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비유’라는 양날의 칼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12-18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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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유는 문장의 수사학뿐 아니라 학습방법으로 널리 쓰인다.
    • 하지만 언제나 오류의 위험이 도사린다. A와 B가 어떤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로부터 이 둘이 모든 점에서 같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추론이 진행되는 것이다.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2010년 6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기록문화전시회’에 선보인 구텐베르크 성경 원본.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양피지에 최초로 인쇄한 것이다. 원래 ‘성경(聖經)’, 즉 성인의 가르침은 ‘논어’였다. ‘Bible’은 ‘성경’이란 번역어를 통해 ‘논어’에 비유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대중성을 얻었다. 그리고 끝내 ‘논어’를 ‘성경’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 솜털 보송보송한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선생님께서 설명을 하신다. 요즘은 붓을 쓰지 않으니까, 학생들에게 한자로 된 글씨는커녕 붓을 설명하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요즘은 연필이나 볼펜으로 쓰지? 붓은 연필이나 볼펜에 털을 달아 먹이라는 잉크를 묻혀서 쓴 글씨야”라고 정성스럽게 설명하신다. 그제야 학생들은 조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맹자라는 고수

    이렇게 붓을 모르는 학생들에게 연필이나 볼펜을 비유로 들었듯, 잘 모르는 사실이나 사물을 소개하는 데 설명을 해도 잘 모를 땐 비유(譬喩, 유비(類比), analogy)를 해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장의 수사학뿐 아니라 학습방법으로 비유가 널리 쓰이고, 이는 역사 공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비유 하면 떠오르는 고수(高手)가 있다. 공자의 어록 ‘논어(論語)’ 다음으로 치는 고전인 ‘맹자(孟子)’의 주인공 맹자다. 맹자가 양(梁)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양혜왕이 물었다.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내(河內)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을 하동(河東) 지방으로 이주시키고, 곡식을 하내 지방으로 옮겨 구제합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들어도 그렇게 합니다. 이웃 나라의 정치를 살펴보건대, 저처럼 마음을 쓰는 자가 없는데도 이웃 나라 백성이 더 적어지지 않으며, 과인의 백성이 더 많아지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살기 좋은 곳으로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다. 딴에는 열심히 정치를 하는데 왜 인구가 안 늘어나느냐는 질문이었다.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 전투를 좋아하시니, 전투 상황을 가지고 비유하겠습니다. 둥둥둥 북이 울리고 싸움이 벌어져 병기와 칼날이 부딪쳤습니다. 얼마 있다가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질질 끌고 패주하는 쪽이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백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고, 어떤 사람은 오십 보를 도망한 뒤에 멈췄습니다. 이때 오십 보를 도망쳤다고 하여 백 보 패주한 자를 비웃으면 어떻겠습니까.

    양혜왕은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다만 백 보를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지 이 또한 패주한 것입니다.”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 그걸 아신다면 이웃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시지요.”

    이것이 유명한 ‘오십 보, 백 보’의 고사다. 전쟁이 빈발하던 때라 시대 명칭도 ‘싸우는 나라[戰國]의 시대’일 때 양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잦은 전쟁을 놔두고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을 내놔봐야 실효가 있을 수 없었다. 백성을 들볶는 원인은 일차로 전쟁에 있었다. 그래서 맹자는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내가 그런 게 아니다. 올해 농사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이건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내가 그런 게 아니다. 칼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이렇게 적재적소에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반론하는 맹자의 논법은 우리가 성선설(性善說)이라고 배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도 효력을 발휘했다. 인간은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이 곧 배움이다, 라는 공자 이래 유가(儒家)의 핵심 논지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갑자기 어떤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 ‘어이쿠! 어쩌면 좋아!’ 하는 마음을 가진다. 측은(惻隱)해하는 마음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동네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데도 구해주지 않는 잔인한 놈이라는 소문이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보아라, 누구나 이런 마음이 있지 않느냐! 이게 근거다, 라고 맹자는 말한다. 이 비유를 ‘유자입정(孺子入井·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짐)’의 고사라고 한다. 이어서 맹자는 우리가 도덕시간에 배운 사단(四端·4가지 단서)을 설명한다.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羞惡·부끄러움)의 마음은 의(義)의 단서이며, 사양(辭讓)의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다.

    대장부!

