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예전엔 ‘돌직구’였대요 지금은 여우짓도 해요”

쉰둘 최영미의 새로 시작한 사랑, 그리고 詩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3-05-23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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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감을 열고 세상의 풍경, 사람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문장을 얻었다.
    • 버리기 아까운 문장엔 암호를 넣어 시를 만들었다.
    •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과 말을 섞으면서 남자를 만났고, 사랑을 시작했다.
    • 그러곤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을 냈다.
    • 최영미의 사랑, 시, 그리고 삶.
    “예전엔 ‘돌직구’였대요 지금은 여우짓도 해요”
    1962년생 교수 L이 4월 19일 물었다.

    “실제로 만나보면 어때요?”

    L의 뇌리에 박힌 그의 이미지는 ‘도도한 차도녀’.

    시인 황인숙은 그를 두고 이렇게 썼다.

    “소설에서와 달리 시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겹치기 일쑤다. 시인의 일상이나 몸과 마음의 형편과 동태가 작품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영미는 그걸 꺼리지 않는다. 거침없고 서슴없다. 그 대범함에는 자부심도 한몫했으리라. 자신의 명민함에 대한 자부심, 젊은 날 수많은 독자의 아이돌 시인이었던 데 대한 자부심, 내가 설핏 엿본 최영미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L 또래의 남자에게 그는 ‘아이돌’이었나보다. L은 기자가 그와 알고 지내는 것을 신기해했다. 아니, 부러워했다. L에게 물었다.

    “아는 사인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L이 웃으면서 답했다.

    “작년에 최영미 씨가 쓴 글에 나오는 ‘S 기자’가 우리 송형 아니야?”

    L은 눈 밝은 독자다. 최영미 시인이 ‘신동아’ 2012년 11월호 ‘나와 신동아’라는 기획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창간 81주년 기념 특별기고 중 하나였다.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S 기자는 내가 만난 언론인 중에 가장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친해져 같이 야구장에도 갔다. 나처럼 서울내기이며 쿨한 그와의 대화를 나는 즐겼다. 그를 닮은 남동생이 있으면 참 좋겠다. 아니, 더 솔직해지자. 그가 싱글이고 내가 10년쯤 젊었다면…. 만약의 경우를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와 함께 야구장에 간 때는 2010년 봄의 어느 날이다. 토요일 2시 경기. 둘은 “이종욱 안타~” “김현수 홈런~”을 외치면서 맥주를 마셨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오후의 볼 파크는 상쾌했다. 둘은 경기가 끝난 후 대학로의 일본식 라면 집으로 옮겨 오랫동안 얘기를 더 나눴다. 그날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싱글이고 그녀가 10년쯤 젊었다면….’

    최영미는 그런 여자다.

    “새로 시작한 연애처럼 설레요”

    최영미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 펴냄). 책을 4부로 나눠 꾸렸다. 1부는 풍자시, 2부는 연애시, 3·4부는 이것저것 섞였다. 4월 29일 서울 성북구 대사관로 ‘삼청각’에서 시인을 만났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신을 비꼬는 풍자시 ‘고해성사’로 시작한다.

    죄는 여러 곳에서

    따로따로 짓더니,

    속죄는 한 곳에서

    왜 한꺼번에 용서받으려 그래?

    우리를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놓고

    구름 속에 편안히 앉아서

    땅을 내려다보는,

    신이야말로 태초에

    죄인이 아니던가?

    ▼ 기분이 어때요.

    “새로 시작한 연애처럼 설레요. 4년 만에 나온 책인데, 젊은 독자와 소통할 수 있을지 두렵고요. 이번 시집엔 연애 감정이 녹아들어가 있어요.”

    그는 4월 3일 기자간담회에 앞서 ‘의식’이란 시를 낭송했다.

    …낡은 자취방에 불이 들어오고/ 휘황한 호텔에 버려둔/ 팔과 다리들이 꿈틀대고/ 코스모스 한들한들 비에 젖은/ 돌담 밑에서 입을 맞추던 첫사랑이 눈을 크게 뜨고/ 너, 괜찮니? 물어본다/ 내 옆에 누워 팔팔 끓어오르는 남자에게/ 시들시들한 나를 들키지 않으려/ 이불을 끌어당긴다.

    그는 낭송을 마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에 쓴 시인데…, 좀 야하죠?”

