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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읽는 우리 근대문학

계몽주의자의 사랑은 심심하고 고상한 맛?

춘원 이광수

  • 소래섭│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계몽주의자의 사랑은 심심하고 고상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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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도덕, 온갖 제도, 온갖 법칙, 온갖 예의-이 용감한 돈키호테는 재래의 ‘옳다’고 생각한 온갖 것에게 반역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반역적 사조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일치되는 감정으로서, 다만 중인(衆人)은 차마 이를 발설치를 못하여 침묵을 지키던 것이었다. 중인 청년계급은 아직껏 남아 있는 도덕성의 뿌리 때문에, 혹은 예의 때문에 이를 발설치 못하고 있을 때에 춘원의 반역적 기치는 높이 들렸다. 청년들은 모두 그 기치 아래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반역적 행사도 가능하다고 깨달을 때에, 조선의 온 청년은 장위(將位)를 다투려는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춘원의 막하에 모여들었다. 아아! 우리는 그때 얼마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았는가!”

사랑을 맛보다

춘원이 논설을 통해 주장하던 바를 소설 속에 녹여낸 ‘무정’은 그에게 논설가로서의 명망에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까지 안겨줬다. 다시 김동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후 춘원의 소설은 청년들 사이에 ‘읽어야만 될 것’으로 각인됐다. ‘어린 벗에게’ 역시 당시 춘원의 주장과 논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네 통의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편지는 주인공 임보형이 상해(上海)에서 혼자 병을 앓다가 이웃을 자처하는 젊은 여자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고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병에서 회복한 뒤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임보형은 자신을 간호해준 여자에게 뜨거운 사랑을 품게 됐음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인 참된 사랑임을 역설하며 감정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제도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나는 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듣고, 맛은 못 본 조선인이로소이다. 조선에 어찌 남녀가 없사오리까마는 조선 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본 일이 없나이다. 조선인의 흉중(胸中)에 어찌 애정이 없사오리까마는 조선인의 애정은 두 잎도 피기 전에 사회의 관습과 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죽고 말았나이다. 조선인은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로소이다. (…) 이에 우리 조선 남녀는 그 부모의 완구(玩具)와 생식(生殖)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로소이다.



계몽주의자의 사랑은 심심하고 고상한 맛?

1928년 무렵의 이광수와 부인 허영숙, 아들 봉근.



임보형이 재래의 관습과 도덕을 과격한 언사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부모가 맺어준 짝과 조혼한 기혼자였기 때문이다. 임보형은 병에서 회복하자마자 다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고, 억누를 길 없는 사랑의 감정과 자신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 구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그는 서랍에서 젊은 여자가 남긴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그 여자가 김일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해에 오기 6년 전, 와세다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던 임보형은 친구의 누이 김일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연서를 통해 고백한다. 6년 전에도 기혼자였던 임보형은 자신의 처지로 인해 순수한 정신적 사랑만을 요구하지만 그마저 거절당하자 오랫동안 좌절과 절망의 나날을 보낸다.

세 번째 편지에서 임보형과 김일련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 위에서 다시 만난다. 임보형이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기 위해 탄 배가 침몰하게 되고, 그 혼란의 와중에서 우연히 김일련과 재회한다. 영화 ‘타이타닉’의 남자주인공과는 달리 침몰하는 배에서 연인을 구해내고 자신도 살아난 임보형은, 김일련과 함께 유럽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는 제도적으로는 용납되지 못한 사랑의 미래를 운명에 맡기겠다는 결심으로 마무리된다.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이 작품에서 춘원은 사랑을 맛에 비유한다. 사랑을 맛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감각은 종종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닫기 쉽다. 김일련과 짧은 시간 만났음에도 임보형이 두 번씩이나 격렬한 사랑의 불꽃에 휩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임보형의 이성은 기혼자라는 현실적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지만, 김일련을 향한 감각과 감정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오히려 임보형은 자연스러운 감각과 감정의 분출을 억압하는 이성에 대한 반발을 구제도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드러낸다.

치유의 음식, 사랑의 음식

이 작품에서 춘원이 사랑을 맛에 비유하는 또 다른 이유는 김일련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임보형의 사랑이 음식을 통해 촉발되기 때문이다. 김일련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임보형을 헌신적으로 간호한다. 고열과 갈증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김일련은 약을 달이고 죽을 쑤고 신선한 과일을 건넨다. 김일련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임보형은 그녀가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아닐까 상상한다.

누구나 객지에서 홀로 앓을 때 돌봐주는 사람에게는 감격하기 마련이다. 그이가 이성이라면 부지불식간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음식에 관한 많은 글을 집필했던 마크 쿨란스키는 동서고금의 음식 에세이를 엮은 ‘음식사변’의 서문에서 “맛있는 음식은 섹스보다 유혹적이다”라고 단언한다. 어떤 음식은 사랑을 촉발시키고, 그때 사랑은 맛있어지며, 맛있는 사랑은 중독성 있는 음식처럼 끊기 어렵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춘원에게 사랑의 맛을 촉발시킨 음식이 실제로는 아리따운 여성이 만들어준 죽이나 과일이 아니라 사내가 만든 ‘붕어곰’이라는 사실이다. ‘어린 벗에게’가 발표되고 10여 년이 지난 후, 춘원은 ‘인생의 향기’라는 수필에서 ‘어린 벗에게’의 창작 내력을 밝힌다.

이야기는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아의 몸으로 일진회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마친 춘원은 1910년부터 오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한다. 1913년, 춘원은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세계 일주 무전여행에 나선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셋, ‘인생의 향기’에서는 갑작스러운 여행의 이유를 ‘공상적 방랑성’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춘원이 깊이 빠져 있던 톨스토이와 생물진화론 강의가 신앙심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 외국인 목사와 대립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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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섭│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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