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법은 밥보다 가깝다

  • 입력2013-12-20 10: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당신은 지금까지 계약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해봤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어떤 이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다가 “서너 번”이라고 답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아직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계약을 하고 삽니까?’라고 다시 물으면 대부분 ‘하루에 몇 번? 나를 무슨 부동산 중개업자로 생각하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법은 일상이다

    회사원 이평범 씨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월요일 아침. 늦게 일어난 이 씨는 후다닥 출근 채비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교통카드를 갖다 대고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한다.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침식사로 샌드위치 1개와 아메리카노 1잔을 사들고 사무실에 도착한다. 업무를 보다가 지난주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본 캐나다산 거위털 파카가 계속 눈에 어른거려 결국 쇼핑몰에서 거금을 들여 구입한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회사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 백반을 시켜 먹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담배 한 갑을 산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증권회사 사이트에 들어가 갖고 있던 주식 일부를 매각한다. 오전에 비싼 옷을 산 것을 벌충하기 위해서다. 근무를 마친 이 씨는 버스를 타고 친구와의 저녁약속 장소로 가서 소주 한잔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친다.

    이평범 씨가 이 월요일 하루 동안 업무가 아닌 일상 중에 계약을 몇 번이나 했을까. 정답은 ‘최소한 9번’이다. 먼저 이 씨는 이날 3건의 여객운송 계약을 체결했다. 출근할 때 지하철, 저녁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갈 때 버스, 귀가할 때 택시, 이렇게 3번이다. 그리고 3건의 물품구매 계약을 했다. 출근할 때 샌드위치와 커피, 인터넷 쇼핑몰에서 의류, 점심식사 후 담배 1갑을 구매했다. 여기에 점심과 저녁 2건의 음식물 공급 계약 내지 식당이용 계약, 마지막으로 주식거래 계약 1건을 체결했다.

    평생 서너 건의 계약을 해봤다거나 아직 경험이 없다고 말한 이들은 계약이라고 하면 부동산을 사고팔 때처럼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 신분증을 주고받거나 공증을 받는 정도는 돼야 ‘계약’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착각이다. 두 사람이 무엇인가를 대가로 무엇을 해주기로 하는 약속은 대부분 계약이다. 우리 국민 중 3500만 명 이상이 체결했을 이통통신 계약은 휴대전화 요금을 내면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게 해주겠다는 계약이고, 4000만 명 이상이 체결했을 은행거래 계약은 돈을 맡기면 계좌를 만들어주고 이자를 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이다. 이통통신, 보험, 은행거래, 신용카드 등은 우리 경제생활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수단들이고, 이들은 모두 계약이 없으면 이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없이 체결되는 계약

    휴대전화나 보험은 계약서라도 있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또 식당에서 음식 주문할 때는 무슨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계약이라고 할까. 꼭 부동산 계약같이 인감도장을 찍진 않지만 최소한 사인이라도 들어가는 휴대전화, 신용카드 계약까지는 계약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교통카드가 든 지갑을 ‘툭’하고 찍고, 손을 들어 정차한 택시를 타고 “○○으로 갑시다”라고 하는 게 고작인 상황을 가리켜 계약하는 것으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그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생겼다고 하자. 지하철공사는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해 치료해줄 것이고, 부상자들은 손해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지하철공사가 언제 승객들에게 부상당하면 치료해줄 것이고 피해배상을 해주기로 한 적이 있는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부상 승객에 대한 치료와 배상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지하철공사와 승객 간에 여객운송 계약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지하철 여객운송 계약은 승객이 교통카드를 인식장치 위에 댄 순간 체결된다. 그래서 지하철공사의 여객운송 규정도 “교통카드 이용자는 교통카드를 개찰한 때에 계약이 성립된다”고 정하고 있다. 택시운송 계약은 승객이 손을 들어 차를 세운 후 행선지를 말한 순간, 식당의 음식공급 계약은 주문을 하고 종업원이 “네” 하는 순간 체결된 것이다. 이렇게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승객은 운임이나 식대를 지불할 의무가 생기고 운송회사는 목적지까지 승객을 안전하게 운송할 의무를 지고, 식당은 안전한 음식을 제공할 의무를 진다.

    계약과 같은 법률행위에는 반드시 계약 당사자가 계약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해야 하는데, 의사 표시는 꼭 말이나 글로 할 필요가 없다. 지하철, 버스, 택시처럼 같은 내용의 계약이 극히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특별한 경우에는 행동으로 하는 것도 인정되는 것이다.

