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전면 시행까지는 한 세대 걸친 ‘안정화’ 필요

도로명주소

  •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 myungraecho@naver.com

    입력2013-12-19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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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 시행까지는 한 세대 걸친 ‘안정화’ 필요

    지난 11월 광주광역시 북구 직원들이 도로명주소로 새로 인쇄된 건물 번호판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2014년부터 지번주소가 도로명주소로 바뀐다. 예를 들어 ‘서울 종로구 청진동 18-1’은 ‘서울 종로구 중학천길 18’이 된다. 동네 이름 ‘청진동’은 길 이름 ‘중학천길’로, 땅의 순서인 지번 ‘18-1’은 도로상의 건축물 순서인 건물번호 ‘18’로 바뀐다. 도로명은 크게 ‘대로(폭 40m 이상, 왕복 8차선 이상)’, ‘로(폭 12m 이상, 왕복 2차선 이상)’, ‘길’로 나뉜다. 큰 도로에서 작은 도로가 갈라질 경우 큰 도로명 뒤에 숫자를 쓴다. 진행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갈라진 도로엔 홀수, 오른쪽으로 갈라진 도로엔 짝수가 붙는다. 건물번호는 20m 구간마다 도로 좌우에 기초번호가 부여되고, 그 뒤에 구간 내 건물 순서가 붙는 것으로 정해진다. 서에서 동쪽, 남에서 북쪽으로 왼쪽 건물엔 홀수, 오른쪽 건물엔 짝수가 차례로 붙는다.

    정부는 새 주소를 사용하면 길 찾기가 더 쉽다고 한다. 대다수 선진국에서 도로명주소를 쓰므로 국가경쟁력은 물론이고 국가 이미지도 제고된다고 한다. 도로명주소 도입에 따른 사회경제적 효과도 연간 3조4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 절대 다수는 새 주소를 여전히 잘 모른다. 알아도 선뜻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정부는 강제적으로 시행하다보면 언젠간 ‘몸에 맞는 옷’같이 편해질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오래 준비해왔다지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주소 체계로 다듬는 시간은 분명 충분치 않았다. 강제 시행이 능사가 아니라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도로명주소로 바꾸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 지번주소가 불편하고 후진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일제가 세금을 걷기 위해 토지를 나누면서 번호를 붙인 게 지번주소다. 따라서 지번은 처음부터 사람이나 건물의 위치를 찾기 위한 게 아니라 땅의 자리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지별로 일련의 번호를 붙였기에 지번은 당초엔 일정한 방향과 순서를 가졌다. 또한 개별 필지는 개별 건물의 자리이기 때문에 지번주소는 건물주소의 의미도 함께 지녔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를 겪는 동안 나눠지고 합쳐진 필지 위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지번은 더는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가령 1번지 다음에 2번지가 아니라 5번지 혹은 6번지가 붙으면 위치 정보로서의 지번주소는 ‘체계성’이나 ‘예측 가능성’을 잃게 된다. 그로 인한 국가행정 및 일상생활의 불편과 비용도 덩달아 커진다.



    1970년대부터 여러 차례 전환 시도

    정부 차원의 새 주소 전환 검토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1971~73년 일본의 구역방식 주소 체계를 도입하려고 전국 6대 도시에 시범 적용했고, 1980년엔 ‘신주소 표시제도 실시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자 1995년 폐지됐다. 이후 도입 시도가 본격화한 건 1995년 청와대 국가경쟁력기획단이 주소제도 개선을 정책추진 과제로 채택하면서부터다. 1996년 7월 정부는 ‘도로명 및 건물번호 추진 방안’을 발표한 후 1997년 1월 서울 강남구와 경기 안양시에 1차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이듬해엔 경기 안산시 등 4개 도시로 확대했다. 1999~2003년 2단계 시범사업이 전국 135개 도시에서 시행됐다. 이때까지는 지번주소를 법적주소로 하면서 생활주소란 이름으로 도로명주소가 병행 사용됐다. 그러나 도로명주소 사용은 기대만큼 확산되지 못했다. 부정적 평가와 함께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사업이 존폐 위기에 처했다. 강제력이 부족해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판단한 정부는 ‘도로명주소의 입법화’를 대안으로 내놨다. 이렇게 해서 ‘도로명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이 2005년 발의되고 2006년 제정된 후 2007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법정사업으로 위상이 강화된 도로명주소는 2011년부터 지번주소와 병용하다 2012년부터 전면 시행토록 돼 있었다. 정부는 ‘도로명주소통합센터’를 설치하고, 도로명판 등 관련 시설물을 전국적으로 설치하는 일을 2010년 10월까지 완료했다. 대국민 홍보도 실시했다. 그럼에도 새 주소에 대한 국민의 인지나 수용 정도가 여전히 낮은 것으로 드러나자, 전면 시행을 2014년 이후로 2년간 미뤘다.

