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광폭 경제인맥으로 재벌-中企 투 트랙 줄타기

박근혜 당선인의 재벌개혁 본심은?

  • 송국건│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13-01-23 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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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경련에선 재벌 군기 잡았지만…
    • 인수위 경제·고용·복지분과 보수 성향 일색
    • 청와대-내각 인사도 같은 기조?
    광폭 경제인맥으로 재벌-中企 투 트랙 줄타기

    지난해 12월 26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전경련회관에서 대기업 회장단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저만 웃고 찍는 것 같네요.”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이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찾아 기념촬영을 할 때 재벌 총수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러자 박 당선인이 던진 농담이다.

    실제로 대기업들은 박근혜 정부 출범을 맞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박 당선인은 선거 기간 재벌을 압박하는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내세웠다. 이날 전경련 방문에서도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고통 분담에 나서달라” “글로벌 해외기업을 상대로 경쟁해야지 우리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영역을 뺏어선 안 된다”는 경고를 쏟아냈다. 비공개 간담회에선 박 당선인의 대선 공약인 대기업 신규 순환출자 금지,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일을 강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등을 놓고 긴장이 흘렀다고 한다.

    자존심 상한 전경련

    전경련 처지에선 자존심이 상한 날이었다. 박 당선인은 당선 후 처음으로 경제단체를 순회하면서 중소기업중앙회→소상공인단체연합회→전경련 순으로 방문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뒤 첫 번째 외부 활동으로 전경련을 찾은 것과 비교된다. 당시 현대건설 회장 출신 대통령당선인과 재벌 총수들의 첫 만남에선 오찬을 겸한 2시간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반면 박 당선인이 전경련에 머문 시간은 40분에 불과했고 분위기도 냉랭했다.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서 제가 제일 먼저 왔어요.” “당선된 순간에 여러분(소상공인) 생각이 제일 많이 났습니다.”

    전경련에 앞서 방문한 중소기업중앙회, 소상공인단체연합회에선 달랐다. 박 당선인은 중소기업중앙회에서 “‘9988’(전체 기업 중 중소기업 수가 99%, 전체 근로자 중 중소기업 종사자가 88%)이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 없다. 9988이면 다잖아요. 중소기업이 우리 경제의 조연이 아니라 당당한 주연으로 거듭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참석자들의 박수와 웃음이 쏟아졌다. 박 당선인은 “소상공인 여러분이 우리 사회의 뿌리이자 민생의 바로미터다. 여러분이 ‘하하’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소원”이라고 했다. 소상공인진흥공단 설치 등 선물보따리를 풀어 열렬한 환호도 받았다.

    이렇듯 상반된 분위기는 박근혜 정부의 실물경제 정책 방향을 짚어볼 수 있는 상징적 척도다. 박 당선인은 대기업 수출에 의존하는 ‘외끌이’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가고 수출과 내수가 공존하는 ‘쌍끌이’로 방향을 바꿀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 상대적으로 소외받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적극적 지원 의지도 밝혔다. 반면 대기업에 대해선 정리해고와 과도한 부동산 매입 등 기존 관행의 변화를 강하게 촉구하면서 긴장감을 높였다. 그렇다면 ‘박근혜표 경제민주화’라 볼 수 있는 ‘근혜노믹스’는 대기업 개혁의 강도를 어느 정도로 가져갈까.

    근혜노믹스의 핵심은 대기업 규제를 통한 부조리 척결, 계층 간 자원 재분배로 요약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 당선인은 정권에 힘이 실리는 임기 초반부터 재벌개혁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예상된다. 경기활성화와 경제민주화를 투 트랙으로 함께 추진하며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새 정부의 국정 운영이 탄력을 받는다.

    따라서 대선 때 공약한 경제민주화의 각론들이 대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민주화의 요체인 대기업 6대 규제책은 △대기업 오너의 범죄에 대해 집행유예나 사면 불가 △대기업 불공정 행위에 대한 제재 강화 △부당 내부거래 금지 및 부당이익 환수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 및 집단 소송제 도입이다. 이런 정책이 한꺼번에 완전히 발동되면 대기업 그룹에 강력한 압박이 될 것이다.

    배제된 경제민주화론자들

    박 당선인의 재벌개혁 강도는 본인의 의지와 주변 측근, 경제 브레인들의 성향에 달려 있다. 일단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또한 현실적으로 경제 브레인들의 재벌에 대한 마인드, 개혁 의지가 성패를 좌우한다. 실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조직적 반발이 일 것임은 불 보듯 훤하다. 여권 내 정통 보수세력의 견제도 예상된다. 이를 극복하거나 절충점을 찾는 역할은 경제 브레인들이 맡을 수밖에 없다.