    ‘법은 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밥은 하루 세끼 먹고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만, 계약은 그보다 훨씬 더 자주하는 것이고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 법은 밥보다 더 가깝고 중요하다.

    함부로 도장 찍지 마라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에선 법과대학에 가지 않으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6년을 공부해도 계약이 무엇인지, 계약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가 없다. 청소년과 청년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계약을 경험하게 된다. 보통 은행에서 자기 명의의 계좌를 만들 때 또는 자기 명의의 휴대전화나 신용카드를 개설할 때 처음 계약서를 써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계약은 모두 은행이나 통신사가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채워 미리 인쇄해둔 계약서 종이에 직원이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몇몇 곳에 자기 이름을 쓰는 방식으로 체결된다. 제대로 한 번 읽어볼 여유도 가지지 못한 채. 읽어보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당할 것이다. 처음 하는 계약을 이런 식으로 대충 넘기게 되니 그게 계약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계약서는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사인만 하는구나’ 하는 인식이 심어지는 것이다. 반복되는 경험은 학습되고 급기야는 몸에 새겨지는 체화(體化)에 이르게 된다. 일단 체화하면 다시 바꾸기가 대단히 어렵다.

    2000년대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휩쓴 재개발, 재건축 광풍 때 조합이 만들어 온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은행에서 하듯 형광펜 칠한 곳에 서명을 마구잡이로 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전 재산과 같은 자기 집을 내주고 몇 푼 안 되는 돈만 쥔 채 쫓겨나게 된 주민들이 속출했다. 뒤늦게 문제를 알고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소송을 하고 하소연해보지만 자기 손으로 단 몇 초 만에 찍은 도장이나 서명을 뒤집는 데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계약은 이런 것이다. 한순간에 찍은 도장 하나가 자기 인생과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휴대전화, 신용카드, 인터넷 개설과 같이 우리 국민 중의 1000만 명 이상이 같은 내용으로 체결하는 계약은 훨씬 덜 위험하다. 정부가 감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표준적인 계약이 아니고, 가령 자신의 1년 수입이 넘는 금액이 걸린 계약이라면 계약서를 처음 본 그 자리에서 바로 도장을 찍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일단 집으로 가져와서 한 번 더 읽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확인하고 체결해야 한다.

    상대방이 급하다고 하면? 그런 정도의 검토할 틈도 주지 않고 재촉하는 상대방은 십중팔구 사기꾼일 것이고, 사기꾼은 상대방이 반쯤 넋 나간 상태에서 계약서에 사인하게 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도 계약을 서두르겠는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기억하고 계약서 쓸 때 조심하자고 마음먹더라도 막상 ‘계약서’라고 이름 붙은 계약을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 ‘계약서라는 제목이 없는 것은 계약이 아닐 테니 대충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계약은 상호간 약속이라고 했다. 계약 당사자의 약속 내용이 들어 있기만 하면 제목이 뭐든 모두 계약이라고 보면 된다. 차용증, 현금보관증, 확인서, 하다못해 부부간에 써주는 각서도 계약이 될 수 있다. 재건축조합에서 써주는 ‘동의서’라는 것도 계약서다. 이에 대해혹자는 공증을 안 하면 효력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면지에다 끼적끼적 쓴 것도 서명이 있기만 하면 강력한 계약서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에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문서는 일단 두 번 세 번 읽고 생각해보는 것, 이건 결코 지나친 행동이 아니다.

    소위 문명국가는 예외없이 법이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기본 법체계는 예부터 전해져온 전통 법체계가 아니라 광복 이후 독일, 프랑스 등의 대륙법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법의 틀을 갖춘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국민의 몸에 배지 않아 ‘법 따로, 사람 따로’의 분열상을 못 벗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이 가장 반가운 족속은 사기꾼이 으뜸일 것이요, 덕분에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변호사, 판검사들이 두 번째일 것이다.

    교육을 바꿔라

    법은 밥보다 가깝다
    우리 국민이 지금과 같은 법과 인식의 분열적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고등학교 과정에서 서너 시간이라도 계약과 관련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사회시간에 배우는 삼권분립이니 대통령제니 의원내각제니 하는 내용은 알면 도움이 되는 교양이지만 계약에 관한 지식은 모르면 인생에서 실패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필수적인 내용이 돼야 한다.

    지난 4년 가까이 ‘신동아’에 우리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법률 문제들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독자 여러분이 내 글을 읽고 ‘아, 법이 먼 것만은 아니고, 어려운 것만도 아니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면 매월 마감에 쫓겨 진땀 흘린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밥보다 가깝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