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파격 연기 변신 최지우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입력2013-12-19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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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딩 점퍼, 모자 벗으면 벌거벗은 느낌
    • 칼질, 마술, 요리 대역 없이 직접 소화
    • 신한류 반갑지만 스타 빨리 바뀌는 세태 아쉬워
    • 발음 때문에 상처? 우스갯소리처럼 회자돼 싫었다
    • 풋풋한 첫사랑 아닌 ‘어른들의 멜로’ 욕심나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드라마가 끝날 무렵 좋은 기사가 많이 나와서 유쾌하게 마무리하는 느낌이에요. 시청률에 연연하진 않았지만 두 자릿수로 끝나 정말 다행이에요.”

    SBS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가 막을 내린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2월 2일 오후, 서울 강남 신사동의 카페테리아에서 마주한 최지우(39)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달뜬 목소리였다. 데뷔 3년 만이던 1997년 역대 시청률 1위(65.8%)를 기록한 KBS 드라마 ‘첫사랑’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2001) ‘겨울연가’(2002), ‘천국의 계단’(2003)의 여주인공으로 한류 열풍의 선두그룹을 이끈 그가 10%를 간신히 넘긴 ‘수상한 가정부’의 최종 시청률에 의미를 두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수상한 가정부’는 일본 드라마 역대 시청률 3위에 오른 ‘가정부 미타’를 리메이크했다. 2011년 NTV에서 방영한 ‘가정부 미타’는 일본 열도를 감동과 눈물로 적시며 시청률 40%를 기록했다. 하지만 네 아이의 엄마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제작 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먼저 전파를 탄 ‘직장의 신’이나 ‘여왕의 눈물’과 마찬가지로 여배우를 원톱으로 기용한 일본 드라마의 리메이크 작이라는 점에서도 신선할 게 없었다. 청순한 이미지로 일관해온 최지우에게 여주인공 박복녀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박복녀는 남편과 아들을 스토커의 계획적인 방화로 한꺼번에 잃은 뒤 로봇처럼 영혼 없는 삶을 사는 가정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평단에서는 드라마가 10.3%의 두 자릿수 시청률로 마감한 것만도 성공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데뷔 후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에 도전한 최지우에게는 연기 호평이 이어진다. ‘수상한 가정부’는 일본에 역수출되는 쾌거를 올렸다. 국내에서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해 일본에 되판 예는 드물다. 편당 판매 가격도 일본 수출작의 평균치를 웃돈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에서 ‘지우 히메(공주)’로 통하는 최지우의 인기가 한몫했다.

    ▼ 지금도 일본에서 인기가 상당하다죠?



    “독보적이죠, 하하.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같은 드라마 팬들이 지금까지 좋아하세요. 뭐, 그렇다고 아이돌 가수에게처럼 공항에 몰려와 열광하는 정도는 아니에요.”

    ▼ 한국과 일본의 팬 문화가 다르지 않나요.

    “일본 팬들은 배려를 많이 해주세요. 조곤조곤 오래가요. 좋아하는 감정이 빨리 식거나 다른 배우에게 옮겨가질 않아요. ‘겨울연가’ 때부터 좋아해주신 일본 팬들이 ‘수상한 가정부’ 찍을 때도 한국 팬들과 같이 간식차, 밥차를 계속 대주셨어요. 스태프들이 무척 좋아했죠. 간식이 풍부하다고, 호호.”

    ‘복녀’ 만들기

    ▼ 후유증은 없나요.

    “잠을 세 시간 이상 못 자요. 이번처럼 잠 못 자며 찍은 작품도 없어요. 사람이 잠을 안 자고도 살 수 있다는 걸 체험했죠. 넉 달 동안 그렇게 살았더니 마음으로는 10시간 이상 푹 자고 싶은데 자꾸 깨요. 세 시간 간격으로.”

    ▼ 밤샘 촬영을 많이 했나봐요.

    “(2013년 8월부터) 넉 달 동안 매일 밤샘 촬영을 했어요. 일찍 끝난 적이 단 하루도 없어서 간신히 잠깐 씻고 나오는 정도였어요. 침대에서 자는 건 사치죠. 그냥 차 안에서 자는 걸로 때웠어요.”

