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누가 북한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나?

L기자의 취재노트 비밀해제!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입력2013-06-20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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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북한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나?
    1997년 2월 15일 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아파트 현관 앞에서 한 남자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남자는 열흘 뒤 숨졌다. 피살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처조카 이한영 씨였다. 이 씨는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아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함께 자랐고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북한 최고 상류층에 속해 있던 인물이다.

    이 씨는 1982년 스위스 어학연수 중 한국으로 망명했다. 북한 최고위층에 관한 정보에 목말라 있던 한국 정보당국이 그야말로 ‘횡재’를 한 셈이었다. 정부가 올해 초 공개한 이한영 망명 외교문서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씨의 망명은 1982년 9월 28일 오전 9시 50분 스위스 제네바 대표부에 그가 전화로 망명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된다. 제네바 대표부는 즉각 이 씨의 신병을 확보했고 긴급 전문을 통해 서울 외무부 본부에 알렸다. 전문 제목은 ‘몽블랑 보고’.

    이 씨는 리민영·이일남이란 이름의 여권을 소지했다. 이때까지 이 씨가 김정일의 처조카인 줄은 현지 관계자들도 몰랐던 것 같다. 대표부는 전문에서 “스웨터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서류는 숙소에 두고 왔다”고 보고했다. 이 씨의 망명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씨는 스위스에서 프랑스, 벨기에, 독일, 필리핀, 대만을 경유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나흘 만인 10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정부는 북한의 방해공작에 대비해 해당 공관에 철저한 기밀 유지를 요구하고, 관련 문서를 파기할 것을 지시하는 등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서울에 온 이 씨는 망명 동기를 비롯해 북한 내부 실정 등에 대해 오랜 조사를 받은 뒤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한양대 재학 시절에는 테러 위협을 느껴 성형수술까지 했다. KBS 국제방송국 러시아어 방송 담당 PD로 입사해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러시아어 통역사로도 활동했다. 이후 개인사업을 시작했지만 곧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북한 최상류층 생활에 젖어 씀씀이가 헤프기도 했고, 한국 실정에 어두운 탓도 있었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건설회사를 차렸으나 1991년 부도를 냈고, 횡령 등의 혐의로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 씨는 정부에 더 많은 금전적 지원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보를 캐낼 만큼 캐낸 정보기관 처지에선 이 씨의 활용가치가 떨어져 있었다. 돈이 궁해지자 이 씨는 특종 기삿거리를 주겠다며 언론사들과 거래를 시도했다. 1996년에는 북한 최고 권력층의 실상을 속속들이 밝힌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을 발간했다. 1996년 2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혜림 망명설’도 그가 언론에 흘려준 정보였다.



    1996년 2월 13일 조선일보가 ‘김정일 본처 서방탈출’이란 제목의 기사를 세계적 대특종이라면서 보도했다. 각 언론사는 이 씨를 만나 또 다른 얘기를 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조선일보가 워낙 크게 이 사건을 다룬 탓에 다른 언론은 속칭 ‘물먹은 것’을 만회하고자 ‘더 큰 한 방’을 노렸고, 당연히 무리한 취재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씨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해 뭔가 큰 것을 캐내려 애쓰기도 했다. 이처럼 치열한 보도 경쟁 속에 자연스럽게 이 씨가 살고 있는 동네가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2월 14일 이 씨가 1982년에 귀순,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성혜림 망명설’은 결국 오보로 판명 났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만 3국으로 망명하고 성혜림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북한 측 보호를 받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취재 경쟁 속 거처 드러나

    누가 북한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나?

    이한영 씨(왼쪽)가 1996년 2월 13일 서울 모처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이모이자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 등의 행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 씨는 이듬해 2월 15일 피살됐다.

