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김병관 - 김관진 우정과 경쟁 40년

스페셜리스트 vs 제너럴리스트

  • 이정훈 편집위원│hoon@donga.com

    입력2013-04-18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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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관 - 김관진 우정과 경쟁 40년
    북한의 거듭된 도발 위협으로 박근혜 정부의 국방부 장관 임명 파동은 벌써 먼 옛날의 일이 돼버린 것 같다. 김병관 국방장관 내정자 사태는 한 달 이상을 끌다가 김 내정자가 자진사퇴하고, 김관진 현 장관이 유임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과정에는 김병관과 김관진의 우정과 경쟁 40년, 우리 사회의 막연한 오해와 정쟁(政爭) 등 여러 단면이 뒤섞여 있다.

    이 사태는 김 내정자가 중개업체인 UBM텍의 고문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롯됐다. 그리하여 UBM텍이 김관진 장관 등에게 영향을 끼쳐 UBM텍이 수입하는 무기를 사도록 하기 위해 김 장관의 육군사관학교 28기 동기인 김 내정자를 고용했다는 ‘소설’이 만들어졌다. 육군 대장 출신이 로비스트로 고용됐으니 ‘당연히’장관 자격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등 군을 잘 아는 쪽에서는 “김병관은 국방부 장관을 할 자격이 있다”며 그를 감쌌다. 180도 다른 주장이었다.

    그런데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국회 청문회는 시중 여론을 재탕, 삼탕하는 선에서 끝나버렸다. 그리고 김 씨가 사퇴하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엉킨 것을 풀지도 않고. 이는 필요한 인사를 검증하는 국회 시스템이 주먹구구라는 걸 보여준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면 혼란과 낭비가 초래된다.

    로비스트는 고위 인사에게 뇌물을 건네고 유리한 대가를 받아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뇌물 수수가 밝혀지면 로비스트는 물론이고 뇌물과 향응을 받은 공직자도 처벌된다. 뇌물 사건은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이 더 강하게 처벌받는다. 김병관 씨가 로비를 했다면 그 핵심 대상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과 노대래 방위사업청장이어야 한다. 두 사람이 로비와 관련해 김 씨를 만났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김 장관은 유임시키고, 노 청장은 장관급인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영전시켰다. 김 씨의 로비가 있었다면 이는 아주 잘못된 인사인데, 김씨를 물고 늘어졌던 야당과 여론은 두 사람의 유임과 영전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유임, 영전한 ‘로비 대상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 씨는 로비를 하기 위해 UBM텍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김 씨는 김 장관과 노 청장을 상대로 로비를 한 적이 없으니 야당도 대형 ‘게이트’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국산 전차 K-2의 결정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이 회사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막연한 ‘국산무기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 시작할 때는 세계 최고를 만들 것처럼 큰소리를 쳐놓고, 끝날 때는 마무리를 제대로 못해 절절맨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국산 대잠(對潛)로켓(ASROC)인 ‘홍상어’다.

    보통의 어뢰는 물속으로 발사된다. 그런데 물은 저항력이 크기 때문에 어뢰는 수상함이나 잠수함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정도의 속도로 항진한다. 따라서 너무 멀리 있는 적 잠수함을 향해 쏘면 표적에 도달하기 전에 연료가 소진된다. 이 때문에 멀리 있는 적 잠수함을 잡아야 할 때는 수상함에서 대잠로켓을 발사한다. 미사일처럼 하늘로 발사된 대잠로켓은 적 잠수함이 있는 곳에서 입수(入水)해 스크루를 돌려 표적으로 돌진해간다.

