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오래된 성당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3-06-20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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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더위를 잠깐 피하려고 강화도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 꽉 막혀 때 이른 더위를 이기기 위해 차의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에 미안한 얘기지만, 언제나 강화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처럼 여겨진다.

    아무래도 분단의 공간 지리학 때문일 것이다. 분단된 지 언제이며 또한 통일을 염원한 지 언제이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강화도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서울 도심지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강화도와 춘천의 거리를 물어보면 마음의 거리는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강화도는 40㎞ 남짓이고 춘천은 그 갑절에 가까운 70㎞가 넘는데, 마음의 거리는 경춘선의 풍경이 훨씬 가깝다. 북쪽의 도시 연천이나 철원은 더 아득하다. 서울과 이 두 곳의 거리는 70㎞ 남짓이지만 그 갑절이 되는 대전이나 안면도, 충주나 평창은 업무와 피서로 인해 훨씬 더 가까운 듯 여겨진다. 분단으로 인한 군사적 이미지가 강화도나 철원 같은 산자수명하고 역사문화가 흘러넘치는 지역을 멀고 아득한 곳으로 여겨지게 했다.



    1906년 건립한 한옥 성당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강화도 온수리성당.

    그래도 주말이면 강화도는 차량으로 붐빈다. 귀갓길 정체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도 때 이른 무더위를 잠시 잊기 위해 강화도에 이르는 국도를 내달렸다. 원래 계획은 초지대교를 건너 우익이든 좌익이든 꺾어 지르려고 했으나 꽉 막힌 김포와 대곶의 국도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그만 직진으로 서두르다보니 전등사 입구를 거쳐 온수리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길은 원래 그런 법이다. 긴 여정이든 짧은 산책이든 그렇게 가게 된 데에는 우주의 운행에 버금가는 어떤 비밀이 있다. 이곳 온수리로 내처 달려오게 된 까닭이 어딘가 있을 터이므로 우선 한갓진 곳에 차를 버리고, 잠시 걸어보자. 그런 생각이 절반쯤 담배를 태웠을 때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침 차를 세운 곳은 온수리의 끄트머리였다. 차에서 내려보니, 마치 저 유럽의 작은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근엄한 성채 혹은 수도원 같은 건물이 보였다. 아하! 그제야 생각이 났다. 강화도는 성공회의 땅이다.

    구한말, 황해를 거쳐 내습해 온 대영제국의 행렬 사이에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천으로 들어와 기운을 살폈고 강화도에 뿌리를 내렸다. 강화도를 세거지로 한 유력한 집안이 성공회를 받아들였고 신자가 됨으로써 지금까지 강화도는 낮은 자리로 헌신하는 성공회의 종교 기풍이 배게 되었다. 1930년 이곳 길상면 온수리의 성공회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김성수 주교 같은 분이 강화도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한 물리적 유산이 강화읍에 있는 성공회 성당이고 또한 이곳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이다. 언덕을 우회해 온수리성당으로 올라가본다.

    온수리성당은 1906년 건립된 한옥이다. 이 성당의 주보성인(主保聖人)은 성 안드레아. 그래서 성 안드레아 성당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9칸의 이 한옥 성당은 2003년 10월 27일 인천시 유형문화재 52호로 재(再)지정된 중요한 공간이다. 한옥 지붕의 용마루 양쪽으로 십자가 장식이 있고 지붕 양쪽 끄트머리의 합각 벽면에도 십자가 장식이 새겨져 있지만, 그러한 장식 요소를 빼놓고 보면 옛 지방 관청의 형태다.

    그래도 이 소읍의 오랜 유산으로 그 언덕과 그 나무와 그 건물이 자연스럽다. 조금 전 차에서 내리면서 보았던 건물은 신축 성당으로 장대하고 우람한 기운으로 이 정족산의 한 언덕을 압도하고 있지만, 그래도 잔디 마당의 대각선에 위치한 옛 성당 건물의 대칭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세월은 흘렀지만 시간은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강화도에서 귀가하면서 잠시 들른 김포성당 또한 고졸하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만한 소중한 곳이다. 이 일대는 신도시 개발 붐으로 인해 아파트가 새로 서고 길도 새로 나고 마트도 새로 생기고 심지어 교회며 포교당이며 성당도 다 새로 지은 것 일색인데, 그래도 그 한쪽에 김포성당의 옛 본당 같은 건물이 남아 있어 마을 전체의 테마파크화를 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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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공세리성당 지하예배소.

    공세리성당, 예산성당

    내 기억의 또 다른 공간으로 충남의 공세리성당과 예산성당이 있다. 그야말로 어릴 적 교과서나 흑백영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골의 작은 성당, 해 지는 서녘으로 종소리 울려 퍼지는 그런 성당이다.

