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北 ‘김씨 왕조’ 전위대 만경대혁명학원

  • 김옥자 │북한학 박사, 서울 압구정초등학교 교사 give1111@daum.net

    입력2013-09-24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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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2월 16일 북한 고위층 자녀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 앞에서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 후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은 정권이 권력 안정기에 접어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후계자 수업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데다 나이도 어려 이런 분석은 꽤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은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이슈를 거치며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안정 궤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은이 통치 능력을 충분히 검증받지 못했는데도 조기에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추론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좀 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접근이 이뤄져야 설득력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과학적 분석의 틀 아래서 김정은 정권의 조기 정착 배경을 짚어보고자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최고 권력을 분석하려면 그 충실한 핵심 간부들의 충원 과정을 논하는 것이 필수다.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절대적 지지자이던 김일성 친·인척 중심의 만경대 줄기, 항일 빨치산 세력 및 그들의 유자녀들로 이어진 백두산 줄기, 그리고 6·25전쟁 전사자·피살자 유자녀들이 그들로, 최고 권력은 혈연과 혁명적 동지애를 기초로 한 이 운명공동체에 세력 기반을 두었다.

    만경대院, 김일성大보다 강력

    2011년 북한의 지도급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232명의 김정일 장의위원회 위원의 출신학교를 살펴보면 김일성종합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중등교육기관 출신으로 좁혀보면 상위 50위권 위원들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 13명이나 됐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 중에서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배출한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숫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북한의 주요 인물 대다수가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것처럼 중등교육기관에서는 만경대혁명학원이 핵심 간부 양성기관임을 보여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당과 인민무력부의 특별한 지원 아래 당·군·정의 수많은 핵심 간부를 배출하며 주요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해왔다.



    1947년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된 만경대혁명학원은 출범 초기에는 항일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항일 빨치산 대원의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혁명 전사 자녀 양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 당국은 만경대혁명학원 창립을 위해 학원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중국 동북지역 등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항일 빨치산 유자녀들을 직접 찾아가 모집하고, 정부 차원에서 학원 건물과 시설을 지으면서 교원을 선발, 배치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47년 개원식 당시에는 최소한의 건물에 유자녀들을 수용했다가 추후 시설을 보완하는 식으로 건축을 계속해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마침내 1948년 10월 24일 준공식을 했다. 준공식에서는 북한 최초의 김일성 동상 제막식도 함께 진행됐다. 학원 이름은 전쟁 중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으로 개칭됐고, 1962년까지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과 ‘만경대혁명학원’등의 명칭으로 혼용되다가 1962년부터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불리게 됐다. 소련, 중국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도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유자녀들을 보호, 양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운영했으나 만경대혁명학원은 유자녀 양육이라는 기능적 측면 이외에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과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정치·사회적 통합기제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당·군·정 핵심 간부로 중용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김일성은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후 소련, 체코, 루마니아 등의 사회주의 국가에 유학을 다녀온 졸업생을 포함한 1~3기 졸업생을 모아 최고사령관의 친위중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김일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김일성은 실제로 이들을 전쟁 현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친위중대원에는 연형묵, 리길송, 박송봉, 현철규, 현철해, 김시학, 김환, 홍성률, 우동측 등이 포함됐으며 향후 김정일 체제에서 주요 임무를 맡게 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후 폐허가 된 도시와 파괴된 경제 재건을 위한 군사위원회 회의 결과 친위중대원 상당수가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로 유학을 가게 됐다. 모스크바대학의 연형묵 최영림 김국태 최상욱, 소련 군사아카데미의 김강환 김상호 김두남, 소련 프룬제아카데미의 오극렬 김영춘, 프라하 공대의 김병률, 루마니아 공대의 현철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귀국 후 1960년대에 북한 각 분야의 기술전문직 분야에서 활약했고, 1980년대 김정일 후계 체제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 당중앙위원회의 군사위원회 위원 등 당·군·정의 핵심 간부로 중용됐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창립 당시에는 주로 항일 빨치산 유자녀들에게 입학 자격을 주다가 6·25 후에는 전쟁 유자녀로 확대했다. 입학 연령에 해당하는 항일 빨치산 유자녀 수가 점차 줄어든 데다 전쟁으로 전사자와 피살자의 유자녀 수가 늘어 이들을 위한 양육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6·25전쟁 후 전사자, 피살자 유자녀들을 ‘애국열사유자녀’로 분류하고 그들 중 특별히 선별된 학생들은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양육했다. 입학 자격은 전쟁 유자녀에 이어 대남(對南) 침투요원 유자녀에게도 주어졌는데, 이는 입학 후보 원천이 고갈돼던 만경대혁명학원에 새로운 충원 인력이 되어 항일 빨치산 세력이 그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代 이어 무한충성

    만경대혁명학원은 196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군사기술 교육기관으로서의 비중이 커져 군 간부 양성과 군사 분야 기술전문가 양성 기능을 겸하게 됐다. 현재의 만경대혁명학원은 항일 빨치산 유자녀 양육기관으로서 가지는 항일 혁명전통 계승의 상징성을 유지하면서 학생들에게 당 정책교양과 충실성교양, 혁명전통교양으로 구성되는 정치사상교양과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해 군사 분야 핵심 간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도록 했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다하는 ‘수령 결사옹위’의 전위대 노릇을 하도록 했다.

