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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단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다시 들여다보는 분단 책임

  • 최영호 | 하와이대 명예교수∙역사학

‘한반도 지속 지배’ 일본의 망상 만주 이권 노린 소련의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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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참전 약속

1945년 2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얄타에서 제2차 거두회담을 가졌다. 독일의 패배가 눈앞에 보이던 터라 전후 유럽 문제가 주된 논의 대상이었다. 전후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합의를 내놓았는데, 우리는 이 합의에서 한반도 분단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 2월 11일 회담에서 세 정상은 ‘소련의 대일전쟁 참여에 관한 협정’에 합의했다.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한 후 2개월 혹은 3개월 이내에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첫째, 스탈린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는 테헤란에서의 약속을 거듭 확인했으며 공식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탈린의 야망이다. 스탈린은 일본이 1904년 러시아를 상대로 ‘배신적 공격(treacherous attack)’에 나서 빼앗아간 러시아의 권리를 회복한다는 사실을 협정문에 명기하도록 했다. 스탈린은 러일전쟁의 패배를 역사적 치욕으로 봤으며 이를 설욕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스탈린이 만주의 이익과 권리를 쟁취하려면 소련이 일본을 반드시 공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한다면 얄타의 약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왜 이처럼 양보했을까. 첫째 이유는,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 일본의 특수한 저항을 살펴볼 때 미국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둘째는, 전후 세계 신(新)질서의 구상이다. 루스벨트는 국제연합(UN)을 조직해 5대 강국 주도로 세계평화를 유지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려면 소련의 협조가 필수라고 믿었다.

얄타에서는 한국을 신탁통치한다는 합의도 이뤄졌다. 2월 8일 루스벨트가 한국은 20~30년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가능하면 짧은 기한이 좋다고 답하면서 신탁통치와 관련해 합의가 이뤄졌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얄타회담을 준비하며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전후 한국 문제(Post-War Status of Korea)’라는 제목이 붙은 문건이다. 이 문건에는 전쟁 직후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과 과도정부 수립 준비에 관한 복안이 들어 있다. 국무부는 군사적 점령에 참가할 수 있는 나라로 한국에 실제적 이익(real interest) 관계인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네 개의 강대국을 꼽았다. 다만 소련에 대해서는 “만약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을 경우(if it has entered the war in the Pacific)”라는 조건을 달았다. 다시 말해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예기하고 있었지만, 참전하지 않을 경우 소련은 한반도 점령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중립조약 폐기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자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졌다. 도조(東條) 내각이 무너지고 조선 총독이던 고이소(小磯國昭)가 총리가 됐다. 내각을 조직할 때 고이소는 패전을 각오하고 있었다. 내각서기관장 다나카(田中武雄)는 이렇게 증언했다. “조각 당시 고이소는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至難)고 결론내리고 중국을 상대로 속히 화평공작을 진행하면서 소련 또는 기타 제3국을 통해 전전국화평(全戰局和平)의 길을 강구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일본 외무성 편, ‘종전사록 1’ 236~237p)

1945년 초 필리핀 함락을 눈앞에 두고 다급해진 천황(일왕의 일본식 표현, 필자 요청으로 이 글에서는 천황으로 표기했다.)은 중신(重臣, 주로 전 총리)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당면한 사태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고노에 전 총리는 2월 14일 직접 준비한 상주문을 천황 앞에서 읽고 전달했다. 그는 상주문 서두에 “패전은 유감스럽게도 필연적(必至)”이라면서 “하루속히 전쟁 종결의 방도를 강구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라고 말했다.

일본 최고위층에서는 이처럼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강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적극 반대했고, 천황은 군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었다.

1945년 4월 필리핀이 함락되고 오키나와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독일도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4월 5일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는 일본대사 사토(佐藤尙武)를 소환해 중립조약을 폐기한다고 공식 통고했다. 폐기 시효가 언제부터인지의 문제가 생겼다. 1941년 4월 25일 비준돼 5년간 유효한 중립조약에는 폐기 시 1년 전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사토는 이를 인용해 소련이 1945년 4월 폐기 통고를 했으니 조약은 1946년 4월까지 유효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고, 몰로토프는 순간 주저하다가 사토의 지적에 동의해 중립조약은 이듬해까지 유효하다고 확인했다.(보리스 스라빈스키, ‘일소중립조약(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150~162p)

중립조약 폐기는 일본에 치명적이었다. 일본은 소련과의 중립조약에 의존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실질적으로는 이때 중립조약이 소련에 의해 폐기됐음에도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 중립조약이 1946년까지 유효하다는 몰로토프의 확인은 사기극이었다.

전 소련 육군참모총장 슈테멘코(S. M. Shtemenko)는 중립조약 폐기와 관련해 회고록(‘The Soviet General Staff at War, 1941-1945’ 408~409P)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소련이 중립조약을 계속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은(ridiculous) 짓이어서 폐기를 일본에 통보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폐기 통고는 일본에 심각한 경고를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본은 전쟁에 광분(war hysteria)해 이를 무시했다. 동시에 스탈린은 대(對)독일 전쟁의 경험을 비축한 유능한 지휘관과 참모들을 극동 지역에 재배치하고 일본 공격 준비를 명령했다.”

일본은 이렇듯 소련의 기만에 말려들었다. 일본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관동군(關東軍)의 군력 상당 부분을 태평양 지역으로 돌려놓은 터라 소련과의 국경지대 군사력은 격감돼 있었다. 소련의 진짜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일본의 이 대(大)실책이 궁극적으로 종전을 지연하고, 원자폭탄 공격과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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