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모방과 짜깁기의 포스트모던 영상 시대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3-05-23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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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방과 짜깁기의 포스트모던 영상 시대

    ‘스타워즈’의 우주제국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거리를 걷고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공상과학영화 ‘오블리비언’(Oblivion·조셉 코신스키 감독, 2013)은 중후장대한 규모와 현란한 액션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캐릭터, 이야기의 구조, 스펙터클(spectacle·구경거리)로 이어지는 구성이 돋보인다. 동시에 이 영화는 ‘혼성모방’과 ‘패러디’라는 포스트모던 공상과학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외계인과의 전쟁, 기계와의 전쟁이라는 묵시록적인 설정은 핵전쟁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영화 ‘우주전쟁’(1958)이나 텔레비전 시리즈 ‘V’(1983) 등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고 주인공이 알고 있는 현실이 거짓이라는 설정은 ‘매트릭스’(1999)와 유사하다. 또한 주인공이 원본인간의 복제인간이라는 설정은 ‘솔라리스(1972)’나 ‘에일리언 4’(1997)와 닮았다. 잭과 줄리아가 헬리콥터를 타면서 공중전을 펼치는 장면은 ‘스타워즈’(1977)와 ‘인디펜던스 데이’(1996)에서 펼쳐지는 공중전을 떠올리게 한다.

    ‘스타워즈’에서 ‘오블리비언’까지

    ‘오블리비언’은 이렇게 기존의 여러 영화로부터 설정과 장면을 따와 짜깁기하는 혼성모방(pastiche) 기법으로 제작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혼성모방은 패러디(parody·기존 작품의 소재 등을 흉내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기법)와 함께 가장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 스타일로 꼽힌다.

    미국의 문학평론가 프레데릭 제임슨이 1984년에 쓴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는 논문은 영화의 혼성모방과 패러디 문제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제임슨은 이 논문에서 1970년대부터 미국 영화에서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로 돌아가는 복고 경향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빅슬립’(마이클 위너 감독, 1978)처럼 고전 영화를 단순히 리메이크하는 경향,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감독, 1974)처럼 고전 영화가 풍미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경향, ‘보디히트’(로렌스 카스단 감독, 1981)처럼 고전 영화의 관습으로 현대적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외 각기 다른 영화 장르의 관습을 뒤섞어 전혀 다른 영화 장르를 만들어내는 경향도 나타나는데 상당수 공상과학영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TV도 혼성모방, 패러디 유행

    예를 들어 공상과학영화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스타워즈’(조지 루카스 감독, 1977) 시리즈는 서부영화, 전쟁영화, 사무라이 영화와 같은 여러 고전 영화 장르를 뒤섞어 공상과학영화 장르를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유명한 영화들의 유명한 장면이나 설정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한다. 혼성모방과 패러디의 차이점은, 풍자 목적 없이 다른 작품의 설정을 빌려오는 것이 혼성모방이고 풍자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패러디라는 데에 있다. 관객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져온 거구나’라고 알아내가면서 감상한다. 이렇게 영화의 문법이 바뀌면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사실 영화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에서도 혼성모방과 패러디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tvN에서 방영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코리아’(SNL 코리아)의 거의 모든 코너는 패러디 전략을 구사한다. 매주 유명 연예인이 나와 고정 출연진과 함께 평소의 자신과는 다른, 야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다른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거침없이 모방한다. 신동엽이 출연하는 ‘이엉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채널A의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을 패러디한 코너다. 그런데 사실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라는 제목도 미국의 유명 TV 드라마 시리즈인 ‘X File’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ㅉㅑㄱ’이라는 코너는 SBS TV의 리얼리티 쇼 ‘짝’을 패러디한 것이다.

    KBS 2TV의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여러 프로그램 역시 유명 영화, 드라마,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모방하거나 짜깁기한다. 일부 프로그램은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드라마의 주된 내용을 재연하기도 한다. MBC TV의 ‘무한도전’은 KBS TV의 ‘공부의 신’ 프로그램 형식을 빌려와 ‘예능의 신’이라는 에피소드를 꾸리기도 했다.

    혼성모방과 패러디는 방법이 다른 만큼 효과도 다르다. 패러디는 주로 코미디에서 많이 구사되고 그 효과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혼성모방은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오블리비언’이 보여주듯이 반드시 웃음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1970년대 이후의 블록버스터급 공상과학영화에서 혼성모방을 자주 구사했는데 이때의 효과는 웃음과는 다른 재미나 스릴을 일으키는 것으로 표출됐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이후에 등장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시기 순으로 보면 리얼리즘-경쟁자본주의, 모더니즘-독점자본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영화와 TV도 문화적 현상의 하나이므로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현대 영화와 TV는 포스트모던의 속성을 자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영화 제작자들이 혼성모방과 패러디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를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는 시도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나 미국 영화에 푹 빠진 이른바 ‘할리우드 키드’들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의 영화관(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표현기법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차용하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1950년대 말 프랑스의 누벨바그 세대는 1940년대 미국 영화의 장면들을 프랑스 스타일로 바꾼 영화들을 선보이곤 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일종의 존경 차원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혹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기법이 시대를 초월하는 완성도와 보편성을 지녔기에 이렇게 한 것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부터 몇몇 영화와 TV 드라마가 유명 외국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영화 ‘게임의 법칙’(장현수 감독, 1994)과 ‘비열한 거리’(유하 감독, 2007)’, MBC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장근수 연출, 인정옥 극본, 2002)가 대표적 사례다. 이전 영화들을 차용하는 현상은 영화 또는 영상 콘텐츠가 뉴 미디어에서 올드 미디어로 바뀌고 있으며 신진 제작자들에게는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과 역사 배제한 ‘흉내 내기’

    모방과 짜깁기의 포스트모던 영상 시대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20세기 전반기의 영화는 문학, 회화, 연극, 사진, 건축과 같은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부터 표현기법을 전수받아 영상을 만들었다. 반면 20세기 후반~21세기의 영화는 기존 영화-영상 콘텐츠를 혼성모방하거나 패러디하는 포스트모던 기법을 자주 사용해 영상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차용과 모방, 짜깁기는 원전(原典)의 사회·역사 맥락을 고려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업이 아니다. 마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청바지와 셔츠 패션의 소재로 삼는 것과 같이, 이념을 배제한 분절적이고 즉흥적이며 지극히 감성지향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와 TV를 보면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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