    아직 경제부처 조각(組閣)이나 청와대 경제참모 인선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박근혜 정부 경제 정책을 이끌어 갈 핵심 멤버들의 면면은 거의 드러나 있다. 박 당선인에게 ‘경제 과외공부’를 지도한 그룹, 대선 과정에서 경제 공약을 입안한 선대위원단, 대통령직인수위에 합류한 경제통들이 그들이다. 서로 겹치기도 하는 세 부류의 인맥에는 친(親)재벌과 반(反)재벌 성향이 섞여 있다. 따라서 박 당선인이 취임 후 청와대와 경제부처에 어떤 인물들을 기용하느냐에 따라 재벌개혁의 속도와 수위가 달라진다.

    박 당선인은 ‘강성’ 경제민주화론자들을 새 정부 초기 인적 구성에서 배제할 공산이 높다. 실제로 인수위엔 김종인 전 선대위 행복추진위원장, 이혜훈 최고위원 등이 진입하지 못했다. 김 전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렸으며 박 당선인이 경제민주화 화두를 선점하도록 한 인물이다. 하지만 재벌그룹의 기존 순환출자도 소급해 금지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제기하면서 신규 순환출자에만 국한하자는 박 당선인과 견해차를 보였다. 김 전 위원장은 “내 역할은 대선 승리로 끝났다. 박근혜 당선인이 잘하고 있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친박계 이혜훈 최고위원은 같은 친박계 김세연·이종훈 의원, 비박(非朴)계 남경필 의원과 함께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을 이끄는 4인방이다. 그중에서도 이 최고위원이 가장 ‘좌클릭’해 있다는 평이다. 이 최고위원은 1월 4일 “재계가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와 경제민주화를 무산시키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경실모 4인방 가운데 김세연 의원은 사안에 따라 보수 성향을 띠고, 이종훈·남경필 의원은 중도에 속한다. 이들도 박근혜 정부 출범 준비과정에서 뚜렷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다. 경제민주화 1호 법안을 낸 민현주 의원도 마찬가지다.

    인수위에서 경제민주화가 주요 이슈로 다뤄지지 않자 박 당선인의 의지에 의구심을 품는 시각도 있다. 당초 인수위에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이 들어가거나, 그런 기능을 갖는 분과 또는 특위를 설치할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구체적인 논의조차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을 다룰 인수위 경제 1·2분과, 고용·복지분과도 대부분 보수 성향의 학계 인사와 행정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경제1분과는 기획재정부 출신 류성걸 의원(간사)과 박흥석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홍기택 중앙대 교수가 맡았다. 경제2분과에는 이현재 의원(간사)과 서승환 연세대 교수가 포진했다. 고용·복지분과 멤버는 최성재 서울대 명예교수(간사), 안상훈 서울대 교수, 그리고 성균관대 교수 출신인 안종범 의원이다.

    따라서 인수위 단계에서 대기업 규제 목소리를 강하게 낼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상황은 청와대 인선이나 조각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특히 이혜훈 최고위원이 우려했듯 재계에서 경제위기론을 본격적으로 꺼내 들면 박 당선인의 경제민주화 공약 전반이 벽에 부딪히고 결국 재벌의 오랜 관행을 깨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청와대와 내각에 추진력을 갖춘 경제민주화론자가 포진하지 못할 경우 그런 비관론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유일호, 이현재의 경우

    잘 알려진 대로 박 당선인 주변에는 친재벌 성향의 참모, 지인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12월 26일의 경제단체 순회에서 보여준 박 당선인의 의지,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가리는 평소 성격을 보면 그들에게 쉽사리 휘둘리지는 않을 듯하다. 박 당선인의 한 측근은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상득 전 의원,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대기업이 정권에 줄을 댈 창구가 뚜렷했지만 박근혜 정부에선 그럴 만큼의 명확한 포인트가 없다”고 했다. 박 당선인 주변의 친재벌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박 당선인은 오히려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대기업 인맥을 동원해 재벌을 설득할 수도 있다.

