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삶의 우직함, 견고함에 대하여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1-23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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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차역의 낭만이란 둘러보는 이의 감상일 뿐이다.
    • 역무(驛務)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직업이다.
    • 철도원의 삶을 떠올리면서 숙연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전북 익산 춘포역

    겨울 오후, 나는 지금 임피역에 앉아 있다. 사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아주 한참을 기다려야 철로 위로 무심히 기차가 지나가는데, 인적 없는 역사에 앉은 나는…. 아! 이렇게 쓰고 나니 그럴듯해 보이는데, 실은 역사 바깥에 커다란 개 네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필시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들개는 아닐 텐데 그래도 바깥으로 나서기가 꺼려진다. 내가 이 작은 역에 도착할 때부터 역사 안팎을 뛰어다니던 녀석들은 이제는 아예 역사 앞 잔디밭 터줏대감처럼 군림하며 불청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골든리트리버를 꽤 오래 길러본 일이 있어 웬만한 대형견이라 해도 겁먹을 일은 없는데, 오가는 사람 거의 없이 극단적으로 조용하고 어두운 역사 앞을 지키고 선 네 마리의 대형견은, 선뜻 문 열고 나서기 어렵게 했다.

    차라리 잘됐다, 그런 심정으로 역사 안에서 더 머물렀다. 벼르고 벼르다가 일부러 찾아온 곳이 아닌가. 군산이나 전주 쪽으로 일이 있을 때 꼭 한 번은 이 일대의 간이역을 둘러본다 했으나 기어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다 새해 벽두에 강의가 있어 전주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 군데 작은 역들을 둘러보는 중이다. 역사 안에는 옛 시절의 기차 승객을 실물 크기로 세워놓은 조형물이 있는데, 조형적 판단을 떠나서 텅 비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 고생 많이 해 생긴 주름살에 평범한 형상들이라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일부러 좀 더 앉아 있었다.

    어릴 적 꿈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전북 군산시 임피역 인근 철도건널목.

    아주 어릴 적, 나는 기관사가 되고 싶었다. 아홉 살 때, 서울로 온 가족이 다 올라오는 바람에, 내 유년의 기차역은 바로 그 나이 때의 경북 풍기역으로 일단 멈춰버렸지만, 기억의 저 희미한 터널 끄트머리에 유년의 내가 풍기역에서 끝도 없이 뻗어 있을 것만 같은 안동 방면의 기찻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의 기품 있고 의연한 걸음을 따라 풍기장에 들렀고, 역전에서 놀다가, 역사 안에서 놀다가, 틈을 봐서 기차가 섰다 떠나가는 곳까지 나갔다가, 다시 역사 안으로 돌아와 지쳐서 가만히 앉아 있던 희미한 기억들.

    좀 더 커서는 강원도 함백역 일대가 기억의 창고를 채웠다. 탄광지대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첩첩한 곳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역도 언덕 위에 있었고 레일도 저 높이 산간 허리를 뚫고 지나갔다. 탄광지대의 사촌동생들하고 한참 놀다 보면 갑자기 기적이 울리고, 저 산간 허리의 연속된 터널을 우람하게 관통하며 화차들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순간, 멈춰 서서, 기관차에 줄줄이 매달려가는 화차의 수를 셌다. 하나 둘, 일곱 여덟…열넷 열다섯…. 그러다가 스물이 넘어가면 헷갈리기 시작하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직선으로 첩첩의 산을 관통하는 화차의 행렬을 그저 경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화인처럼 찍힌 이미지들 때문에 아! 기관사가 되어야지, 그런 생각도 했더랬다.



    열차 기관사가 되기 위한 정식 코스로부터 탈선한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기차와 관련된 모든 직업이 낭만의 꿈으로 흐려져버리고 말았다. 멋진 제복을 입고 승차권에 구멍을 찍는 역장이 되고도 싶었고, 최인훈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선로 고치는 기사도 되고 싶었으나 실은 그러한 일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도 잘 몰랐고 그 일을 제대로 하려면 우직하고 견고한 심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가서 그 힘든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학교부터 진학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세월로 너무 많이 미끄러져 오고 말았다.