    이 씨는 언론에 신변이 노출된 뒤 불안한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1996년 6월 23일 “이 씨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와 불화 끝에 안기부가 제공한 안가에서 쫓겨났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 씨와 안기부가 갈라진 것은 최근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수기를 펴내면서부터”라며 “이 씨는 안기부에 미리 자신의 수기 원고를 보여줬는데, 이를 읽어본 안기부 측이 수기 내용 중 일부를 삭제하라고 요구했으나 이 씨가 거부해 안기부의 미움을 샀다”고 이 씨가 안가에서 쫓겨난 이유를 설명했다.

    동아일보는 또 이 씨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안기부는 지난 2월 성혜림 일가 서방 탈출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 씨의 신분이 드러나자 이 씨에게 서울 시내 모처에 있는 안가를 제공, 그곳에서 살도록 해왔으나 수기 출판 후인 6월 13일 안기부 담당관이 ‘15일까지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해왔던 것. 이 씨는 원래 분당의 아파트에 7000만 원을 주고 전세를 살았으나 이 아파트가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지금은 아내와 딸은 처가에, 자신은 친구 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이에 대해 안기부 측은 ‘더 이상 이 씨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씨는 지난 2월 이후 갑자기 유명해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북한의 보복 위험이 커져 생활이 불안해졌다. 외동딸(7)은 초등학교 취학통지서를 받아놓고도 아직 학교에도 못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 씨는 ‘먹고살기 위해’ 요즘은 신문, 잡지와의 인터뷰는 물론 TV 출연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6월 초 MBC TV에 출연한 데 이어 SBS TV의 ‘이주일 쇼’에 출연했다. ‘이주일 쇼’에서는 자신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과 이모부인 김정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얼굴을 성형수술해 잠적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동아일보 1996년 6월 23일자).

    이 씨 피살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곧바로 사건 발생지역을 관할하는 분당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관할 경찰서장이 수사본부장을 맡는 게 보통인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경기지방경찰청장을 수사본부장에 임명했다.

    경기청장이 직접 수사 지휘

    자연스럽게 북한이 범행을 했을 소지가 크다는 분석이 나왔다. 우선 이 씨 피살 사건 발생 이틀 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실이 밝혀졌다. 정부는 당시 중국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도피해 있던 황 씨를 한국으로 입국시키는 문제와 관련해 평양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북한은 황 씨의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한편 망명자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다짐했다. 이 씨가 ‘대동강 로열패밀리…’를 발간해 김정일과 북한 고위층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북한의 공적(公敵) 1호와 다를 바 없게 됐다는 점에서 이 씨가 피살되자 누구나 ‘북한의 보복 범행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이 씨가 총격을 받은 직후 ‘간첩’이라고 외쳤다는 목격자 진술이 나오고, 현장에서 북한 공작원이 주로 쓰는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의 탄피가 발견된 점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러나 단순히 북한 공작조의 ‘보복 테러’로 추정되던 사건이 북한 소행으로 공식화한 계기는 1997년 10월 이른바 ‘부부간첩단 사건’의 범인들이 잡히면서다.

    부부간첩단 사건은 남파된 부부공작조 최정남(당시 35세)과 강연정(당시 28세)이 ‘전국연합’ 산하조직 간부를 포섭해 북한으로 데려가려다 붙잡힌 사건이다. 이후 조사과정에서 이들은 “이 씨 살해범이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전문 테러 요원인 최순호와 신원 미상의 20대 남자 등 2명으로 구성된 특수 공작조였다”고 진술했다. 부부간첩단은 이어 이 씨를 살해하고 돌아온 암살범들이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고 재(再)남파를 위해 성형수술까지 받았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안기부는 1997년 11월 19일 이 씨가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에 의해 사살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씨 피살과 관련해 경찰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실은 범인들이 이 씨의 주소를 입수한 경로를 밝혀낸 게 전부다. 범인들이 심부름센터에 돈을 주고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 이에 따라 1997년 5월 이 씨의 개인 정보를 외부로 유출한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 경사 한 명이 공공기관 개인정보법 위반 혐의로 법원으로부터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 이 경찰관을 통해 이 씨의 주소를 알아낸 후 돈을 받고 용의자들에게 정보를 넘겨준 심부름센터 대표 등 2명에게는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경찰은 안기부가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공식 발표하자 곧 특별수사본부를 해체했다. 경찰은 1000여 건에 달하는 제보, 사건 현장 증거물(머리카락 8개, 탄피), 목격자 및 이 씨 주변 인물 9000명의 행적, 이 씨 전화 통화내역 3000여 건 등에 대한 확인 작업과 탐문 수사를 벌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찰은 또 용의자들이 심부름센터에 돈을 보낼 때 쓴 은행 입금 원표에 묻은 지문과 사건 발생 전후 출입국자 지문을 전부 대조했다. 입금 원표에 쓰인 용의자 필적과 유사한 160여 명의 필적도 일일이 대조했다.