    특히 공세리성당은 그 특유의 고색창연함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벌써 널리 소개됐으니 요즘은 아마도 찾는 이들의 주차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공세리성당이 있는 아산은 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해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의 보관창고가 있던 곳이다. 공세리라는 지명 자체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했던 공세창(貢稅倉)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연히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었고, 구한말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도 적지 않게 드나들었다. 한국 천주교의 또 하나의 뚜렷한 젖줄이 이 지역에서 비롯했다. 그중 한 사람, 드비즈 신부가 민가를 예배당으로 삼다가 1897년에 옛 곡물창고에 사제관을 세우고 1922년에는 직접 본당을 설계, 완공했으니 이것이 공세리성당의 시작이다.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온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해 완공을 보았을 정도로 문물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직접 조제한 한방 고약으로 환자들을 살폈는데,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었다가 이를 이명래가 전수받아 ‘이명래고약’으로 널리 팔리게 되었다.

    만약 당신이 이 성당에 와서 본당의 안팎을 한 바퀴 둘러보고 곧장 언덕 아래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고 서해 백사장으로 헤엄치러 떠났다고 하면, 공세리성당을 제대로 다녀간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겠다. 햇살이 그윽하게 스며드는 오후에 본당 안에서 마음을 다독이며 차분하게 몇 분이라도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언덕 아래쪽의 예배소에 반드시 들를 것을 권한다. 신자냐 아니냐 하는 수준 낮은 질문은 삼가자. 그 안으로 들어가 잠시 무릎으로 앉아 있다보면 과연 여름이 왔다고 해수욕장에 가서 헤엄이나 첨벙첨벙 쳐야 하는가 하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예산성당도 그런 운치와 가치가 있다. 1933년 착공해 1934년 준공했다. 다른 근대 종교 건축물과 달리 예산성당은 한국인 신부에 의해 준공을 보았다고 한다. 이 성당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인근의 장엄한 수덕사와 고졸한 개심사 그리고 추사고택으로 이어지는 내포 지방의 문화적 저력과 아울러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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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주교좌성당의 고졸한 한옥.

    도심 속 힐링 필링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좀처럼 도심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서울 도심의 더위는 너무 일찍 찾아왔다. 이제 두어 달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빌딩 숲의 참호들로 기어드는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자니 이 짧은 생애가 어수선하다. 이 여름을 몇 번 더 피하면 한 세월이 지나가고 한 세대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제아무리 축구광이라 해도 4년마다 다가오는 월드컵으로 인해 제 삶의 유한한 시간이 부쩍 짧아지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일과 같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라고 했던가? 히딩크 효과? 광장문화? 하긴 그러한 기억이 틀림없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런 일도 어느덧 10여 년 전의 일이고 이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에 12년의 세월이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동아시아의 한복판, 그 서울의 한복판, 그 세종로 사거리의 한복판에서 잠시 더위를 피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마당으로 도피해 있다. 큼직한 나무들이 로마네스크식 성당과 어울려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다. 간이 커피숍도 있어서 때 이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본다.

    원래 이런 쪽에는 취미가 전혀 없어 어쩌다 글 쓰고 책 읽는 일에 종사한 뒤로 장안의 수많은 문예객의 와인 방담, 요리 한담, 커피 훈담 사이에 끼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들이 나누는 지극한 애호의 극한을 귓전으로 얻어듣기는 했으나 일부러 그것을 배우고 익혀서 나날의 취미로 삼고자 한 적이 전혀 없으되, 더위를 피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 까닭은 그것이 오히려 때 이른 더위의 광열에 의해 미지근해질 때까지 들고 있음으로 하여 딱 그 시간만큼의 시차를 즐기고자 하는 이유 외에 달리 없다.

    성당은 고즈넉하다. 불과 몇 걸음, 코리아나호텔에서 덕수궁 쪽으로 가다가 그만 지쳐서 잠시 오른쪽으로 열댓 걸음 남짓 옮겼을 뿐인데, 세속의 번잡함은 뒤따라오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만약 이러한 공간을 애써 찾는다고 하면 저 멀리 지리산의 사찰이나 설악산의 은성한 숲이나 강화도의 갯벌까지 몇 시간을 달려가야 하건만, 이 도심 속의 성당은 일순 마음을 먹는다 하면 바로 그와 같은 세속과의 격절을 보여주니, 진경이란 저 깊은 산에 있는 것이 아니요 힐링의 처소란 굳이 돈 들여 어디 가서 가부좌를 틀어야만 하는 일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성당의 역사는 어느덧 120여 년을 헤아린다. 1889년 11월 성공회의 선교 책임을 맡아 초대 주교로 승품이 된 찰스 코프(한국명 고요한) 신부가 구한말 조선의 한복판에 터를 장만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듬해 겨울, 이 터의 이름은 장림성당(將臨聖堂)으로 불리게 된다.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이므로 지금의 자리 바로 곁에 영국대사관이 위치해 있음은 정교(政敎)의 일치로 식민지에 밀려들어온 서세동점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미 국권을 상실한 다음에 작성된 ‘순종실록부록’ 1912년 3월 18일자는 이 위급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옛 수학원(修學院)의 토지와 건물을 영국교회에 5년 기한으로 빌려주기로 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수학원은 대한제국 시절, 황태자(영친왕)와 황족·귀족의 자제를 위한 황실교육기관으로 1906년 10월에 설치됐다. 1910년 8월까지 그러한 일을 했는데 그 멸실되지 않은 기억의 파편을 보려면 성공회 성당의 뒤로 걸어 들어가면 된다.