    명예역장

    그런데 2009년, 놀라온 정보를 들었다. 역장을 공모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간이역의 명예역장을 뽑는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코레일은 무인역(직원을 배치하지 않는 간이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일반인에게 기차 문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전국 31개 무인역의 명예역장을 뽑는다고 했다. 당시 집계로 전국에 180여 개의 무인역이 있고 그중에서 문화재로 등록된 3개 무인역과 열차가 정차하는 28개 무인역 등 총 31개역을 선정해 명예역장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정말 비통하게도 정작 내가 그 정보를 접했을 때는 이미 공모 절차가 다 끝난 다음이었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으랴. 게다가 자격 조건도 ‘철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제한 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당시 코레일은 철도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 해당 역 인근 주민, 퇴직한 철도 직원 등을 우대해 선발한다고 했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간 날 때마다 기차역 다니기를 밥 먹듯이 하고 경향 각지로 일을 보러 갈 때마다 인근의 기차역은 빠짐없이 들르는 데다 기차와 기차역 그리고 기차 일에 역무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로 써왔으니, 이 정도면 영혼의 자격쯤은 갖췄다고 자부하는 터였으나, 하필 그 공모는 진즉에 끝난 다음이었다.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전북 익산시 춘포역에서 공공미술 작업을 하는 정강희(50·오른쪽), 고성미 작가(39)

    명예역장의 임기는 1년이고 연임도 가능하며 역장 제복과 신분증, 명함까지 나온다 했으니 만약 역장이 되었다 하면 내 평생 그런 자긍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었을 것이며 역장의 액자사진과 프로필을 대합실 벽에 걸어준다고 했으니 이는 필시 고이 간직해 가문의 유산으로 남길 만한 일이었다.

    명예역장은 주기적으로 자기가 맡은 역을 방문해서 역사 주변을 정돈하고 시설물을 관리하고 더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안내도 하는 게 기본 업무인데, 만약 내가 소박한 마을의 작은 간이역을 맡게 되었다면 소홀히 방치됐던 무인역을 마을의 쉼터로 만들고 서울의 문화판에서 맺은 인연을 ‘남용’해 철 따라 공연도 열고 시 낭송회도 열었을 것이다. 너무 소문나서 떠들썩해지는 것은 막으면서, 그저 그곳에 사는 주민의 쉼터가 되고 어쩌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나 조용하고 느린 곳을 찾는 사람들이 물어물어 찾아와서 다리쉼을 하다가, 철로를 걷다가, 화장실도 이용하고, 사진도 찍고, 그렇게 한숨 쉬어가는 간이역 역장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사실 지금이야 무인역에 폐역까지 되는 신세지만 근대사 속에서 지금의 간이역은 당시의 중요한 교통 거점이었다. 비록 일제에 의한 역사적 작동이지만, 20세기 초 근대화와 초기 산업화의 시작은 중요 교통수단으로 기차가 다닌 것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기차는 산업의 기간이었고 생활의 통로였고 문화의 집산이었다. 한반도 곳곳에 기찻길이 놓이고 그 위를 여객차나 화차가 질주하게 되는데, 그 관절이 되는 역들은 산업의 측면에서나 일상 교통의 측면에서나 중요한 거점 지역이 되는 곳에 생겨났다. 그러하지 않은 곳으로는 기찻길이 놓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신문화가 사방으로 확산되고 각지의 사람과 정보와 물산이 거점으로 수렴되었다가 중앙으로, 또 저 멀리, 만주까지 이송되었다.

    그러니 간이역은 작은 쉼터 정도만이 아니라 근세기의 산업과 생활과 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꽤 많은 간이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근세기의 건조물이나 시설물 가운데 기념하고 보존해야 할 것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데 간이역은 지역 역사와 문화의 상징 거점이라는 점, 당대의 건축 조형 양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화랑대역(경춘선), 일산역(경의선), 팔당역(중앙선), 구둔역(중앙선), 심천역(경부선), 남평역(경전선), 율촌역(전라선), 동촌역(대구선), 가은역(가은선) 등이 그렇다.

    간이역의 값어치

    그중 많은 곳을 다녀보았다. 부산 해운대역처럼 폐선의 운명으로 역사마저 사라질 것 같은 곳이면 어김없이 가보았다. 하늘아래 첫 간이역이라는 태백의 추전역, 경원선의 남한 측 최북단이 되는 신탄역, 도로가 없어 철로가 아니면 접근이 어려운 봉화의 승부역, 근대 문학이 그 이름으로 살아 있는 김유정역, 곽재구 시인의 걸작 ‘사평역에서’의 무대로 알려진 나주의 남평역, ‘이별의 골짜기’란 뜻을 가진 정선의 별어곡역, 서천화력발전소를 위한 철로지만 휴가철에는 춘장대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달리기도 하는 춘장대역, 내 고향 풍기의 소백산 중턱에 있는 희방사역, 그밖에 공전역, 함백역, 곡성역 등을 일부러 찾거나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들렀다.

