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간질과 비만에 시달린 경종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6-19 16: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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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2003년 방영된 TV 사극 ‘장희빈’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를 부여잡고 슬퍼하는 경종. 실제의 경종은 어릴 때부터 비만이었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자 때부터 신변, 정치와 관련해 갖은 수난을 겪은 비운의 왕이었다. 32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년간 병치레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재임기는 소론과 노론이 세제(世弟·연잉군, 후일 영조) 책봉을 두고 피의 숙청(1,2차 신임사화)을 벌인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해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지만 노론의 압박으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실록 곳곳에 경종의 ‘이상한 질병’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재위 1년 10월 10일) “도승지 김시환이 나랏일을 의논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의관들의 입진 후 화열이 오른 상의 심기가 대발(大發)했다. 여러 신하가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재위 2년 3월)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 곤담환과 우황육일산 등의 처방을 썼지만 효험이 없었다.”(재위 4년 8월 2일)

    간질과 발작의 증거

    경종이 말한 ‘이상한 병’‘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종이 복용한 약물은 그의 질병을 알려주는 핵심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집중적으로 복용한 약물은 가미조중탕이었다. 경종 즉위 원년부터 재위 2년, 3년에 걸쳐 150첩 이상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일에도 잘 나서지 않고 적극성을 보이지 않던 경종은 이 약만큼은 작심한 듯 계속 지어 올릴 것을 의관들에게 주문한다. 그만큼 약효가 좋았다는 뜻이다.

    가미조중탕은 일반적으로 대조중탕과 소조중탕으로 나누는데, 고종의 어의이자 국내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기관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한 청강(晴崗) 김영훈 선생(1882~1974)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이 먹은 가미조중탕은 소조중탕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전체에 나타난 가미조중탕의 처방기록은 총 50회 정도로 정조와 순조에게도 투여한 기록이 나온다. 경종에게는 무려 42회가 처방됐다. 동의보감 열담(熱痰) 조문에 나온 소조중탕의 기록은 이렇다. ‘열담이란 곧 화담(火痰)이다. 번열이 몹시 나서 담이 말라 뭉치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눈시울이 짓무르면서 목이 메어 전광증이 생기는 증상에는 대·소조중탕이 좋다.’



    동의보감은 또한 경종에게 쓰인 또 다른 처방인 곤담환의 치료 목표에 대해 ‘습열과 담음이 몰려서 생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 속을 끓이고 소원이 풀리지 않아서 전광증(癲狂症)이 생기는데 하루 100알씩 먹는다’고 설명한다. 전광증은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뇌 구조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정신착란이나 정신분열증의 여러 증상을 가리키는 질병으로 때아닌 발작을 일으키는 게 특징이다.

    동의보감에 나타나는 소조중탕과 곤담환의 공통적 치료 목표는 전간(癲癎)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간질이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둘째 오빠 민진원은 영조 4년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을 초록한 책 ‘단암만록’에서 경종의 정신과적 증세에 대해 ‘숙종 승하 시 곡읍(곡하며 우는 행위)을 하는 대신 까닭 없이 웃으며 툭하면 오줌을 싸고 머리를 빗지 않아 머리카락에 때가 가득 끼어 있었다’고 썼다.

    경종의 간질증상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숙종 15년 11월 8일 실록에 쓰인 ‘경휵(警)’이란 단어다. ‘원자(경종)에게 경휵의 증세가 있어 약방의 여러 신하가 청대하여 조양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여기에서 ‘경(警)’은 ‘놀란다’는 뜻이고 ‘휵()’은 ‘경련’ ‘쥐가 나다’란 의미의 발작성 경련과 간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돌팔이 이공윤에 당하다

    많은 드라마에서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앓았다.

    이런 경종의 비만병 치료에 이공윤이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조선 후기의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공윤에 대한 평가를 담은 실록 기록은 이렇다.

    ‘경종 2년 천거된 후 약방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셨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을 자주 복용해 설사를 하고 나면 몸 내부가 깨끗이 청소되고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해 실제 시험해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시평탕에 대황, 지실 등 설사하는 약을 재료로 처방해 일백하고도 수십 첩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그러자 임금의 살은 빠지지 않고 비위 등 내장만 허해졌고, 오히려 음식을 싫어해 물리는 날 수가 많아지면서 한열(寒熱·오한과 발열)의 증세까지 생겼다.’