    ▼ 드라마 내용이 한국 정서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너무 극단적이었죠. 복녀라는 캐릭터가 모 아니면 도잖아요. 우리 정서에 좀 더 공감이 가도록 원작과 다르게 묘사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대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어요. 복녀가 흔들리면 안 되니까요.”

    ▼ 결말을 원작과 다르게 한 것도 한국 정서를 고려한 건가요.

    “원작에서는 가정부 미타가 떠나고 아이들의 아빠와 이모가 이어지는 분위기로 가는데 그건 우리 정서와 너무 안 맞잖아요. 그래서 우리 드라마에선 떠났던 복녀가 웃으며 돌아와요. 따뜻하고 희망찬 느낌이죠. 해피엔딩에 만족해요.”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SBS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

    ▼ 기존 이미지와 사뭇 다른데, 복녀 캐릭터에 도전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주변에서 많이 우려했어요. 원작이 워낙 잘돼서 비교당할 수밖에 없고,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직장의 신’과 ‘여왕의 교실’이 이미 방영돼 뒷배를 탄 느낌도 있어서요. 더구나 배우 최지우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패션이나 비주얼 요소를 모두 포기해야 하니까. 그래도 복녀를 꼭 하고 싶었어요. 원작을 보고 나서 미타가 아닌 복녀를 새롭게 탄생시킬 자신이 있었어요. 초반에만 딱딱하지 좀 지나면 풀어지고 인간적인 감동을 주는 캐릭터라는 걸 알았거든요.”

    ▼ 캐릭터 잡느라 애먹었겠네요.

    “처음엔 힘들었어요. 말투나 목소리 톤, 눈빛, 표정을 일일이 복녀 캐릭터에 맞춰 새롭게 만들었거든요. 길고 딱딱한 대사가 많은 것도 문제였어요. 설명조로 사전적인 지식을 말하는 대사들이요. 긴 대사를 주고받는 것 자체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사전적인 지식을 말하는 대사가 길면 웬만큼 외워가지곤 안 돼요. 머리에서 한번 생각하고 내뱉는 게 아니라 툭 치면 입에서 다다다 하고 나올 정도가 돼야 해요. 평소에 복녀처럼 딱딱한 말투를 쓰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딕션(발음)이 좋은 배우도 아니라서 자칫 약점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겠더라고요. 대사가 생각나서 잠도 안 왔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면 안 됐거든요. 토씨 하나, 조사 하나만 달라져도 어감이 바뀌니까 대사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무표정 속 눈빛 연기

    박복녀가 사무적인 말투로 입버릇처럼 내뱉는 ‘이것은 명령입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같은 대사는 극중에서 아역배우들이 따라 할 정도로 어감이 재미있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다. 대본에 원래 있던 대사냐고 묻자 최지우는 배시시 웃으며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초반에 캐릭터 잡을 때 감독님과 계속 상의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어미도 ‘…까?’ ‘…요’ 등으로 바꿔가면서 제 입에 꼭 맞는 것을 찾았고, 눈빛이나 시선도 각도를 달리해서 찍은 다음 모니터링해서 가장 좋은 걸 골랐어요. ‘명령입니까?’도 그렇게 탄생했죠. 한번 캐릭터가 잡히니까 그다음부터는 쉽더라고요. 다만 상대방의 말에 무표정하게 리액션하는 장면이 많아 눈빛으로 감정을 표현하느라 애 좀 먹었어요. 지문이 이래요. ‘한심하다는 눈빛’ ‘의뭉스러운 눈빛’ ‘싸늘한 눈빛’…. 이런 눈빛 연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NG는 안 냈습니까.

    “눈 깜빡거리는 것 때문에 NG가 많이 났어요. 저도, 감독님도 복녀가 눈을 깜빡이면 카리스마가 깨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카메라가 비추는 동안에는 계속 눈에 힘을 주고 뜨고 있어야 했거든요. 그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 감독님이 ‘복녀 씨, 힘내. 조금만 참아’ 하고 매번 응원해줬어요.”

