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입력2014-05-20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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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일 동북아 3국 중 진정한 하늘자손(天孫)의 나라는 어디인가.
    •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天祭)의 권리는 천손국의 천자(天子)만이 누리는 정치권력이었다. 그 권력 뒤엔 풍수 논리가 개입됐다.
    • 하늘의 기운과 소통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여야만 천제는 그 영험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중국 베이징의 천단. 아래부터 일직선상으로 원구대, 황궁우, 기년전 순으로 배치돼 있다.

    4월 초 청명절을 맞은 중국 베이징의 천단(天壇)공원.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으로 내내 찌푸린 얼굴을 하던 베이징의 하늘이 요 며칠 화창하다고 한다. 베이징을 찾으면서 걱정했던 공기가 상큼해진 게 다행스럽긴 하지만 ‘그러면 서울은?’하는 생각에 이르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이제 우리는 천단공원의 공중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 서울 하늘이 무섭게 오염될까 염려해야 할 판이다.

    어디 기후만일까. 우리와 중국은 역사적으로도 깊은 숙연(宿緣)을 갖고 있다. 천단공원의 천단도 그중 하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는 목적으로 명나라 때 건립된 이 역사적 유적은 동시대 조선 사람들에게 정신적 굴욕을 안겨주었다. 중국의 황제가 천단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는 한 조선의 국왕은 자국 영역에서조차 함부로 하늘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왜 그런가. 하늘 혹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천제의 자격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하늘자손의 나라인 천손국(天孫國)의 대표, 곧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만이 지낼 수 있는 고유 권한이다. 그러니까 천제를 지내는 행위 자체는 자신이 진정한 천자, 즉 하늘에서 유일하게 인정받은 왕임을 만방에 알리는 정치적, 외교적 효과를 지닌 것이다. 이 권리에 대해 이웃 국가에서 도발할 경우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넘본 것으로 간주된다. 나라 간 전쟁을 일으킬 만한 도발적 행위다. 이는 적어도 동북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에선 불문율처럼 통했다. 천손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한국, 천자의 나라라는 자긍심이 대단한 중국,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를 국기(國旗)로 내걸 정도로 하늘자손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본에선 천제가 정치·외교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이 점에서 중국 명나라(1368~1644)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조선(1392~1910)은 중국에 ‘꿀릴’ 수밖에 없었다. 유교 사대주의를 표방한 조선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전 왕조인 고려 때까지도 천손국의 자손으로서 떳떳이 지내오던 천제 의식인 환구(?丘·원구라고도 발음)제를 조선은 포기하고 말았다.

    천단은 중국의 자긍심 상징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 때까지도 면면히 내려오던 우리의 천제 의식을 중단케 한 명나라의 천단을 풍수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은 하늘의 기운과 교감할 수 있는 자리일 것이다. 마땅히 천기(天氣)가 내려오는 입지여야만 할 것이다. 중국이 그런 자리를 골라내 제단을 건립해야 명실상부하게 ‘천자의 나라’라고 자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청명절 연휴를 맞은 탓인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천단공원의 곳곳은 중국인 관람객으로 북적거렸다. 명청(明淸)시대의 궁궐인 자금성(紫禁城) 남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총 면적이 273만㎡로 북쪽은 원형(圓形)으로, 남쪽은 방형(方形)으로 벽을 두른 형태다. 북쪽을 상징하는 하늘은 원만하게 둥글고, 남쪽을 상징하는 땅은 반듯하게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출이다. 또 동서의 길이는 1700m, 남북의 길이는 1600m에 달하는데 황제가 머무는 궁궐인 자금성보다 무려 4배나 넓은 규모다. 과연 중국인들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전이라고 자랑할 만하다.

    천단은 가운데 중심축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기년전(祈年殿), 황궁우(皇穹宇), 원구대(?丘臺)라는 핵심적인 건물들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돼 있는 구조다. 이곳에서 명나라 이후 청나라 때까지 22명의 황제가 새해나 국가 중대사를 맞아 654차례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914년 원세개(遠世凱·위안스카이)가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천황을 칭할 때도 이곳에서 천제를 거행했다.