    이공윤이 의학과 관련해 기록에 등장한 것은 경종 이전 숙종 35년, 유천군 이정과 더불어 의약동참(議藥同參)에 뽑히면서부터였다. 의약동참이란 조선시대 내의원 소속의 의관으로 주로 임금이나 왕비, 세자 등의 병을 치료한 의관으로 정원은 12명이었고 모두 어의로 불렸다. 이후 춘천의 제방 쌓는 일에 개입해 부당하게 뇌물을 받은 일로 중죄인이 되어 양산에 유배됐지만 경종의 질병이 악화되면서 복귀한다.

    숙종 때 같은 유의인 유천군 이정이 ‘도수환’이라는 공격적인 약재로 왕의 질병을 치료했듯 이공윤도 감수나 대황 등 공격적인 약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공윤의 처방은 늘 주변의 우려를 자아냈다. 경종 4년 사헌부는 이공윤을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이공윤은 괴벽하고 미련한 데다 행동과 모습마저 대체로 해괴한 데가 많습니다. 유의라 하여 의약동참에 뽑혔으나 매양 차례가 되는 날마다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누차 부른 뒤에야 느릿느릿 나와서 여러 의관의 입만 쳐다보다가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답하고 정성들여 깊이 연구해보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종이 세상을 등질 때까지 마지막 진료를 담당한 것은 불행하게도 이공윤이었다. 그의 공격적 처방과 복약 지시는 끝까지 계속됐다. 경종 4년 8월 19일 식욕이 줄어들고 원기가 떨어지자 비위를 좋게 하는 육군자탕을 처방한 후 20일에는 게장과 생감을 먹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은 밤에 갑자기 가슴과 배가 조이는 통증을 호소했다. 복통과 설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설사를 그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계속하며 이번에는 계지마황탕을 처방한다.

    계지마황탕 속의 마황은 허약한 사람에게는 결코 투여할 수 없는 약물이다. 마황의 별명은 청룡이다. 용처럼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땀을 내는 무서운 약이다. 필로폰 성분을 함유한 강력한 진통제에 견주는 약물이다. 특히 위장이 허약한 사람이 먹으면 침을 증발시켜 입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다이어트 약물로도 쓰이지만 잘못 쓰면 부작용이 엄청나다.

    계지마황탕을 먹은 후 경종의 환후는 더욱 위태로웠고 맥박이 약해졌다. 이복동생이자 세제인 영조는 인삼과 부자로 위장의 온기를 올리는 처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공윤은 이때에도 다시 한번 영조의 처방을 조목조목 따지며 반대의견을 피력한다. “신(臣)의 처방 약을 쓰면서 인삼도 쓰면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고 못박는다. 하지만 결국 인삼을 마시고 난 경종의 눈빛은 좋아졌고 콧등도 따뜻해지면서 반전의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흥분한 영조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인삼 약재를 쓰지 못하게 하느냐고 강하게 이공윤을 힐책한다.

    게와 감이 부른 참극

    경종은 이후 얼마 안돼 숨을 거뒀다. 즉위 4년 8월 25일이었다. 경종이 숨을 거두자 시중에 독살설이 확산됐다.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영조였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영조가 임금이 되고 30여 년이 지난 후 큰 사건으로 불거졌다. 일명 ‘신치운(1700~1755) 사건’이다. 신치운은 경종과 영조 때의 문신으로 영조 때 소론이 노론에 밀려 숙청당하는 데 앙심을 품고 모반을 꾀하다 처형된 인물이다. 사건의 시작은 신치운이 모반으로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한 말로부터 시작된다. 영조 31년 5월 20일 신치운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상(영조)이 왕위에 오른 갑진년(1725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살을 짓이기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명했다. ‘대왕대비(인원왕후·숙종의 둘째 계비)께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자성(慈聖·임금의 어머니)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경종에게 게장을 진어(進御·임금이 먹는 것)한 것이 내가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수라간)에서 공진(貢進)한 것을 알았다. 경종의 죽음은 그 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하인들이 지나치게 진어한 것이다. 그들이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였다.’