    나아가 맹자는 사단을 사람이 사지(四肢), 곧 팔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누구나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이 명료함! 어떤 점에서 보면, 이 명료성을 포착해 새로운 유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놀랍다. ‘맹자’라는 책이 소외되다 ‘4서(書)’의 하나로 경(經)이 된 데는 주자의 공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약 1500년 뒤의 일이다. 탁월한 비유 능력에 더해 호연지기(浩然之氣)로 표현되는 기상을 갖췄던, 맹자의 늠름함을 용납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맹자 이야기를 이쯤에서 그치는 게 아쉬워 맹자의 말 한 마디를 인용하고 가야겠다. 대장부(大丈夫)에 대한 맹자의 정의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길을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돈이나 귀함이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가난과 천대가 절개를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세와 권력이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 부른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AX:BX=AY:□

    위에서 본 탁월한 비유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적절하지 않은 비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고자(告子)라는 학자와 벌인 ‘식(食)과 색(色)이 본성인가’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이것까지 여기서 다룰 여유는 없지만, 비유나 유비가 엄격한 눈으로 볼 때는 전혀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나 학문 연구에서도 유비는 널리 쓰이고, 또 그만큼 유용함엔 틀림이 없다.

    비유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이 어떤 한 측면에서 일치하면 다른 측면에서도 일치할 수 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는 수학시간에 배운 방정식이다.

    A가 X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B를 닮았다.

    A는 또 Y라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B도 Y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추론한다.

    식으로 나타내면 AX:BX=AY:BY가 된다.

    추론하기 전까지 BY는 미지수다. BY는 앞의 두 명제에서 추론해 얻은 값이다. 신비하기까지 한 지적 창조의 과정에서 볼 때 비유의 추론은 중요할 뿐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 비유는 어떤 생각을 표현할 때 유용성도 있으면서 수사적인 포장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내적으로 보면 한 사상가의 머릿속에서 비유를 통해 무의식적이고 불완전한 추론이 뭔가의 합리성 영역으로 진입하는 작용이 일어난다. 뿌옇게 생각되던 것이 이미 알고 있던 무엇과의 비유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변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비유는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비유는 합리적 논쟁을 유려하게 창출한다.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 설득하며, 정보를 주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소통하고 논의를 명료하게 만든다. 비유는 활용도가 높고 효율적인 교육수단이다.

    역사학자들도 경험을 탐구할 때 발견 도구로, 또 가르칠 때 설명 도구로, 글로 쓸 때 수사학적 도구로 비유를 널리 사용한다. 종종 이런 비유는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이러한 비유 없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창조적 사유나 소통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예 생각하기도 어렵다.

    계몽 vs 암흑시대

    그렇지만 비유의 다양한 쓰임새는 비유의 남용에서 발생하는 악영향을 수반한다. 비유의 오류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상투적으로 쓰는 비유인데 그 자체가 오류다. 이는 ‘상투적 비유의 오류’ ‘무의식적 비유의 오류(the fallacy of the insidious analog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오류는 저자의 언어, 독자의 마음속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비유의 추론이 담겨 있을 때 나타난다.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인식된다기보다는 강하게 경험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오류는 단순하다. 그러나 영향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비유는 역사적 사유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내용을 구성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보자.

    냉전(冷戰), 암흑시대, 계몽주의, 건국의 아버지, 르네상스, 모국(母國), 쇄국(鎖國)정책, 햇볕정책, 축(軸)의 시대, 실학(實學), 마르크스주의, 케인스주의

    국내 역사학계보다는 외국 역사학계에서 이런 비유가 성행하는 편이다. 이들 용어엔 서술하려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킬 수 있는 ‘무의식적 비유’가 포함돼 있다. 참으로 많이 쓰는 용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 용어가 개념적으로 사전에 실릴 만큼 엄격하다고 여기기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역사사전에 다 등재돼 있지만.

    예를 들어,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대는 ‘빛’으로, 봉건시대는 ‘어둠’으로 비유했다. ‘계몽(啓蒙)’이란 ‘Enlightenment’의 번역어인데, 암흑시대(Dark Age)와 광명시대의 비유를 적절히 표현해주는 번역어다. ‘어리석음[蒙]을 깨우는[啓]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통해 중세=봉건은 어둠, 야만, 정체 등의 의미를 띠게 됐고, 근대는 이성(理性), 문명, 자유, 해방의 시대로 묘사됐다. 이런 비유를 쓰는 순간 빛과 어둠이 선명히 대비되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투적, 무의식적 비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명사형 용어에만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건 아니다. 동사, 형용사, 부사를 통해서도 이런 오류가 발생한다. 정부는 ‘전복되고’, 혁명은 항상 ‘폭발한다’. 경제는 ‘붐이 일거나 파산하며’, 문화나 문명은 장미꽃 정원도 아니면서 곧잘 ‘꽃피운다’.