    오늘의 중국인도 천단에 대해선 남달리 생각하는 듯했다. 공산화 이후 중국 정부는 1998년 천단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한 데 이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바로 이곳에서 성화 봉송식을 거행했다. 중국인이 천단을 그들 정신문화의 중심 포인트로 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공으로 천기(天氣) 꾸며

    필자는 공원 한 켠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마작을 즐기는 중국인들을 뒤로 하고 북쪽의 기년전부터 찾았다. 기년전은 직경 36m의 원형 3층 건축물로 높이는 38m에 달한다. 매해 봄철이면 역대 황제들이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곳이다. 우리나라 사직단과 비슷한 기능이다. 기년전은 천단 조성 과정에서 최초로 건축된 건물로 평가되며, 원 이름은 대기전(大祈殿) 혹은 대향전(大享殿)이었다고 한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재위 1402~1424)가 15년간 심혈을 기울인 끝에 1420년에 완공한 역작이다.

    원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재위 1368~1398)은 난징(南京)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대사전(大祀殿)을 짓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지만, 영락제가 어린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제3대 황제에 올라 수도를 베이징으로 이전하면서 궁궐인 자금성과 함께 천지단(天地壇·후의 천단) 건축물을 조성했던 것. 조카를 폐위하고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한 영락제는 이곳에서 제사를 통해 흩어진 민심을 규합하고 자신의 권위를 굳히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단의 기년전은 순수하게 천제를 올리는 건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말 그대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祈穀) 예식을 행하는 건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기년전이 입지한 터도 풍수적으로 천기(天氣)와 별 관련이 없는 데다 지기(地氣)도 신통치 않아 보였다. ‘왜 이런 곳에 터를 잡았을까?’ 의아함과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황궁우(위)와 기년전.

    기년전을 뒤로하고 남쪽 방향으로 단계교(丹階橋)라는 통로를 지나니 고깔모자를 얹은 듯한 모양의 황궁우가 나타나고, 다시 더 남쪽으로 일직선상으로 이어진 곳에 원구대가 자리 잡고 있다. 황궁우와 원구대는 명나라 제11대 황제인 가정제(嘉靖帝·재위 1521~1567)가 1530년에 조성했다. 이때부터 이 일대가 정식으로 ‘천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고, 하늘과 땅을 분리해 각각 별도의 제사를 올리게 된다. 즉 황궁우와 원구대는 순수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땅과 태양과 달에 지내는 제사는 각각 지단(地壇·자금성 북쪽), 일단(日壇·자금성 동쪽), 월단(月壇·자금성 서쪽)에서 거행토록 했다.

    중국의 황제들은 매년 동지가 되면 노천에 세워진 3단 원형의 대리석 제단 한가운데의 천심석(天心石)에 올라서서 하늘에 제를 지냈다. 황제의 축문(祝文) 소리는 원구대를 둘러싼 원형 담장에 의해 굴절돼 공명 현상을 일으키도록 설계됐다. 하늘과 소통하는 황제의 기원이 신하들에게도 메아리쳐 울려 퍼지도록 함으로써 천제의 극적 효과를 도모한 것이다.

    원구대에서 제천 의식이 끝나면 의례에 쓰였던 위패들을 황궁우에 모셨다. 직경 15.6m의 원형 목조 건축물인 황궁우의 한가운데엔 도교에서 하늘의 임금을 의미하는 ‘황천상제(皇天上帝)’ 위패가 모셔져 있고, 이미 돌아간 선대 황제들의 위패도 좌우에 배치돼 있다.

    황궁우 역시 소리의 공명 현상을 일으키도록 조성됐다. 황궁우 외부를 둥그렇게 둘러싼 벽은 소리가 휘돌아 하늘에 전달되도록 설계돼 ‘회음벽(回音壁)’이라고 불렀다. 황궁우 내부로 들어가는 계단 아래엔 ‘삼음석(三音石)’이라는 석판도깔려 있다. 첫 번째 석판에서 손뼉을 한 번 치면 한 차례의 메아리가, 두 번째 석판에선 두 차례, 세 번째 석판에선 세 차례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해보려 했지만 워낙 많은 수의 관람객 소리에 묻혀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튼 하늘의 기운과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계해낸 당시의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치밀하게 계산된 당대인들의 과학적 성과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론 자연과의 꾸밈없는 조화를 살피는 풍수가의 시각에선 아쉬운 점도 남는다.

