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명사에세이

1987년의 스무 살에게 건네는 인사

  • 입력2017-11-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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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십이 되었다. 

    나이에 무감한 편이지만 ‘50세’는 좀 세다. 생일을 맞아 늦은 휴가를 내고 혼자 여행을 가려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감기가 너무 심해 포기하고 휴가 내내 누워 쉰 살의 생일을 맞았다. 누워서 생각해보니 모험에 가까운 여행을 즐기는 나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멈춰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뿐 아니었다. 설렘도, 자극도 언젠가부터 없다. 

    50세의 나는 갑자기 내가 궁금해졌다. 난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다보니, 이런…온통 직장, 일과 연관된 것뿐이다. 일 말고 세상에 가슴 두근거린 때가 언제였지? 무엇이 나를 들뜨게 했었지? 대학에 들어갔을 때를 생각해낸다. 1987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놀랍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스무 살이던 1987년 봄부터 1990년 겨울까지 매일 아침이면 여행 같은 등굣길에 올랐다. 학교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글을 쓰고 싶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방송국 프로듀서나 연극연출자가 되고 싶단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글을 알아야 한단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이 많은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다. 학교는 멀었다. 집과 학교 오가는 시간은 왕복 2시간~2시간 반. 창밖으로는 벚꽃이 흩날렸고 장맛비가 차 천장을 두드렸고 도로 위엔 눈이 수북이 쌓여갔다. 이성복의 시를 읽다가 보는 창밖은 남해금산이 되기도 하고, 하일지의 경마장이 멀리 보이는 듯했다. 

    한 학년 정원은 40명이 넘었지만, 학교에 나타난 자는 스무 명 남짓. 한 친구는 잠적 6개월 만에 나타나서는 경북 안동 작은 읍내 당구대만 닦다가 왔다면서 장편소설 한 편을 내놓았다. 부모님이 주신 등록금을 날름 가지고 열 식구가 한 방에 붙어사는 연인의 부산 단칸방으로 숨어버린 친구도 있었다. 휴학하고 세상 경험을 많이 하면 미숙한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학교도 집도 아닌 곳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빨리 졸업해서 편한 마음으로 세상 돌아다니며 노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어머니 말에 솔깃해 학교를 꾸역꾸역 다니며 친구들이 하나둘 사라진 도서관에서 나는 낯선 미술도록을 한없이 보았다. 등굣길은 프랑스 영화처럼 아련히 아름다웠고 학과 사람들은 현실감이 너무 없어서 영화 속 인물 같았다. 피가 뜨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등장인물을 싫어하면서도 부러워 눈을 떼지 못했던 나는 참으로 소극적 관객이었다.

    스무 살에 만난 괴짜들

    시인 구상 선생님의 시 수업시간은 참으로 이상했다. 의자에 천천히 앉으시고 모자를 천천히 내려놓고 6~8명 정도의 학생 얼굴을 천천히 본 후, 준비해 온 시를 천천히 꺼내셨다. 시 제목을 읽으신다. 물론 천천히 읽으신다. 우리는 받아 적는다. 작가 이름을 읽으신다. 우린 받아 적는다. 시 첫 구절을 읽으신다. 우린 받아 적는다. 한참이나 그냥 계신다. 둘째 구절을 읽으신다. 우린 받아 적는다. 한 구절 불러주시고 다음 구절을 불러주실 때까지 그 시간은 참 길었다. 너무 길어서 창밖 흔들리는 나무를 보거나, 지나가는 구름을 봤다. 시 창작 세미나실은 언제나 조용했고 시를 받아 적은 후 바라보는 창밖 나무와 잔디는 그때마다 다른 춤을 췄다. 