    영조는 게장과 생감을 경종에게 먹도록 한 것이 자신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한다. 사실 경종에게 바친 게장과 감의 궁합이 상극이며 함께 먹으면 절대 안 되는 음식이라는 것은 의관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게장과 감이 상극의 음식이라는 점은 주로 한의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한약물의 고전 본초강목 감나무 편은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복통이 일어나고 설사를 하게 한다. 감과 게는 모두 찬 음식이다’라면서 실제 경험까지 기록해뒀다. ‘혹자가 게를 먹고 홍시를 먹었는데 밤이 되자 크게 토하고 토혈(吐血)까지 했으며 인사불성이 됐는데 목향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게의 성질이 찬 것은 옻의 독을 해독할 때 쓰는 약성으로 알 수 있다. 옻은 잎이 떨어지는 가을이면 줄기가 빨갛다. 붉은 것은 뜨거운 성질을 갖고 있다. 속이 찬 사람이 옻닭을 고아 먹으면 설사를 멈출 정도로 성질이 뜨겁다. 옻을 먹고 피부염이나 두드러기가 생길 때 게장을 바르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게는 겉은 딱딱하고 내부는 부드러우며 뱃속 부분이 달(月)의 크기에 따라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므로 달처럼 차가운 성질을 갖추고 있다. 영덕 대게가 가장 추운 2월에 알이 차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 때문이다.

    게장과 감은 멀쩡한 사람을 죽게 만들 만큼 독약은 아니지만 지병이 있거나 소화기 계통이 약한 사람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경종은 14세 무렵, 생모인 희빈 장 씨가 사약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끊임없는 당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더욱이 간질에다 비만체질로 인한 복통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게장과 감의 음식 조합은 치명타였음이 분명하다.

    ‘신치운 사건’은 결국 이공윤의 자식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공윤은 영조 즉위 후 경종의 치료에 대한 대신들의 이의가 제기되자 그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간 후 그곳에서 죽었지만, 신치운 사건으로 화가 날 대로 난 영조는 경종이 죽은 지 31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과오를 물어 이공윤의 아들 이명현을 처형했으며 이명현의 아내와 아들들은 노비로 만들었다. 이공윤의 형제들은 북도로 유배를 갔다.

    후사 잇기 위한 정력제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청와대에서 기르는 수사슴 두 마리가 뿔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수사슴은 한 번에 100여 마리의 암컷과 교미를 할 정도로 정력이 세다.

    경종은 죽을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이복동생 연잉군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야사(野史)에는 폐비된 장옥정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경종)의 고환을 잡아당겨 고자로 만들었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포장돼 있다. 경종은 9세 때 단의왕후와 혼인했고, 그녀가 죽고 난 뒤 선의왕후와 재혼했을 뿐 단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다. 승정원일기는 경종의 후사 문제를 한의학적 처방과 연결시켜 거론한다.

    경종이 21세 되던 1708년, 즉 숙종 34년 2월 10일 승정원일기는 임금이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후사를 위해 육미지황원과 팔미지황원을 처방했다고 썼다. 한의학에서는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이 양기, 즉 정력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소변이 자주 마렵다는 것과 정력의 관계를 한의학은 이렇게 설명한다.

    항온동물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인체의 온도를 36.5℃로 유지해야 한다. 방광에 고이는 소변의 주성분은 혈액이 아닌 물이다. 물의 온도는 4℃에 불과하다. 소변을 배출하는 것은 몸의 노폐물을 처리하는 것 외에 방광의 온도를 체온과 같이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다. 한의학은 소변을 36.5℃로 데워서 저장하는 방광을 태양의 온기와 같다고 정의해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인체에 분포되어 있는 주요 경맥 중 하나)’이라고 규정한다.

    소변은 그냥 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물총처럼 짜내는 것이다. 짜내는 힘이 강하면 한번에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 있지만 힘이 떨어지면 오히려 역류해 잔뇨감이 생긴다. 자꾸 소변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증상을 양기가 약해진 때문이라고 본다. 즉, 방광이 제 기능을 못하면 정력이 약해지고 빈뇨증이 생긴다는 것. 그러고 보면 남성들이 정력제에 목숨을 걸고, 오줌발에 신경을 쓰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난경은 방광을 포함한 신장계통에 대해 ‘생명의 정(精)을 간직하는 부위로 정신과 원기가 생겨나는 곳이며 남자는 정액을 간직하고 여자는 포(胞), 즉 자궁이 매달린 곳’이라고 정의한다. 즉, 신장계통을 생명 활동의 근간이자, 생식 활동을 주관하는 곳으로 여긴 것이다. 보신(補身)이라는 개념과 보신(補腎)이라는 말이 혼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장에 문제가 생긴 이들을 위한 특효 처방은 무엇일까. 알려진 것 중 신장을 보하는, 즉 보신하는 가장 중요한 약물은 ‘육미지황환’이다. 고희(古稀)의 나이에 사흘 꼬박 노름을 해도 허리가 아프지 않게 한다는 전설의 한약이다. 옛날 어른들이 주머니에 넣고 먹던 토끼똥같이 생긴 환약이 바로 그것이다.

