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우크라이나 내분 속 미·러 군사 충돌 가능성

크림반도 新냉전

  • 김영미 | 국제분쟁지역 전문 PD

    입력2014-05-21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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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림 반도를 차지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도 관심을 보이자, 미국과 서방세력은 반발한다. 양측이 군사적·경제적 행동에 들어가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서방의 경제제재는 이미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턱밑까지 올라온 상태. 크림 반도에서 시작된 ‘신냉전’ 체제로 지구촌 전체에 위기가 감돈다.
    우크라이나 내분 속 미·러 군사 충돌 가능성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서 친러시아 시위자 수백 명이 모여 러시아 국기를 흔들었다. 이들은 자치를 요구하며 우크라이나 지방정부 청사에 난입했다.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25㎞ 떨어진 우크라이나 동부 최대 도시 루한스크. 4월 29일 이곳에서 1000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러시아 편입 결정을 위한 주민투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 검은 복면을 쓰고 야구 방망이를 든 괴한 150명가량이 시 청사로 진입했다. 청사에 근무하던 우크라이나 공무원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청사로 진입한 그들은 게양된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리고 러시아 국기를 달았다. 러시아 국기가 올라가자 시위대는‘우리는 러시아인’ ‘러시아로 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이슈는 ‘깃발’이다. 우크라이나 각 지역 관공서에는 모두 우크라이나 국기가 게양돼 있지만, 일부 도시에선 이미 러시아 국기가 나부낀다. 한 나라에 두 나라 깃발이 올라오는 나라,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이다. 루한스크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동부 10개 도시에서도 친러 무장세력이 경찰서와 청사를 장악했다. 그럼 우크라이나에선 왜 친러 바람이 부는 걸까.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는 교역량이 많은 유럽연합(EU)과 경제협력을 논의 중이었다. 경제협정이 맺어지면 EU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관세 95%가 없어지고 자유로운 여행도 가능한 상황, 장기적으로는 EU 편입도 예상됐다. 우크라이나처럼 옛 소련 연방 소속이던 에스토니아는 2011년 이미 유로존에 들어갔고 라트비아도 2014년 유로존 가입이 확정된 상태다.

    러시아의 경제제재

    문제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이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럽에 안겨버리는 상황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유럽과 경제협약을 체결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 제품의 수입을 중단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로 보내던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원을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제조 품목의 75%를 러시아에 수출하는 우크라이나로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러시아의 경제제재로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25억 달러(약 2조6500억 원)에 달하는 무역 손실을 입었다.



    결국 지난해 11월 21일 우크라이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EU와의 협정 진행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의 경제 압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정부의 결정에 시민은 분노했다. EU와의 협정 체결을 통해 유럽 경제권에 편입된 뒤 서구식 민주주의와 경제자유화로 나아가리라 기대했던 우크라이나 국민이 느낀 실망은 엄청났다.

    국민의 분노와 실망은 시위로 표출됐다.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에서 독립한 날인 지난해 12월 2일 시위대는 수도 키예프의 시청과 노조 건물을 점거하고 정부 청사를 봉쇄하면서 순식간에 키예프 도심을 장악했다. 시위대의 분노는 러시아와 대통령 야누코비치에게 향했다. 결국 정부군과 시위대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시민과 정부군의 유혈충돌

    지리한 시위정국은 올해 2월 20일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경찰 특공대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이다. 당시 시위대는 비무장이었지만 경찰 특공대의 저격수들은 도망가는 시위대의 가슴과 머리를 정조준해 사살했다. 이날 총격으로 무려 100여 명(시위대 집계)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했다. 마이단 광장 인근의 미디어 호텔 로비는 순식간에 총상 환자들로 가득 찼다.

    시위대를 치료하던 의사 줄리아(32) 씨는 “대부분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의 몸에서 총알을 빼내는 조치를 거듭했다”며 “긴급 수혈을 위해 시민들이 대기 중”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또한 호텔 로비 한구석에서는 정교회 사제들이 죽어가는 시위대에게 병자 성사를 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사제는 “서너 명의 사제가 죽어가는 신도들을 위로하고 안식에 들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밝혔다. 총격이 끝난 오후에도 시위대의 시신이 거리에 흩어진 채 방치됐다. 하얀 천에 싸인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던 유족은 애통해했고 거리는 시민들이 가져온 꽃으로 뒤덮였다.