    ‘익숙함’에 못 미치는 ‘작위성’

    전면 시행을 2개월여 앞두고 안전행정부가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자기 집의 도로명주소를 아는 사람은 전체의 32.4%, 우편물 주소에 도로명주소를 표기한 경우는 16%에 불과하다. 공공기관을 제외하면 새 주소 사용 경험은 더욱 적을 것이다. 사실상 국민이 새 주소를 사용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셈이다.

    안전행정부의 성과목표를 보면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 이후에도 사용률은 전 국민의 45%에 불과하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10년을 준비해 시행함에도 전 국민의 절반도 새 주소를 쓰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정책이다. 새 주소가 국민에게 잘 수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지번주소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오랜 공간 문화와 관련된 것이다.

    1662년 도로명주소를 처음으로 도입한 영국에선 평지의 도로에 연해 집이 들어서고 도로 단위로 행정을 처리하는 가운데 도로 중심으로 한 지리적 공동체가 형성됐다. 영국에선 도로명이 우리의 동명과 같다. 이에 비해 지형지세가 다양한 우리나라에선 동네와 같은 면(面)과 그 표지물(느티나무, 바위 등)로 장소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지리적 공동체가 형성돼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길보다 단지 같은 터의 위치 중심으로 ‘누가 어디 사는지’를 가늠한다. 지번은 우리 공간 문화와 잘 들어맞는다. 지번주소 폐기를, 동(洞)으로 표현되고 인식되는 우리의 오랜 장소 문화와 그 역사를 지우는 것으로 우려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도로명주소는 도로의 위계(位階), 방향, 건축물 순서 등을 규칙화하면서 만든 위치 정보다. 오랜 연구 검토 끝에 나온 것이지만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엔 너무 ‘작위적’이다. 대로, 로, 길의 구분, 서에서 동과 남에서 북으로의 방향 확인, 좌우 구분, 20m의 확인 등 위치 확인에 필요한 개별 정보가 너무 많다. 또한 그 공간 스케일이 일상적 공간인식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다. 따라서 사용자 처지에선 도로명주소의 과학성은 단점이자 장애물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으로 관리자 눈높이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일상인에겐 맞지 않다.

    ‘제도의 순화’ 과정 거쳐야

    영국의 도로명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짧은 구간, 장소 특성을 살린 개성적 이름으로 돼 있어 누구나 쉽게 이용하고, 사용자의 공간의식과 일체화가 쉽게 이뤄진다. 반면 우리의 도로명주소는 ‘기하학적 공간의식’을 의도적으로 작동시켜야 확인 가능하다.

    그래서 인식자의 처지에서 볼 때 도로명주소는 지번주소 못지않게 복잡하고 어렵다. 편리성과 용이성이 떨어지면 결국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 같은 기기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로명주소가 아무리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사용을 외면하고 기기를 사용해 위치를 찾는 게 일반화하면, ‘도로명주소 따로’, ‘도로명주소 찾기 따로’가 될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이렇게 되면 도로명주소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뜻도 모르는 ‘코드(비밀번호)’일 뿐이다.

    4000억 원의 예산이 이미 투입됐고 주소 전환을 위한 법적 고시가 끝났다는 것은 새 주소 제도를 무조건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국민의 수용성과 시행상 혼란, 장차 발생할 사회경제적 비용 등을 헤아려보면 새 주소는 ‘제도의 순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우선 전면 시행을 보류하고 사용자 수용성을 훨씬 높여야 한다. 굳이 전면 시행을 한다면 최소 한 세대에 걸친 ‘안정화’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에 도로 위계, 도로 구간, 도로명, 번호체계 등을 사용자의 공간 행태나 장소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말하자면 일정 기간 지번주소와 함께 사용토록 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와 함께 지역별주소검토위원회를 구성해 자체적으로 검토하고 보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5년 혹은 10년마다 재정비해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 경우에 따라 도로가 잘 발달한 곳에만 도로명주소를 쓰고, 골목길이 발달했거나 장소적 응집성이 강한 곳엔 기존 지번주소를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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