1969~70년 정영사에서 지낸 오제세 민주당 의원은 “육 여사가 1969년 추석 즈음에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1973~75년 정영사에서 생활한 나성린 새누리당 의원도 “육 여사가 (정영사에) 오실 때면 반찬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육 여사가 사 오신 고기로 만든 반찬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청와대와 육 여사의 따뜻한 관심 덕에 정영사 사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좋은 조건에서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1972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 각 대학 기숙사 비용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정영사 입사비(2000원)는 중앙대(4000원)나 이화여대(6000원)보다 훨씬 낮았다.

    ‘통섭 공부’ 함께 한 기숙사 인맥 ‘통합 정치’ 단결력 발휘할까?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서거한 이후에도 청와대는 정영사에 특식을 보냈다. 육 여사 서거 후 정영사에서 생활한 한 인사는 “1년에 한두 번 청와대에서 당시로선 귀한 음식인 통닭을 내려보내 맛있게 나눠 먹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정영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은 20일 하현망 교수(이화여대) 저서인 ‘한국의 역사’를 사서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직원과 출입기자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주고, 전국 각지의 도서관 및 서울대 정영사 학생들과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장학생들에게도 기증”이라고 보도했다.

    ‘통섭 공부’ 함께 한 기숙사 인맥 ‘통합 정치’ 단결력 발휘할까?
    자연스러운 ‘통섭’의 공간

    정영사는 사생대표와 층장(층 대표), 날개장(각 층의 왼쪽, 오른쪽 구역 대표), 방장 등으로 구성된 사생자치회가 중심이 돼 운영됐다. 그래서 운영 주체이자 수혜자인 사생들의 의견이 기숙사 운영에 많이 반영됐다. 공훈의 소셜뉴스 대표(14기)는 “정영사 재사 시절 방마다 돌아가면서 찬거리를 사왔다”며 “음식을 만들어주시던 아주머니가 적어준 기본 찬거리를 사고 난 뒤 나머지는 예산 범위 안에서 먹고 싶은 것을 사다 먹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면 잊지 않고 ‘구루마 커피’를 마시곤 했다”며 길거리 리어카에서 팔던 커피에 얽힌 추억담을 들려줬다.

    정영사에서 지냈던 인사들은 하나같이 “식사가 특히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1975~77년 정영사에서 생활한 한 회원(9기)은 “무엇보다 좋았던 건 기숙사에서 도시락을 싸준 일”이라고 말했다.

    1975년 서울대는 대학로에서 관악구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이전한다. 그래서 정영사 사생들은 통학버스를 타고 매일 관악캠퍼스를 오갔다. 이때부터 정영사는 사생들에게 도시락을 제공했다. 앞의 회원은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려는 사생에게는 점심과 저녁 2개의 도시락을 싸줬다”며 “하숙을 하던 학생도 도시락을 2개씩 싸오는 일은 드물었다. 정영사가 그만큼 학생들을 많이 배려해줬다”고 흐뭇해했다.

    단과대학별 우등생을 사생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정영사에서는 학문 간 ‘통섭’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한 9기 정영회원은 “자기 전공은 물론 다른 학문 분야까지 이해를 돕도록 하려는 뜻에서 방 배치 때 전공이 겹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안다”며 “덕분에 ‘생활 속의 통섭’이 뿌리를 내렸다”고 전했다.

    정영회 14기 인사는 “예를 들어 ‘operation’ 단어 하나를 놓고도 전공이 다른 세 학생은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며 “전쟁론에 빠져 있던 나는 ‘작전’으로 이해했는데, 한 방에 기거하던 치대생은 ‘수술’로, 컴퓨터공학도는 ‘작동’으로 해석하더라”고 떠올렸다. 그는 “한방에 같이 지내던 치대생에게 치아 관리법을 잘 배운 덕에 지금도 튼튼한 치아를 유지하고 있다”고 뿌듯해했다.

    정영회 회원들은 마지막 기수인 16기(1985년 졸업)마저 50대에 접어든 지금도 만나면 20대 초반의 즐거운 추억담을 나눈다. 특히 정영사 바로 앞에 있던 옥광슈퍼와 옥광약국에 얽힌 일화가 많다고 한다.

    “옥광슈퍼 한쪽에 예닐곱 명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는데, 시험이 끝나면 거기 모여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슈퍼마켓 딸인지, 약국 딸인지 가물가물한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미스 옥광’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운다.”(13기)

    ‘통섭 공부’ 함께 한 기숙사 인맥 ‘통합 정치’ 단결력 발휘할까?
    “매년 가을이면 정영사에서 ‘낙엽축제’를 열었다. 한 해는 정영사 출신 선배가 결혼한다고 해서 방마다 매일같이 포대자루에 은행나뭇잎을 가득 모아뒀다가 결혼식날 낙엽으로 식장을 뒤덮어 ‘낙엽 위의 결혼식’을 거행했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14기)

    28년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정영사가 새해 들어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정영회가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의 숨은 인재 풀이 아니냐는 시각 때문이다. 문용린 서울시교육감 당선,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 최성재 대통령직인수위원 발탁 등 정영회 회원들의 이름이 연거푸 거론됐다.

    박근혜 당선인과 정영회

    특히 최성재 위원은 박 당선인이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1998년 이후 꾸준히 인연을 맺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1, 2기 정영회원 8명이 박 당선인을 찾아가 축하했는데 그중 한 명이 최 위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사회대학장이던 정운찬 전 총리, 서울신문 간부로 있던 이경형 현 헤이리 이사장, 당시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 등이 최 위원과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육 여사의 애정 어린 배려를 잊지 못하는 정영회 회원들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매년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해 8월 15일 육 여사 37주기 추도식에도 30여 명의 회원이 다녀왔다.

    박 당선인은 정계 입문 이후 정영회 회원들과 1년에 서너 차례 소그룹별로 만남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월에는 정영회 신년하례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했다.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한 회원은 “주미대사를 마치고 귀국한 한덕수 전 총리를 모셔 강연을 들었는데, 한 전 총리의 강연에 앞서 박 당선인이 짤막하게 인사를 했다”고 전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정영회가 박 당선인 인재 풀로 부각되고 있다는 얘기에 대해 대다수 정영회원은 손사래를 친다.

    “정영회는 학창시절 같은 공간에서 동고동락했던 기숙사 사생들의 모임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에도 회원 중에 인수위와 정부에 참여한 이가 있고, 이전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회원도 있다. 20대 초반, 대학 기숙사에서 함께 공부한 것이 계기가 돼 만남을 이어온 친목모임을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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