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한국인과 서양인의 시간여행

‘열한시’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3-12-19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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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과 서양인의 시간여행

    영화 ‘열한시’의 한 장면.

    영화 ‘열한시’(김형석·2013)는 ‘칼라’(송해성·1999), ‘동감’(김정권·2000), ‘2009 로스트 메모리스’(이시명·2002), ‘인어공주’(박흥식·2004) 이후 오랜만에 나온 시간여행 영화다. 이전의 영화들은 주로 과거로 가는 여행을 다룬 데 비해 ‘열한시’는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을 다룬다. 과거로 가는 여행은 대체로 현재 상황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찾아본다. 현재 상황을 바꾸려는 쪽과 유지하려는 쪽 간의 갈등구조를 그린다.

    이들 영화에서 시간여행은 타임머신이라는 기계가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타임머신 기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과학자도 없다. 등장인물들은 과거와 우연히 마주하고, 영화는 이 때 이들이 보이는 반응과 액션을 주로 다룬다.

    외환위기 사태와 시간여행

    영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마틴 존스는 2007년 ‘시네마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흥미 있는 주장을 폈다. 존슨은 ‘칼라’‘동감’‘2009 로스트 메모리스’와 같은 한국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주로 1997년에서 2001년 사이에 제작된 점에 주목했다. 존슨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클래식’(곽재용·2003),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2001), ‘그해 여름’(조근식·2006) 같은 한국 영화들도 이런 경향에 포함될 수 있다.

    존슨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서구가 이룩한 근대화를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이뤄냈는데 이러한 압축적 근대화(compressed modernization)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제반 문제가 파생됐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라는 것이다. 존슨은 그 직후 나온 한국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현재의 문제점을 근대화 과정에서 찾는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은 발전을 위해 희생된 가치들, 사람들에 대해 애잔한 동정심을 자아내도록 설정돼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비해 ‘열한시’는 과거가 아닌 미래로 간다. 또한 타임머신 및 이를 개발한 과학자들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이전 한국의 시간여행 영화들과 구별된다. ‘열한시’는 물리학자 정우석 박사(정재영)가 러시아에 가서 타임머신 사업 투자유치 설명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러시아 투자회사의 사주는 정 박사에게 “암으로 죽은 당신 아내의 치료제를 미래에서 가져오려고 타임머신을 개발하려는 것이냐”고 묻는다. 정 박사는 “미래에는 암세포 치료제는 물론 줄기세포 복제도 이뤄져 있을 것”이라면서 하반신을 못쓰는 사주의 관심을 끌고 투자 유치에 성공한다. 회사가 소유한 외딴섬의 해저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몇 년간 실험과 연구를 계속하지만 뚜렷한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 회사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연구의 실효성에 회의를 품고 연구원들을 소환하려 한다.

    정 박사는 타임머신이 작동한다는 증거를 제출하기로 회사에 약속한다. 연구소 인원은 정 박사 이외에 물리학 박사인 유지완(최다니엘), 컴퓨터 프로그래머 영은(김옥빈), 투자회사에서 파견한 조 실장(이대연), 그리고 기술직인 박영식(박철민)·문순(이건주)·숙(신다은)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중 정 박사와 영은이 타임캡슐을 통해 크리스마스 오전 11시로 시간이동을 해서 15분 동안 머무르다 돌아오기로 한다.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이긴 하지만 ‘열한시’의 공간 이미지는 우주여행이나 해저여행을 다룬 ‘에일리언’이나 ‘레비아탄’ 같은 할리우드 공상과학영화와 흡사하다. 이러한 영화들은 우주선이나 해저탐사선, 연구소 같은 폐쇄적 공간을 설정한다. 이어 여기에서 괴물체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영화들은 이에 대처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인물들은 맡은 임무에 따라 계급이 갈리며 그 조직은 현대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야기 구조와 인물 설정이 비슷하긴 하지만, ‘열한시’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에일리언’이나 ‘레비아탄’이 낯선 곳에 가서 만나게 된 정체불명의 괴물체에 대한 공포와 폐쇄공포증을 결합한 것이라면, ‘열한시’는 타임머신 기술이 불러일으킨 재앙을 보여주면서 기술공포증(technophobia)과 폐쇄공포증을 연결짓는다.

    서구 공상과학영화에서 기술공포증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오작동 컴퓨터나 기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로 인해 핵전쟁이 터지고 로봇과 인간이 대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영화들 중에는 ‘터미네이터’가 대표적인데, ‘터미네이터’는 미래의 슈퍼컴퓨터가 살인기계에 대항하는 인류의 지도자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타임머신을 통해 현재로 살인기계를 보낸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타임머신을 파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살인기계를 막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주로 다루며 시간여행이나 타임머신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술을 바로잡으면 해결된다는 시각을 담았다.

    억압적 자본, 불확실한 미래

    이런 점에서 ‘열한시’는 타임머신을 다룬 서양 영화들과 다르다. 서양 영화들은 ‘타임머신’을 개발하려는 동기나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타임머신’‘백 투 더 퓨처’‘타임 캅’ 같은 영화를 보면, 그저 과거 혹은 미래 사회에 대한 궁금증이나 시간여행의 가능 여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한다. 그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이에 비해 ‘열한시’는 타임머신 개발에 대해 초국적 자본의 수익 증대라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열한시’는 이렇게 자본의 이윤 추구와 과학 탐구를 연결하면서 자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를 함께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타임머신이 재앙을 초래하는 장면에서 극대화한다. ‘열한시’의 이러한 성향은 할리우드의 공간여행 공상과학영화들과 비견될 수 있다. 공간여행 공상과학영화들은 다른 공간을 식민지화하려는 제국주의적 동기를 담고 있는데, ‘열한시’는 타임머신을 통해 다른 시간을 식민지화하려는 제국주의적 동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

    ‘열한시’에서 결국 실험은 실패하고 연구소의 다수 인물은 죽는다. 유지완과 영은만이 성공적으로 탈출한다. 이들은 미래에서 가져온 폐쇄회로 화면 녹화영상을 보면서 자기들에게 닥칠 불행한 일을 알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 역시 동영상에 기록된 과거일 뿐이다. 그들의 행위들은 그들이 피하고자 한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도록 예정대로 흘러간다.

    ‘열한시’는 정우석, 유지완, 영은이 학생이던 시절에 서로 알게 된 사연을 에필로그로 보여준다. 과거의 그들은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시간여행의 방향을 미래로 선회했음에도 이 영화엔 과거를 더 아름답게 그리는 예전 한국 시간여행 영화의 관습이 남아 있는 셈이다.

    한국인과 서양인의 시간여행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한국의 시간여행 영화들은 미래 사회가 좀 더 편리하긴 하겠지만 유토피아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인간관계는 과거보다 훨씬 덜 순수해질 것이라고 우울하게 전망한다.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鄕愁). 서양인의 시간여행에는 없고 한국인의 시간여행에만 있는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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