    명의 가정제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천단의 경우 도교적 흔적도 보인다. 아마도 가정제는 천단 건축물을 지으면서 풍수를 할 줄 아는 도교 도사(道士)들의 힘을 빌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로장생설을 신봉한 그의 도교적 취향은 황궁우에 모셔진 ‘황천상제’ 위패뿐 아니라 명나라의 국운을 북돋기 위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조성한 칠성석(七星石·기년전 동쪽에 위치) 등에서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처럼 생각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명 현상을 일으키긴 하지만 자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원구대와 달리 황궁우 주변에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됐다. 이 일대에선 땅 밑에서부터 황궁우 넓이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넓이의 지기(地氣)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도교 도사와 같은 기감(氣感) 능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땅의 생명력(生氣)을 감지하고서 그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황궁우를 설계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황궁우를 감싼 기운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주위를 빙 둘러보는데, 황궁우 북서쪽의 기묘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의 신기한 모양새 때문인지 관람객이 나무를 에워싸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무를 안내하는 간판엔 한자로 ‘古樹’라고 쓰여 있고 측백나무임을 알리고 있다. 이 역시 가정제 때 심은 나무로 수령이 무려 500여 세에 이르며 이름을 ‘구룡백(九龍柏)’이라고 한다. 그 이름처럼 나무의 뒤틀림이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다.

    명의 쇠퇴 불러온 천단 풍수

    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지기의 용오름 현상을 보여주는 ‘구룡백’ 나무.

    “아!” 필자는 그만 짧은 신음을 내고 말았다. 중국에서 또 한 번 기의 용오름 현상을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나무 밑에선 두 가닥의 지기가 회오리처럼 각각 회전하면서 올라오는데, 마침 두 기운의 회전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던 나무가 그 영향을 받아 줄기가 묘하게 뒤틀리는 현상으로 표출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나무의 뒤틀림 현상은 지상에서 2m 정도 높이까지만 나타나고 그 위부터는 본래의 바른 나무 모양새를 한다. 줄기의 굵기도 뒤틀린 나무 둘레보다 눈에 띄도록 확연히 줄어들어 있다. 이는 땅에서 분출된 지기가 지상 2m 정도까지만 그 기운을 뻗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룡백 나무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을 이룬다는 소문 때문인지 울타리가 쳐진 나무 쪽으로 손을 내밀어 그 기운을 받으려 하거나, 두 손을 번쩍 들어 기운을 감지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국인이건 중국인이건 좋은 기운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인 듯하다.

    필자는 이곳을 조성한 중국 풍수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중국 풍수는 확실히 우리 풍수와 다르다는 점도 이곳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황궁우를 비롯해 원구대 등 이 일대에선 이렇다 할 천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하늘 기운과 교감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천기이련만, 오로지 지기를 활용하는 데만 그쳤다는 점에서 중국 풍수의 한계가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환구단과 천단의 천자(天子) 풍수 대결

    일제가 허물기 전의 황궁우(가운데 3층 건물)와 환구단(오른쪽).

    나아가서 황궁우의 지기는 오히려 조성 이후 명나라의 국운에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이곳에서 분출되던 지기는 황궁우 건물로 인해 굴절돼 천단 북쪽 너머, 자금성이 있는 경산공원(景山公園)으로까지 떨어진다. 기운이 강하게 서린 곳에 건물이 들어서면 그 건물의 입지와 형태 등에 따라 기운이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혹은 탄력을 받은 기운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아무튼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인 경산은 평지에 건설된 자금성 북쪽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설계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금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황궁우에서 날아온 지기가 장막처럼 드리워져 되레 자금성 북쪽에서 뻗어 내려오는 좋은 기운까지 차단하는 구실을 한다. 중국 풍수가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황궁우 지기가 자금성 궐내를 향하도록 한 풍수적 조절이 의도치 않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을까,아니면 가정제에게 반감을 품었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