    그럼에도 범인의 윤곽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북한 공작원들의 범행이어서 지문이나 필적 대조가 소용없었다는 설명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 초기부터 북한 소행이 아닐 수 있다는 추측과 분석 또한 적지 않았다. 이 씨가 한동안 러시아 인사들과 사업을 벌였고 크고 작은 여러 분쟁과 갈등이 있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마피아, 또는 국내 폭력 조직 관여설 등 다양한 의문이 제기됐다.

    ‘스모킹 건’은 없었다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우선 범행 수법이 지나치게 어수룩하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이 씨는 두 차례 총격을 받고도 죽지 않고 10일이나 살아 있었다. 암살 테러를 위해 고도로 훈련된 정예요원 2명이 불과 몇 m 거리에서 암살 대상을 즉사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웃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심한 말다툼을 벌이고 거기에 격투까지 벌어졌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사실 북한 공작원이라면 조용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고 빠져나갔어야 할 것이다. 체포 가능성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행여 아파트 경비원이나 이후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래저래 암살 전문가 솜씨치고는 어설펐다.

    누가 북한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나?

    1981년 평양에서 촬영된 김정일의 가족사진. 김정일이 장남인 정남과 의자에 앉아 있다. 뒷줄 왼쪽부터 성혜랑(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 씨의 자녀 이남옥, 이한영 씨.

    북한 공작원들이 심부름센터를 통해 이 씨 주소를 알아냈다는 것 또한 석연치 않다. 수사결과에 나온 것처럼 북한 공작원들이 과연 심부름센터에 “1993년에 서울구치소에 수인번호 ○○○○번으로 수감됐던 이한영이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아봐달라”는 식으로 요청했을까? 북한 소행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게다가 북한 소행이라고 단정한 강력한 증거 중 하나는 이 씨가 숨지면서 “간첩, 간첩…”이라고 외쳤다는 목격자의 진술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목격자는 “약간 움찔했을 뿐 말을 하거나 손가락 2개를 편 적이 없다”며 증언을 번복했다.

    수사본부가 설치됐던 분당경찰서는 실제로 2003년 4월 17일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15년이고 아직 피의자가 검거되지 않아 사건이 종결되지 않고 진행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서울지방경찰청도 같은 해 4월 4일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이 씨 부인 김모 씨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관련 답변서에서 “이한영 피살범인을 검거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부간첩단’ 진술만으로 (원고 측이) 이 씨의 피살범인으로 북한 테러 전문요원을 확정하는 것은 승복할 수 없다”고 경찰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 마피아 소행?