    피를 본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다. 비무장인 시민을 무차별 공격한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무력 진압 후 정국은 야누코비치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건이 난 지 하루 만인 2월 21일, 야누코비치는 성난 시위대를 피해 수도 키예프를 버리고 도망쳤다. 비어버린 정권은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의 야권지도자인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가 차지했다.

    신임 라다(의회) 의장이 된 투르치노프는 먼저 라다가 유일한 합법 권력기구임을 선언하고 표결로 야누코비치에 대한 탄핵·해임안을 통과시킨 후 5월 25일 조기 대선 실시를 선언했다. 세상이 뒤바뀌며 친(親)서방인 야권이 이제 우크라이나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야누코비치의 최대 정적으로 수감됐던 율리아 티모셴코가 석방됐다. 그는 2011년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7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다. 수감 생활 중 티모셴코는 교도관에게 구타당하는 등 몹시 험한 세월을 보냈다. 티모셴코는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마이단 광장으로 가서 시위대를 만나는 것으로 극적인 정계복귀를 연출했다. 그의 복귀는 곧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대통령 권한을 총리와 의회에 대폭 나누는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2004년 헌법’이 복원됐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야누코비치 독재 이전인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오렌지 혁명은 2004년 11~12월, 우크라이나 시민이 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저지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친서방 세력으로 재편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유럽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남쪽에 있는 흑해 연안 크림 반도는 사정이 달랐다. 인구 250만 명의 크림자치공화국은 주민의 60%가 러시아계다. 이들은 유럽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러시아로의 편입을 원했다.

    3월 27일 새벽, 수십 명의 무장 세력이 크림자치공화국 수도인 심페로폴의 청사와 의회 유리창을 깨고 무단으로 진입했다. 검은 옷에 오렌지색 리본을 단 그들은 의회 건물 밖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고 ‘크림은 러시아’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 무장 괴한들은 친러시아 자경단 소속이었다.

    여기에 러시아도 가세했다. 자기들이 알아서 러시아에 땅을 반납하겠다는데 러시아로서는 총 한 발 안 쏘고 크림 반도를 가질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즉각 1만5000명의 군대를 크림 반도 심페로폴의 외곽 군기지와 러시아 흑해 함대 주둔지인 세바스토폴 인근 페레발노예 군기지, 반도 동쪽 페오도시야 군기지 등에 보냈다.

    러시아 택한 크림 반도

    크림 반도는 원래 러시아공화국 소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동맹관계를 맺은 지 300년이 되던 1954년 당시 소련의 흐루시초프 정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화합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크림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우크라이나로 이관했다. 소련 내의 민족감정을 불식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촉구하는 ‘독립선언’을 채택하며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3월 16일 크림자치공화국은 주민투표를 통해 합병을 결의하고, 22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합병안에 서명했다. 이로써 60년 만에 크림 반도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게 됐다.

    이 과정에 크림 반도에 부각된 인물이 있는데, 바로 크림자치공화국의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악쇼노프(41)다. 그는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만든 당의 의회 의석 점유율은 3%(10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가 총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건 그가 조직한 자경단 때문이었다. 자경단은 말 그대로 사병부대로 러시아로 편입하기 위해 조직된 친러 무장 세력이었다. 수도 키예프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친러 자경단의 숫자는 급격하게 불었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복면을 한 채 정부 청사나 경찰서를 점령해나갔다.

    이렇게 자경단을 바탕으로 그는 빠르게 총리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자경단은 심페로폴에 있는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를 무력으로 점령했으며 가장 먼저 악쇼노프의 총리 지명을 요구했다. 그렇게 총리가 된 그는 지금까지 초고속 행보를 이어간다. 러시아 편입을 결의하고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으며 자체 군대도 창설했다. 두 달 안에 러시아 화폐인 루블로 전환하는 등 경제권에서도 러시아에 완벽하게 편입했다. 크림의 요충지인 세바스토폴은 공문서 언어를 우크라이나어에서 러시아어로 바꿨다.