    ‘명나라는 미국과 같다’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축구공과 사과. 비유를 잘못하면 축구공을 보고 먹기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완벽한 비유의 오류’란 두 실체의 부분적인 닮은꼴에서부터 아주 정확히 상응한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이는 A와 B가 어떤 점에서 일치한다는 사실로부터 이 둘이 모든 점에서 같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추론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둘 게 있다. 유추나 비유란 그 성격상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이며, 이 유사성을 빼면 기타 측면에선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하다는 말이 통상적으로 동일성을 함축한다고 본다면, ‘완벽한 비유’란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이에 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바로 명나라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미국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가질수록 명나라는 물론 명나라에 대해 사대를 했다는 이유로 조선 ‘지배층’ 역시 폄하의 대상이 된다. 명나라와 미국 사이에 제국주의 국가라는 비유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 지배층이나 백성의 처지에서 볼 때 무척 억울한 평가다. 조선 사람들은 한양에 명나라 군대를 주둔시킬 땅을 내주지도 않았고, 군사작전권을 내주지도 않았다. 6·25전쟁에 미군이 개입한 것이 내전(內戰)에 개입한 것이라면, 명나라의 개입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참전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명나라는 제국의 성격이라는 점에서만 유비 관계가 성립할 뿐 조선과 명나라, 한국과 미국은 유비 관계가 성립하기 어려운 경우다.

    명나라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오해가 상식처럼 당연시되는 이유는 동아시아 각국의 공존 논리인 사대(事大)의 보편성과 질적 차이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해가 부족했던 이유는, 사대를 콤플렉스 없이 정면으로 응시할 지적 토양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유나 유비의 오류엔 이밖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어리석은 유비의 오류’라고나 할 만한 것도 있다.

    1) 이 축구공은 둥글고 저 사과는 빨갛고 둥글며 부드럽고 껍질이 반짝반짝한다.

    저 사과는 아주 먹기가 좋다.

    그러므로 이 축구공은 아주 먹기가 좋을 것이다.

    2) 이 축구공은 둥글고 저 사과는 빨갛고 둥글며 부드럽고 껍질이 반짝반짝한다.

    저 사과는 크리스마스 양말에 들어 있으면 아주 좋다.

    그러므로 이 축구공은 크리스마스 양말에 들어 있으면 아주 좋을 듯하다.

    1)번의 유비는 언뜻 보기에도 명백히 바보 같은 추론이다. 그러나 2)번의 경우, 어떤 미감에서 볼 때는 옳다. 이렇게 둘의 논리가 타당성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 축구공은 둥글고 저 사과는 빨갛고 둥글며 부드럽고 껍질이 반짝반짝한다’는 축구공과 사과의 질에 대한 비유 묘사가 보기 좋은지 아닌지 하는 미감의 문제이지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바보들의 비유

    쉽게 말해서 1)번은 바보처럼 미감에 의한 묘사에서 곧바로 ‘저 사과는 아주 먹기가 좋다’라는 전혀 다른 규정으로 옮겨감으로써 유비의 비약을 겪었고, 그것이 바보 같은 오류로 귀결된 것이다. ‘바보들의 비유’는 축구공과 사과 사이에서만 생기는 게 아니다. 심각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은 문명의 진보와 현대화를 둘러싼 환희(일부 서구 엘리트들의 번영)가 한창이던 20세기 개막 직후 터졌다. 1000만 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2000만 명이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어갔다.

    레마르크의 소설로 유명한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1차 대전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처절했던 프랑스 서부전선의 전투, 마른(Marne) 전투까지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이 투입돼 몇 km의 진격을 위해 60만 명이 희생된 그 전투를 배경으로 한 실화다. 기관총과 포탄 세례에 하루에도 병사 수천 명이 도륙되는 상황에서도 공식적 소식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고 발표됐다.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1930년작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포스터. 주인공 파울은 전투 중 자신이 찔러 죽어가는 병사와 참호 속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랜돌프 본이라는 작가는 ‘전쟁은 국가의 건강한 상태’라고 비유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1차 대전으로 인한 사상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1914년 8월 당시 영국군 지원병이 되려면 키가 173cm 이상이어야 했는데 10월에 이르면 자격요건이 165cm로 낮아진다. 그달에 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번엔 160cm만 돼도 지원할 수 있었다.