    이번 행로도 그런 일환이다. 전주에서 일을 마치고 임피역으로 오기 전에 익산 쪽으로 먼저 들러 그 곁의 작은 간이역, 춘포역에 먼저 들렀다. 기록에 의하면 춘포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이다. 1914년 영업을 개시했다. 지금은 폐선이 되었고 작은 춘포역 뒤로 신작의 거대한 철로가 강건하게 뻗어 있다.

    춘포역의 옛 이름은 대장역. 이 일대의 옛 이름, 즉 일제강점기 당시의 이름이 대장촌리(大場村里)다. 작은 역사 안에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의 식민 산업화 일환의 포스터가 기록적 가치 차원에서 붙어 있다. 익산시가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원래 지명을 찾기 위해 조례를 개정해 1996년 1월 1일 이후로 춘포면 대장촌리가 춘포면 춘포리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역 이름도 바뀌었으나 2007년 6월부터 폐선돼 여객도 화물도 취급하지 않는다.

    춘포역의 서정

    이미 예고된 운명이었다. 1997년 6월 1일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2004년 12월 10일에 무배치 간이역으로 또 한 칸 내려갔으며 2005년 11월 11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긴 했으나 2007년 6월 1일 여객 업무가 중단되었고 2011년 5월 13일부터 전라선 복선 전철화 사업에 따라 완전히 폐역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지어진 춘포역은 그 역사적, 문화사적, 건축적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는 문화재적 보존가치 및 문화관광 활성화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시도한다.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전북 익산시 춘포면의 가옥을 활용한 공공미술 작품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폐선이 된 철로에 낡은 표지판이 서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춘포면에서 역으로 꺾어 들어오는 길에 보니, 주택가 담벼락에 춘포역 및 철도 문화와 관련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한눈에도 제법 솜씨 있는 사람들이 일부러 엄선하고 간격과 위치와 크기를 고려해 세심하게 신경 써서 붙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사진 하나씩을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역사 가까이 오니 두 사람이 역사 바로 앞의 담벼락을 정돈하고 있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약속도 없이 찾아온 길이었는데 운 좋게도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가꾸는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기억하고 남기는 것

    “익산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일인데, 우리 같은 예술가에게 의뢰가 온 것이다. 익산시와 익산문화재단이 올해로 건립 100주년을 맞는 춘포역을 재조명하고 이를 역사적으로나 관광명소로나 활성화하자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그 일환으로 지역의 사진가, 조각가들이 힘을 합쳐서 역사 안팎을 새로 꾸미는 중이다.”

    정강희(50) 전북조각회장의 말이다. 춘포역과 관련한 조형물을 설치하고 김재관 사진작가가 기증한 110여 점의 간이역 사진을 설치하는 중이다. 충남 천안의 자동차부품연구원에서 일하는 김재관(54) 씨는 10여 년 동안 흑백필름으로 간이역을 찍어왔다. 그중 116점을 익산문화재단에 기증한 것이다. 익산문화재단은 장차 춘포역을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등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 작은 역사 안에서 각종 문화 공연이나 어린이를 위한 미술학교 등이 운영될 예정이다. 역사 안에 들어가보면 벌써 작은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이 역을 중심으로 펼쳐질 예정”이라고 고성미(39) 작가는 말한다. 정강희 작가와 더불어 춘포역사 일대의 공공미술 작업을 하는 중이다. 쌀쌀한 날씨에 야외에서 작품과 접착제와 페인트를 가지고 작업을 하던 터라 미술가 특유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 어울려 보였다.

    정강희 작가는 역사 앞에 서서 좀 더 힘을 줘서 말했다.

    “전남 곡성에 가면 기차만 가지고 관광이 가능할 정도로 해놓았다. 여기가 그만큼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외지의 관광객 유입만을 생각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춘포라는 작은 마을과 이 작은 역에 오랜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남기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이 이 역에서 큰 도시로 일하러도 가고 공부하러도 가고 그랬다. 그런 기억들을 최소한 망각되지는 않도록 하는 게 우리 일이다.”

    우직하고 견고한 삶

    전주와 군산을 직선으로 잇는다 해 ‘전군가도’라고 불리는 도로의 한복판이 춘포다. 28번 국도가 바로 전군가도다. 이 전군가도는 1908년 10월 완공된, 일제가 식량 수탈의 목적으로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 포장을 한 직선의 도로다. 그야말로 최초의 신작로인 셈이다. 봄철에는 길고 긴 벚꽃길로 장관을 이룬다. 만경강을 중심으로 해 드넓은 곡창지대가 펼쳐지는 곳이어서 직선의 가도와 전주선 철도가 놓였으며 춘포역이 그러한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오래전에는 군산 앞바다에서 만경강을 따라 나루터가 들어와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던 일본인 호소카와가 이 곡창지대에 ‘대장촌 농장’이란 이름을 붙였고 일본의 야마모토현에서 많은 일본인이 이주해 일하던 역사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그 건축 유산들이 만경강 일대에 산재한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러 서둘러 담벼락으로 되돌아간 작가들을 뒤로하고 역사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춘포역은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진 지붕)의 목조 구조로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건축 기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일제강점기의 작은 역들은 대개 춘포역을 전형으로 삼아 건립됐다. 익산 일대 최대의 곡창지가 다름 아닌 춘포였으니 춘포역사는 어떤 의미로든 보존하고 기억해야 하는 장소다.