    지난해 초 1000억 원을 들여 개발한 홍상어가 실험발사에서 입수 직후 사라져 버렸다. 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이상하게 여겨 다른 홍상어도 발사해보게 했다. 그 결과, 8발 가운데 3발이 입수 직후 실종됐다. 그제야 원인을 찾는 작업이 시작됐다. 물은 부드러운 것 같지만 고속으로 떨어지는 물체엔 맨땅이나 다름없다. 금속으로 된 항공기도 바다로 추락하면 풍비박산이 난다. 홍상어도 입수하는 순간 이런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낙하할 때 낙하산을 펴 낙하 속도를 줄여준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입수 속도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발사된 홍상어가 올라갈 수 있는 정점(頂點)에 헬기를 띄우고, 그곳에서 홍상어 대용물을 떨어뜨려 입수 속도를 구했다. 직하(直下)하는 낙하 속도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홍상어는 미사일처럼 발사되므로 정점에 오른 다음에는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포물선 낙하는 직하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러니 직하 속도를 근거로 개발된 홍상어는 입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거나 전자장치가 망가진 것으로 추정됐다. 그 후 ‘홍상어 뇌진탕 사건’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최신 무기로 소개됐던 K-11 복합소총도 실제 사격에서는 조준경이 깨져 전량 리콜됐다. K-21 신형 장갑차는 물속으로도 갈 수 있도록 개발됐다는데, 개발 후 강을 건너가다 물이 새어 들어와 승조원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흑표’라는 별명을 가진 K-2 신형 전차는 엔진과 변속기, 냉각시스템을 합친 ‘파워팩’이라고 하는 구동품에 하자가 있어 운행 도중에 주저앉았다.

    방사청이 ‘해결사’ 간청

    그러자 육군에서 난리가 났다. 육군은 K-2 납기에 맞춰 오래된 전차를 폐기해 왔는데 K-2 생산이 늦어진다고 하니 전력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며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엔진은 두산엔진, 변속기는 S·T중공업, 냉각시스템은 현대로템이 따로따로 개발했기에 어느 회사에 파워팩 불량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세 회사는 책임을 회피했다. 방사청은 곤란해졌다.

    한국은 K-2가 세계 최고라고 선전해 개발과 동시에 터키로 수출하게 됐다. 터키에 불량 파워팩을 장착한 K-2를 수출할 수는 없었기에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독일제 파워팩을 탑재해 수출했다. 그리고 한국군에도 독일제 파워팩을 넣은 K-2를 공급하고, 그러는 동안 국산 파워팩을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결정했다.

    파워팩에서 핵심은 엔진이다. 방사청은 엔진만큼은 반드시 국산화해보자고 판단했다. 엔진을 제일 먼저 국산화해보자고 한 것은 전차 엔진의 재고 부족이 핵심 원인이 됐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차 엔진은 다량으로 필요해지니,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국내에 엔진 제작 공장을 짓자고 한 것.

    엔진은 K-2 파워팩에도 들어가는 독일 MTU사의 것이 세계 최고다. 때문에 MTU사와 합작으로 한국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MTU사는 미래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한국법인 설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가 탄 방사청은 UMB텍을 동원했다.

    UBM텍은 오래전 MTU사 엔진을 한국에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한국군에 납품되는 K-2에도 MTU 엔진이UBM텍을 통해 공급됐다. UBM텍과 MTU는 사이가 좋았으니 방사청은 UBM텍으로 하여금 합작법인을 만들어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MTU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해결사’로 초빙한 이가 김병관 씨다. 방사청은 이 사업에 ‘거물’이 참여한 것을 보여줘야 MTU가 움직일 것으로 보고 김 씨에게 UBM텍 입사를 간청했다.

    김 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화공과에 67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이듬해 육사 28기에 수석 합격했다. 이후 그는 군에서 받은 거의 모든 교육 과정에서 수석입학과 수석졸업을 반복했다. 그는 생도 시절부터 ‘손자병법’을 탐독했다. 육사 시절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각개격파를 현실화한 생도

    생도들이 기마전을 벌였는데 그는 한쪽 팀의 대장을 맡았다. 떼로 기마전을 벌이면 전면에 선 기마대만 적 기마대와 싸우고, 뒤에 있는 기마대는 싸울 상대를 만나지 못해 한동안 적을 찾아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다 아군 기마대와 맞붙은 적 기마대를 발견하면 달려들어 협공하는데, 요령이 모자라 헛힘만 쓰는 경우가 많다.

    오른손잡이가 많기에 양쪽에서 적 기마대를 붙잡으면 대개 오른팔 힘만 써서 적을 넘어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좌우로 붙은 아군이 반대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것이니 이것이 묘한 힘의 균형을 가져와 적 기마대는 제법 오래 버틸 수 있게 된다. 시간과 힘을 낭비한 후 이기는 것이다. 김병관 생도는 이것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양쪽에서 적 기마대를 잡았을 때는,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같은 방향으로 적을 넘기는 연습을 반복시켰다.