    육미지황환은 흔히 만성 요통, 뼈마디 통증, 성기능 쇠약, 당뇨병, 전립선 질환, 식은땀, 귀에 소리가 나는 증상 등에 좋다. 이 처방에 기재된 중심 약물은 지황인데 그 다른 이름이 ‘지정(地精)’이다. 이 식물이 땅의 정기를 모조리 뽑아 올린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나머지 약재인 마, 산수유도 신장을 보해 정기를 채우는 작용을 돕고, 목단피·택사·백복령은 신장의 정기가 허해서 생긴 허화(虛火)를 없앤다.

    황제의 약 ‘공진단’ 처방

    즉위년에 이르러서도 후사가 없자 특단의 대책으로 그 유명한 공진단(拱辰丹)을 처방한다. 승정원일기 즉위년 9월 7일 어의 권성규와 이진성이 “상의 하초(下焦·배꼽 아래 부위) 맥인 척맥(尺脈)이 약하다”고 진단하자 김창집이 무시로 공진단을 복용할 것을 건의한다. 잇따라 9월 14일에도 하초의 부실함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처방으로 공진단을 추천한다. 승정원일기는 이 모두를 ‘종사의 경사를 위한 것’이라고 전제하며 ‘선조들도 큰 효험을 봤다’는 경험담을 곁들였다.

    공진단의 구성 약물은 크게 사향, 녹용, 인삼, 산수유로 대별되며, 공(拱)은 공손하게 두 손을 마주잡는다는 뜻이고 진(辰)은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천자문에도 둘째 구절에 진(辰)자가 나온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그것이다. 이때 일월이 음양의 대비를 나타내듯 성신도 대비적 의미가 있다. 성이 뭇별을 나타낸다면 신은 거대한 별들의 원점인 북두칠성을 말한다. 이때는 진이 아니라 신으로 읽는 것이 원칙적으로 맞다.

    따라서 공진단은 공신단으로 읽어야 옳으며, 여기서 공신은 하나의 숙어 기능을 한다. 공신의 사전적 의미는 ‘뭇별이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으로 사방의 백성이 천자의 덕에 귀의하여 복종함’이다. 공신의 이런 의미는 이 처방을 만든 중국 원나라 때 명의 위역림의 뜻과도 맞아떨어진다. 공신단은 애초 일반인이 아닌 황제의 건강 증진용으로 만들어진 처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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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강원도 양구에서 처음 발견된 사향노루(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와 사향주머니.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건강한 수사슴의 뿔을 잘라 만든 녹용. 정력 증강과 골다공증, 소아의 성장부진, 허리 통증에 효과가 좋다.

    공신단의 치료 목표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이다. 말 그대로는 찬 기운은 위로 올리고 열은 아래로 내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한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리면 손에 쥔 무엇인가로 머리를 가리고 뛴다. 아무것도 없으면 손으로라도 가린다. 거의 반사적으로 머리 꼭대기로 손이 가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몸의 모든 양기(陽氣)가 모이는 백회(百會)라는 혈이 있기 때문이다. 비로 인해 백회혈에 음기가 자리 잡으면 체온이 내려가면서 감기에 걸린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고 방어를 하는 것이다.

    얼굴은 신체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겨울에도 얼굴은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의학에선 얼굴과 머리에 인체에서 가장 뜨거운 화가 있다고 전제한다. 반면에 하체는 차갑다. 인체에서 가장 많은 것은 혈액이고 중력이 작용해 하부에는 혈액이 충만하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혈액을 데우는 데 양기를 소모하다보니 하체는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뜨거운 열기는 위쪽을 향하고 차가운 한기는 다리 쪽으로 쏟아내려 불균형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주역에선 천지비괘(天地否卦)라고 하는데 상하가 단절돼 꽉 막힌 상태의 병리적 모습을 가리킨다. 흔히 우리가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하라’는 건강 격언은 이런 원리에서 유래했다.