    황궁우와 원구대를 조성한 가정제 이후 명의 국운은 급격히 쇠락했다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 평가다. 특히 가정제는 정사를 돌보는 대신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로불사의 단약(丹藥) 제조와 불로초를 찾는 데 골몰한 인물이다. 심지어 그는 단약을 제조하려고 12~14세 궁녀들의 월경액을 채취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여 궁녀들이 이에 반발해 가정제를 죽이려는 암살모의 사태를 겪기도 했다. 실제로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몽골군과 왜구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는 등 명의 쇠퇴를 불러왔다. 이 때문에 가정제는 명의 몰락을 몰고 온 첫 번째 인물로도 꼽힌다.

    강화도 참성단과 환구단

    중국의 천단이 그 위용과 명성에 걸맞지 않은 인위적 조형물이란 점에서 실망감과 함께 내심 조선을 위해선 ‘다행’이었다는 소감을 안고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명의 천단에 눌려 천제도 지내지 못한 조선의 허약함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선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천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학자가 없지는 않았다. 태종 때 문신 변계량(1369~1430)이 대표적이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 BC 2333년)이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임금에게 충심으로 올린 변계랑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한때 천제 의식이 태종을 비롯해 ‘명의 영락제’ 같은 인물인 세조와 광해군 시기에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시적이었을 뿐, 명의 눈치와 압력 및 조선 유교 사대주의자들의 견제를 견뎌내지 못하고 폐지되고 말았다.

    고려 시기의 문신이기도 했던 변계량이 언급한 하늘제사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지내던 천제였다. 단군조선 시기에 쌓았다고 하는 참성단은 중국 천단의 원형처럼 천원지방의 형태를 취했고, 무엇보다도 천기가 직접 내려오는 곳이라는 점에서 명실상부하게 하늘기운과 바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녔다. 기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기가 센 곳 중 하나로 꼽는 참성단을 가리켜 “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고 평가하기도 했고, 참성단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선 이곳의 기를 아예 관광 상품화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기풍수 전문가 지한 선생은 “참성단의 천기는 이곳에서 기원하는 사람의 기도에 각각 감응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기운”이라고도 해석했다. 중국의 천단이 음향의 반사음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천제를 시늉했다면, 참성단의 천제는 기도자와 하늘기운이 직접 교감하는 행사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에서 우리식 천제를 지내자는 변계량의 소원은 그의 사후 460여 년이 지난 조선 말기 고종 시대에 이르러 결국 이뤄졌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신이 황제임을 공포했다. 그리고 그 첫 작업으로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과 황궁우를 지었다. 당시의 풍수가를 동원해 조선의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조성한 환구단은 하늘의 천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고, 하늘상제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는 지기가 솟구쳐 오르는 곳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황궁우의 지기는 그 소용처를 찾지 못해 공중으로 흩어져버리고, 환구단이 있던 자리(서울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에 내려오는 천기 역시 그 훌륭한 기운을 현 시대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채 겉으로 떠도는 상태라 아쉽기만 하다. 이처럼 풍수적으로 보완만 하면 현재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양택 명당은 우리 주위에 의외로 많다.

    권력과 명예의 기운이 밴 환구단의 천기가 당시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사람들에게 그 좋은 기운을 물씬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한다.

    한국과 중국만큼이나 천손의 나라가 되고 싶어 한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후 그 첫 작업으로 환구단 터를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한 다음 1914년엔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을 지었다. 한국이 ‘천손의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일본의 정치적 쇼였다. 이 역시 일본의 또 다른 ‘풍수 침략’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웨스턴조선호텔의 황궁우에서 고종 시절의 환구단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원형의 환구단에 올라 황제 즉위식을 치렀다. 환구단 주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고종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대한제국이야말로 진정한 천손국임을 만방에 선포했다. 누가 과연 천손의 나라일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의 천손국 다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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