    그는 “같은 또래 남자와 ‘사귄 지’ 6개월째”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연애시는 뜨겁게 읽힌다.

    ▼ 야한 시를 골라 낭송한 까닭은요?

    “조선일보가 시집이 새로 나왔다는 보도를 기자간담회 하는 날 조간에 보도했어요. 다른 언론사에 미안하더라고요. 그런데 조선일보 기사 제목이….”

    제목은 이랬다. ‘386 시인, 김일성·정일·정은을 쏘다’

    “조선일보 기사를 읽은 이들이 시집에 풍자시만 담긴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연애시를 낭송했고요.”

    풍자시 ‘돼지의 죽음’은 통렬하다.

    “김정일이 죽은 날 어머니가 병원에서 뇌수술을 앞두고 있었어요. 이튿날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초조하잖아요. 그런데 TV에 ‘돼지’가 나오는 거예요. 어머니가 ‘어쩜 그렇게 살쪘니? 인민은 굶는데…’라고 말씀했어요. 어머니 기분을 풀어드리려 한 농담이 그대로 시가 됐어요.”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꽃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 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 돼지가 울자/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통곡한다/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더 울고 싶지만 배가 고파서/ 혁명사상으로 불룩한 배를 우러러보며/ 뚱뚱한 수령의 말씀을 받드느라 삐적 마른 염소들,/ 영양실조에 걸린 사슴과 강아지들이 격한 울음을 토하고 때마침 눈이 내려/ 영구차가 미끄러질까 봐/ 위대한(그의 胃는 정말 거대했다)/ 장군님이 가시는 마지막 길에 외투를 벗어 바친다

    -시 ‘돼지의 죽음’에서

    돼지짓, 여우짓

    “예전엔 ‘돌직구’였대요 지금은 여우짓도 해요”
    “최고존엄을 꼬집었다고 테러 당하지는 않겠죠? 시인을 상대로 지령 내리고 그러진 않겠지만, 북한 추종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엉뚱한 짓 할지도 모르잖아요.”

    ▼ 돼지를 왜 그렇게 싫어해요?

    그는 2006년 풍자시집 ‘돼지들에게’를 냈다. 좌우를 막론하고 지식인의 거짓과 위선, 속임수를 꼬집었다. 가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돼지, 여우에 빗댔다.

    “돼지고기는 좋아해요, 하하. 성경에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구절이 있어요. 거기서 착안해 시집 ‘돼지들에게’를 냈고요. ‘화장한 얼굴’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체질적으로 싫어요.김정일이 뚱뚱하고 돼지처럼 생겼잖아요. 안 그래요? 그 얘긴 그만 할래요. 무서워요.”

    그에게 정치인은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 (시 ‘정치인’에서)일 뿐이다. 또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시 ‘닮은꼴’에서)이라고 차갑게 비웃는다. 또한 ‘얼굴에 1억짜리 미소를 바르고/ 장애 아동의 몸을 씻기며/ 향수를 뿌린 목소리로/ 고통을 말하며/ 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니?’(시 ‘정치인’에서)라고 묻는다.

    ▼ 여성 정치인 ○○○ 씨가 읽으면 섭섭할 것 같은데요.

    “그녀가 모델이 됐지만, 그녀를 공격하려고 쓴 건 아니에요. 내 주변에 그 못지않게 성공한 여성이 있어요. ‘그녀’를 꼬집은 거예요.”

    시 ‘성공한 여성’에 ‘자신의 내밀한 상처는 두터운 화장품으로 가리고/ 잡지에 인쇄된 세련된 웃음/ 그 여자의 성공 비결은 얄팍한 거울/ 들여다보되/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것/ 타인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않는/ 성공한 ‘그녀’가 또 한 번 등장한다.

    ▼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모두 위선자라는 건가요.

    “그런 거는 아니죠. 그런데 그런 맘을 가져야 풍자시를 쓸 수 있어요. 상대의 한 특징을 비꼬는 거잖아요. 풍자시는 작정하고 비꼬는 거예요. 물론 나도 위선자고요.”

    ▼ 여우짓은 안 하고요?

    “여우짓 은근히 해요. 남자는 여우가 좋다면서요? 누가 그러던데 예전엔 제가 ‘돌직구’였대요. 여우짓 못했어요. 늘 정곡을 찔렀고, 정식으로 항의했고요. 그래서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든 뒤 적을 만들지 않으려면 적당하게 돌려 말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았고요.”

