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나

  • 유안진│시인

    입력2013-05-22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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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이 짙어지면 검푸르다

    단풍도 진할수록 검붉다

    깊을수록 바닷물도 검푸르고

    장미도 흑장미가 가장 오묘하다





    검어진다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

    높이를 거꾸로 가늠하게 된다는 것

    창세전의 카오스로 천현(天玄)으로

    흡수되어 용해되어버린다는 것

    어떤 때얼룩도 때얼룩일 수가 없어져버린다는 것

    오묘 기묘 절묘해진다는 것인데



    벌건 대낮이다

    흐린 자국까지 낱낱이 까발려서 어쩌자는 거냐

    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은 칠흑 슬픔

    바닥 모를 용서의 깊이로 가라앉아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의

    검은 혁명을 음미해보자

    암흑보다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

    제목과 동일한 위의 시는 신작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집은 핵심주제를 검은색으로 했다. 잘못 실수 실패 때 얼룩 모자람 바보 숙맥 짓 같은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수치 등을, 그늘 뒷전 어둠 밤 검정 등으로 예찬했다.

    나이 타령은 하고 싶지 않아, 나이를 물을 때마다 얼른 마흔한 살이라고 대답한다. 태어나보니 마흔한 살이더라고 하면, 출생연도가 곧 나이임을 알아차리고 기발하다고도 한다. 시인의 나이가 어떻게 세상 나이대로인가? 내 나이는 내가 정한다. 그러나 그럴듯한 근거를 출생연도로 하여 억지를 부리고 싶어서다. 돌이켜보니 마흔 살부터 살 만해졌다. 퇴직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옮겼고, 불완전했지만 집도 장만했고, 늦었지만 아이들도 기저귀를 떼어,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저래 마흔한 살을 시점이자 종점으로 평생 나이로 정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빛나는 성공보다는 실패 실수 잘못 억울함 등이 내 평생을 마흔한 살로 정하게 해준 듯하다. 너무 쉽게 상처 받고 수모와 굴욕에 시달려왔다. 누군들 나와 같지 않았으랴마는, 또 내가 타인들에게 그 이상의 상처를 왜 아니 주었으랴만, 그렇게 주고받은 상처로 이만치라도 편견이 줄어들었고, 때 묻지 않은 순결, 순전의 배타적 고발적 백색보다는, 어떤 때 얼룩도 받아 감춰주고 용서해주는, 치유도 받고, 다시 천연색으로 태어날 용기와 사기(morale)를 주는 검정이 더 좋아졌다. 때 묻히고 잘못을 밥 먹듯이 하며 살아와, 얼마나 가증스러워졌는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이 적 밖에서 당하고 눈물을 감추며 시무룩해서 돌아오면, 캐묻지도 야단치지도 않고, 품어주어 얼굴 파묻을 수 있던 엄니의 검정치마폭이 떠올랐다. 흰색 등 옅은 색 옷이 더 어울린다고들 하지만, 그런 옷의 통제와 지배를 당하느니, 커피를 흘려도 음식이 묻어도 개의치 않을 편안함을 주는 검은색 짙은 색이 더 좋았다. 산다는 것은 용서받을 짓을 자꾸만 보태는 것 아닌가.

    검은 눈동자나 태양 속 흑점 등은 물론 사제와 수도자의 검은 옷, 스님의 먹물 들인 회색 옷, 핏발 선 눈동자를 식혀주는 밤하늘과 밤의 어둠…이, 대낮의 눈부심보다 내겐 더 유익했다. 대낮조차 어둠에서 태어나고, 검정의 깊고 멀고 높음이 곧 천현(天玄) 아닐까? 아이 적 배운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에서 천현(天玄)이란 천흑(天黑)이 아니라고, 검정에서 우러나는 멀고 높고 깊음이고 모든 천연색을 넘어선 아득함이라던 할아버지 말씀이 왜 이리도 늦게야 생각나던지.

    서울 서초동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고사 직전의 향나무를 본다. 본래는 서초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던 당산나무(老姑堂神木)였으리라. 마을마다 있는 신목은 마을의 안녕과 다산 풍요를 관장하는 노고신(老姑神)의 신체 즉 신목(神木)이라고 동제(洞祭)도 지내곤 했다. 따라서 삼신할미처럼 할머니의 무한 자애와 용서, 그리고 주민과 농사 과일 가축의 다산풍요를 담당하게 했다. 더구나 나무 그늘은 주민들의 쉼터였으니. 그 그늘에서 땀 씻고 퍼질러 앉아 휴식하며, 삶의 모든 수고로움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당산나무 그늘은 안식년 안식일처럼, 때 없이 찾아와 안식(安息)과 회복의 시간과 기회를 누리게 해주었다. 그늘의 어두움이 주는 휴식은 밝음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가치였다.

