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오리엔트 + 옥시덴트’ 터키 돌이킬 수 없는 세속주의로!

  • 안성찬|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story@snu.ac.kr

    입력2013-12-19 16: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13년 터키를 뒤흔든 탁심광장 시위는 터키가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터키의 세속주의는 확고부동하다.
    ‘오리엔트 + 옥시덴트’ 터키 돌이킬 수 없는 세속주의로!

    2013년 5월 녹지 철거에 반대하면서 일어난 터키 이스탄불 탁심광장 시위.

    〈연재를 마치며〉

    ‘동서양의 접점-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연재가 이번 호를 끝으로 마감한다.

    이 연재는 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이 2011년 여름에 수행한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지역 탐사의 수확물이었다.

    문명 사이의 교류는 충돌을 빚어내고 충돌은 교류를 촉진한다. 이것이 지구화 시대의 문명사적 상황을 ‘충돌로 볼 것인가, 통합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동서양 문명교류에서 중심축 기능을 해온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지역은 이에 대한 수많은 예증을 보여주는 인류 문명사의 보물창고다.



    그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현지를 탐사하고 고대 이래의 수많은 기록을 뒤적였다. 이 연재물에는 충돌로 생겨나는 고통을 줄여가며 인간이 이루어낸 지적·육체적 산물을 평화적으로 교류시켜, 세계 여러 지역의 문명이 함께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담겨 있다.



    이 연재를 하는 동안 터키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시위는 ‘오리엔트와 옥시덴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터키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처음 언론은 수년간 이슬람권 국가를 휩쓴 민주화운동의 격랑(재스민 혁명)이 터키에도 밀려왔다고 보도했다. 경찰의 과도한 진압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이슬람권 국가와 달리 터키 시위는 심각한 유혈사태나 정치혁명으로 치닫지 않았다. 정부와 의회, 언론, 시민사회 등 사회세력들 간 복잡한 조율과정을 거치며 수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터키가 많은 과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혈사태가 확산돼 내전으로 치닫는 이슬람 국가가 적지 않은데, 터키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이슬람 vs 군부, 종교 vs 세속

    2011년 초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이 시리아로 확대되면서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와 20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지난 20여 년간 내전에 준하는 상태에 있는 알제리의 상황이 혁명을 겪은 이슬람 국가의 미래가 되리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알제리는 오랜 투쟁 끝에 1962년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해방됐다.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민족해방전선(FLN)을 핵심으로 군부가 독재를 해오다 1988년 민주화 시위로 무너졌다. 1991년 민주 총선에서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압승했으나, 군부가 개입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이슬람구국전선을 불법화했다. 이에 구국전선이 반발해 무장투쟁에 들어감으로써 시작된 내전은 2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빠져 있다. 군부는 관료와 함께 근대적 국가기구를 운영하고자 한다. 반면 이슬람주의는 윤리와 종교를 앞세운다. 이슬람 세계에는 이 둘을 제외하면 다른 대안 세력이 없다는 게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슬람 종교세력이 군부세력의 부패를 공격하며 집권해도, 세속주의보다 더 민주적인 정권을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주의 정권은 국민이 열망하는 사회개혁을 외면하고, 종교적 이념을 앞세워 사회를 다스리려 한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규정된 관습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세속주의 세력은 이슬람주의 정권은 무능하며 근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경제와 복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로 인해 국민의 여론이 갈리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다. 그리고 군부 독재가 장기화하면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아랍의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두 개의 수레바퀴에 비유될 수 있다.

    ‘분배의 광장’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국제도시다. 보스포루스 대교가 거주지역인 아시아와 행정과 상업, 관광의 중심지인 유럽을 이어준다. 유럽지역은 다시 골든혼(황금뿔)이라는 작은 해협을 중심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구시가지에는 하기아소피아를 비롯해 슐레이마니에사원, 블루모스크, 톱카프 궁전, 그랜드바자르, 이집트바자르, 고대박물관 등 주요 유적지가 몰려 있다. 쇼핑과 유흥 지역인 신시가지의 중심은 탁심 광장이다. 탁심광장의 중앙에는 공화국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탑의 중심에는 터키공화국의 국부(아타튀르크)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조각상이 건국 영웅을 새긴 군상(群像)의 한가운데 서 있다.

    ‘탁심’은 ‘분배’를 의미한다. 시내 전역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저수지가 고대 이래로 이곳에 있었던 데 유래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가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부를 적절히 분배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탁심은 터키공화국의 이념을 대변한다. 이 광장은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는 다양한 정치세력의 시위가 끊이지 않는 터키의 정치 1번지이기도 하다.

    2013년 5월 말 시작된 탁심광장 시위가 진압경찰과의 충돌로 격화되자, 언론은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라는 전형적인 프레임에서 사태를 보려고 했다.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었다. 그들은 터키의 정치 프레임이 여타 이슬람 국가와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다.

