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어른이 되는 법

  • 이나미│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

    입력2013-08-20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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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불로장생약을 찾으며 불사에 집착하던 진시황이 웬일인지 요순임금 흉내를 내가면서 태산에 제사를 지내러 떠나다 중도에 큰비를 만난다. 비가 좀체 그치지 않자 나무 밑에서 비만 피하다 그냥 돌아와 결국 유생들의 비웃음을 산다.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지도,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재물과 권력과 자기 안위만 챙기는 이가 어떤 번잡을 떨면서 자기 포장을 해도 결국 당대와 후대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자리가 높아지고 가진 게 많아질수록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은 받기가 힘든 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잘난 척, 있는 척이나 하고 나이 자랑이나 한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술이 발달하니 옛것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해 ‘예의 없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게 된 탓도 있다. 존댓말이 없어 평등한 듯 보이는 서양에서도 교양 있는 사람들은 필요한 권위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예의를 엄격하게 따지는데 말이다. 일단 ‘맞짱’ 붙으면 세련된 것이라는 선입관이 노인들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드는 와중에도 둘러보면 어른 노릇을 멋지게 하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비법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라며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지? 왜 나를 떠나려 하지?’ 라고 관계와 자리에 전전긍긍하기보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생 이치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돈이나 권력으로 사랑과 존경을 구걸하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네게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하면서 누군가를 원망하고 분노를 퍼부을 거라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반대급부를 예상하고 베푸는 흉내만 내면 한과 억울함만 남을 것이다. 물론 ‘누구든 남 좋은 일만 하지’라며 회의하거나 남이 내게 감사해하지 않는 것 같아 괘씸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복이 많으니 남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고, 남보다 경험과 자원이 많아 남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니 속상해할 것도 없다. 존재의 속성 중 하나인 허무감을 관계로써 보상받겠다는 희망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을 얼른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가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여러 고통과 어려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꼭 필요하다. ‘왜 하필 나한테 암이? 왜 하필 나만 중풍이? 왜 내 사업체만 내리막길이야?’라고 따지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는 ‘나라고 뭐 특별한가. 나이 들었으니 병 걸리는 게 당연하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 이젠 정리를 할 때가 되었군’ 하고 크게 마음먹는 게 좋다.



    물론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한다. 약 먹을 병이면 약 먹고, 수술할 병이면 수술한다. 몸 관리는 생명을 가진 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미련 때문이 아니라, 죽지는 않는데 자꾸 아프다 하면 아무래도 남의 신세를 지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관리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훌륭한 양생법은 단순히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몸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라 했다. 건강과 젊음에 지나치게 집착해 몸과 건강의 노예가 되는 것도, 반대로 몸을 함부로 굴려 학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감정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속으로는 원망과 회한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도사인 척하다가 술만 마시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변해 난장판을 만드는 이들이 특히 문제다. 소리 지르며 화내는 것을 권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신세 한탄하면서 죄의식을 유발해 자신이 목적하는 대로 주변 사람을 조종하려는 사람들 역시 감정 조절에 실패해 사람들에게 경원시된다. 큰소리 치며 야단법석을 떨면 뭔가 대단해 보일 것 같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감정 조절을 못해 10대처럼 소리 지르고 흥분하는 연장자나 윗사람은 결국 무시당한다.

    젊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겠다고 마음먹고 젊은이들을 모방하면서 너무나 가볍고 유치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흉거리다. 이미 다 지나간 농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이들, 사적인 자리에서 젊은이들보다 더 경박하고 더 끈적거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들, 후배들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는다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이들은 어른답지 못하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더라도 경계와 품격은 꼭 지켜야 진짜 어른이다.