    일부 외국 언론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1997년 2월 17일 “이 씨 피살에 대해 한국 정부가 북한 소행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사과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범인이 잡히지 않은 데다 이 씨의 채무가 많고 여자 문제가 복잡해 다른 조직이 저지른 행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할 때 개연성이 가장 높은 시나리오로 러시아 폭력조직의 개입이 거론된다. 사건 당시는 러시아와의 각종 교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에 막 눈뜬 러시아에서는 돈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던 그 무렵 이 씨에게 러시아 무역은 그간의 사업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위험이 따랐다. 이 씨가 높은 수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무역에 높은 이윤이 보장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위험한 비즈니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게 결국 이 씨의 목숨까지 앗아간 원인이 됐다는 게 러시아 폭력조직 연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약속 불이행 등으로 인해 러시아 폭력조직의 미움을 샀고 결국 러시아 마피아와 연계된 국내 폭력조직의 하수인들이 러시아 마피아의 지시에 따라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들은 범행에 사용된 총기 역시 당시 밀반입이 용이했던 부산 감천항을 통해국내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사건 발생 넉 달 전쯤 감천항을 통해 소음기가 부착된 러시아제 권총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일보는 1996년 10월 4일 “부산경남본부세관과 안기부 부산지부는 3일 살상용 소음권총을 밀반입해 국내에 판매한 러시아 선적 트롤어선 사티노호(720t) 갑판원 라첸코 세르게이(37)와 기관장 아브데브 빅토르(36)를 관세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세르게이는 지난달 30일 부산 감천항 중앙부두 물양장에서 사티노호에 싣고 온 러시아제 55구경 소음기 부착식 권총 1정을 빅토르를 통해 강모(50) 씨에게 미화 400달러에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안기부 조사 결과 이 권총은 탄창 삽입식(10발)으로 총구 부분이 소음기를 부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주문 제작된 제품이며 격발 시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 인명 살상용에 주로 이용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또한 검찰 조사 결과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인 5명이 수산회사 간부로 위장해 주로 부산을 근거지로 러시아 여성들의 국내 불법 취업 알선과 총기 밀매 등을 주도해온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북한으로서도 망명한 배신자에게 철저한 보복을 약속한 만큼 설사 자신들과 무관하더라도 또 다른 망명자들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이 씨 피살사건이 자기들 소행이라는 발표를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러시아 폭력조직 주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일부에선 설사 러시아 마피아 등 폭력조직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를 뒤에서 사주한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적 견해를 제기했다. 1997년 2월 13일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불과 이틀 뒤 이 씨가 피살되자 모종의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만도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씨는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비망록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국내 사정’

    “황장엽 국제담당 비서가 망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문민정부가 기획한 사건이고, 이로써 남북관계가 새로운 차원에서 심각하게 악화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흥미로운 점은 뉴욕타임스가 이 두 사건으로 문민정부가 지금 겪고 있는 당혹스러운 부패 스캔들로부터 국민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냉전식 잔머리 굴리기요, 꼼수를 쓰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한 번 부끄러웠다. (…) 그런 와중에 소산(김현철)의 왼팔 노릇을 했다는 박경식이란 의사(비뇨기과)가 베이징에 가서 황장엽을 만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만에 하나 황의 기획 탈북에 소산이 관여했다면, 이야말로 국가 최고 공권력의 사적 남용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이런 심각한 사태가 민주정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도 나는 이를 믿고 싶지 않다.”(한겨레신문, 2012년 10월 16일자)

    한 전 부총리가 언급한 뉴욕타임스는 1997년 2월 18일자다. 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반북(反北) 불씨를 더욱 키워야 하는 국내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 측근이 부패 혐의로 구속된 가운데 황 씨 망명과 이 씨 피살 사건이 터져 부패 스캔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김영삼 정부의 비리에 대한 관심을 황장엽 망명과 이 씨 피살로 돌리려 했다는 게 음모론의 핵심이다. 2월 13일 황장엽 망명 이후 모든 언론 지면은 이 사건으로 뒤덮였다. 그전까지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영원한 집사로 불리던 홍인길 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이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과 나중에 차남 김현철 씨 구속으로 이어지는 한보비리 사건이 언론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가 북한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나?

    1997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는 “한보에서 안보로…정가 ‘난기류’”라는 제목으로 이한영 씨 피살 사건 속보를 내보냈다.

    한보 비리 둘러싼 음모론

    당시 ‘미디어오늘’의 보도를 살펴보자.