    이어 전체 병력을 3등분해, 3분의 1 병력은 뒤에 서지 않고 전부 앞에 나와 적 3분의 2 기마대와 맞서게 했다. 그리고 남은 3분의 2 병력으로는 적 3분의 1 기마대를 분열시키고, 2개 기마대로 적 1개 기마대를 붙잡아 연습한 대로 신속히 넘기게 했다. 그리하여 적 3분의 1이 궤멸되면, 적 3분의 2를 견제하고 있던 아군의 3분의 1 병력과 합세해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 제압했다.

    손자병법은 적은 병력(以少)으로 적 대병력(衆)을 부수는(擊) ‘이소격중(以少擊衆)’을 하려면 적을 분산시킨 후 집중해서 기습하는 각개격파를 하라고 가르친다. 김 생도는 각개격파를 현실화한 작전을 고안하고 이를 연습시켜 실전에서 압승했다. 그 후로도 그는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는 능력을 자주 선보였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았고, 그는 밤잠을 자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줬다.

    그가 내놓은 방법이 100%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꽤 높은 승률을 기록했기에 그는 ‘해결사’로 인식돼갔다. 실력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그는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문제, 가령 대인관계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 그런 까닭에 그를 싫어하는 이들로부터는 “건방지다”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들었다. 잘나가는 사람으로 인식되다보니 인사 때마다 심한 견제를 당했다.

    전차 엔진 합작법인 문제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도 사람들은 그의 해결사 능력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장 출신은 웬만해선 사기업에 가지 않는다. 방사청은 간청하고, UBM텍도 사정했다. 이 때문에 대장 출신은 사기업에 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그는 ‘합작법인이 성사될 때까지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나기 전인 2010년 6월 UBM텍 고문으로 들어갔다.

    김병관을 늘 앞서간 김관진

    그렇다면 노대래 당시 방사청장은 그와 어떤 관계였을까. 두 사람을 잘 아는 이들은 “노 청장도 김 장군만큼이나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뻣뻣한 김 장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 청장은 그를 대면하는 것도 피했다”고 전했다. 노 청장이 필요해서 그를 부르게는 했지만, 성격적으로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비는 서로 피하는 사람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

    육사는 전통적으로 수석 졸업자에게 가장 앞선 군번을 준다. 김 씨는 수석졸업을 했지만 육사 28기에서 선임자는 언제나 김관진이었다. 28기가 졸업할 때는 외국 유학을 갔다 온 졸업자에게 선임 군번을 줬다. 김관진은 생도 1학년 때 독일 유학시험에 합격해 3년간 독일 육사를 다녔다. 28기가 졸업하게 되자 유학 성적이 좋았던 김관진 소위가 가장 앞선 군번을 받고, 수석졸업자인 김병관 소위는 세 번째 군번을 받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대장까지 진급했다. 진급하면 상급자에게 신고하는데, 그때마다 김관진이 대표신고를 했다. 김병관 씨는 진급에서도 김관진 장관을 앞서지 못했다. 김 장관은 모든 진급을 1차로 했지만, 김 씨는 중장 진급을 2차로 했다. 김 장관은 김 씨가 동기 대표로 신고할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합작법인 무산되자 바로 퇴사

    김 씨는 경기고 출신이지만 고향은 김해다. 김 장관은 서울고를 나왔으나 전주 출신이다. 28기 선두주자들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0월 중장을 달기 시작했는데 김병관 씨는 이때 처음으로 1차 진급에 실패했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 때 있었던 대장 진급에서는 두 사람이 똑같이 1차로 진급해 3군사령관(김관진)과 1군사령관(김병관)이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벌어진 ‘육군의 꽃’ 참모총장 경쟁에선 두 사람 모두 쓴잔을 마셨다. 그때까지 중장으로 참모차장이던 동기 박흥렬 씨(현 청와대 경호실장)가 대장으로 진급하며 바로 총장이 됐다. 박 씨는 전임자인 김장수 총장과 호흡이 잘 맞았는데, 김 총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가면서 파격 승진을 했다. 박 씨는 중장에서 대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총장이 된 두 번째 인물이다. 최선두에서 평생을 경쟁해온 두 사람은 합참의장(김관진)과 연합사 부사령관(김병관)으로 옮겨갔다. 군 서열 1번은 합참의장이니 선임은 여전히 김관진의 몫이었다.