    더구나 대기업이 과거 선거 때마다 후보들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관행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만큼 박 당선인은 재벌 개혁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에 빚진 게 없는 만큼 자유롭게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는 의미다. 전경련 대표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중소기업 업종 침해와 재벌 2, 3세들의 행태를 비판한 것도 경제민주화 실천 과정에서 대기업을 봐줄 일이 없다는 경고를 한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이와 함께 박 당선인 주변에는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권익을 대변할 참모들도 포진해 있다. 박 당선인이 청와대 인선이나 조각 단계에서 이들을 중용할 경우 경제민주화 정책은 탄력을 받게 된다.

    인수위에선 현역 의원인 유일호 비서실장과 이현재 경제2분과 간사의 활약이 기대된다. 유 실장은 경제 정책 전문가로 손꼽힌다. 특히 재정 정책과 조세 분야의 풍부한 식견을 바탕으로 박 당선인의 최우선 공약인 민생안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박 당선인은 유 실장에게 인수위 비서실장직을 제의하면서 “정책이 중요하니 맡아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유 실장은 “대기업 위주의 성장과 불공정 행위로 인한 폐해 등은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밝혀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경제민주화의 목표로 제시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청장 출신인 이현재 간사는 재계에서 ‘중소기업 전문가’로 통한다. 옛 상공부, 산업자원부 등에서 중소기업·소상공인 정책에 오랫동안 간여했다. 그는 인수위에 발탁된 뒤 첫 일성으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가는 제도적인 것을 점검해서 실제 중소기업이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검토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의정활동 중에도 공정거래위원회의 솜방망이 처분을 비판하며 동반성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폭넓은 중소기업 인맥

    박 당선인의 중소기업 정책 브레인으로는 선대위 중소기업진흥특별본부장을 맡았던 허범도 전 의원도 있다. 상공부 출신으로 초대 부산지방중소기업청장과 산업자원부 차관보,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냈다.

    중소기업중앙회 김기문 회장과 서병문 수석부회장도 박 당선인이 향후 중소기업 정책을 구체적으로 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특히 김 회장은 박 당선인과 몇 차례 개별적으로 만나 중소기업 현안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광 한국전기조합 이사장은 대선 캠프의 직능총괄본부 내 중소기업본부장을 맡아 선거유세 기간에 박 당선인에게 중소기업계의 반응을 전달하고 요구사항을 건의하는 역할을 했다. 박 당선인이 국회에 있을 때 종종 의원회관 방으로 불러 경제 자문을 했던 정희수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중소기업·소상공인·벤처기업협력단 공동단장으로 활약했다.

    박 당선인의 중소기업·소상공업계 인맥은 소개된 것보다 훨씬 넓다. 친재벌 성향의 측근들에 비해 유명인이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이다. 만일 새 정부 구성 과정에서 이들이 경제 정책 라인에 속속 포진하고, 여기다 정치권과 학계의 경제민주화론자들이 가세한다면 일각에서 제기하는 재벌개혁 한계론을 극복할 수도 있다.

    역대 대통령의 경우 집권 초기에는 재벌, 관료, 검찰 등 우리 사회의 최대 기득권층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현실에 부딪혀 실패하는 일이 되풀이됐다. 개혁의 이상은 좋으나 실제 국정을 운영하면서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한 까닭이다. 박 당선인은 다를까. 최근 박 당선인의 언행을 보면 자신은 집권 과정에서 어느 기득권층에도 빚을 진 게 없으니 확실하게 개혁의 칼을 들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읽힌다. 다만 대기업에 대한 지나친 견제 등이 경제를 위축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게 부담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는 특정 대기업 때리기나 기업들 편 가르기가 아니다”라고 누차 강조했다. 또 “대기업은 혁신과 기술개발을 통해서 우리의 경제를 이끌어왔다. 대기업들이 미래 성장동력에 투자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활동은 적극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관련해 대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징벌적 규제보다는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애로사항을 시정해주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맞출 가능성이 높다. 박 당선인은 1월 7일 인수위 전체회의에서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했을 때 이런저런 정책보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를 빼주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거창한 정책보다는 중소기업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잘살아보세’와 경제민주화

    이에 인수위는 경제1분과에서 다루는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금산분리 정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경제2분과가 담당하는 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 개선, 하도급 피해 방지, 소상공인 영업 활성화 지원 등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 대책을 집중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기조는 새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경제민주화 공약이 대기업에 대한 제한적 규제와 중소기업에 대한 특별한 배려라는 투 트랙으로 진행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박 당선인은 선거 기간 중 ‘잘살아보세’로 상징되는 국가주도 경제운용을 시사했다. 결국 대기업 의존도가 높아진다. 성장 정책을 펴면서도 경제민주화 원칙을 지켜야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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