    서울 한복판의 주교좌성당

    성당 후원으로 사제관이 있고 또 그 뒤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성가수녀원 건물이 있는데, 그 한쪽으로 신식 한옥 한 채가 어색한 차림으로 서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근엄한 성당, 고졸한 멋으로 은은히 버티고 선 사제관,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당으로 유명한 수녀원이 각각 그 나름의 어떤 공간적 의미를 점유하고 있는데 그 한쪽으로 흡사 저 북한산 기슭이나 강남 어디쯤의 한정식집 같은 건물이 유난히 밝은 빛으로 서 있다. 양이재라는 건물인데, 황족들의 교육을 맡았던 옛 기관의 유산이다. 원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공사인 경운궁(慶運宮·덕수궁의 옛 이름)을 중건(1904~1906)할 때 궁 안에 건립했으나 1927년경 지금의 자리, 곧 영국대사관과 영국국교회 사이에 옮겨졌고 이후 수리와 보완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다.

    그런 와중에 1911년, 3대 주교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 신부에 의해 지금 성당의 원형이 축조된다. 아더 딕슨이 설계했다. 그는 우리의 근대 건축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영국 건축가다. 원래 트롤로프 주교는 천상을 향해 치솟는 화려한 고딕 성당을 생각했으나 딕슨은 당시 조선의 기본적인 가옥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인근 덕수궁(경운궁)의 나지막하면서도 장중한 건물과의 조화를 고려해 단순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강권했다고 한다.

    1922년 착공됐고 1926년 1차 준공됐다. 원래는 라틴형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됐으나 비용이 부족해 설계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일자 모양으로 밋밋하게 하여 축성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1차 준공이다. ‘성모 마리아와 성니콜라스 성당’으로 불릴 예정이었으나 트롤로프 주교는 ‘예비 대성당(pro-cathedral)’이라고 달리 불러 훗날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렇기는 해도 때마침 일제의 태평로 확장 공사에 따라 이후 지금까지 이곳은 서울의 한복판이라는 장소성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 문화적 거점이 돼왔다. 해마다 6월이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이 성당에서도 그것을 행하는 까닭은 그해 6월의 항쟁 선언이 바로 이 성당에서 전격적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이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성당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6년이다. 1993년 7월, 런던 교외 렉싱턴도서관에서 이 성당의 설계도 원본이 발견돼 이를 바탕으로 1994년 5월 27일 신축 기공 예배를 올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5월 2일, 마침내 이 도심 안에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이 트롤로프 주교와 설계자 아더 딕슨의 애초 상상했던 모양으로 완성된 것이다.

    수녀원의 기품 있는 안마당

    성당을 잠시 둘러본다. 앞마당에는 6월 항쟁 기념비가 단단한 바위 형태로 서 있고 그 위로 금빛 모자이크와 오방색 스테인드글라스의 전면부가 보인다. 창문들은 전통 창살 모양을 하고 있다. 기존의 가톨릭 구교와 달리 지극히 낮은 자세로 선교 대상지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철저히 ‘현지화’를 추구한 성공회 교단의 마음가짐의 한 단락이다. 화강암과 붉은 벽돌이 기하학적 리듬을 구축하며 그 위로 12개의 기둥이 솟아 있다. 서구 성당의 기본 형식대로 이 공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형상이다. 성당 맞은편의 프레스센터에 올라서 덕수궁 쪽으로 난 창으로 내다보면 전체적으로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으며 12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둥과 부활을 상징하는 8각형(완전수 7 다음의 8은 부활을 상징)의 세례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양식은 서울에선 약현성당(1892)과 명동성당(1898) 그리고 대구의 계산성당(1899)과 전주의 전동성당(1914)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이 도심 속의 진정한 힐링 장소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계절보다는 가을에서 겨울로 승화하는 다른 계절에 찾는 게 더 좋다. 그 무렵이면 한여름의 무더위는 이미 고개를 숙였고 가을 햇살은 무르익어 성당의 첨탑들이 환영을 자아낼 정도가 된다. 1990년대 증축하면서 성당 뒷부분에 있던 아름답고 소박한 마당이 사라져버려 그 기억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아쉬울 수 있으나 그래도 이 번잡한 도시에서 성공회 성당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지고 청신해지는 것은 차이가 없다.