    얼마 후 28기 출신 세 대장은 나란히 전역해 야인이 됐다. 그런데 김관진 씨가 가장 먼저 정권의 부름을 받았다. 천안함 폭침 사건에 이어 연평도 포격전을 당해 어수선하던 2010년 말 이명박 대통령이 그를 국방부 장관에 지명했다. 야당은 범(汎)호남 출신인 그를 환영했고 국민은 눈매가 날카로운 그에게 신뢰감을 표시했다. ‘운장(運將)’이라 불릴 만도 하다.

    UBM텍이 김관진 장관을 포섭하기 위해 김병관 씨를 고용했다면, 김병관 씨는 김관진 씨가 장관이 된 후 UBM텍에 입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UBM텍 입사는 김관진 씨가 장관으로 지명받기 6개월 전이었다. ‘김병관 로비스트 설(說)’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인 것이다. 김 씨의 한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김병관은 실력으로는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평생을 경쟁해온 김관진에게 절대로 부탁하지 않았다. 김병관은 남의 부탁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지, 부탁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인맥도 없다. 인맥을 만들면 보직 인사를 하러 다녀야 하는데, 김병관은 그것을 군인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김관진에겐 유연한 면이 있다. 세상은 그의 눈매를 보고 ‘레이저 김’이라고 하지만, 그는 부드러운 면모를 많이 지녔다. 그는 외롭게 산 사람이 아니다.”

    대장 출신이 협상에 나서자 MTU사는 ‘한국 정부(방사청)가 합작법인 설립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으니 사업성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하는 듯했다. 그런데 MTU사의 새 대주주가 된 롤스로이스가 한국 합작법인 설립은 실익이 없다며 ‘불가’로 돌아섰다. 그러자 냉정한 김 씨는 ‘더는 내가 할 일이 없다’며 퇴사했다.

    UBM텍과 관련된 김병관-김관진, 김병관-노대래 커넥션은 없었다. 김병관은 무기 수입을 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50%짜리라도 핵심 국산 부품을 만들자는 과업을 위해 간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여론과 야당이 로비스트로 몰아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해명은 변명이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자존심 센 사람들의 노선을 걸은 것이다.

    박근혜와 남재준의 충돌

    그런 김병관을 도와준 이는 평생의 라이벌인 김관진 장관이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장관 공관의 살림을 빼놓고 고려대에서 2학기부터 강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김 장관은 ‘김병관 사태’가 잘못돼 간다는 것을 알고 국방부 대변인실로 하여금 진화에 나서게 했다. 청와대도 곧 진실을 파악했기에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김병관을 비껴갔다. 한번 만들어진 고정관념이 확대 재생산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병관 씨를 국방부 장관에 내정한 것은 의외였다. 박 대통령의 안보 참모를 가장 오래해온 이는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재준 당시 육군총장은 군 사법체계를 바꾸고 인사에 개입하려는 노 대통령 등과 강하게 충돌하고 전역해, ‘보수의 아이콘’처럼 됐다. 그래서 2007년 대선을 준비하던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진영에서 모두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양쪽의 국가관을 검증해본 후 박근혜를 선택했다.

    박 후보는 경선에서 패했지만 남재준은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 갈아타지 않고 계속 박근혜를 위한 자문을 했다.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국가안전보장회의 기능을 부활시키기 위해 청와대에 안보실장을 만들게 했다. 암묵적으로 초대 안보실장은 그가 맡는 것으로 돼 있었다. 남 원장은 안보실장을 맡아 전체 국방 구도를 짜려고 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 인선을 놓고 박 대통령과 의견이 엇갈렸다. 그는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에 문제가 많다고 본다. 국방개혁은 통일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대장 출신이 국방장관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전사(戰史)에 밝고 통일을 위한 국방개혁 아이디어를 가진 소장 출신 예비역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대장 출신을 시켜야 한다”고 반대했다. 소신이 강한 남 원장은 “그렇다면 국방정책 전체를 조율하는 안보실장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박 대통령은 김장수 씨를 안보실장에 보임했다.