    “현 정권 최대의 의혹사건으로 남은 ‘한보특혜대출비리’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여야 의원 몇 명과 현 정권 고위 관련자 몇 명 끼워 맞춰 구속시킨 뒤 적당히 봉합해 덮어두자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국민들로서는 한보사건이 어떻게 된 건지 앞뒤가 무엇인지 쉽게 납득이 안 된다. 황장엽 망명과 이한영 피습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자연스럽게 전환 국면을 타고 있다. (…) 2월 15일 발생한 ‘이한영 피살사건’은 황장엽 망명사건과 함께 또 한 번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한보사건’을 언론의 관심 뒷전으로 물러나게 했다. (…) 그러나 방송 3사 모두 경찰 발표에 지나치게 치중하다보니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를 근거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 범행에 사용됐고 이는 간첩의 소행이라는 식으로 요란하게 몰아갔다. 그러나 18일 권총에 대한 검찰 수사의 잘못이 드러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보도도 갈팡질팡했다. 보도의 비중도 현저하게 줄었고 처음에 간첩 범행으로 무작정 몰아가던 태도를 바꾸어 ‘단순 형사사건’의 가능성도 점점 강하게 제시됐다.”(미디어오늘 1997년 3월 3일자 보도).

    한편 뉴욕타임스는 이 씨 피살사건을 1996년 12월 26일 국회의 안기부 관련법 개정안 강행 처리와 연결하는 색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은 지난 12월 안기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안기부가 종종 정치탄압에 개입한다고 주장하는 야당은 (1997년 2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을 철회하거나 개정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권총을 가진 북한 요원이 아무렇지 않게 범행을 저지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법안 개정을 훨씬 어렵게 할 것이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15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에서 신한국당 및 친여 성향 의원 154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에 도착, 곧바로 본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오전 6시 신한국당 소속 오세응 국회 부의장의 개회 선언으로 본회의가 시작됐다. 11건의 노동 및 안기부 관련법을 단 6분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2010년 12월 13일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현 경남지사)는 이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1996년 12월 26일 아침에 (안기부 관련법 등과) 노동법을 기습처리한 뒤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축배를 들었는데 이것이 YS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고 곧바로 한보사건이 터지고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50년 보수정권을 진보에 넘겼다.”

    이 씨 피살 사건 일주일 뒤인 1997년 2월 22일 오전 경찰청을 출입하던 중앙 일간지 소속 L 기자는 사건팀장으로부터 당시 국민회의(민주당 전신) 출입기자에게 전화를 해보라는 지시를 받는다.

    “총격 사건 있을 것”

    오전 11시 30분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 커피숍에서 국민회의 출입기자를 만난 L 기자는 국민회의에 중요한 제보가 접수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보자에 대한 메모와 함께 “워낙 엄청난 내용이라 당에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언론에서 확인해주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제보 내용은 이랬다. 이 씨가 피격당하기 3일 전 익명의 제보자가 국민회의에 전화해 “한보 사건을 덮을 만한 총격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는 것이다. 국민회의도 처음에는 정신병자의 헛소리로 생각했으나 막상 이 씨 사건이 벌어지자 제보자의 진실성과 관련해 반신반의하고 있다 했다.

    L 기자는 오후 1시 30분 제보를 받은 국민회의 인사와 통화를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오후 2시 40분 경찰청 기자실에서 기자실 전화로 국민회의에 “총격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준 제보자의 삐삐를 호출했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오후 2시 41분에는 L 기자의 개인 전화번호로 다시 호출했으나 연락은 없었다.