    일각에서는 담배 밀수나 하는 등 별다른 경력이 없는 그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러시아 편입 절차를 주도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가 뒤에서 조종했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하다. 실제로 그는 총리로 지명된 후 가장 먼저 푸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크림의 총리이며 앞으로 러시아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러시아 하원의 ‘독립국가연합(CIS·옛 소련권 국가 모임) 문제위원회’ 위원장 레오니드 슬루츠키 의원은 심페로폴을 방문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우리는 동포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해 그를 지원했다.

    크림에 주둔하던 우크라이나 군대는 철수하거나 일부 지휘관은 자진해서 러시아군으로 옮겼다. 러시아에 투항한 군인 중에는 데니스 베레좁스키 우크라니아 해군사령관도 있었다. 이처럼 악쇼노프 총리의 행보와 크림 주민의 바람으로 크림 반도는 급속도로 러시아에 편입됐고, 러시아는 가만히 앉아서 크림을 받기만한 모양이 됐다.

    친러 세력의 테러

    우크라이나 내분 속 미·러 군사 충돌 가능성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 세워진 장갑차 옆에 한 소년이 서 있다. 도네츠크 지역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정부의 경고에도 분리독립 투표가 진행 중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월부터 러시아 서부지역 군부대에 긴급 군사훈련을 지시하며 시시각각 우크라이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동부가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으며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크림 반도는 러시아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도 가지고 있다. 17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흑해로 남하했는데, 당시 흑해 일대를 장악했던 현재의 터키인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여러 번의 전쟁 끝에 마침내 1783년 크림 반도를 힘들게 손에 넣었다.

    그 후에도 크림전쟁(1853~1856)을 겪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한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크림 반도 영유권을 갖는 대신 흑해를 비무장화한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크림을 다시 빼앗긴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의 어수선함을 틈타 러시아는 기존 조약을 깨고 세바스토폴 항을 러시아 최대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는 흑해함대를 주둔시키며 해군기지를 유지한다. 이렇게 힘들게 지킨 크림 반도를 유럽연합에 편입될 공산이 큰 우크라이나에서 빼앗지 못한다면, 이제 러시아는 영원히 크림 반도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크림 반도가 분리되는 상황을 지켜본 우크라이나 동부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본토의 동부 지역에도 러시아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 중 일부 주민들도 우크라이나와 분리되길 원한다. 급기야는 도네츠크, 하리코프가 연달아 자치 독립을 선언했다. 또 4월 28일엔 루간스크에서도 친러 시위대가 크림 반도처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5월 11일 자치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하겠다고 밝혔다.