    ▼ 돌직구만 던지다 지쳐 체인지업을 배웠다?

    “체인지업은 아직 어렵고요. 변화구 정도는 던져보려고요.”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셋에 펴낸, 50만 부 넘게 팔린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그는 여배우 못지않은 셀레브리티가 됐다. 시집을 관통한 담론은 운동권을 들끓게 했다. “위선 그만 떨고 공부나 하라”는 식의 냉소로 읽혀서다. 그래선지, 진보 성향이 강한 문단에서 그는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1980년 서울대 인문대에 입학했다. ‘역사, 철학, 그리고 인간’이라는 카피를 내걸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던 고전연구회에서 활동했다. 2학년 때는 시위에 참여했다 체포돼 무기정학을 맞았다. 졸업 후엔 급진적 운동조직 외곽에서 ‘자본론’ 번역에 참여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 때는 백기완 민중후보 캠프에서 뛰었다. 고전연구회는 나중에 주사파의 산실이 됐다. 그의 2년 후배로 자생적 주사파의 원조 격인 ‘강철’ 김영환 씨가 고전연구회 출신이다. 이상규 통합진보당 국회의원도 이 서클에서 사상을 다졌다.

    이 대목에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다시 읽어보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때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81년 4월의 반란

    그는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1981년 4월의 어느 날, 내 속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의 저녁 귀가가 늦어졌고, 막걸리를 마신 뒤끝과 소주를 마신 뒤끝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술맛을 안 뒤에 겁이 없어져 남학생들과 어울려 수련회도 가고, 치마보다 바지를 즐겨 입고,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나쁜 딸이 되었고, 시위대에 섞여 한강을 건넜다.”

    ▼ 32년 전 이날이 삶에서 의미가 있어 보이던데요.

    “막걸리 맛을 처음 안 날이에요. 늦은 나이였어요. 1학년 때는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어 도시락 싸들고 다녔거든요. ‘겅건너’라는 술집이 있었어요. 그 시절 학교 다닌 이들은 다 아는 곳이에요. 그즈음 첫사랑을 했고, 첫키스를 했고, 첫사랑 상대가 그날 ‘강건너’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담배도 그때 배웠고요. 술, 담배 한 거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어요. 우리 또래 여자들이 술 담배 탓에 다들 골밀도가 낮아요.”

    “예전엔 ‘돌직구’였대요 지금은 여우짓도 해요”
    ▼ 밥보다 술을 더….

    “그 시대 정서가 그랬어요. 운동권 아닌 친구들도 똑같아요. 그 친구들 역시 괴로워서 깽판치고 그랬거든요.”

    ▼ 1980년대는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20대를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치유하지 못한 상처도 남아 있고요. 쇠와 살이 부딪치던 청동시대라고 생각해요. 불의 연대예요. 불꽃처럼 뜨거운 시대였는데, 아직도 내 몸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았어요. 비슷한 학번의, 언론사에 근무하는 분이 내가 시 강의하는 곳에 오셨어요. 그분이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사회생활하고 애 낳고 결혼하느라 잃어버렸는데, 당신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분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아이 낳고 살림했더라면 잊어버렸겠죠. 아직도 골프 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1980년대, 잊어버리고 싶어요, 이젠.”

    그런 그가 ‘문학의오늘’ 여름호부터 자신의 20대를 담은 자전적 소설 연재를 시작한다. 4월 말 200자 원고지 200매 분량의 첫 회분을 보냈다.

    “그간 일부러 다루지 않았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에요. 1980년대라는 말만 들어도 뜨거운 게 올라오곤 했지만, 글로는 기록하지 않았거든요. 집단의 기억이 아닌 개인의 기억에 초점을 맞춰 소설을 쓰고 있어요.”

    ▼ 문장을 압축하고 표현을 조탁(彫琢)하는 시인의 언어로 소설이 써져요? 양이 안 나올 것 같은데요.

    “그 문장이 아니에요. 첫 소설(‘흉터와 무늬’, 2005) 읽어봤죠? 그 소설은 시적인 문장이었어요. 그래서 무척 힘들었죠. 이번엔 1년 안에 마무리할 거예요. 기자들처럼 마감 시각 딱딱 맞추면서요.”

    ▼ 첫 회 마감은 잘 지켰어요?