    1997년 2월 24일 월요일 오전 8시. L 기자가 경찰청 2층 기자실로 나왔더니 신문사 전용 부스의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 PC가 보이지 않았다. 누가 노트북 가방은 그대로 놔두고 노트북만 가져간 것이다. 대다수의 기자가 취재용 노트북을 기자실 책상에 놔두고 다닌다. L 기자의 노트북은 오래된 기종인 데 반해 바로 옆 방송기자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은 최신 기종이었다. 다른 기자들 노트북은 그대로 있는데 L 기자의 노트북만 없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경찰청에서 도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일단 경찰청에 도난 사실을 알리고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오후 3시 34분, 국민회의 쪽 모 인사와 통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제보자가 당사에 와 있으니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불과 5분 뒤인 오후 3시 39분, 데스크에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경찰청, 신문사를 잇는 직통전화로 보고하는 도중 전화가 끊겼다. 그간 한 번도 발생한 적 없는 일이었다. L 기자는 느낌이 좋지 않아 집에 전화를 했다. 집에도 이상한 사람이 전화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둘러대고는 L 기자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1억 주면 증거 주겠다”

    경찰청, 신문사를 연결하는 직통전화의 통화 음질 상태가 매우 불량해 감청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있다가 안기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왜 당신 이름이 우리 회사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느냐?”

    L 기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후 4시 30분. L 기자는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제보자를 만났다. 제보자로부터 전후사정 얘기를 듣고 내용을 녹취했다. 내용인즉 이랬다.

    “정권 실세 한 명이 김현철 씨 연루 의혹이 일고 있는 한보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산의 폭력조직에 의뢰해 이 씨 살해를 지시했다. 범인들은 총기를 구입한 뒤 총열을 바꾸고 분당으로 올라와 범행을 저질렀다.”

    제보자는 국민회의에 이런 얘기를 전하고 나서 2월 19일 국민회의 관계자를 다시 만나 자세한 얘기를 나눴다. 그러곤 2월 22일 새벽 안기부 요원들에게 강제 연행됐다는 게 제보자의 주장이었다. 제보자는 부산의 안기부 안가에서 조사받은 뒤 24일 항공편으로 서울로 돌아온 뒤 국민회의 당사를 찾았고, 국민회의에서 L 기자에게 연락해 기자와 제보자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제보자는 L 기자에게 안기부 요원들이 심문 내용을 적은 호텔 메모지를 자신이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오후 5시 30분. L 기자는 국민회의 관계자와 제보자에게 취재 준비를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뒤 신문사로 복귀했다. 오후 6시 10분 신문사 회의실에서 사건팀장과 만나 상황에 대해 설명한 뒤 향후 취재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믿기 힘든 구석이 많지만, 제보자가 부산에 가면 증거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일단 부산에 내려가 제보자가 언급한 총기 및 범행과 관련한 문서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7시 30분. 국민회의 당사에 도착해 제보자와 국민회의 실무자와 함께 여의도 KBS 별관 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L 기자가 듣기에 황당무계한 얘기가 많았고 제보자의 신뢰도 또한 높지 않았으나 이 씨 총격 사건 전 “총격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제보한 것과 경찰청 기자실의 노트북 분실과 같은 수상한 정황에 근거해 일단 취재에 나섰다. L 기자가 ‘당장 부산에 내려가자’고 했더니 제보자는 ‘서두르면 안 된다’고 고집해 다음 날(25일) 아침 떠나기로 했다. 이윽고 오후 10시 10분. 사건팀장을 불러 제보자 및 국민회의 실무자와 함께 신문사 앞 호프집에서 사건 경위에 대해 다시 자세한 얘기를 나눴다.

    1997년 2월 25일 화요일

    L 기자는 오전 11시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 지하 전통찻집에서 제보자를 만나 함께 신문사 차량으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신문사 차량에 운전기사, L 기자 외 2명의 기자, 제보자가 함께 타는 바람에 자리가 없어 국민회의 실무자는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핵심 취재는 오후 6시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제보자는 이 씨 피살 사건에 가담한 이들이 파라다이스호텔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오후 7시 30분 해운대 터미널 앞 식당에서 자동차로 부산에 내려온 L 기자 일행과 열차편으로 부산에 온 국민회의 실무자가 함께 식사를 했다. 오후 9시 30분 제보자가 범행을 한 장본인을 만나고 돌아오겠다면서 시내로 나갔다. 이날 밤 12시 제보자가 호텔로 돌아와 이른바 ‘범인’과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전했다. ‘범인’이 다음 날인 26일 오후 2시 파라다이스호텔 커피숍에서 범행에 사용된 총기와 범행 입증 서류를 전달해주는 대신 현금 1억 원이 담긴 돈 가방을 요구하고 있다고 제보자는 말했다.