    도네츠크 주 등 돈바스 지역은 크림 반도처럼 러시아계 주민이 50% 이상이다. 친러 무장세력이 관공서를 점령한 도시에서는 새로운 친러 시장이 임명되고, 독립된 행정권을 행사하는 등 사실상 러시아로 합병되는 분리독립화가 진행된다. 여기에도 친러 자경단이 가세했다. 동부 도네츠크 주 슬라뱐스크를 거점으로 코스티얀티니프 등 최소 10개 도시에서 친러 무장 세력이 출몰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시청, 방송사 등을 무력으로 장악했으며 이제는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리코프와 수도 키예프 등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다. 분리주의 운동에 반대해온 하리코프 시의 케르네스 시장이 아침 산책 도중 괴한들로부터 총격을 당해 중태에 빠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뿐 아니다. 크라마토르스크에서도 무장괴한들이 보안국 청사를 점거한 후 분리주의 운동에 반대해온 부시장을 구타하고 경찰서장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슬라뱐스크 시장 넬리 슈테파는 4월 18일, 친러 무장세력 지도자 포노마레프와 면담을 시도하다 실종돼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주 고를로프카의 시의원 블라디미르 리바크(42)도 납치 살해됐다. 그는 4월 17일 친우크라이나 시위에 참석한 뒤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올린 ‘돈바스 공화국’ 깃발을 내리고 다시 우크라이나 국기를 올리기 위해 시청으로 들어갔다가 복면을 쓴 친러 무장세력에게 납치됐다. 이틀 뒤 리바크 의원은 슬랴반스크 인근 강가에서 모래주머니가 달린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처럼 친러 무장세력의 분리주의 시위가 확산되면서 무법지대가 된 도네츠크에서는 연일 납치와 고문, 살해 등 정치테러가 일어난다. 친러 무장세력의 폭력을 감시하러 온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감시단원까지 친러 무장조직에 의해 납치됐다가 석방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런 친러 무장세력의 동부 점령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우크라이나 정부는 부활절 연휴 이후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친러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해온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개입 의지를 내비친 것이 빌미가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자국민을 상대로 군사적 압력을 가한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범죄”라며 “상황이 어떻게 진전되는지 주시할 것이며 거기에 맞게 움직일 것”이라고 말해 러시아의 무력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는 4만 명의 러시아군 병력과 군용차량, 탱크를 운영하는 기계화 보병이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러시아는‘단지 계획했던 훈련을 이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서방 측은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을 위한 준비로 본다. 자칫하면 친서방 세력이 잡은 우크라이나 서부와 친러 세력이 장악한 동쪽이 분열되며 내전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신냉전 체제 형성

    서방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개입에 비판을 쏟아냈다. 4월 17일 우크라이나, 미국, EU, 러시아 등이 합의한 ‘제네바 협약’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후 우크라이나 본토와 국경만큼은 절대 침범하지 않겠다고 서방과 약속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도 러시아에 반발하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에 외교·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다.

    서방과 미국은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의 요청에 응해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한 군사적 행동을 이미 시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러시아의 군사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정찰기 두 대를 우크라이나 국경에 급파했다. 미국도 F-15 전투기 6대를 리투아니아에 보낸 데 이어 며칠 내에 F-16 전투기 12대와 병력 300명을 훈련 명목으로 폴란드에 파견할 예정이다. 또 미국 핵 추진 미사일 구축함 ‘USS 트럭스턴’은 이날 불가리아, 루마니아 해군과 함께 크림 반도에서 수백 ㎞ 떨어진 흑해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미국으로선 러시아의 유럽 상륙을 위한 발판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유럽도 러시아의 남진을 걱정한다. 미래에 러시아가 유럽 전체에 위협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크라이나를 두고 서방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1990년대 구소련이 붕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냉전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부활한 듯한 모습이다.

    ‘신냉전’으로도 부를 수 있는 이런 긴장은 경제제재 형태로도 나타났다. 미국은 4월 러시아인 7명과 러시아 기업 17개의 자산을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제재 대상 러시안 기업에는 푸틴 대통령 최측근인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 회장과 푸틴의 ‘개인금고 지킴이’로 알려진 게나디 팀첸코 회장의 볼가그룹도 포함됐다. EU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사 15명에게 제재를 가했다. 캐나다도 러시아인 9명과 은행 2개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처럼 서방의 경제 압력이 러시아를 압박하자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 국영 가스업체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 등 6개 기업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최하 등급인 ‘BBB-’로 낮췄다.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는 시가 총액 기준으로 러시아 1, 2위 기업이다. S·P는 러시아 국가 신용등급도 내렸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이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의 이념대립이 종식되고 힘의 균형도 한쪽으로 기운 상태이나, 전략적 요충지인 동유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공방전을 이어갈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경제제재를 감수하더라도 영토에 대한 중요도를 더 크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방산 수출 금지 조치에 푸틴 대통령이 방위산업체 수입품을 자국산으로 대체하겠다고 맞서며 미국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런 서방의 경제재재가 크게 작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그동안 폴란드의 MD기지 등 ‘서방과 미국 VS 러시아’구도를 이룬 기류를 확실하게 ‘신냉전’구도로 굳히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대신 우크라이나가 그 ‘대리전’을 혹독하게 치를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안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 세계에 몰고 올 나비 효과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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