    ‘깊이의 공간’이 꿈틀대는 도심 속 힐링캠프

    서울주교좌성당은 1922년 착공해 1926년 1차 준공됐다. 지금의 완성된 모습을 갖춘 것은 1996년이다.

    잠시 용기를 내보자. 성당 뒤편의 주차장에서 몇 계단 올라가면 수녀원 건물이 나온다. 작지만 의젓한 솟을대문이 있다. 이 문을 밀고 들어가보는 것이다. 물론 잠겨 있는 수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몇 번 흔들어본다. 수녀님들이 혼찌검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다 열려 있는 수도 있고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어보는 수녀도 있다. 그러면 아주 공손한 태도로 한두 마디 부탁하면 된다. 꼭 수녀원 마당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말이다. 다른 말은 번거롭다. 어디서 무슨 책을 봤느니, 건축을 전공한다느니, 힐링 장소를 찾아다닌다느니 하는 모든 말은 구차하다. 뭐, 우리가 여자교도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차를 몰고 여자교도소 정문을 들이박은 이탈리아 축구 선수 마리오 발로텔리는 아니잖은가.

    그저 한번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면 특별한 행사가 없는 경우라면 문을 열어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한번 해보고라도 돌아서는 게 낫다. 그러다 혹시 주님의 가호가 있어 그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게 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순식간에 저 20세기 중엽으로 유체이탈하고 만다.

    깊이를 상실한 세속 도시

    이문구는 ‘장동리 싸리나무’에서 어느 깊은 밤의 시골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상실해버린, 그러나 이 한반도 어딘가에 아직은 살아 있을 그런 풍경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쩌다가 난초 하나를 얻게 된다. 그런 쪽으로 문외한인 주인공은 그저 그것을 거실의 끝에 놓아두었고, 깊은 밤에 잠에서 깨었다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아직 비몽사몽의 상황에서 주인공은 흡사 길고 아름다운 난초가 거실에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끄트머리에 놓아둔 작은 난초가 달빛을 받아 긴 그림자로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거실 바닥에 펼쳐져 있는 그림이 달빛에 어린 그림자로 밝혀진 뒤에도 어쩐지 밟아지지가 않았다. 그는 다가서서 시계를 보았다. 달구리도 더 있어야 하게끔 새로 두시 반이었다. 초봄의 달빛은 새로 두서너 시경의 달빛이 가장 기막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한 번 더 뇌어본 다음 자신하고 머릿속에 적어두었다.”



    그런 후 주인공은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이럴 때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꼭 무식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요즘처럼 골목 어귀마다 카페가 들어서 서로 각축을 벌이는 마당에야 어디 한잔 가볍게 마시는 일이 유별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주인공은 경이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무슨 생각이든 골똘히 하고자 한다면 이 같은 풍경이란 가차 없이 장악해야만 한다. 주인공은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밖의 풍경을 본다. 야음이 드리워진 시골의 산야는 깊은 수묵 담채의 정경이다.



    “그는 커피를 끓여 찻잔에 따라 들고, 난초 그림자를 다시는 밟지 않도록 거실 바닥을 살펴가며 창으로 다가섰다. 그는 창밖의 그윽함에 빠져들면서 이런 달이야말로 위대한 화가라고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는 질뜸을 에워싸고 있는 앞동산을 바라다보았다. 들고 나고 한 능선도 여리고 부드러운 선화(線畵)였다. 시야를 들이굽혀 물면으로 옮겼다. 수심(水心)은 달빛을 입어서 으늑하고 수변은 앞동산의 산그림자가 먹어들어, 혹시 그믐께의 초저녁을 한 귀퉁이 떼어다가 담가놓은 것이나 아닌가 싶게 어두웠다. 물녘의 나무들은 마치 이름난 산에서 명이 다한 고사목들처럼 우듬지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고 견디어냈다는 투로, 자못 묵중하게 서 있는 자세를 여간해서는 허물어뜨릴 것 같은 기미가 아니었다.”



    이런 풍경은 우리를 위로한다. 고작해야 5분 남짓이나 될까. 아무튼 그런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 수녀원 마당을 둘러보고 고졸한 한옥의 처마도 올려다보고 그 아래 마루에 앉아 무심한 듯 마당을 바라보다보면 정녕 우리의 이 세속 도시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금세 알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깊이의 공간을 상실한 세대다. 우리가 망가뜨려버렸다. 깊이의 공간을 학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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