    그는 얘기하면서 자주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무표정보다 웃는 얼굴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런 그가 극중에선 웃음을 어찌 참았을꼬. 복녀는 “아들과 손자를 죽게 만들었으니 평생 웃지 말라”는 시어머니의 명령을 철칙처럼 지키며 산다.

    “극에 빠져 있으면 웃음이 안 나와요.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도 없었고요. 덕분에 이번 작품을 찍을 때는 감정 잡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엄마를 잃은 혜결이(강지우 분)나, 남편과 아들을 죽인 서도형(송종호 분)을 생각하면 절로 몰입되던 걸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지막회에서 복녀가 아이들과 한 사람씩 눈 맞추며 웃는 장면이죠. 복녀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20부를 다 봤다는 분도 있어요. 느낌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초반에 복녀가 로봇처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모습일 때도 좋았고요. 전문지식을 줄줄줄 이야기하며 박학다식한 면을 보여줄 때도 희열을 느꼈어요. 복녀 같은 가사도우미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 싶고.”

    ▼ 다친 혜결이를 안고 맨발로 뛰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어요. 극중에서 의사가 ‘엄마들은 아이가 다치면 얼굴에 흉 지는 걸 가장 걱정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혜결이를 안고 뛰면서 흉 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비록 연기지만. 정말 미친 듯이 달렸는데 아이가 연기를 잘해서 덜 힘들었어요. 안자마자 목에 매달려 몸을 웅크리더라고요(웃음).”

    ▼ 별장에서 찍은 화재 신은 무척 위험해 보이던데.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신이었어요. 얇은 블라우스 하나만 입고 새벽에 양수리에서 이틀을 꼬박 촬영했는데 정말 얼어 죽을 뻔했어요. 연기를 하도 마셔 코를 풀면 시커멨어요. 불을 크게 낸 다음 성재(이성재·남자주인공 은상철 역) 오빠가 저를 업고 나가는 장면을 찍었는데 연기가 자욱해 앞이 안 보일 정도였어요. 그 때문에 성재 오빠가 저를 업은 상태에서 넘어져 바지가 다 찢어졌어요. 오빠가 제가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무릎으로 받친 덕에 저는 그나마 종아리에 피멍 드는 타박상으로 끝났고요.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요.”

    연륜의 선물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새해 2014년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데뷔 20주년. 인생의 절반을 배우로 살았다. 고향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1994년 친척의 권유로 MBC 23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가 최연소 합격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에게 이런 행운이 따른 건 “어릴 적부터 주목받은 긴 팔다리와 미모 덕분”이었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그는 안재욱, 이민영 등 공채 동기들과 달리 2년간 단역만 전전했다. 1996년에는 김민종, 이경영이 주연한 영화 ‘귀천도’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가 이유도 모른 채 하차하는 설움도 겪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는 길거리에서 뽑은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 닮은꼴 대회’에 나가 1등을 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다. 이듬해인 1997년엔 최수종, 박상원, 배용준, 이승연 등 당대 톱 배우가 대거 출연한 드라마 ‘첫사랑’에서 배용준의 상대역을 맡으며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많은 히트작을 낸다. 영화 ‘올가미’(1998)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 ‘여배우들’(2009)과 드라마 ‘사랑’(1998) ‘유정’(1999) ‘진실’(2000) ‘에어시티’(2007) ‘스타의 연인’(2008~2009) 등이 대표작이다.

    ▼ 작품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스토리와 제가 연기할 캐릭터만 보지 않고 함께 일할 감독님, 작가, 상대 파트너까지 다 살펴요. 공동작업인 만큼 팀워크와 호흡이 중요하잖아요. 근데 ‘수상한 가정부’는 예외예요. 스토리와 캐릭터가 신선해서 더 욕심이 났어요. 제게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를 잘해냈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고, 뭔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도 연륜이 있는데, 계속 멜로물의 청순가련형 이미지에 머물러 있을 순 없잖아요(웃음).”