    김정일의 후계자 계승 과정에서 그의 측근이 돼 김정일 체제를 공고화하는 지지세력 역할을 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 핵심 간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진 사회주의 국가에서 유학하고 온 기술전문직 인재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김일성 체제의 정통성과 김정일 체제의 정당성을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함에 두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핵심 간부 등용의 기준으로 항일 빨치산 유자녀 신분보다 더 확실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의 대표적인 졸업생으로는 1960년대 북한의 정치·경제·군사 등의 분야에서 기술전문직 인재로 활동했고, 김정일이 권력승계를 준비하던 1970년대에 김정일의 측근으로 활동한 후 1980년대 김정일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중요 부서의 핵심 간부로 자리매김한 연형묵(정무원 총리), 강성산(정무원 부총리), 최영림(내각총리), 김국태(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계응태(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 전병호(당중앙위원회 부장, 내각 정치국장), 최태복, 한성룡 등이 있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위원 145명 중 김정일, 김환, 오극렬, 계응태를 비롯한 32명(약 22%)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었다. 당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 대거 등장한 배경으로는 항일 빨치산 세대의 자연수명이 한계에 다다른 시기였다는 점, 정치적으로는 김일성 권력이 공고해진 데 비해 경제발전이 지체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그동안 김일성 체제를 옹호해온 항일 빨치산 출신을 계승하는 인적 충원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불안한 대외적 외교 상황과 경제난 해결을 위해 북한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실무형 지도자를 더 많이 요구했던 것이다.

    ‘선군정치’ 때도 막강한 힘 발휘

    이런 배경 아래 실행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들의 간부 등용은 항일 빨치산 혈통을 가진 이들에게 혁명전통을 계승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럼으로써 김정일 권력세습의 견인차 구실을 하게 됐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된 124명의 당중앙위원회 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은 약 14%로 확인됐다.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 비율은 25~50%였고,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구성원 중에선 1980년 10월 40%, 1994년 12월 45%, 2000년 12월 67%, 2010년 8월 80%였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은 당 기구뿐만 아니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와 군 관련 각 기구에서도 핵심 간부로 포진해왔다. 김정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를 보면서 당이 군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 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체제 유지에 위기의식을 감지하고 선군(先軍)정치와 함께 군을 비롯한 주요 기관의 핵심 간부 자리에 그의 측근들을 전진 배치했다. 1954년부터 군사학원의 성향을 갖고 1962년부터 군사 분야 간부들을 양성해온 만경대혁명학원은 현재 40~60대 이상의 연령에 해당하는 인민군 간부들을 배출했고, 이들 핵심 군 간부가 김정일 선군정치의 인적 토대가 됐다.

    북한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군 관련 정책결정기관인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은 1980년 제6차 당대회 때 19명의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 6명인 약 32%, 1994년 12월엔 약 36%,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는 약 21%였다. 지난해 4월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는 약 26%였는데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당 비서 최용해, 당 행정부장 장성택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다. 국방위원회 위원들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비율은 1990년에는 50%였으나, 1996년에는 약 57%, 2003년에는 89%, 2005년에는 7명 전원인 100%, 2010년에는 77%였다. 1990년 이후 국방위원회 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은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100%였다. 흥미로운 것은 2005년 국방위원회 위원은 전원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고, 1990년과 1996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를 제외한 나머지 위원이 모두 국가 수립에 기여한 자들을 포함한 항일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항일혁명전통의 상징

    만경대혁명학원은 유자녀 교육기관, 정치사상교양 시범기관, 핵심 간부 양성기관으로서 교육적 차원의 의미와 역할과 함께 항일혁명전통의 상징, 항일 빨치산 세력의 재생산과 확대, 김정일 후계자 계승 및 선군정치 기반 세력 형성 등의 정치군사적 차원의 의미를 지녔다.

    국민이 체제에 순응하도록 정치적 지지를 유도하거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 상징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만경대혁명학원과 그 출신자들은 항일혁명전통의 상징으로 작용해 북한 주민을 조직·동원하고 선동하기 위한 최상의 선전도구이자 사회통합의 기제로 활용됐다. 항일 혁명가 유자녀를 모집해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양육함으로써 일제 식민통치에서의 수난과 이에 맞선 항일투쟁 등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과 김정은이 그들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조해온 항일혁명전통의 상징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김일성 체제에서 그의 권력 유지에 협조한 집단이 항일 빨치산들이었다면 김정일 체제에서는 그 역할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을 포함한 항일 빨치산 자녀들에게 이어졌다. 항일 빨치산의 자녀들이 당·군·정에 진출해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기여하고 김정일의 후계자 시기에 핵심 간부로 활약, 체제 지지세력을 형성해온 점에서 보면 만경대혁명학원이 항일 빨치산 세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김일성, 김일(본명 박덕산), 김혁, 오중성, 김책, 최현, 김철을 비롯한 항일 빨치산들과, 김정일 체제에서 핵심으로 활동해온 박용석(김일의 아들), 김환(김혁의 아들), 오극렬(오중성의 아들), 김국태(김책의 아들), 최용해(최현의 아들), 김시학(김철의 아들)을 비롯해 강성산, 연형묵, 우동측 등을 통해 증명됐다.

