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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박사의 ‘왕의 한의학’

왕권 행사 못한 심약한 군주

면역력 약했던 ‘마마보이’ 명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왕권 행사 못한 심약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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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세종마저 평생의 위안처로 삼았으면서도 대놓고 절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조선의 이단 종교다. 이 때문에 사회를 거스르며 불교를 육성하고 도첩제를 만들어 승려 보우를 우대한 문정왕후의 배짱은 조선의 미스터리다. 반면 유학적 소양을 지닌 명종이 얼마나 어머니의 압박에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종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의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명종 즉위년 7월 27일 인종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됐다. “왕의 성품이 엄중하여 평소 한가롭게 소일할 적에도 조용히 침묵하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외형에 나타내지 않았고,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성색(聲色·음악과 여색(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이 공자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면, 성리학은 주자를 조종으로 해 태어난바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학이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불교적 공(空)의 세계와 도교의 도(道)의 세계로 확장해 마음의 태극을 닦아가는 공부다.

인종의 극단적 도덕성

조선시대 왕의 이상형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안으로 성현 같은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성현은 당연히 공자와 주자가 롤 모델이다. 공자는 ‘논어’ 향당편에서 자신의 식생활 습관을 밝히면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생강이 정신을 소통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를 없앤다고 주석을 달았다.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에 보내는 것이니, 한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생강을 선물하며 극단의 공자 따라잡기를 한 것이다.

인종과 연산군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비슷한 면도 많다. 일찍 세자로 책봉됐고, 어머니가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며, 계모의 손에 자라 다음 왕위가 계모의 아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모두 파평 윤씨였고, 31세에 사망한 점도 닮았다. 하지만 인종은 사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극단적으로 효심을 발휘했으며 도학자로서의 금욕정신을 실천한 반면, 연산군은 처용무라는 탈춤을 추고 백모를 겁간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도덕성도, 극단적인 쾌락도 건강을 해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가 확인해준 셈이다.

실록은 인종의 효심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됐음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질병이 없었다. 자신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초췌해졌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왕이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에서 졸곡(卒哭·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죽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편히 자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상차를 떠나지 않았다. 왕이 시질(侍疾) 초두부터 초췌함이 너무 심하였는데, 대고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철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지경이었으므로 대신이 선왕의 유교를 들어 아뢰면서 권도를 따라 육선을 진어하라고 청하면, ‘나의 성효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더욱 애통해하였다.” 병이더욱 악화된 것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심열증(心熱症)과 독살설

인종의 재위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1월 1일부터 약방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건의하지만 거절당한다. 1월 9일 “심폐와 비위의 맥이 미약하고 입술이 마르고 낯빛이 수척하며 때때로 가는 기침을 했다. 정부 및 육조·한성부가 아뢰기를, “상의 옥체가 매우 피곤하고 비위가 미약하십니다”라면서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고 되레 반문한다. 실록은 인종이 정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했다.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 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듯합니다.”

7월 1일 인종은 세상을 떠난다. 하루 전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성리학의 메시아답게 죽은 조광조를 잊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 비원을 윤임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현량과를 부용(復用)하는 일은 내가 늘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미처 용기 있게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평생의 큰 유한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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