    “원래 4월 15일이 마감이었는데, 일주일 늦었어요. 그 정도 늦는 건 괜찮대요. 나보다 늦게 낸 사람도 있다던데요.”

    다 털어놓는 민망함

    그는 차갑게 냉소하고, 뜨겁게 도발했다.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퍼스널컴퓨터’) 같은 거침없는 성적 표현으로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 일침을 가했다. 냉소 혹은 도발의 미학은 그의 자산 중 하나다.

    “나는 도발이란 단어 제일 싫어해. 누구를 도발하려 한 적도 없고요. 도발적이지도 않고요. 출판사서 첫 시집 마케팅 포인트를 그렇게 잡는 바람에 지금껏…. 내가 도발적이에요? 아니죠? 귀엽고 발랄하지 않아요?”

    “인간 최영미는 발랄하지만 시인 최영미는 도발적”이라고 답하려다 말았다.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 담긴 시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몸과 마음, 성정, 일상이 시 속에 서슴없이 혹은 거침없이 녹아들어가 있다. ‘물에 잠긴 장미 봉오리가/ 점점 크게 벌어지네/ 나의 마음도/ 나의 거기도……’(‘선물’) 같은 문장이 뜨겁다면 ‘고독은 참으로 시끄럽다’(‘채널을 돌리며’)의 반어는 서늘하다.

    고독은 참으로 시끄럽군. 드라마와 스포츠와 뉴스가 나의 하루를 구성하는 무지 심심한 날. 8시에도 9시에도 시리아는 위급한 상태이고 9시에도 10시에도 죽어가는 그들에게 내가 해줄 게 없어 텔레비전을 켜기 전보다 무력해진 나. 수첩이나 정리할까? 빨간 볼펜을 들고 1분에 1명꼴로 관계를 정리했다. 이미 검은 줄이 그어진 이름들을 확인 사살하고 내 인생에서 영원히 추방한 그대들. 지우기로 결심하고 잘못 누른 번호들. 고독은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어

    -시 ‘채널을 돌리며’

    투명하고 단단한 금속성 울림

    그는 스물셋에 결혼해 스물셋에 이혼했다. ‘이혼녀’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이 지금과 다를 때다. 30대 초반에 유명인이 됐다. 그러곤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 딱히 보지 않더라도 TV를 켜놓아야 마음이 놓였다. 축구와 야구가 외로움을 달래줬다.

    ▼ 날것의 자신을 드러내는 게 부끄럽지는 않나요? ‘다 털어놓는 민망함’ 같은 게 있을 텐데….

    “어떻게 안 부끄러울 수가 있어요. 어떤 숙명 같아요. 특히 시는,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아요. 가장 깊은 곳의 감정과 사랑, 분노의 진한 정수를 드러내지 않으면 남이 감동하지 못해요.”

    그는 자문한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지? 어디서부터 속였는지?”

    그러곤 자답한다.

    “감추지 않으련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그의 시를 두고 ‘투명하고 단단한 금속성 울림’이라고 했다. 단단함, 투명함, 덧붙여 잘 읽힘은 모호함을 선호하는 시와 불화할 수 있다. ‘쉽게 쓴 시’라는 문단 일각의 평가에 그는 시를 통해 이렇게 답한다.

    술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시가 쉽다고/ 노란 시월이 밀려온다고, 빗대어 쓰면/ 몰라도 뜻을 묻지 않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을/ 밥벌레들이 기어들어가는 순대에 비유하면/ 직장인들을 모욕했다고 분개하고/ 나도 모르는 말들을 주절주절 갖다 붙이면/ 그들은 내 시가 심오하다고…

    -시 ‘오해’에서



    …유행을 따르는 허접스런 문자유희로 넘치는 지식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말도 어렵게 비틀고 꼬아야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시 ‘인터뷰를 마치고’에서

    “외우기 좋은 시가 잘 쓴 시예요. 운율이 없는 시는 잘 안 외워집니다. 잘 쓴 시는 저절로 외워져요. 바이런, 사포의 시처럼요.”