    6·25전쟁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한 전쟁 유자녀들은 수적으로 줄어든 항일 빨치산 유자녀를 대체했다. 이는 전쟁 유자녀들을 초기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처럼 혁명전통 계승과 ‘당과 수령에 충실한 참된 혁명가’의 전위대로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 만경대혁명학원에는 대남 침투요원 유자녀, 사회주의혁명사업가 유자녀들도 입학할 수 있게 됐다.

    “결사옹위 정신으로 무장하라”

    만경대혁명학원이 전쟁 유자녀, 대남침투요원 유자녀에게 입학자격을 확대해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해가도록 교육시킨 결과 혁명전통 계승자의 범주가 확대됐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대를 이어 김정은에게도 ‘수령 결사옹위’가 가능하도록 했다. 지난해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65돌 기념식에서 김정은은 “학생들이 최고사령부의 문전보초병이고,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하며 금수산태양궁전과 당 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선군시대의 친위병이 되도록 수령 결사옹위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그 대상자로 재학생, 졸업생뿐만 아니라 졸업생의 자녀들까지 거론해 당과 김정은에게 충성하는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 김정일이 후계자 지위에 오르고 또 권력을 승계해 김정일 체제를 유지하는 기간에 기술전문직 실무자와 핵심간부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이 최고 권력을 향한 강한 충성심과 함께 전문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이들이 항일 빨치산 세력의 유자녀들로 항일혁명전통 계승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김정일에 의해 중용됐다는 점이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일 것이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은 국가 차원의 교육적 지원과 신분 보호를 받고 사회 진출도 보장받은 집단이었다. 이러한 지원, 보호, 보장은 이들이 북한 사회 구성원 중 그 누구보다도 항일혁명전통의 의미를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북한 학교들이 내각 교육성의 지도를 받는 것과는 달리 만경대혁명학원은 인민무력부(1972년 전에는 민족보위성이라 불림) 관할 아래 있으면서 교육과정과 관련해서만 교육성의 협조를 받는 등 학원 운영구조에서도 군 간부 양성기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일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항일 빨치산 세력은 김정일이 어린 시절부터 직접 보살폈으며 그가 후계자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김일성, 김정일이 공동운명체라고 느꼈다. 또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은 항일 혁명가 유자녀라는 동등한 신분과 그들이 받은 충실성 교양으로 인해 김일성, 김정일에게 충성하고 체제 보위를 위한 강력한 결사체를 형성해왔으며 이러한 패턴은 김정은 체제에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 만경대혁명학원 연구로 박사학위 받은 김옥자 씨

    “예비 교사들에게 올바른 북한 교수법 가르칠 것”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북한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쉽게 붕괴할 곳이 아니에요. 북한은 김일성 가계(家系)로 상징되는 만경대 줄기, 항일 빨치산 세력과 그들의 유자녀로 이어진 백두산 줄기가 가족 같은 동지애를 바탕으로 단단한 운명공동체를 이룬 곳입니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가 북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압구정초교 김옥자(47) 교사. 그의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만경대혁명학원 연구’.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 당국이 항일 빨치산 유자녀와 후손을 양육하려고 1947년 평양에 설립한 인재 양성기관이다. 그간 만경대혁명학원을 본격 연구한 논문은 없었다. 김 교사가 사실상 ‘1호 논문’을 쓴 것. 김 교사는 이 논문에서 북한이 만경대혁명학원을 통해 이른바 ‘항일혁명전통’을 계승해왔으며 이 학원 졸업자들이 김정일 후계 체제 확립 과정과 김정일 체제에서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1호 논문이다보니 2차 자료(북한 자료를 분석한 논문)가 없었습니다. 조선중앙TV, 선전영화, 김일성 선집, 김일성 전집, 노동신문 등 1946년부터 최근까지의 북한 자료를 이 잡듯 뒤져 교차 분석했어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탈북인사 다수를 상대로 면접 조사도 했고요.”

    그는 3대째 ‘수령 결사옹위’가 이뤄지는 배경에도 만경대혁명학원이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자녀를 당국이 책임지고 키운 겁니다. 졸업생이 5000명에 달합니다. 생존 빨치산 부모를 둔 이들과 만경대학원 출신이 김정일 체제 때 노동당, 군, 내각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빨치산 유자녀가 어른으로 성장한 후 6·25전쟁 유자녀와 대남 침투요원 유자녀 등으로 입학 자격을 확대해 혁명전통을 계승한 사람의 범주가 확대됐죠.”

    그는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교대, 사대)에서 ‘예비 선생님’을 대상으로 북한 교수법 관련 교육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북한에 대해 잘 몰라요. 현재는 앞으로 교사가 될 학생들에게 북한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공부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북한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되려는 대학생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북한 교육과 관련한 인력, 시스템을 갖추는 데도 일조하고 싶고요.”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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