    머리에 불타오르는 양기를 흩어버리고 아래로 내려주는 데는 사향이 가장 좋은 약재다. 사향노루의 사향선을 건조시켜 얻은 분비물이 바로 사향인데, 그 향기를 서양에선 무스크의 향기이라고 한다.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카를 폰 린네의 분류에 의하면 무스크의 향기는 신의 향기다. 서양의 고대 신전은 대개 무스크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장엄하고 고혹적인 신전의 분위기는 무스크향으로 인해 비밀스러움을 더한다. 사향의 생태학적 특징은 실제로 신전 수도자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사향노루는 늘 혼자 다닌다. 교미를 위해 1년에 한 번 정도 암수가 만나는 것 외에는 고독한 혼자만의 생활을 즐긴다. 그가 걷는 길은 늘 험한 길이다. 히말라야의 척박한 땅과 바윗길로만 다닌다. 더욱이 수척하고 깡마른 모습이다. 봄이 되면 사향은 가장 소중한 사향주머니를 스스로 버린다. 자신의 발톱으로 주머니를 떼어 낸 후 대소변으로 덮어버리고 떠난다.

    사향의 효능도 마치 맑고 강인한 수도자의 정신과 비슷하다. 흉한 사기(邪氣)와 귀신 기운, 악기(惡氣)로 인해 생긴 각종 증상을 사라지게 하고 간질을 치료한다고 전해진다. 사향의 품질엔 여러 등급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향노루가 스스로 적출한 사향이 1등급이며 극히 구하기 힘든 것이다. 2등급은 포획해 도살, 채취한 것이고 3등급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향노루의 피가 심장에서 비장으로 흘러들어간 하품이다.

    초강력 정력제 사향과 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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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기가 내릴 때 머리 위를 손으로 막는 이유는 양기를 빼앗겨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사향의 남성 호르몬 생성을 돕는 작용 때문에 그런지 사향 이야기에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일화가 늘 회자된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홀린 이유가 그녀가 허리에 찬 사향주머니 때문이었다는 설이다. 양귀비 사후 그녀의 무덤 주변엔 황제의 후궁들이 보낸 도적들이 득실득실했다고 한다. 행여나 양귀비가 차고 다닌 사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보낸 것이다. 본초강목은 “수사향노루는 기이하다. 사향주머니가 모두 물로 돼 있는데 그 향이 좀처럼 소실되지 않는다. 당나라 때 궁중에 헌상된 후 길러져 사향을 채취한 적이 있었으며 그 이후로는 기록에 없다”고 기록했다.

    승정원일기에서 김창집은 경종에게 공진단을 추천하면서 그 원료가 되는 조선 녹용의 채취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녹용의 핵심은 그 피에 있다. 중국 녹용은 피를 품은 채로 말려 붉은 가지 색깔이 나는데, 조선은 피를 빼고 말리는 탓에 녹용의 색깔이 백색이고 효험도 없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녹용의 보양과 정력강화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왜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한의사는 별로 없다. 이는 사슴의 생태와 관련이 깊다.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인 갈홍(283~343)이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 포박자(抱朴子)에는 “종남산에 사슴이 많은데 늘 한 마리의 수컷이 백수십의 암컷과 교미한다”라고 쓰여 있다.

    본초강목도 “사슴은 성질이 매우 음탕하다”고 지적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사슴의 생태를 보고하고 약효에 힘을 싣는다. “사향노루는 먹을 때는 서로 부르며, 행보할 때는 동행하고, 모여 있을 때는 뿔을 외부로 향해 둥근 진을 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며, 누울 때는 입을 꼬리 쪽으로 향하여 독맥(督脈)을 통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독맥’이란 해부학적으로 머리뼈와 척추뼈, 남자의 성기를 연결하는 맥을 가리킨다.

    게와 감, 상극 음식 먹고 절명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사슴의 뿔을 관찰하면 녹용의 강장효과가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세상의 수많은 동물 중에서 뿔 속에 피가 흐르는 것은 녹용밖에 없다. 뿔의 외피는 머리뼈의 연장으로 차갑고, 그 안에 든 피는 따뜻하다. 차가운 뼈를 뜨거운 피가 밀고 올라가 튀어나온 형국으로 내부에 있는 양적인 힘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녹용은 뼈의 생명력과 조혈기능, 양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그 어떤 약재보다 탁월하다. 해면체인 남성의 성기에 혈액을 용솟음시키게 함으로써 양도를 흥하게 하며 골다공증, 소아의 성장부진, 허리 통증에 유효하다. 모두 녹용이 가진 양적인 기, 즉 에너지의 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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