    ▼ 나이에 따라 연기하는 느낌이 다른가요.

    “30대 초까지는 쫓기는 기분이었어요. 대본을 내 것으로 만들기에 급급했죠. NG가 나면 순간적으로 당황해 연기가 위축됐어요. 표정이 굳어 웃어도 부자연스럽고. 근데 지금은 상대방의 연기를 보면서 반응하고, NG가 나도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생겼어요.”

    ▼ 그동안 호흡을 맞춘 파트너 중 다시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는.

    “다들 다시 만나고 싶어요. ‘아름다운 날들’의 이병헌 씨, ‘겨울연가’의 배용준 씨, ‘천국의 계단’의 권상우 씨, ‘지고는 못 살아’의 윤상현 씨 모두 좋은 파트너였어요. 성재 오빠하고도 다음엔 멜로물에서 만나자고 농담을 했는데, 오빠가 옆에 있어서 참 든든했어요.”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KBS 드라마 ‘겨울연가’.

    ▼ 정상의 자리에 있으면 신인 배우들이 치고 올라오는 게 두려울 법도 한데.

    “이젠 그런 마음 내려놨어요. 자리에 연연하면 정신 건강에 안 좋잖아요. 제가 아무리 애쓴들, 신세대 배우보다 예쁠 수 있겠어요? 그래도 ‘겨울연가’가 방영된 후 지난 10년 동안 일본에서 ‘히메’라는 칭호를 붙여준 여배우는 저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난 못 들었는데…, 호호.”

    ▼ 처음 한류 열풍이 불었을 때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추측이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돌 스타들이 케이팝으로 신한류 열풍을 이끌며 전 세계를 누비고 있지요. 한류 스타 1세대로서 한류 문화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케이팝 열풍을 일으킨 아이돌 그룹들, 장근석 같은 젊은 배우들이 계속 선전하고 있어서 기쁘고 뿌듯해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 국내 팬들에게 희망을 주고,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잖아요. 그런 친구들이 계속 나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줘야죠. 경제적 지원뿐만이 아니라 꾸준한 응원과 관심이 큰 힘이 될 거예요.”

    ▼ 아쉬운 점은 없나요.

    “실력 있는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좋긴 한데, 스타가 너무 빨리 바뀌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1990년대나 2000년대에는 스타가 빨리 바뀌지 않았는데 지금은 상반기, 하반기 스타가 다르잖아요.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TV 봐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스트레스에 강하다

    ▼ 이제 ‘겨울연가’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진 않습니까.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싶었어요. 근데 그게 다 자만이고 교만이더라고요. 쉽게 잡을 수 없는 행운이 제게 왔잖아요. 그 덕에 대표작이 생겼고. 작품과 함께 떠오를 수 있는 건 배우로서 더없는 영광이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는 걸 지금은 알아요. 그래서 더는 (‘겨울연가’를)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요. 이번처럼 새로운 캐릭터를 하면 되니까.”

    그가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작인 MBC 드라마 ‘지고는 못 살아’에서도 당돌하고 까칠한 변호사로 연기 변신을 꾀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방영 내내 한 자릿수 시청률을 면치 못했다.

    ▼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웠겠어요.

    “배우가 시청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일 거예요. 저도 스트레스 좀 받았어요. 그렇다고 대박감인지를 따져가며 작품을 하진 않아요. 대중적이지는 않더라도 스토리가 탄탄하고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 슬럼프를 겪어봤나요.

    “고맙게도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 아니라서 슬럼프를 겪지 않았던 것 같아요. 새 작품에 들어갈 때는 매번 캐릭터에 대한 부담감을 못 떨쳐내는데, 그 정도는 배우가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해요.”

    ▼ 데뷔 후 발음 논란이 심심찮게 불거져 상처가 됐을 것 같네요.