    광주일고 출신인 김장수 씨는 유연한 사람이다. 너무 유연하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육군총장과 국방장관을 하며 거의 모든 지휘관이 반대한 군 사법개혁을 승인했다. 미국과는 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져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에게 굽신거리며 인사한 이만복 국정원장 옆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해 ‘꼿꼿 장수’라 불리면서 대중에겐 보수 인사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김병관 흔들기’ 음모론

    김장수 씨도 18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요구한 국방개혁을 수행한 만큼 당연히 민주당으로 갈 것 같았지만 한나라당을 선택해 국회의원(비례대표)이 됐다. 그는 보수의 관점에서 국방부 업무를 점검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관료를 하며 노 정부가 원하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 계속 약점이 돼 19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고는 자기 인맥을 이끌고 박근혜 후보를 도왔다.

    박 대통령은 남재준 씨와 의견이 부딛히자 김장수 씨를 안보실장에 임명하고, 남재준 씨는 비국방 분야인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안응모 전 내무장관 등 ‘박정희 맨’들의 추천을 받아 김병관 씨를 국방장관에 내정했다. 김병관 씨는 박정희의 팬이었기에 박근혜 후보를 도왔지만 인맥 없이 혼자서 했다. 그를 장관에 내정한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새누리당에 포진한 경기고 출신들은 반색했다.

    로비스트 의혹이 제기되며 그의 장관 임명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사정을 아는 재향군인회와 성우회가 나섰다. 두 단체는 북한의 3차 핵실험을 심각한 위기로 보고 이에 대처하려면 ‘해결사’를 장관으로 임명하는 게 좋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 진영이 김병관 지지 쪽으로 돌아섰는데도, 군 사정에 밝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그의 비밀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김관진 씨가 장관에 지명됐을 때는 없던 현상이 김병관 씨가 지명되자 일어났다. 그러자 ‘범호남 그룹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김병관 흔들기를 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별안간에 호남과 영남의 대립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다 김병관 씨가 KMDC 주식 보유를 누락한 것이 밝혀지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다양한 도발에 대응하려면

    김관진 씨는 철저할 정도로 주변 관리를 해왔다. 동기들은 “그의 부인은 수녀처럼 살아온 분”이라고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뜻이다. 반면 ‘실력주의자’ 김병관 씨는 인맥을 만들지 않고 전략전술을 연구하는 군인의 길을 걷는 데만 매진했다. 그 외의 것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이것이 정치적인 대립이 극심해졌을 때 그의 낙마를 부르는 한 원인이 됐다.

    김병관 사태가 심각해지자 육사 28기 동기회에서 난리가 났다. 각 기수에서 한 명의 장관이 나오기도 힘든데, 김관진 씨에 이어 김병관, 박흥렬(청와대 경호실장도 장관급) 씨가 잇달아 장관으로 지명됐기에 환호했다. 그런데 김병관 씨가 로비스트로 몰리고 범호남 세력이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으로 거론되자 당황했다. 동기들은 김병관 씨에 대한 오해는 풀어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동기회가 양분되는 것도 막으려 했다.

    이명박 정부 관료 중 김관진 장관은 김황식 총리와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인수위 시절부터 두 사람은 유임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김병관 불가론’이 가라앉지 않자 청와대는 김관진 유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KMDC 주식 누락 건이 불거지자 김 장관을 유임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제너럴리스트(김관진)가 스페셜리스트(김병관)를 또 이긴 것이다.

    연평도 포격전 후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지명된 것을 고려하면 김관진 장관도 스페셜리스트다. 다만 김병관 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는 얘기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지금의 안보 상황은 연평도 포격전 후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스라엘은 이라크와 시리아가 핵무장을 추진할 때 공군기로 폭격해 제거하는 작전을 펼쳤다. 예방전쟁이 아닌 선제공격으로 우환거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에서 6~7kt의 위력이 나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6~7kt은 TNT 6000~7000t을 터뜨렸을 때 나오는 위력인데 이론상으로는 TNT 6000~7000t을 땅에 묻고 터뜨리면 이런 위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냥 터뜨려서는 안 되고 100만분의 1초 이내에 모두 터뜨려야 한다. 현재의 기술로는 6000~7000t이나 되는 많은 TNT를 100만분의 1초 안에 터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러한 위력은 핵무기를 터뜨렸을 때만 일어난다.