    덧없이 오후를 핥고 지나가는 겨울 해를 걱정하며 임피역으로 이동했다. 임피역도 2008년 5월부터 여객 운송 업무가 멈췄다. 기차체험 공간, 간이 테마공원, 잔디밭, 연못 그리고 기차 두 량이 설치돼 있지만, 인적이 끊긴 간이역은 쓸쓸하고 더구나 큰 개 네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역무실 안에 누군가 있었다. 나는 몇 마디라도 들어볼까 하다가 최근에 읽은 어떤 기사의 석연치 않은 내용 때문에 관두었다. 임피역에 코레일에서 선임한 명예역장이 있었다. 2009년 6월, 전국 31개 무인역에 대한 ‘명예역장 공모’ 때 선발돼 지금까지 무보수로 명예역장을 해온 사람이다. 그런데 군산시가 기간제 근로자 신분의 임피역 관리인으로 전 시의원을 따로 선임하면서 불편해진 것이다. 역사의 일부를 빌려 쓰는 군산 시에서 보낸 관리인과 비록 ‘명예직 신분’이나마 5년이 넘도록 역사 일대를 관리해온 33년 철도공무원 기장 출신의 명예역장이 불편하게 동거하는 일이 이 작은 임피역의 미묘한 문제다. 잠깐 들렀다 가는 외지인이 그러한 문제까지 탐문할 수는 없어서 나는 그저 좀 더 오래 역사에 머무르기만 했다. 큰 개 네 마리는 여전히 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결코 철도원처럼 살 수 없으리라

    충남 서천군 춘장대역.

    문득 작은 역에서 평생 기차소리를 들으며 일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생각나는 영화 한 편, 일본의 국민배우로 일컬어지는 다카쿠라 겐이 주인공을 맡은 ‘철도원’. 1년 중 절반이 눈으로 뒤덮이는 일본 북해도의 작은 마을 호로마이. 그곳의 간이역장 이야기다.

    주인공은 평생 호로마이 간이역을 지켰다. 그에게는 시간 엄수가 평생의 지침이었다. 1분이라도 늦으면 큰 사고라도 난 것처럼 여기는 일본의 교통문화, 나아가 일본인 특유의 작고 미세한 것에 대한 집요한 관념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영화에서 간이역장은 자기 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선로 곁에서 보내야만 했다.

    눈꽃처럼 아름다운 아내가 딸을 출산할 때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선로 곁에서 역무를 보았다. 눈송이 같았던 그 아이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열병에 걸린다. 급히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역장은 선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내가 딸의 시신을 안고 돌아왔을 때도 그는 역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아내마저 병을 얻어 입원하는 날에도 그는 역을 지켜야만 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겨울이라 찾는 이 없이 어두워져가는 임피역사를 둘러보니 명예역장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마저 사치스러워 보인다. 역무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직업이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지점에 서 있어야만 한다. 기차역의 낭만이란 잠시 둘러보는 이의 감상일 뿐이다. 그런 일을 감당한다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절제를 요구한다. 우직하고 견고한 삶, 단 한 번뿐인 삶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숙연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살 수 없다면, 그렇게 사는 삶을 존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제야 나는 임피역을 나올 수 있었다. 컹컹 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것을 보니 큰 개들은 제 갈 곳으로 간 모양이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서해를 한 번은 보고 귀경하고 싶었고 그래서 서천의 춘장대역으로 차를 몰았다. 서천화력발전소를 위한 간이역이므로 일반 여객 업무는 원래 보지 않는 곳이다. 여름에 피서열차가 잠시 운행되는데 그것을 위한 그림들이 아기자기 그려져 있다. 역 좌우의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름한 집들 지붕을 좀 더 지켜보다가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겨울 바다,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식당에도 나 혼자였다. 혼자 해물칼국수를 시켜 먹고, 다 먹고 나서, 2000원 하는 축포를 하나 사서, 텅 빈 바닷가로 가서, 검은 하늘을 향해 피슝피슝 스무 발을 싱겁게 쏘아 올린 후,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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