    1916년 7월 영국의 헤이그 장군은 영국군에게 독일군 방어선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 6개 사단은 기관총으로 응수했다. 공격에 나선 영국군 11만 명 가운데 2만 명이 전사하고 4만여 명이 부상당했다. “적진 돌파는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얻은 것이라곤 약 8km의 영토뿐이었는데, 이로 인해 이프로(Ypres) 돌출부가 전보다 더 작전에 불리한 지역이 됐으며, 영국군은 그 대가로 약 40만 명이 희생됐다.”

    미국은 1917년 봄, 이 전쟁의 구렁텅이에 발을 들여놨다. 6월엔 방첩법(防諜法·Espionage Act)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의 비준을 받았다. 이 법은 간첩행위에 대한 법이 아니었다. 이 법엔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의도적인 불복종이나 불충, 항명, 미국 육군이나 해군에서 복무 거부를 야기 또는 시도하거나 미국의 신병 모집이나 입대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지’ 최고 20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방첩법은 ‘전쟁 및 징병 반대 금지법’이었다.

    “극장에 불이 났습니다!”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갈색 폭격기’ 차범근 선수. 우리는 그를 갈색 폭격기라고 불렀지만, 누구도 그가 진짜 갈색 폭격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징병은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상대로 저지르는 잔인무도한 행위’라는 전단을 배포한 찰스 셴크라는 사람은 방첩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이때 평결문을 작성한 자유주의자 홈스는 셴크가 징병법 시행을 반대하려는 의도를 품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자유에 대한 가장 엄격한 보호조치일지라도 극장에서 거짓으로 불이 났다고 외쳐 공황상태를 야기한 사람을 보호해주지는 않는다. (…) 모든 사건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 즉 의회가 막을 권리를 갖고 있는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 그가 사용한 언어가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됐는지 아닌지 하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그럴듯한 비유였다. 누구도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소리쳐서 공황상태를 일으킨 사람에게까지 언론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유가 전쟁에 대한 비판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셴크의 행동이 누군가 극장에서 상영 막간에 일어나 화재 때 비상구가 충분하지 않다고 외친 데 비유했다. 그러나 셴크의 행동은 그보다, 표를 끊고 막 극장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극장 안에 큰 화재가 났다고, 거짓이 아니라 진짜 정보를 외친 사람과 같지 않을까.

    만약 언론의 자유가 생명과 자유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킨다면 합리적인 사람은 누구도 그 자유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언론의 자유는 다른 극히 중요한 권리와 경쟁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가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 즉 전쟁에 반대하는 어떤 주장보다도 더 ‘명백하고 현존하며 더 생명에 위험한’ 건 아닐까. 시민들은 전쟁에 반대할 권리, 핵발전소에 반대할 권리, 위험한 정책에 반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1차 대전과 셴크 사건에 대한 서술은 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2’, 이후, 2008, 12~22쪽).

    창조적 사유, 위험한 오용
    오항녕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국가기록원 팀장으로 기록관리도 공부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고대 민연) 등 10여 편의 저·역서가 있으며, 그 외 논문 50여 편이 있다.


    비유-유비의 올바른 사용은 비유의 한계를 의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A와 B 사이의 비유 추론은 두 대상이 ‘어떤’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그 밖의 다른’ 측면에선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차범근 선수가 ‘갈색 폭격기’라고 불렸지만, 누구도 그가 진짜 갈색 폭격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일 이런 불일치가 없다면 우리는 비유가 아니라 동일하다고 부를 것이다.

    비유-유비적 설명이 갖는 심리적 영향력은 논리학이나 경험주의에 모두 위험하다.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관념은 효과적인 비유, 잘된 비유 때문에 오래간다. 만일 비유가 증명 없는 설득, 경험적 증거 없는 경험론적 질문의 확정, 이해 없는 세뇌에 사용된다면, 비유는 오용될 것이다. 종종 그 결과는 단지 동의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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