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이문세 ‘광화문 연가’

  •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입력2013-12-19 15: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잠자고 있던 옛 기억을 일깨워주는 노래, 듣는 동안 과거를 주유케 하는 노래.
    • ‘광화문 연가’는 바로 그런 노래다. 과거가 아름다운 건 꽃다웠던 그 시절이 다 가버렸기 때문 아니던가. 그래서 추억을 되살리는 광화문과 덕수궁 돌담길은 비극적이다.
    • 이별이 주는 후회와 상처다. 세월 따라 떠난 그 시절 청춘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짧은 인생 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거리와 여인들을 다 음미하고 또 가슴에다 남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적어도 가슴 한 켠에 남아서 가끔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순간순간 떠오르게 된다. 흑백사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루하지는 않고, 조금은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순간들이고 그런 장소들이 있다. 광화문은 우리 세대에게 그런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듯, 특정 장소에도 정드는 경우가 있다.

    노래 ‘광화문 연가’는 이 땅의 기성세대들에게 잠자고 있던 옛날 기억을 일깨워준다. 노래를 듣는 순간만큼은 과거의 세계로 주유(周遊)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꽃다운 시절로 돌아가 입가에 웃음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고 난 뒤가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때문이고, 꽃다운 시절이 아름답다는 것은 꽃다운 시절이 다 가버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는 바로 그런 노래이고 노랫말이다.

    일찍이 미당은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이자 낮달마저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고 노래했다. 그런 위대한(?) 광화문에는 묘한 냄새가 있다. 서울의 심장, 이 웅장한 사거리에는 혁명의 피냄새도 있고, 백성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왕조의 남루함도 배어 있다. 정작 존재감 없는 광화문에 사람의 냄새를 입힌 것은 교보빌딩 정면에 내걸린 글판의 시구절이다.

    “살얼음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사랑하고/ 손을 잡으면 숨결은 뜨겁다.”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교보빌딩에 내걸린 광화문 글판은 삭막한 도심에 온기를 입힌다.

    12월에 등장한 신경림의 시 ‘정월의 노래’다. 1년에 4번 옷을 갈아입는 광화문 글판은 계몽적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는 시구로 바뀌어 등장하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계기가 됐다.

    그런 광화문 글판의 압권은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였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 구절은 연탄재와 함께 웃고 울어온 이 땅의 기성세대들에게 일갈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시구를 탄생시킨 서정 시인은 아니러니하게도 지금은 정치 투사가 되어 세상의 불의에 맞서겠다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강남과는 다른 곳, 광화문

    광화문 글판과 함께 대중에게 감성적으로 먹혀드는 데에는 아무래도 노래 ‘광화문 연가’도 한몫했다고 봐야 한다. 노래는 빌딩 숲으로 숨막히는 광화문 일대에 온기를 입히고 있다. 메마른 도회인들에게 ‘연가’라는 매력적인 단어를 이용해 추억과 낭만이라는 덧칠 작업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는 의미다. 광화문은 누가 뭐래도 서울의 중심이다. 압구정동, 청담동, 강남역 일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광화문을 따라오기는 힘들다. 속성 개발된 강남 거리들이 갖는 한계다. 그런 광화문에는 저마다 사연이 엮여 있었다.

    ‘광화문 연가’는 기성세대에게는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는 노래다. 특히 이 일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오리지널 서울 시민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된다. 개발연대 당시, 도심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해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과거의 명문고들이 신 개발지 강남이나 목동으로 쫓겨가기 전 광화문은 그 시절 청춘들이 몰려다니던 추억의 거리였다.

    북촌 인근의 경기고를 비롯해 서울고,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창덕여고, 창성동의 진명여고, 수송동 숙명여고, 정동의 이화여고, 배재고, 경기여고 등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문 고교들이 광화문 사거리를 빙 둘러싼 형국이었다. 경복고, 중앙고 정도가 아직 남아 있고 중동, 휘문, 양정, 배재 등 전통의 사학들도 개발 바람에 강 건너에 둥지를 틀었다.

    광화문 일대 명문고들이 잉태한 또 하나의 현상은 명문 입시학원이다. 대성, 종로, 정일학원 등 이른바 ‘3대 천왕’ 학원에다 기타 크고 작은 외국어학원까지 가히 청춘들의 용광로에 비견될 만한 요소를 갖추게 된다. 당시 이 일대에는 고고장과 나이트클럽, 음악감상실, 분식센터, 빵집이 넘쳐났으며 거리는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로 비좁았다. 광화문 사거리, 인터넷 예약이 없던 시절, 어쩌다 지금의 동화빌딩 자리에 있던 국제극장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걸린 주말이면 긴 줄이 신문로 덕수제과까지 이어졌다.