    오는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60주년이다. 북한은 이날을 조국해방전쟁 기념일로 경축할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소형화해 탄두로 만드는 데 주력하면서 계속 한국을 위협할 것이다.

    참수계획과 킬 체인

    북한의 위협이 거듭되고 이를 막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으면 한미연합군은 이른바 ‘참수(斬首)계획’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핵시설을 폭격해 없애버린 이스라엘처럼 초정밀 유도탄을 발사하고 스텔스기를 투입해 북한 핵 관련 시설과 미사일 기지, 공군기지 레이더 시설, 북한 지도부를 날리는 작전을 펼칠 수 있다.

    이를 위한 하드웨어가 바로 ‘킬 체인’이다. 미국의 킬 체인은 완성돼 있고 한국의 킬 체인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형 킬 체인은 홍상어나 K-2 전차처럼 실전을 통해 검증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지만, 다급하면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태양절을 앞두고 북한이 끌고 다니며 위협했던 무수단은 실험발사 등을 통해 검증된 미사일이 아니다. 북한이 실전 배치한 미사일은 스커드와 노동 계열이다.북한이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을 기립시키거나 핵무기 소형화를 위한 4차 핵실험에 착수하면 한미연합군은 북한이 도발한다고 보고 참수계획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예민하고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군은 이렇게 치밀하고 복잡한 작전은 실전으로 경험한 적이 없다. 책으로 공부한 사람은 있어도 이를 현실화하는 능력을 보여준 사람은 없는 것이다.

    천안함 폭침 3주년인 지난 3월 26일 우리 군은 연평도 등에서 사격연습을 했다. 북한군의 포격을 유도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사격을 해오면 이를 기화로 북한군 사격 원점은 물론이고 북한의 약점을 때리는 대응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말려들지 않았다.

    이순신이 運將이었나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하고 있지만, 북한이 태양절(김일성 생일)을 앞두고 한국에서 전단을 띄우는 세력을 공격하겠다고 하자 우리 군은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전단 살포를 막았다. 아직도 한국군은 북한의 모든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성공단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기엔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가 대처하도록 해 방법을 찾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 군은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정권을 쥐는 데다 실전 경험이 적다보니 대개 싸움에 진력하는 전문가보다는 다방면에 대응하는 원만한 사람이 진급에서 유리했다.

    진짜 ‘싸움꾼’들은 대개 원 스타나 투 스타급에서 전역했다. 남재준 원장이 국방장관 감으로 밀었던 이가 그런 경우다. 김병관 씨는 드물게 4성 장군까지 올랐다.

    위기 때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핀치히터로 써야 한다. 육사 28기 출신의 한 인사는 “이순신이 제너럴리스트였느냐”고 반문하며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이순신은 병서에 있는 대로 군관을 가혹하게 조련했다.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는 군관은 바로 목을 베었기에 원한을 사 두 번이나 백의종군을 했다. 그렇게 훈련시켰기에 학익진이라는 대담한 작전을 구사해 승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난국이 아니었으면 이순신이 중용될 수 없을 것이다.

    국방장관은 정치적으로 임명되니 이미 낙마한 김병관 씨를 다시 장관으로 임명하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위기상황인 만큼 박 대통령께 김병관류 인물들이 갖고 있는 해결책을 갖다 쓰라고 권유는 꼭 하고 싶다.

    평시에는 제너럴리스트를 쓰고 위기에는 스페셜리스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리더십이다. 우리 군에는 대장이 못 되고 사라진 스페셜리스트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 지장보다는 운장(運將)이 낫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위기를 돌파한 지휘관은 지장+용장이다. 그들에게 운(運)은 마지막으로 작용했다. 제갈공명과 이순신은 결코 운장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숨은 지장을 찾아내고 그들의 지혜를 빌려와 제너럴리스트 김관진 장관을 보완케 함으로써 이 위기를 통일의 기회로 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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