    그는 ‘이미 뜨거운 것들’에서 자신을 ‘유목민’이라고 규정했다. ‘…짝이 맞는 옷장을 사지 않고/ 반듯한 책상도 없이/ 에어컨도 김치냉장고도 없이/ 차도 없이 살았다 그냥/…’(시 ‘서울의 울란바토르’에서). ‘태초에 죄인’(시 ‘고해성사’에서)인 어떤 신도 믿지 않았으며 지시를 받거나 지시한 적도 없다. 속초, 춘천에서 혼자 살았다. 지방에 내려간 건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어서다. 오랜 유목민 생활에 지친 걸까. 7개월 전 춘천에서 일산으로 거처를 옮겼고, 1980년대를 함께 경험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미 뜨거운 것들’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사랑’이다. 연애로 인해 변한 몸과 마음의 형편이 거침없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다.



    너는 차가웠고,/ 나는 뜨거웠고,/ 그리고 너를 잊기 위해 만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남자들./ 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내일은 전국이 흐리고,/ 나는 샴푸를 사러/ 나갈 것이다

    -시 ‘일기예보’에서



    나의 저녁이 너의 저녁과 합해져/ 너의 욕망이 나의 밤을 뒤흔들고/ 뜨거움이 차가움을 밀어내고/ 나란히 누운, 우리는/ 같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곁에 없으면 잠이 안 와.’

    -시 ‘연인’에서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 시집에서 나이 듦에 대한 탄식 같은 것도 느껴지더군요.

    “갑자기 늙은 거 같아요. 내 나이쯤 돼보면 가버린 젊음이 아쉬울 거예요. 나는 제대로 젊지도 못했던 거 같아요. 젊을 때 젊은 적이 없어서 제대로 늙지도 못하는…. 1980년대의 시대상황 탓에 청춘을 빼앗기지 않았나 싶어요. 청춘 이런 낱말을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져요. 싱그럽고 황폐한 청춘이라고나 할까요. 여하튼 복잡해져요. 시대의 그림자에 가려 젊음을 맘껏 못 누렸어요. 그래서 예전에 못 했던 거, 요즘 해보고 있어요.”

    ▼ 어떤 거요?

    “예컨대 남자친구랑 타로점 보는 거요. 젊었을 때는 그런 거 해볼 생각도 못했죠. 예전엔 운동선수, 가수를 좋아해본 적도 없었어요. 운동선수나 가수 좋아하는 것을 이해를 못했거든요.”

    그는 소문난 두산 베어스 팬이다. ‘이미 뜨거운 것들’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이가‘김현수’다.



    …시인과 사장님이 엉뚱한 한담을 주고받는 날. 김현수가 시원한 만루홈런을 날리고 두산베어스가 롯데자이언트를 10:3으로 누르며 어제의 처절한 패배를 되갚아주었다.

    -시 ‘야구장에 나타난 시인과 사장님’에서

    ▼ 20대의 사랑과 50대의 사랑은 어떻게 달라요? 똑같이 뜨거워요?

    “똑같아요. 뜨거워요. 유치하고요. 서로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면…. 유치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요. 나이 쉰에 이런 사랑이 올 줄 몰랐어요. 시 쓴 그대로예요.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어요. 대학 시절에 나를 알았다고 해요. 나는 몰랐고요. 내가 동아일보에 쓴 칼럼을 읽은 후 용기를 내 전화했다 하더라고요.”

    ▼ 사랑?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말아야겠군요.

    “그럼요.”

    ▼ 결혼해 사는 사람 보면 부럽지 않았어요?

    “결혼한 애들은 나 부러워해요. 나도 싱글일 때가 이따금 그립고요.”

    ▼ 그 성격으로 어떻게 연애를 하는지 궁금해요.

    “이 남자, 고생하고 있어요. 나보고 까다롭다고….”

    그가 굽 있는 구두를 신은 것을 처음 봤다.

    “운동화 신지 말고 굽 있는 구두 신으라고 해, 남자친구가.”

    ▼ 혹시 깨지는 건 아닌지 걱정은 안돼요?

    “젊어서 깨지는 것과 다르죠. 나이가 있으니 잘 수습하지 않을까요. 미키 루크 나오는 영화 봤어요? ‘나인 하프 위크’(9 1/2 Weeks, 1986). 9주 반이 넘으니까 다른 면도 보이더라고요.”

    그는 오감을 열고 세상의 풍경과 주변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문장을 얻었다. 버리기 아까운 문장에는 암호를 넣어 시를 만들었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과 말을 섞으면서 남자를 만났고 사랑을 나눴다. ‘이미 뜨거운 것들’의 대표 시는 2부의 첫 시 ‘이미’일 것이다.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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