    이딸리아노와 돌담길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늦가을날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

    이런 지정학적 변인(變因)과는 별도로 광화문을 낭만스럽게 만든 또 하나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돌담길은 그리 내놓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서울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낭만을 선사하며 버티고 있다. 돌담길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데는 MBC도 한몫했다. 지금의 정동 입구에 있는 경향신문사는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 MBC가 있던 자리다. 고(故)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멋쟁이 건물은 그 옛날 문화관광호텔로 있다가 1977년 3월 문화방송 사옥으로 바뀐다.

    그런 MBC 사옥 건너편에는 ‘이딸리아노’란 양식집이 있었다. 이름이 이딸리아노라고 해서 이탈리아 식당으로 알면 오산이다. 지금처럼 이탈리아 식당, 프랑스 식당, 그리스 식당 등으로 분화되기 전에는 그저 ‘양식당’ 정도로 불리고 또 이해되었다. 방송이라곤 KBS와 MBC, TBC 딱 세 개가 있던 시절, 이딸리아노는 MBC 정문 앞에 위치한 덕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출연을 기다리거나 끝낸 연예인, 당대의 명망가들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흔치 않은 방송 출연에서 오는 흥분을 달랜 뒤 돌담길을 따라 시청 쪽으로 나가 버스를 타곤 했다. 그래서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유명 연예인이나 명사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잦았다.

    이딸리아노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짠해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서울고, 이화여고 졸업생들이다. 아직은 가난했던 시절, 양식당은 장안의 명소였고, 이전하기 전의 서울고와 이화여고의 딱 중간에 자리한 덕에 두 학교 재학생들 간에 정분이 유별났다. 조숙한 이들은 이미 고 1때 언약하고 또 그래서 결혼까지 성공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전해진다.

    후회 또는 상처

    그러나 정작 광화문과 덕수궁 돌담길에는 비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별에서 오는 후회 또는 상처들이다. 그래서 이문세는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이 언젠가는 모두 이별하게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맞다. 세월을 따라 그 시절 청춘들은 모두 떠났고 노랫말처럼 언덕 밑 정동길엔 감리교회만 남아 힘겹게 버티고 있다.

    노래 ‘광화문 연가’의 위력은 다양한 장르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랫말과 비슷한 걸개의 ‘광화문 연가’라는 동명의 뮤지컬도 있고 그림도 있다. 그러나 그림 ‘광화문 연가’는 노래의 서정과는 대척점에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민중화가 임옥상(63)의 작품이다. 2011년에 제작된 가로 456cm, 세로 182cm의 거대한 유화는 그림 전체를 압도한 핏빛으로 인해 보는 이들에게 섬뜩함을 안긴다. 멜랑콜리한 노래 ‘광화문 연가’와 제목은 같지만 억눌리고 폭압적인 느낌은 정반대에 있다.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 추억은 때론 슬픔이 된다
    ‘광화문 연가’는 수많은 가수에 의해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부른 가수와 함께 작곡가의 이름까지 동시에 소개되고, 반드시 언급되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이영훈의 곡이다. 많은 이가 여전히 추억하는 요절 작곡가 이영훈은 ‘광화문 연가’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불리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된다.

    실제로 이문세의 수많은 히트곡은 대부분 이영훈의 콩나물에서 나왔다. ‘옛사랑’ ‘그녀의 웃음소리뿐’ ‘사랑이 지나가면’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붉은 노을’ 등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영훈을 생각하는 묘한 상황이 되고 있다. 서정성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빼어난 곡들이 달랑 한 명의 작곡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새삼 그의 짧은 생을 안타까워한다. 열혈 팬들은 지금도 정동교회 맞은편에 있는 이영훈 추모 노래비를 찾고 있다. 2009년에 세워진 추모비는 검박하지만 광화문 시대를 그리워하는 기성세대들의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추모패에 새겨진 글귀다. 노랫말 때문인가,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 종로서적이 떠오르고 무교동에 있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광화문은 청춘의 한 자락에 그렇게 깊이 새겨져 남았다. 그리하여, 비록 턱없는 센티멘털리즘 때문에 다소간의 과장이 있긴 해도 노래는 광화문 일대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에게 열병처럼 지나온 젊은 날의 그리움과 슬픔을 안겨준다. 장려했느니, 그 시절들, 지나가버린 것은 더 깊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지만, 지금 이 순간 노래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슬픔이 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