    졸업 후 카피라이터가 됐다. 맡은 광고 품목은 맥주와 소주 그리고 기타 등등. 학교 다니던 때처럼 술을 마셨다. 술집 수업이 많은 문창과 출신답게 술자리에서 오가는 사람과 사람 이야기를 광고로 풀어내다보니 어느새 나는 ‘술 좀 아는 사람, 사람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카피라이터로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유한킴벌리-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맡았을 때, 구상 선생님의 시 수업이 떠올랐다. 그 한적하고 평화로운 느낌. 수업시간에 듣던 창밖 바람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구상 선생님의 느리고 낮은 목소리.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의 새로운 라디오 광고를 만들기 위해 시인과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시인은 숲 속에서 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시를 읽어주고 있고, 그 옆에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구상 선생님, 고맙습니다. 

    문창과 사람들은 학점이나 장학금이나 취직 자리보다는 누가 어떤 글을 썼느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로 글에 대해 참 가혹했다. 서로의 글을 읽고 빨간펜을 그어대던 수업은 술자리까지 이어져 무서운 혀들이 술집 위로 날아다녔다. 멋이라도 좀 부린 글에 대해선 선생님과 과 사람들은 독에 가까운 ‘혀 화살’을 날렸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 카피를 쓰면서도 겁이 났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문구, 광고 카피이지만 기교 많은 카피를 앞에 두고선 학교 때를 떠올리며 ‘내가 이렇게 쓰면 안 되지’ 하는 생각에 고민하는 밤이 많았다. 그렇다. 서른 살에도 서른 살이 훨씬 지나서도 글 쓰는 건 여전히 재밌고도 어렵고도 무서웠다.

    쉰 살에 만나는 예술가들

    카피라이터 14년 차에 마흔을 코앞에 두고 직업이 바뀌었다. 아트센터 예술감독. 직업이 바뀌니 일하는 과정도 만나는 사람도 바뀌었다. 클라이언트가 없는 게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었다. 카피라이터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광고회사에서는 기획을 하고 제작을 하고 클라이언트의 ‘컨펌(광고주의 승인)’이 필요했는데, 가장 중요한 단계인 클라이언트 컨펌이 없으니 사실 더 고민에 빠졌다. 이 기획 방향이 맞나? 공연 제작을 하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나? 계속 자문하게 되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나의 중요한 미팅 상대는 40세가 안 되는 젊은 예술가들. 희곡작가, 연출가, 배우, 미술작가, 평론가… 국적만 한국인 사람일 뿐 한 명 한 명이 너무 달라서 단 한 번도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 매번 새로운 기획과 제작과정을 거쳐야 한다. 직업 바뀌고 나서부터이니 10년 내내 새로운 사업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는 일도 바뀌고 미팅 상대도 완전히 바뀌었는데 나는 이들이 낯설지 않다. 스무 살부터 같이 수업 듣던 나의 친구들. 밤새 술 마시고도 다음 날 아침이면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강의실은 답답하다며 뛰쳐나가 세상에 대고 소리치던, 너무 열정적이어서 그 뜨거움에 가까이 가기 싫던 스무 살 나의 친구들이 얼굴과 이름만 달라졌을 뿐, 젊은 예술가의 모습으로 오늘도 회의 테이블에 나와 마주 앉아 있다. 

    신학기가 되면 교수님들은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을 칠판 가득 적으며 ‘지적(知的) 모험’을 권장했다. 그 도서 목록을 손에 쥐고 책 도매상인 송인서적에 가서 책 주문을 넣고 종로6가 책방 골목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면 책방 골목 특유의 종이 냄새가 났다. 좋았다. 그 골목에서 난 막 건네받은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 책장을 넘기며 예술과 삶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 떨렸다.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50세의 나는 젊은 예술가와 함께 예술을 통한 지적 모험을 시도 중이다. 사람을 향한 지적 모험. 예술을 향한 지적 모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스무 살부터였으니 난, 참 오랫동안 모험을 하고 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계절이 또 한번 바뀌고 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 잊고 있던 이 느낌을 알게 해준, 지적 모험의 문을 열어준 1987년의 스무 살에게 2017년의 쉰 살이 인사를 건넨다. 고맙습니다.

    강석란



    ● 1968년 서울 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광고대행사 오리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두산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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