    갑작스러운 인사발령

    1997년 2월 26일 수요일

    제보자는 오후 1시까지 돈 가방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회의 측은 돈을 실제로 지불할 의사는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증거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국민회의 실무자는 걱정하지 말라고 제보자를 안심시켰다.

    오후 2시 30분. 제보자가 L 기자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범인과 통화했고, 오후 3시 40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재조정했다.

    오후 3시 10분. 국민회의 실무자와 함께 은행에서 입금을 기다리던 제보자가 돈이 들어오지 않자 은행 화장실 옆 비상구를 통해 사라졌다.

    오후 4시. 건장한 체격의 30대 초반 남자가 호텔로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로비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10분 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안경 쓴 남자가 호텔 안으로 들어오자 먼저 와 있던 남자가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제보자가 말한 이른바 ‘범인’으로 추정됐다. 그때 갑자기 L 기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제보자가 범인이라고 지목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로비 공중전화에서 L 기자에게 전화한 것이다. 제보자 이름을 대면서 찾기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하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이 남자는 호텔 밖으로 나가 옆에 대기해 둔 쥐색 쏘나타 승용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오후 6시. L 기자는 어렵게 취재한 끝에 이 남자가 부산 영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영도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이웃으로부터 이 남자가 건달이라는 얘기를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오후 8시. 사건팀장으로부터 서울시 경찰청 수사팀이 항공편으로 부산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취재팀은 사실 확인과 용의자 추적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경찰 역시 이 씨 사건 해결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론과 경찰의 공조가 이뤄진 것이다.

    오후 11시 부산역 앞 아리랑호텔 커피숍에서 최모 반장 등 수사팀 7명을 만나 사건과 관련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제보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설득해 다시 부산으로 올 것을 제안했고, 제보자는 서울에서 또 다른 기자 2명과 함께 신문사 차량을 타고 내려왔다.

    1997년 2월 27일 목요일

    오후 4시 50분 수사팀에서 가짜 돈 가방을 만들었다고 연락이 왔다. 007가방 안쪽에 신문지를 돈 모양으로 잘라 깔고 맨 위를 1만 원권 24장으로 덮었다. 오후 6시, 제보자에게 돈 가방을 보여준 후 ‘범인’과 연락을 시도했으나 이번엔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제보자는 오후 11시 또다시 사라졌다.

    1997년 2월 28일 금요일

    제보자를 다시 수소문하던 L 기자는 사건팀장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취재 중단 지시와 함께 인사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건팀장과 함께 다른 부서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L 기자는 며칠 뒤 안기부 대공수사과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을 만난다. 그가 전화를 걸어와 먼저 만나자고 요구했다. 만나자마자 노트북부터 돌려달라고 했으나, 그는 제보자 접촉 경위 등 안기부가 궁금한 사항만을 질문했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

    이 대목까지 읽은 독자 대부분은 L 기자가 필자라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이 씨 피살 사건은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취재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 제보는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제보자가 줄곧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한 데다 자신이 말한 경력도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또 제보자가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동네 건달 수준에 불과했고 대단한 일을 저지를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게 취재팀과 경찰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결국 제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종합적인 판단 결과였다.

    그럼에도, 왜 피살 사건 발생 3일 전 족집게 같은 제보가 나왔는지, 그리고 필자의 경찰청 노트북은 왜 없어졌는지, 왜 취재 도중 인사발령이 났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다. 추측건대, 안기부 역시 정확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야당에 제보가 들어오고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니까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에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었거나.