    시위는, 이스탄불 시당국이 탁심광장에 인접한 게지 공원을 쇼핑몰로 재개발하기 위해 나무 다섯 그루를 뽑아내자 환경운동가가 수십 명이 녹지 보존을 요구한 작은 사건에서 촉발됐다. 이 사건 직후 여러 단체에 속한 활동가들이 공원으로 몰려와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SNS로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자 다음 날 아침 더 많은 시민단체 대표들이 몰려왔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 기동대가 출동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다가 충돌이 격화했다. 그때 빨간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최루액을 분사하는 경찰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버티는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이 사진이 ‘가치 있는 것을 지키려는 평화로운 시위대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하는 공권력’의 상징이 되어 터키 국민과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의 주민 수만 명이 보스포루스 대교를 건너 탁심 광장으로 행진하는 장엄한 광경이 전 세계로 전해졌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 연예인, 지식인들이 동참하거나 시위대에 지지를 표명했다. 국제사회도 평화시위에 대한 지지와 경찰의 강경진압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에르도안 총리의 오판

    이스탄불 행정법원은 공사를 중단하라는 행정조치 결정을 내렸다. 이어 대통령이 “민주주의, 다원주의,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터키에서 다양한 의견과 의제로 대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자 민주사회의 풍요로움”이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사태는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집권당 총리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오만과 오판으로 다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장기 시위가 일어났다.

    이스탄불 시장을 지낸 에르도안은 2001년 이슬람계 정의개발당을 창당하고 2002년 선거에서 압승하며 총리가 됐다. 에르도안은 10년 넘게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국제무대에서도 터키의 위상을 드높이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시위가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개헌을 통해 직선제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에서 그는 시위대의 요구를 무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보스포루스 제3대교 기공식에 참석한 그는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천명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의 수가 급증하고,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그는 시위대를 “약탈자” “사회주의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녹지를 지키려는 환경운동은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대돼 90여 개 도시에서 에르도안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에르도안 총리는 시위를 자신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간주하고, “그들이 10만 명을 동원한다면 나는 100만 명을 동원할 수 있다”고 공언하면서, 친정부 시위를 조직해 반정부 시위에 맞섰다.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은 극심한 갈등과 분열로 빠져들었다. 인명피해가 늘어나자 에르도안 총리를 향한 국내외의 비난이 높아졌다.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정부의 시위진압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유럽연합과 미국 국무성도 터키 당국의 폭력적 대응에 우려를 표명했다. 독일은 ‘시위진압이 계속된다면 터키의 EU 가입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고 해, 두 나라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졌다.

    결국 정부 측은 게지 공원 재개발 조치를 법원의 최종판결과 주민투표에 맡기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경찰력을 동원해 광장 시위대를 해산하면서 소강 국면을 맞았다. 에르도안 총리는 심각한 손상을 입어 대권 도전은 힘들게 됐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 시위를 세속주의의 반발로 보는 것은 정의개발당이 친이슬람계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터키의 정치 구도는 단순하지 않다. 정의개발당을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정당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정의개발당이라는 당명에서 ‘정의’는 이슬람 윤리의 근본정신과 세속주의적 경제개발을 결합한 것이다. 모순돼 보이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함으로써 정의개발당은 창당 1년 만에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11년 연속 과반 의석을 확보해 안정된 정부를 운영하는 신화를 일궈냈다.

    신자유주의+보수주의+권위주의

    ‘오리엔트 + 옥시덴트’ 터키 돌이킬 수 없는 세속주의로!

    경찰이 쏘는 최루액을 정면으로 맞으며 버티는 여성. 이 사진은 탁심광장 시위가 확산되는 도화선이 됐다.

    군부의 정치 개입과 잦은 정권 교체로 극심한 정치 불안정을 겪어온 터키의 현대 정치사를 볼 때 이는 경이로운 일이었다. 에르도안 총리하에서 터키의 국내총생산(GDP), 국민소득, 무역규모는 3배 이상 증가했다. 터키는 단숨에 세계 17위, 유럽 6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1990년대까지 연간 100% 내외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던 물가는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에르도안 정부가 이끄는 터키는 G20(주요 20개국) 회원국이 되고, EU 정회원 후보국 지위를 획득하는 등 대외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군부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쿠르드족과의 갈등도 완화해 민주주의 신장에도 많은 성과를 냈다. 2011년 말~2012년 초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터키 국민은 정의개발당이 경제발전, 복지, 민주주의, 쿠르드족 문제 등 정치 현안에서 공화인민당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했다.