    “상처라기보다는 뭐랄까, 우스갯소리처럼 회자되는 게 싫었는데 지금은 재미있어요. 그런 얘기를 할 때 저도 끼어서 농담할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그만큼 여유가 생겨서인지,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이번 드라마를 하는 동안에는 발음을 트집 잡는 사람이 없었어요. 감정을 절제하면서 딱딱한 대사를 차분하게 말한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 배우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모두 잊지 못해요.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어요. 박복녀는 기존에 한 캐릭터와 색깔이 확연히 달라서 훗날 추억할 게 더 많을 것 같아요.”

    불현듯 그가 방송 내내 입었던 박복녀의 유니폼이 떠올랐다. 은회색 패딩 점퍼와 낡은 야구 모자. 그는 “원래 방송국 소품인데 출연 기념으로 하나씩 가져왔다”며 전리품을 얻은 장수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똑같은 패딩 점퍼를 열 벌 넘게 제작했는데 그중 네 벌만 제가 드라이클리닝 해가면서 번갈아 입었어요. 푹푹 찌던 2013년 8월부터 그걸 입고 찍었죠. 예쁘게 꾸미는 것도 여배우에겐 큰 즐거움이지만 미모를 처음부터 포기해서 그런지, 패딩 점퍼만 입고 다니는 게 편하고 좋았어요. 나중엔 모자 없이는 못 나가겠더라고요. 복녀가 서도형 앞에서 모자를 벗는 장면이 있는데 어찌나 어색하던지 벌거벗는 느낌이었어요. 무척 민망했죠. 연기할 때도 안심이 안 되고. 앞치마 안 매면 허전하고. 양수리 별장에서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날리며 서도형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찍을 때는 하도 어색해서 손발이 오글거렸다니까요.”

    “혜결이 같은 딸 있었으면”

    ▼ 마지막 촬영 때 눈물을 보였다면서요.

    “(울먹이는 시늉을 하며) 배우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참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네댓새를 꼬박 새운 끝에 마지막으로 촬영한 장면이, 고속버스에서 내려 달려오는 혜결이와 포옹하는 신이었어요. 동료들과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 저를 엄마처럼 따르던 혜결이를 부둥켜안는 순간, 감정이 복받쳐 올랐어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해는 저물어가니 더 울컥하게 되더라고요. 그걸 마지막회를 방송한 날 오후 5시까지 찍었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복녀님. 복녀님’ 하면서 달려와 안겼어요. 성재 오빠가 그동안 고생했다며 제 어깨를 토닥이니까 또 울컥하고. 다들 헤어지는 걸 몹시 아쉬워하며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 상대역과의 러브신이 빠진 것도 이번 작품이 처음 아닌가요.

    “그러네요. 생각해보니 키스신도 없었고, 포옹신도 없었어요. 손을 잡아주는 정도의 스킨십만 있었어요. 혜결이랑 포옹하는 신은 참 많았는데.”

    ▼ 실제로 스토커가 괴롭힌 적은 없나요.

    “없어요. 남성보다 오히려 여성 팬이 많아요. 대부분이 아줌마들이에요, 호호.”

    ▼ 극중에서처럼 실제로 남편이 외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쩔 건가요.

    “아직 미혼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혜결이 엄마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 것 같아요.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아이 넷을 놔두고 엄마가 자살을 한다는 건…. 극중에도 ‘엄마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대사가 나와요. 그때 복녀가 말하죠. ‘엄마도 여자’라고. 엄마이기 전에 한 여자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 복녀 캐릭터는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던가요.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사실 매일 들고 다니는 마호가니 가방에서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건 뭐든 척척 꺼내주는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일류 요리사 수준의 요리솜씨에 건장한 남자를 들어올려 업어치기를 할 정도로 힘도 세고, 못 푸는 문제도 없고, 가정 일까지 척척 다 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슈퍼우먼이지만 드라마니까 이해 못할 것도 없죠.”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나이 차? 상관없어요, 대화 되는 남자라면”
    ▼ 대역을 썼나요.