    아직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았고 북한 역시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진실은 파묻혀 있다. 필자가 신동아 4월호 ‘범죄의 재구성’에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루면서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암살 사건은 태생적으로 음모론 냄새가 스멀거리게 마련이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범인으로 지목된 오스왈드가 현장에서 잡혔고, 두 차례나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진상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졌는데도 음모론이 지금껏 끊이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범인조차 잡히지 않은 이 씨 피살 사건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당시 조사결과의 공정성을 보장받고자 진보의 아이콘이던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0개월에 걸친 장기간의 조사를 벌인 끝에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여러 의심스러운 정황 증거로 인해 음모론이 아직껏 제기되고 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완전 철수한다는 케네디의 계획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미국의 보수 강경파와 군산복합체가 마피아를 동원해 암살했다는 주장부터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들이 카스트로 축출에 소극적인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또한 만만치 않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4월호 참조).

    이 씨 피살 사건 후 부인 김 씨는 “정부의 보호 소홀로 남편이 살해됐다”며 서울지방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경찰은 범인이 잡히지 않아 북한 공작원에 의해 피살됐다는 당시 안기부 발표는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2005년 11월 25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는 김 씨에게 9699만 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1997년 2월은 황장엽 망명 사건 등으로 북한의 보복 위협에 따른 긴장이 고조되던 때로 귀순자인 이한영의 생명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지만 국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이 있기 때문에 배상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한영이 신변을 노출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등 사건 원인을 제공한 점도 40% 과실로 인정돼 국가책임을 60%로 제한한다”고 손해배상 액수를 정한 기준을 설명했다.

    남북이 모두 버린 이한영

    어쨌든 필자는 이 씨 피살 사건 취재 도중 다른 부서로 옮기고 몇 달 뒤 신문사를 떠났다. 물론 이 씨 사건 취재 중단과 타 부서 전출이 신문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 간 직접적 이유는 아니다. 미국에서 범죄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했던 것이고,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에 있다가 신문사에 복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박사과정을 끝낼 생각이었다. 다만 이 씨 피살 사건이 그 결정을 앞당기게 해준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 씨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통일이 된 후, 어쩌면 그전에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정부 공식 발표처럼 북한의 소행일 소지가 가장 크겠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집단에 의한 범행일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의 공식 입장처럼 말이다. 어찌 됐든 깔끔하지 못한 수사결과 발표는 궁금증을 여운처럼 남겼고,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야당은 이씨 사건 이후 한보 사건을 비롯한 각종 비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더욱 세차게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를 몰아붙였고 이 모든 비리의 몸통으로 김현철 씨를 지목했다. 결국 1997년 5월 17일 현직 대통령 아들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씨 사건이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면 남북 분단이 빚은 수많은 비극 중 하나다. 남북 모두에 이 씨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양측 모두 이씨가 사라져주길 차마 말은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바라는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의 심정이었지 않나 싶다. 남북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었던 이 씨에게 이념과 체제는 입기 싫지만 입어야 하는 제복과 같았다. 사실 그는 어느 체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시인 김광균이 말하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바로 이 씨의 처지였다. 그에게 분단이라는 현실은 너무나 버거웠다. 제대로 훈련도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자본주의라는 링 위에 올랐을 때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그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 위에서 아찔한 곡예를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가 합법과 불법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 씨 사건 이후 친·인척 비리의 몸통으로 불리던 김현철 씨가 5월 17일 구속되고 김영삼 정부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식물 정부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1997년 11월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는다.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다. IMF 구제금융 결정 직후 역대 대통령 최저인 8.4%를 기록했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선 후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이인제 국민신당 대표 지원설 및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 등에 반발하며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 11월 7일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11월 21일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그리고 약 한 달 뒤인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됐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에 의해 여야가 바뀐 최초의 정권 교체였다. 비리범죄가 정권교체를 앞당긴 셈이다.

    ※ 필자 이창무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형사사법학(Criminal Justice)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르퀴즈 후즈후 세계인명사전 등 세계 3대 인명사전 형사사법 분야에 국내 최초로 등재됐으며, 저서로 ‘패러독스 범죄학’ 등이 있다. 중앙 일간지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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