    나이 먹어도 꿈을 간직하면서 무언가를 겸손하게 배워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어른은 큰소리치고 위세를 떨지 않아도 존경받는다.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제안을 해도 “내가 다 해봤는데…”라며 마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달관한 것처럼 패배주의를 포장하는 어른을 젊은이들은 답답해한다. 아무리 늙었어도 젊은이들의 제안, 새로운 아이디어를 잘 듣고 감탄해주면서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보이면 존경받을 것이다.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고 팽팽한 피부를 유지해도 “그런 거 다 소용없어. 니들이 몰라서 그래” 하는 식으로 주변 사람의 사기를 꺾는 어설픈 염세론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자기가 배우는 것을 즐겨 하니 베풀고 가르치는 기술도 좋아질 수 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과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자기 경험을 나눠주는 어른도 존경받는다. 배우는 것에 비해 가르치는 것은 몇 배 더 힘들다. 받는 것 역시 어렵고 때론 치사할 수 있지만, 잘 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때론 정말 인내가 필요할 수 있다. 많이 안다고 꼭 좋은 스승일 수 없고, 성품이 좋다고 꼭 훌륭한 선배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장수 시대가 도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훌륭한 노인과 스승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몸이 늙고 병들어가도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들은 그러나 분명 있었다. 14세기 네덜란드의 성녀 리드비나(Lydwina)는 15세에 병석에 누운 후 35년을 그저 누워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찾아오는 온 마을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었고, 깊은 신앙심을 갖게 도왔으며, 기도와 대화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치료해줬기에 성인품에 올라갔다. 몇 해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도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후 “나, 부활했어”라고 농담을 하셨다 한다.

    그러나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병들고 죽는 운명 앞에 두려움이 없을 수 없다. 우리 세포에는 위험과 죽음 앞에 공포를 느껴 피하라는 유전 정보가 새겨져 있어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게 정상이다. 다만 우리 영혼이 그런 공포 유발 유전 정보를 인지하고 가능한 한 잘 다루어 살아 있는 그날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훌륭한 죽음을 일컫는 여러 나라의 말을 살펴보면 참고가 될 성싶다. 일본에서는 깨끗하게 생을 마친다는 뜻의 ‘이사기요쿠(潔く)’라는 말을 쓰는데 깔끔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인답다. 영미권에선 ‘death with dignity/mercy-killing’이라며 존엄과 운명의 자비를 강조하고, 독일은 죽어서(sterbe) 놓여난다(hilfe)란 뜻의 ‘sterbehilfe’라고 표현한다. 피하고 싶은 죽음이 사실은 삶의 의무나 고통에서 놓여나는 자비로운 순간이니 그럴듯하다. 흔히 ‘안락사’로 번역하는 영어의 ‘euthanasia’도 ‘잘 어! 좋아!’라는 뜻의 라틴어 eu와 죽음을 의미하는 thanasia가 결합된 것이다.

    어른이 되는 법
    이나미

    1961년 인천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석사·박사(정신의학), 미국 뉴욕 신학대학원 석사(종교심리학), 뉴욕 융연구소 분석심리학 디플롬, 뉴욕 신학대학원 교수

    現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원장, 서울대 의대·성균관대 의대 외래교수, 한국융연구원 교육 및 지도분석가

    저서 : ‘사랑의 독은 왜 달콤할까’ ‘우리가 사랑한 남자’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 등


    하지만 현실에서는 노화와 죽음이 그처럼 당당하고 평화롭기 쉽겠는가. 융 심리학파의 거장 폰 프란츠 박사가 말년에 파킨슨씨 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노인이 되어 똥오줌도 싸보고 의사에게 매달려보는 경험도 소중하다고 말해 위로가 된다. 병 때문에 무력한 자신을 대면해봐야, 똑똑한 머리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그림자와 제대로 조우할 수 있다. 질병과 노화와 죽음 같은 인생의 어두운 면을 오히려 가장 큰 스승의 가르침으로 삼을 때 온전한 개성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이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은 권력, 돈, 관계, 젊음, 건강 같은 것들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한 겸손하고도 겸허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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