    공화인민당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창당한 정당으로 세속주의를 당의 핵심강령으로 삼고 있다. 정의개발당은 공화인민당 등 많은 정당이 난립한 터키의 정치판에서 시위사태 직전까지 5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최근 정의개발당이 종교교육 확대, 학교에서의 히잡 착용 용인, 밤 10시 이후 술 판매 제한, 공공장소에서의 키스 금지 등 몇 가지 친이슬람 정책을 펴 세속주의 세력의 반발을 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아타튀르크가 초석을 놓은 세속주의는 이미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터키에서 이것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여러 이슬람권 나라에서는 여성에게 얼굴과 몸의 대부분을 가리는 차도르와 부르카의 착용을 법적으로 강요한다. 반면 터키에서는 머리에 두르는 히잡을 착용하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세속주의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독실한 이슬람 여성이 오히려 이에 반발해 히잡을 두르고 등교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것이 터키의 상황이다. 정의개발당이 히잡 규제를 완화하려는 것은 세속주의적 규제를 과도하다고 여기는 이슬람 신도들에게 영합하려는 정책에 따른 것이다. 정의개발당이 추진하는 친이슬람 정책은 국민의 99%가 무슬림인 터키의 상황을 고려한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게지 공원 개발은 정의개발당이 추진하는 정책의 실체를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다. 시당국은 공원을 밀어버리고 오스만 제국 시대의 화려한 군대 병영을 재건해 쇼핑몰로 이용하려고 했다. 이슬람이 지배한 오스만 제국에 대한 향수와 신자유주의적 이윤 창출을 교묘하게 결합한 개발계획이었다. 광장에 모여든 시위대가 반대한 것은 이슬람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개발정책이었다.

    정의개발당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해결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저임금과 유럽시장의 관문이라는 두 가지 장점을 이용한 해외 자본 유치로 무역 적자를 해결해왔다.

    현대자동차가 터키의 최대 항구도시 이즈미르에 공장을 세우고 최근 확장한 것이 그 일례다. 2008년 불어닥친 미국발 경제위기로 제조업 투자가 하락세를 보이자 에르도안 정부는 공공재를 매각하고 민영화해 재정적자를 메웠다. 건설과 토건사업을 일으켜 경기를 부양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게지 공원의 쇼핑몰화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에르도안 정부가 당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단기간의 고도성장으로 인한 상대적 불평등의 심화다. 집권당은 친이슬람 정책을 펴서 절대 다수인 무슬림의 환심을 사고, 다른 한편으로 파업과 반정부 시위를 사회주의 테러리스트의 책동으로 매도하고 탄압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불만에 대처해왔다. 정의개발당은 세속주의적 신자유주의, 이슬람 보수주의, 정치적 권위주의라는 3가지 정책을 기반으로 터키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래의 세계사는 서구가 힘을 앞세워 그들이 이뤄낸 ‘문명(civilization)’을 세계 전역으로 팽창시켜가고, 비서구 지역은 그에 대응해 힘겹게 고투해온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서구 지역의 대응은 서구가 만들어낸 문명의 힘을 인정해 이를 자기화하는 것과 서구의 ‘물질주의 문명’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요약된다.

    터키가 보여준 ‘가능성’

    이슬람 문화권에서 전자의 대응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세속주의이고, 후자의 대응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이슬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완전히 화목해지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손을 잡고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이라고 하겠다.

    터키공화국의 세속주의 원칙은 타계한 지 75년이 지난 국부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권위에 의존한다. 그는 세속주의, 공화주의, 국민주의, 개혁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6가지 이념을 그가 창당한 공화인민당과 그가 주도해 입안한 공화국 헌법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 6가지 이념의 근간이 세속주의다.

    오스만 제국의 흥망성쇠는 서구와의 충돌의 역사였다. 15세기에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점령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발칸반도 등 지중해 남부와 동부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된 오스만 제국의 목표는 유럽 지역까지 정복해 지중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이슬람의 로마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를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공격하기에 이르러 서유럽 진출을 목전에 뒀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연합군을 결성해 1529년과 1683년 두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 군대에 포위된 유럽의 관문 빈을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18,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에 영토를 빼앗기면서 쇠퇴하다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충돌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중해 동부와 남부 지역 전체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은 동서 문물교류의 중심축이었다. 특히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을 독점할 수 있게 해준 오스만 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제국에 막대한 이익과 부를 안겼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우회해 동서교역에 직접 뛰어들고자 했던 유럽의 열망은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18세기 오리엔트와 옥시덴트 사이의 역학 관계가 역전된 후 오스만 제국은 유럽이 발전시킨 과학기술문명의 힘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 수용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이스탄불의 돌마 바흐체 궁전과 오리엔트 특급열차로 상징되는 철도 건설이 대표적이다.

    교역의 현장에 있던 기술관료와 상인, 충돌의 현장에 있던 군인들은 서구 문명이 지니게 된 힘의 실체와 이슬람 전통이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한계를 꿰뚫어 봤다. 세속주의적 개혁은 바로 이들이 주도했다. 전쟁터에서 서구의 힘을 체험한 엘리트 장교들이 중심에 있었다.

    기반은 세속주의

    술탄의 전제적 지배에 반대하는 연합진보위원회(CUP)를 조직해 ‘청년 튀르크’ 운동을 주도한 것이 서구식 근대교육을 받은 엘리트 청년 장교단이었다. 이 운동에 동참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세속주의적 개혁은 이러한 진보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터키가 민주주의의 기반인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오리엔트와 옥시덴트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아 이슬람 국가의 모델로 성장한 것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시작된 세속주의적 개혁운동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3년 터키의 반정부 시위는 이슬람문화권의 세속주의 국가 터키가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겪고 있는 진통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터키의 미래는 근대화 과정에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