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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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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발터 대타로 대박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1940년 번스타인은 라이너의 추천으로 또 한 명의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커티스 음악원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탱글우드 여름 마스터클래스에서였다. 그곳에서 만난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874~1951)는 보스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세 지휘자의 신임 덕분에 번스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세가도에 들어서게 된다. 번스타인은 무대에서는 도발적일 정도로 격정적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의 스승들은 어린 제자를 단순히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예술적인 동료로 대했고 번스타인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스승 쿠세비츠키가 사망한 후 번스타인은 탱글우드 여름 마스터클래스를 맡아 스승의 유지를 받들었다.

“지휘대에 오르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눈을 빠짐없이 쳐다보게. 기죽지 말게나. 지휘자는 그들 앞에 서 있는 큰 나무일 뿐이네. 그러고는 지휘봉을 들고 작곡자의 비밀을 풀어내는 마술사가 되는 거야.”

지휘자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후에도 번스타인은 중대한 연주를 앞두면 늘 스승의 말이 귓가에 들린다고 회고했다. 그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지휘대에 오른 것도 스승을 추모하는 탱글우드의 무대였다.



번스타인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된 행운은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194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1876~1962)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연 직전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뉴욕필은 할 수 없이 하루 전 대타로 설 지휘자를 물색했고, 당일 오전 뉴욕 필하모닉 부지휘자였던 25세의 번스타인과 연락돼 저녁 공연을 할 수 있었다.

레퍼토리는 슈만의 ‘맨프레드 서곡’, 헝가리 출신 미국 작곡가 로자의 신곡,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키호테’,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 등으로 다소 생소했다. 번스타인은 침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지휘자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없이 그대로 무대에 올라갔다. 명칭만 부지휘자였지 실제로는 보조 지휘자에 지나지 않은 25세의 병아리 지휘자는 67세의 세계적 대가에 손색없이 지휘를 잘 해냈다.

이 공연은 CBS방송으로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기 때문에 그는 다음 날 모든 일간지 문화면에 대서특필됐다. 미국인들은 망명한 유럽의 거장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한 ‘made in USA’의 젊은 거장에게 열광적으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1년 후 번스타인은 피츠버그 오케스트라를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꾸준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음악의 세계에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번스타인이 하버드대에 입학한 1935년 독일의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으로 독일 내 유대인들을 격리하기 시작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뒤숭숭하고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에 미국에 있던 번스타인도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 아래서 상념에 젖어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1941년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고 같은 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로써 미국과 소련은 반파시즘의 동맹국이 됐고, 천식 때문에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던 번스타인도 어떤 식으로든 의식 있는 사회참여를 하고 싶었다. 소련 난민 후원행사와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미·소 우호증진 국민협회’에 가입하고 이념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물론 전쟁 기간에는 미국과 소련이 동맹국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전후에는 반파시즘이라는 명목이 사라지고 국제 정세도 180도 달라졌다. 그래서 각자 자신들의 사상적인 배경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긋고 오해를 일으킬 만한 색채는 모두 지워 없애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번스타인은 진보당의 헨리 윌리스를 적극 지지하고 사회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윌리스는 1940년 민주당 대선주자 루스벨트의 파트너로 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긴박했던 경제위기 때문에 뉴딜정책 초기에 제기됐던 분배의 공정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다 친소주의적인 언행으로 비난을 샀다. 그러다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후보로 공천받지 못하자 친정인 민주당을 탈당하고 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런 인물을 지지한 탓에 번스타인은 냉전시대로 치닫고 있던 미국에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8년 윌리스는 진보당 후보로 대선에 나갔지만 참패했다. 대선에 승리한 민주당은 번스타인과 윌리스가 속한 진보당에서 행해지는 공산주의자와의 모호한 동거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번스타인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게다가 1950년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민심은 더 험악해졌다. 번스타인은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CBS방송의 출연금지자 명단에 오르는 등 언론매체에서도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로 공공연하게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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