    “업어치기해서 넘어뜨리는 장면에선 대역을 썼지만 다른 건 대부분 직접 했어요. 뭐든 잘해야 하니까 종이접기 마술도 배우고, 칼질도 많이 연습했어요. 촬영 현장에서도 수시로 연습하고, 집에서도 오이를 사다가 만날 연습하고. 사실 제가 집안일을 거의 안 해서 칼질을 잘 못했어요. 그렇다고 한두 번 나오는 신도 아닌데 손만 대역을 쓰는 건 내키지 않았어요. 그래서 케이크 만드는 장면도 직접 소화했어요. 송편이나 만두 빚는 것도요. 그건 좀 잘해요. 엄마한테 배운 게 있어서. 감독님도 제가 만두를 척척 빚으니까 깜짝깜짝 놀라시더라고요.”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웃는 모습이 애교가 넘친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여자가 왜 아직 솔로인 걸까.

    ▼ 복녀로 살면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독신주의자는 아니니 언젠가 하겠지만 빨리 해야겠다는 조바심은 들지 않아요. 아직은 솔로 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할까. 촬영할 때도 결혼까지는 아니고, 혜결이 같은 딸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혜결이의 진짜 엄마가 저랑 동갑인데, 그 아이처럼 예쁜 딸이면 키울 만하겠다 싶어요. 애교가 많고 싹싹해요. ‘복녀님, 복녀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하면서 볼에 막 뽀뽀하고 그래요.”

    사랑, 결혼, 소망

    ▼ 어떤 사랑과 결혼을 꿈꾸나요.

    “이번 드라마가 말해주듯 사랑과 결혼에는 책임이 따라요. 사랑과 결혼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하고 있지만 둘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신 내 선택에 후회는 없어야 하니까 신중해야죠. 또 사랑이나 결혼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건 그걸 이어가려는 노력인 것 같아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알아서 해주기만 바란다면 좋은 관계가 지속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나이 들수록 더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글쎄요. 모르겠어요”라며 웃을 뿐이었다.

    ▼ 함께 살고 싶은 남자는 어떤 타입?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요. 나이 차를 떠나 친구처럼 대화가 되는 사람, 무인도에 둘만 있어도 무료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요.”

    ▼ 결혼해도 연기를 계속할 건가요.

    “그러고 싶어요.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근사하고 재미있는 일이에요.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웃음, 행복을 줄 수도 있잖아요. 배우는 매력 있고 보람된 직업인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어요.”

    ▼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에서 유명 연예인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던데, 정계 진출 제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아니요. 관심도 없어요.”

    ▼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그건 얘기 안 할래요. 노코멘트!”

    ▼ 한류 스타로서 바람이 있다면.

    “요즘은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을 노리고 작품을 만든다고들 하잖아요. 근데 국내시장을 배제한 채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배우는 없어요. 저 역시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해외에서 인정받았다고 그게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아요. 우리 국민이 문화 콘텐츠의 질을 판별하는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먼저 자국민에게 인정받는 작품이 많이 나올 수 있게 적극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작품들이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고 믿어요.”

    넉 달 동안 밤낮없이 진행된 고단한 촬영을 끝낸 그는 이제 재충전을 위해 쉬면서 평범한 일상을 즐길 참이다. 줄리아 로버츠 같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보통여자의 삶. 그는 “특히 여행을 좋아한다”며 “아직 약속을 잡진 않았지만 쉬는 동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귀띔했다.

    “한파가 몰려오기 전에 촬영이 끝나 연말을 가족, 친구들과 함께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우선 좀 쉬고 싶고, 좋은 작품으로 팬들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작정하고 오래 끈 적은 없는데 매번 본의 아니게 공백기가 길어져서 벌써부터 팬들이 차기작을 목말라하세요.”

    ▼ 특별히 욕심나는 작품이 있나요.

    “예전부터 사극에 욕심이 있었어요. 기회가 되면 꼭 해보려고요. 어른들을 위한 정통 멜로도 해보고 싶어요.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아닌 어른들의 멜로요. 다음엔 어떤 캐릭터를 할지 모르겠지만 기대가 돼요.”

    ▼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고 싶나요.

    “뭐가 됐든 항상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을 꾸리고 있다면 가족에 충실하고 연기자로 촬영장에 있다면 그 또한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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