    문제: 1)____________에 손대지 않고 이 선을 짧게 만드시오



    답: 문제의 선보다 더 길게 주욱

    ________________________ 그어버리면

    문제의 선은 저절로 짧아집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가요

    자기만의 파라다임으로

    각자 성불(成佛)하기가.

    ‘초월문제’라는 제목으로 시집 ‘둥근 세모꼴’에 실린 소품이다. 둥그러지기를 지향하지만 늘 뾰족스러운 세모꼴의 모순으로 충돌하고 갈등한다는 뜻이었다. 삶이란 60억 인류가 한두 가지 방식이 아닌 60억 가지의 방식으로, 60억 가지 패러다임으로 각자가 성불하는 것인데. 남의 약점을 찾아 해치지 않고 내가 그를 넘어서버리면 해결되는, 모든 것의 문제와 해결법은 내게 있는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대추나무는 늦은 봄이 아니라 거의 초여름이 되어서야 잎이 돋는다. 잎이 돋을 때까지는 가히 죽은 것과 다름없다. 대추나무는 그런 배짱과 느긋함으로 가장 단단한 재질을 키우는가? 대추나무로 만든 옷장은 단단한 재질로 벌레가 잘 안 먹고 빨간 빛깔도 고와서 가장 비싸다. 또 도장새김에 가장 좋은 재질로는 단연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든다. 물론 벼락을 맞았다는, 큰 액운을 치렀다는 벽사적(?邪的) 의미를 부여했지만 단단한 재질이 새긴 이름자를 쉽게 지워지지 않게 했다. 반대로 눈 속에 꽃피는 동백도 매화도 그들만의 성깔 아닌가. 내 성깔, 내 즐거움이면 초월이 아닐까.

    그래서 덜 자란 아이들, 조금 모자라는 숙맥(菽麥) 칠삭둥이 팔푼이가 자기 식으로 사는 초월자들이라고. 이들은 늘 행복하고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하여 잘 웃으며 아주 행복해한다. 잠자는 아기 모습은 곧 안식의 참모습이다. 평화 자체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의 입국 자격을 아이 같음으로 했으리라.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란 그런 거겠지.

    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나
    유안진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동 대학 교육대학원 석사(교육심리학),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박사(교육학)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다보탑을 줍다’‘알고(考)’‘거짓말로 참말하기’등 16권의 신작 시집과 ‘상처를 꽃으로’‘지란지교를 꿈꾸며’등 산문집 다수, ‘한국전통사회의 육아방식’‘아동발달의 이해’등 전공연구서 등 다수.

    現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이 소품은 아침에 계란으로 프라이를 하다가 썼다. 그래서 제목도 편안하게 ‘계란을 생각하며’라고 했다. 시도 사람이 쓰는 언어예술인데, 사람 사는 일상생활의 현장과 어찌 별개일 수 있으리. 남의 헤아림을 깡그리 무시한 동백 매화 대추나무처럼, “나는 나다”면 된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불타는 떨키나무가 불타지 않는 것을 보고 올라갔다. 야훼는 먼저 신발을 벗게 하고, 엄청난 사명,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하라고 했다.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나는 나다”( I am who I am), 즉 창조됨이 아니라, 본래부터 스스로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그대(너)와도 저대(저사람)와도 다른, 오로지 이대(나)다. 오로지 “나는 나일 따름이다”라는 의미로. 무엄하게도 야훼처럼이 아니라, 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초월에 이를 수는 없을까? 하다가, 이제는 하향지원(下向志願)하여 숙맥이 되고 싶다.

    우리 엄니는 늘 내 못된 성질에 혀를 끌끌 차면서 “성질이 팔자”라고 하셨는데, 그 성깔 다 썩어 이렇게 되어버렸다. 검정 예찬으로 숙맥철학(?)으로-감히 철학이라고 하기가 부끄럽지만-나의 멘토들은 팔삭둥이 ‘찌질이’ 어리버리들이다. 촌뜨기가 서울특별시민 된 것만도 과분하다고 때 없이 피식피식 웃는다.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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